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린 채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인정도 부정도 없었다.사실 그 자신도 잘 몰랐다. 강하리한테 남은 미련이 도대체 뭔지.“내가 어떻게 하면 속이 풀리시겠어요? 깨끗이 놔 주고, 다신 내 주위에 나타나지 않으시겠냐고요. 그럴 수만 있다면, 시키시는 건 다 할게요.”강하리의 팔목을 잡은 구승훈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너한테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인 거야?”묵직하고 차거운 음성이 구승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심술 난 거? 맞아. 왜? 네가 중도에서 계약 해지하려고 했으니까.““…….”“내가 네 몸이 망가지든 말든 신경도 안 썼더라면, 계약 해지가 그렇게 순조로울 수 있었을 것 같아?”겁이 났었다. 강하리가 잘못될까 봐.그래서 마음이 약해졌었다. 놔 주기로 했다.그래준 내 마음도 모르고.양심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강하리가 할 말을 잃었다.사실 계약 해지는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자신을 향한 구승훈의 최소한의 배려에 올인한 도박.하지만 그 배려는, 송유라의 만행을 커버하기엔 택도 없이 부족했다.“강하리, 그만 하고 우리 화해하자. 응?”강하리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이쪽을 보지도 않는다.구승훈의 미간이 좁혀졌다.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잡아 얼굴을 이쪽으로 돌렸다.그리고 보았다. 강하리의 눈 속에 꽉 차 있는 고통을.구승훈은 가슴 한 켠이 찔린 듯 아파왔다.정주현과 있을 때는 웃음이 떠나질 않던 그녀가, 그와 마주하니 고통스러워한다.하지만 이대로 놔 주고 싶지는 않았다.강하리를 끌어당겨, 품 속에 안았다.강하리의 어깨에 코를 박고 탐욕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여인의 향기가 술기운에 무뎌졌던 말초신경을 짜릿하게 자극한다.너무나도 그리웠던 체향.구승훈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걷잡을 수 없이 욕정이 치솟는다. 더불어 소유욕도.“대양과 계약하지 마.”“다른 회사도 안돼.”“계약하는 회사마다 작살내 버릴 거다.”술냄새가 섞인 거친 숨소리와 함께 우악스런 말을 뱉어내는 구
강하리는 가슴이 아려왔다.그걸 꾹 참고, 고개를 들어 꼿꼿하게 구승훈을 노려보았다.“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구승훈의 눈동자에 강하리의 모습이 비쳤다.일말의 감정의 일렁임이라도 캐치하고 싶었지만, 그런 건 없었다.실망과 결연함만 그득 차 있을 뿐.“문 열어주시죠.”남자의 손가락이 강하리의 입술에 다가갔다. 강하리가 목을 틀어 피했다.허공에 손가락이 그대로 멈춰선 구승훈.한참 지나서야 헛웃음을 터트렸다.“마음고생 참 많았겠네, 강 부장. 일말의 감정도 없으면서 나와 3년을 잤으니.”“다 대표님이 잘 가르친 덕이죠.”강하리가 냉랭하게 대꾸했다.한 번 뿐이 아니었다. 그저 거래일 뿐이라고, 감정 따윈 섞지 않겠다고 구승훈이 일러준 게.그러고는 말로, 행동으로 그걸 지켜왔었다.홀대와 버림 속에서 강하리가 구승훈을 향한 감정은 조금씩 깎여갔고.마음이 점차 식어갔다.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대가가 너무나도 컸다.더이상 좋아할 엄두가 안 날 만큼 말이다.강하리의 말이 구승훈의 심기를 건드렸다. 몹시 불편했다.얌전하고 말 잘 듣던 강하리는 어디 가고.온 몸에 가시를 꼿꼿이 세운 고슴도치 한 마리가 곁에서 캬르릉대고 있다.싫었다. 짜증이 났다.“꼬박꼬박 대드는 꼬라지 하고는.”“대표님과는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말 시키시니까요. 우린 끝났다고요. 끝났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끝나면 다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넌 고분고분 내 곁에 돌아올 수밖에 없어.”강하리는 목이 꺽 막혔다. 고개를 푹 숙였다.저건 부인할 수가 없다.강력한 수단과 권세 앞에서 그녀는 그저 개미 같은 존재일 뿐.구승훈이 작정하고 앞길을 막는다면 그녀는 평생을 고통 속에서 몸부리칠 거다.그녀도, 그녀 주위 사람들도, 지옥을 맛보게 될 거다.강하리가 고개를 쳐들었다.눈가가 벌개진 채, 구승훈을 꼿꼿하게 노려보았다.“차라리 날 죽여요.”구승훈이 움찔했다.그 말에서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져서였다.단식으로 저항하던 그 결연함이
가전제품들, 인테리어 소품들, 식기들까지.모두가 강하리가 알심들여 골라온 것들이었다.구승훈과의 행복한 일상을 꿈꾸면서.‘다 망상이었지.’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다.“버리세요. 좋아하는 것도 그때 뿐이지, 지금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니까요.”구승훈은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어떻게 되어먹은 여자가 뭘 해도 씨알도 안 먹혀.입술을 일직선으로 꾹 다문 채 강하리를 노려보았다.강하리는 눈 앞에 이 남자가 또 슬슬 화가 치민다는 걸 직감했다.한시 빨리 나가고 싶었다. 이 자가 또 미친 짓을 저지르기 전에.“이제 문 좀 열어주실 수-.”“창문 박살내고 기어나가시든가!”꽥 소리지르는 구승훈. 강하리가 흠칫 놀랐다가 남자를 매섭게 쏘아보았다.구승훈, 이렇게 유치한 사람이었나?그러더니 신고있던 하이힐을 벗어, 뾰족한 굽으로 유리창을 후려쳤다.구승훈은 가슴이 철렁했다.차 유리가 아까와서가 아니었다. 강하리의 모습에서 꼭 자신을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보여서였다.강하리는 유리창을 몇 번이고 내리쳤지만, 힘이 부족한 탓에 유리창은 끄덕도 없었다.“그만 쳐. 사는 데 데려다줄게.”결국 백기를 든 구승훈.“문만 열어주신다면 고맙겠네요.”구승훈이 대답 대신 운전석에 몸을 욱여넣더니 시동을 걸었다.그렇게 도착한 로터스가든. 차가 멈춰서자마자 강하리가 도망치듯 차에서 내렸다.구승훈은 착잡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강하리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몇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구승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바로 그 때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무슨 일이지?”“오빠, 와서 나랑 같이 있어주면 안돼? 나 흉터 남을까 봐 너무 무섭단 말야. 오빠…….”울먹이는 송유라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작게 흐느끼는 소리까지 들려왔다.“최상의 의사에 최상의 약이야. 흉터 안 남으니까 걱정 말고.”울음소리에 마음이 살짝 누그러 든 구승훈이 부드럽게 달랬다.하지만 핸드폰 저 편, 송유라는
”하리야, 괜찮아?”손연지의 격정스런 말투.한 시간째 욕실에 짱박혀 있다 겨우 나온 강하리를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개한테 물려서.”“……구승훈이 또 찾아갔었어?”“마주쳤는데 억지로 끌려갔어.”“저기,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손연지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구승훈이 여자가 없어서 너한테만 집적대는 건 아닐 거고. 혹시 진짜 너 좋아하게 된 거 아니야?”“퍽이나. 있을 땐 먼지 취급 하다가 없어지니까 매달리는 건 뭔데.”손연지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참 여러모로 답이 없네, 구승훈.……그 뒤로 며칠은 거짓말처럼 구승훈이 보이지 않았다.물론 왜 그런지는 강하리는 하나도 안 궁금했지만.그 대신 강하리가 매일 마주한 건, 산더미처럼 밀려 들어오는 일이었다.대타로 오기로 한 부장은 아직이고, 연말이 다가오다 보니 업무 양이 말도 안 되게 늘어나고 있었다.덕분에 강하리는 일정이 차다 못해 넘쳐나는, 알찬(?) 마지막 한 달을 보내야만 했다.정주현의 식사 요청도 번번이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퇴근해 집에 도착하면 밤 열한 시를 훌쩍 넘겼으니까.모처럼 정시 퇴근한 어느날, 막 퇴근 카드를 찍으려는 강하리애게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왔다.“강 부장, 묻고싶은 게 있는데.”“네, 얘기하세요.”“통화로 하긴 좀 그렇고, 어디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싫어요, 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누르고 승낙했다.요즘 들어 사내에서 만나기만 하면, 뭔가 할 얘기가 있는 것처럼 입을 벙긋거리던 구승재였다.무슨 얘기가 나올지는 대충 생각해도 짐작이 갔다.강하리와 구승훈 사이를 가장 응원하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구승훈과 끝났다는 걸 철저하게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강하리는 회사 건물을 나와 승재가 주소를 보내온 근처의 한 음식점에 도착했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막 주문을 마치는 구승재가 보였다.“강 부장이 단 거 좋아한다고 형이 그래서, 달착지근한 맛 위주로 시켰어요.”겸연쩍게 웃는 구승재.다, 보인다.
강하리가 고개를 들자, 정장 차림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의미를 알 수 없는 고요한 눈길로 강하리를 주시하고 있었다.“형, 여긴 어떻게 왔어?”승재가 벌떡 일어섰다.어색한 말투, 드디어 왔냐는 듯 빛나는 눈.강하리에겐 그저 대놓고 “작전 성공”이라고 들렸다.그러자 구승훈이 기다렸단 듯 옆에 앉는다.“퇴근길에 지나가다 승재가 보이길래.”짤막한 대답과 그렇지 않은, 강하리를 향한 눈길 속에 꾹꾹 눌러 담은 그리움.정말 미치도록 보고싶었다.모닝회의나 서류 이관을 핑계로 눈도장이라도 찍으려 했지만.강하리는 작정하고 자신을 피할 생각인 모양이었다.모닝 회의는 안예서를 대신 보냈고, 서류는 비서실장에게 맡기고 도망치듯 사라지곤 했다.그래서 미웠다. 화가 났다.하지만 조바심을 낼 수록 더 멀리 달아날 거란 걸 알기에 꾹 참았다.그런 구승훈과는 달리, 강하리는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옆에서 전해오는 구승훈의 시선이.아니, 둘을 감싼 공기마저도 껄끄러웠다.“저기, 승재 씨.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요.”구승재가 흠칫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렇게 보낼 거냐고, 뭐라도 좀 해 보라고 구승훈에게 바쁘게 눈짓했다.“거참, 밥 한 끼도 같이 못 먹나?”강하리의 손목을 덥석 잡는 구승훈.“배불러서요. 천천히 많이 드세요.”하지만 구승훈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정주현 만나러 가는 거야?”“네, 맞아요. 그러니까 이거 놔 주세요.”그러자 조롱 섞인 웃음을 날리는 구승훈.“확실해?”강하리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네. 확실합니다.”문득 강하리 앞에 핸드폰 한 대가 슥 내밀어졌다.강하리의 눈길이 화면에 멈췄다.사진 한 장이었다.정주현이 한 여자과 마주 앉아, 화기애애하게 식사하고 있는.여자는 강하리가 아는 사람이었다.심준호의 조카, 고이선.“여기 끼러 간다고? 진짜?”강하리가 무덤덤하게 사진에서 눈을 떼었다.“진짠데요.”망신살 한 번 뻗쳐 보라는 듯한 구승훈의 비아냥에
”예?”강하리가 멈춰섰다. 귀를 의심했다.“담당 프로젝트 중 하나가 계약에 문제가 좀 생겨서, 강 부장님 출장 일정이 잡혔어요.”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다시 들려오는 신도윤의 목소리.“……꼭 본인이 가야만 하나요?”“네, 협업사 쪽에서 꼭 담당자와 대면해 얘기해야겠다고 해서요.”“알겠습니다. 수하 직원 동반도 가능하죠?”신도윤이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곧 대답이 돌아왔다.“안예서 씨 말씀하시는 거죠? 그럼요. 내일 공항에서 합류하라고 일러둘게요.”다음날 아침.공항 터미널에 도착한 강하리에게 정주현의 전화가 걸려왔다.“주말인데 시간 되시죠?”강하리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죄송해요. 출장 일정이 잡혀서 지금 공항이에요.”“……주말인데 출장이요?”정주현의 어이 없다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이거 냄새가 확 나는데? 구승훈이 일부러 그런 거죠?”“그러게요. 이직 전에 아주 골수까지 쪽쪽 빼먹을 기세네요.”“언제 돌아와요? 지사 입사 전에 의논할 디테일이 있는데, 돌아오면 데리러 갈게요.”강하리는 돌아오는 날짜에 맞춰 정주현과 식사 약속을 잡았다.어제 봤던 사진에 대해선 한 마디도 언급이 없었다.정주현과 통화를 마친 후, 강하리는 서류들을 보며 안예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이륙 1시간 전이 되었지만 안예서는 나타나지 않았다.강하리는 연거푸 시간을 확인하며 미간을 좁히다가 결국 안예서한테 전화했다.“부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어지간히 놀란 듯한 안예서의 목소리.강하리의 얼굴이 급 어두워졌다.“어제 신 실장한테서 연락 못 받았어? 오늘 출장이라고.”“네? 출장이요? 오늘요?”“…….”강하리는 지끈거려 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아니야. 주말인데 잘 휴식하고.”통화를 마친 강하리가 깊게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구승훈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웬걸, 바로 끊어버리는 구승훈.‘이 인간이!’깊은 빡침(?)이 밀려왔다.설마 설마 했는데. 업무에서만큼은 장난치지 않을 줄 알았는데.이건
”표정이 왜 그렇지? 정주현의 차 옆 자리엔 잘도 앉더만.”“…….”강하리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피곤해 보이네. 수면 부족인가?”“…….”아예 눈을 꼭 감아버린 강하리.참자. 참아야 한다.저 깐족거림이 양아치 뺨치는 인간이 아직 내 대표님이다.왜 피곤한지 몰라서 물어, 라고 빼액 외치고 싶었다.갑작스레 잡힌 출장 때문에 관련 서류들을 준비하느라 날 새다시피 했으니까.우우우웅-.비행기 이륙 소리와 함께, 걷잡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강하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구승훈의 눈길이 그녀의 얼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눈 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이윽고 커다란 손으로 강하리의 머리를 받쳐,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에 내려놓았다.강하리가 깼을 때 비행기는 이미 착륙해 있었다.승객들이 분주하게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자신은 옆 남자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잠깐!강하리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그러고 보니 자신의 몸에는 어느샌가 수트 상의 한 벌이 덮어져 있었다.그 남자한테 선물했던 바로 그 수트.문득 강하리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는 느낌이 들었다.지난 3년동안, 몸에 배어버릴 정도로 익숙한 광경.매번 함께 출장갈 때마다 기대던 넓은 어깨.매번 잠에서 깨면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던 수트 상의.그리고, 그 모든 게 깨져버린 지금.아름답던 기억의 파편들이 날카롭게 목구멍에, 가슴에 파고든다.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옷, 감사해요.”“말로만?”부르퉁한 남자의 목소리.강하리는 대답이 없었다.흥, 콧방귀를 뀐 구승훈이 일어나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강하리는 캐리어를 내려 끌고 그 뒤를 따라갔다.출구를 나서자마자 갑자기 엄습하는 추위.보경시의 연말은 혹한기였다.훅 들어오는 찬 바람에 강하리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바로 그때, 두툼한 외투가 어깨에 내려앉았다. 외투에 배어 있는 깊은 우드향이 강하리의 코 끝을 간질였다.“얌전히 걸치고
”알겠습니다. 딴 데 알아볼께요.”휙 돌아선 강하리가 밖을 향해 걸어갔다.대뜸 구승훈에게 잡혔지만.“놔요!”안간힘을 쓰며 벗어나려는 강하리를 보는 구승훈의 눈이 위험하게 번득였다.“한 방 쓰면 죽기라도 해?”“아니, 지금 한 방 쓰는 게 옳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난 괜찮아.”“내가 안 괜찮거든요!”강하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와락!다시 강하리를 잡은 구승훈이 거칠게 그녀를 끌어당겨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강하리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들도 타고있어 가만히 있었지만.온 몸의 모든 신경세포들이 외치고 있었다.왜? 도대체 왜 매번 이러는 거냐고. 제발 좀 놔 달라고.엘리베이터가 멈췄고, 구승훈이 그대로 강하리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문이 닫히는 순간, 우악스럽게 강하리를 문에 밀어붙인 구승훈.강하리는 버둥거렸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광기로 물든 남자의 시선이 강하리에게 꽂혔고.곧 이어 묵직하고 거친 숨소리가 강하리의 입술을 덮쳤다.딩! 디리리딩! 딩!조용한 룸 안에 느닷없이 울려퍼진 전화벨 소리.콱!“으윽!”구승훈이 주춤한 순간, 강하리가 온 몸의 힘을 실은 힐로 그의 발을 밟았다.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구승훈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그 틈에 구승훈을 밀쳐낸 강하리는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멀어져가는 강하리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구승훈의 얼굴에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핏줄 돋아난 손으로 그때까지 멋 모르고 울려대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중요한 일 아니면 죽여버린다.”성난 야수의 으르렁거림에 핸드폰 저 쪽, 승재가 얼어붙었다.“……그, 뭐야, 형, 알아낸 게 있는데.”한참 뒤에야 승재가 말을 이어갔다.“강 부장이 납치당하기 바로 전, 송유라가 둘째 형을 만난 것 같아.”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구승훈의 손이 멈췄다.“확실한 증거는?”승재가 잠시 침묵했다.“……길가 CCTV에 포착된 화면이 있는데, 거리가 멀어서 좀 희미하지만 누가 봐도 송유
여명주가 반박하려는 순간 강하리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작업실의 주인인 천아름이었다.천아름은 짙은 눈동자와 붉은 입술 크고 우아한 웨이브 헤어 거기에 하이힐까지 착용하고 있었다.강하리 옆에 멈춰 선 천아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 오랜만이에요.”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이 마주한 건 단 한 번뿐이었다.그때 경매장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에비뉴를 인수하고 나서야 강하리는 그 두 개의 약혼반지가 사실 천아름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에비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을 뿐이었다.천아름은 조용히 강하리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여전히 마음에 드세요?”강하리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감사합니다.”천아름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반지가 예쁜 게 아니라 사실은 당신의 손이 예쁜 거예요. 구승훈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그 순간 손연지가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구승훈 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하리를 사로잡을 수 있었겠어요?”천아름은 손연지를 향해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했다.“역시 미녀끼리는 생각도 비슷하네요.”셋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여명주는 그들 사이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서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이건 대놓고 날 무시하는 거잖아.’“천아름 씨, 이게 무슨 뜻이죠?”천아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아직도 못 알아들었어요? 여명주 씨 B시에서는 당신네 가문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면 노민우 씨를 붙잡아다 가문 재정을 끊고 강제로 결혼이라도 시키시지 그러세요? 그런데 왜...”천아름은 옆에 있던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쁜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소연지입니다.”“아. 맞아요. 소연지
강하리는 안에서 밖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은 그 모습을 보며 저절로 입꼬리를 올렸다.“떠나기 아쉽네.”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노민준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지만 구승훈이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정 안 되겠으면 강하리 씨에게 솔직하게 말해. 그러면 강하리 씨도 기꺼이 너와 함께 돌아갈 거야. 그리고 계속 숨기기만 하면 강하리 씨도 불편할 거잖아?”구승훈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그는 작업실 안에서 웃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았다.노민준은 더 할 말이 없었고 그때 서야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승훈, 손연지 씨 지금 어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궁금해?”노민우는 급히 두 번 응답했다.“그러면 직접 와서 보면 되잖아?”“손연지 씨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구승훈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그때 내가 나가라고 했을 때는 왜 안 나갔어?”노민우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그것도 그렇네.”구승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준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희주를 철저히 조사해 줘.]강하리는 마침내 손연지에게 어울리는 주얼리를 골랐다.손연지는 몸에 맞춰보며 환하게 웃었지만 강하리는 그 웃음이 예전처럼 맑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꼈다.감정의 상처는 결국 스스로 치유해야 했고 강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연지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주얼리를 고른 뒤 강하리는 손연지와 함께 의류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곧 결혼식인데 다른 건 안 고를 거야?”손연지가 물었다.강하리는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구승훈이 몇 벌 주문해 놨고 또 에비뉴에서 우리 결혼식에 맞는 주얼리 세트를 준비해 줬어.”손연지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놈의 자본주의.”강하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두 사람은 웃으며 의류
구승훈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왜 갑자기 왔어?”강하리는 구승훈을 째려보며 말했다.“안 오면 당신이 예쁜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못 볼 거 아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질투나?”“아니.”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에는 질투의 냄새를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실제로 구승훈과 임희주 사이에 아무 일이 있을 거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그저... 다른 여자가 어떤 면에서 그녀의 남편을 더 잘 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잡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어쩌지?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침대에 묶어 두는 건 어때? 복수의 기회를 줄게.”강하리는 질색을 하며 손을 빼냈다.“염치를 좀 챙겨.”구승훈은 웃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휴대폰이 옷 속에서 가볍게 진동했지만 그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눈빛이 깊어졌다.마침내 강하리는 차를 개인 작업실 앞에 세웠고 구승훈이 주문한 주얼리를 오늘 착용해 보려고 했다.마침 이틀 후 손연지의 생일이었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휴식 중인 틈을 타 그녀를 불러냈다.강하리가 차에서 내리자 손연지는 작업실의 큰 창문 앞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녀는 강하리를 보고서야 마치 살아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손연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손연지 씨, 이렇게 한가해요?”손연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강하리를 따라 들어가자 직원이 다가왔다.“구승훈 씨, 주문하신 주얼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구승훈은 대답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고 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나서 직원에게 말했다.“주얼리는 내 아내에게 전달하세요.”그러고는 강하리를 향해 말했다.“전화 받고 올게. 주얼리 먼저 착용해 보고 안 맞으면 다시 수정해 달라고 하면 돼.”강하리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흘끗 보았는데 화면에 나타난 이름은 노민준이었다.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손
‘심리 의사들은 원래 이렇게 강한 심장을 가진 걸까 아니면 이 임 선생이 유독 뻔뻔한 걸까? 만약 이 사람이 노민준 씨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대표님은 진작 화를 냈을지도 몰라.’하지만 임희주는 분위기를 살피고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바로 다른 치료 방안을 구승훈에게 설명했다.“간단히 말하면 이전 치료 방안은 증상을 억제하는 방식이었어요. 예를 들어 노민준 씨가 처방한 약들도 증상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죠. 하지만 이런 억제는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해 약효가 떨어지면 증상이 더 심해질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억제보다는 근본적인 해소를 목표로 하는 방향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약효를 완전히 끌어낸 뒤 점차 증상을 약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물론 한 번에 모든 약효를 없애는 건 아니고 몸과 신경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이 방법은 다소 위험할 수도 있어요. 구승훈 씨가 신중히 고민한 후 결정하시면 좋겠습니다.”임희주가 말을 마치자 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준봉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이 방법을 선택하면 어떤 위험이 따를까요?”임희주는 커피를 천천히 저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약효를 모두 끌어낼 경우 증상이 얼마나 심각해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렇기에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준봉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반면 구승훈은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구승훈이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방안을 만든 사람이 누구죠? 노민준인가요?”임희주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제가 만든 방안이지만 노민준 씨와도 논의했습니다. 그는 이 방법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어요.”구승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생각해 보겠습니다.”임희주는 한 발짝 다가서며 덧붙였다.“빠른 답변 부탁드려요.”구승훈은 대답 없이 조용히 카페
구동근은 방에서 밤새 소란을 피운 끝에 다음 날 아침 병원으로 실려 갔다.그는 병원에 가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만 도착한 후에도 구승훈의 철저한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휴대폰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그가 난동을 부린 탓에 병실은 엉망이었지만 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직도 부수고 있네요? 그럼 내가 잠깐 밖에서 기다렸다 들어올까요?”구동근은 화가 나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이미 말했잖아. 여초연 씨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구승훈은 대꾸하지 않은 채 보온병에서 밥을 퍼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건가요?”구동근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확실히 몰라. 여초연 씨가 떠날 때 난 보내주기로 약속했고 그 이후로 여초연 씨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어. 물론 나중에 행방을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얻은 단서는 거의 없었고 여초연 씨는 아마도 M국에 있을 거야. 그 팔찌는 어제 아침 하인이 집 앞에서 발견한 거야. 안에는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고 여초연 씨의 필체로 ‘너희 부인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어.”말을 마친 구동근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여초연 씨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결국 내가 여초연 씨에게 휘둘리고 있었더라고. 만약 그때 여초연 씨가 너에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넌 여전히 나를 미워하고 있었을까?”구동근은 말을 마친 뒤 묵묵히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때 너희가 여초연 씨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여초연 씨가 나에게 그렇게 했을까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죠. 결국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밖으로 나온 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 속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그가 조롱하는 대상이 다른 사
강하리는 구승훈이 그 팔찌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아마 그 감정 속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이 시점에서 여초연이 팔찌를 보내는 것은 분명 도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구승훈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느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내가 안아줄까?”구승훈은 억지로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그럼 강 부장님은 어떻게 나를 위로할 생각이에요?”강하리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키스해 주고 안아주고 오빠라고 불러주면서 달래주면 되지 않을까?”구승훈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고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그는 빗속을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그때 그는 매우 슬펐고 심지어… 죽고 싶다고 느꼈다.구승훈이 강가에 서서 몸을 던지려는 순간 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구승훈 오빠.”그가 돌아보자 한 어린 소녀가 비를 맞으며 구승훈에게 달려와 작은 분홍색 우산을 그의 손에 건네며 말했다.“구승훈 오빠, 슬퍼하지 말아요.”그 말이 끝나자 그녀는 젖은 옷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비가 내리는 중에 힘겹게 사탕 포장을 뜯고 그에게 사탕을 건네주었다.“달콤한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빗속에서 소녀는 반달처럼 꺾인 눈으로 웃으며 물었다.“달콤해요?”구승훈은 그때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저 그 장면이 떠오르자 가슴속에 있던 서글픈 감정이 점차 따뜻하게 변해갔다.그의 어린 시절은 아마도 온통 계산과 속임수로 가득했을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의 마음에 조금의 사랑도 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잊힌 구석에서 어린 시절의 달콤함을 맛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그것은 구승훈의 삶에 존재한 빛과 같았고 아주 달콤했다.강하리는 구승훈이 말하지 않자 여전히 그가 마음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그녀의
구동근은 갑자기 침묵하더니 지팡이를 짚고 다소 힘겹게 걸으며 창문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를 부축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지만 피우지 않고 손에 쥔 채 시선을 내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구동근은 말없이 창가에 서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다그치지 않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구동근이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창밖으로 보이는 아래층 정원에서 기사가 가정부와 연정이를 데려다주었다.연정이는 진태형이 얼마 전 사준 작은 패딩에 토끼 목도리를 두르고 곱슬곱슬한 머리에 예쁜 머리핀 두 개를 하자 작고 하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인형처럼 귀여웠다.차에서 내려와 강하리를 보자마자 아이는 신이 나서 가정부가 내려주기 바쁘게 뒤뚱거리며 강하리를 향해 달려가면서 깔깔 웃었다.강하리가 다가가 연정이를 안고 볼에 입 맞추었다. 정원의 조명은 그리 밝지 않았지만 이 장면은 유난히 선명하게 구동근의 눈에 각인되었다.희미한 눈동자에 잠시 복잡한 감정이 섬광처럼 번쩍이다가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그가 말을 꺼냈다.“솔직히 나도 어디 있는지 몰라.”구승훈은 그의 대답에 놀라지 않은 듯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요. 난 기다릴 수 있어요. 아시게 됐을 때 다시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구승훈은 뒤돌아 문을 나섰고 단호한 발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구동근은 순간 불안한 마음에 주름진 노인의 얼굴엔 금세 화난 기색이 돌았다.“이 자식, 무슨 뜻이야? 날 가두는 거야?”구승훈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고개를 돌려 소위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상대를 바라보았다.“그럴 리가요. 할아버지 안위가 걱정돼서요. 오늘 피까지 토하셨는데 제가 잘 챙겨드려야죠.”“이놈 자식이!”구동근이 지팡이를 내리쳤지만 구승훈은 이미 문을 닫고 나간 뒤 문 앞에 있던 사람에게 잘 지켜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방을 나선 구승훈은 혼자 3층 테라스로 올라갔다.저녁 바람은
구동근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이 장면을 지켜보던 구민성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화가 났다.“구승훈! 할아버지에게 강요해서 무덤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이젠 억지로 결혼까지 밀어붙여? 우린 다 앞 못 보는 장님인 줄 알아? 네가 오늘 할아버지를 강요해 결혼을 진행해도 우린 인정하지 않아!”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고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할아버지, 제가 강요했어요?”구동근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손자 하나는 참 잘 키웠다.구승훈을 노려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구씨 가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결혼 허락받으러 온 거야. 심씨 가문에서 동의하면 앞으로 강하리는 구씨 가문의 당당한 며느리가 될 거야.”구동근의 말이 떨어지자 구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한 겹 내려앉은 듯 어두운 표정이 역력했다.“아버지, 미쳤어요?” 구민성이 성큼성큼 다가왔지만 구동근은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는 한숨을 쉬며 거실로 들어서면서 마음속으로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뭐라고 해도 반대하지 말았을걸. 그러면 이 지경으로 되지도 않았고 구씨 가문도 망하지 않았을 텐데.구동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백아영을 바라보았다.백아영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구동근의 체면을 생각해 별다른 거친 말을 하지 않았다.구동근 역시 빙빙 돌리지 않고 자리에 앉은 뒤 곧장 입을 열었다.결혼 허락은 물론 예물까지 전부 준비할 생각이었다.SH그룹은 무너졌지만 구동근은 여전히 많은 개인 재산을 가지고 있고 그중 일부는 구승훈의 예비 신부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선물이다. 연성 중심가에 있는 사무 빌딩, 그리고...원래 여초연의 손에 있던 팔찌까지.“승훈이 엄마가 며느리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보낸 겁니다.”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고 말을 마친 구동근은 강하리에게 팔찌를 건넸다.하지만 강하리는 팔찌를 받을 생각이
강하리의 말에 진시연은 물론 이정숙도 당황했고 곧바로 이정숙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강하리, 주제넘게 굴지 마!”강하리가 웃었다.“앞으로 저한테 잘해준다는 게 이런 건가요?”이정숙의 말문이 막히자 진시연이 곧장 입을 열었다.“난 무릎은 꿇을 수 있지만 할머니는 그냥 두면 안 될까요? 연세가 있고 그쪽 할머니인데 아무리 그래도 어른은 존중해야죠.”또다시 강하리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는 말에 강하리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아주머니, 손님 내보내세요.”오영숙이 서둘러 달려왔다.“어르신, 진시연 씨, 나가시죠.”오영숙이 말을 마치자 진시연은 이를 악문 채 정말로 무릎을 꿇었다.“시연아!”소리를 지르며 이정숙은 진시연을 끌어당기려 했고 진시연의 몸도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앞으로 다시는 건드리거나 성가신 일 만들지 않을게요. 강하리 씨,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강하리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진시연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난 후 이렇게 말했다.“꺼져요. 앞으로 나랑 내 가족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고.”진시연은 나지막이 고맙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이정숙과 함께 떠났고 거실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구씨 가문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들 눈에 강하리는 줄곧 만만하고 연약한 상대였다.그게 아니면 구승훈이 아니라 바로 강하리의 회사로 찾아가지도 않았을 거다.그런데 지금 보니 구승훈이 만나는 여자가 진태형의 양딸과 어머니도 몰아붙일 만큼 독한 사람이고 거실에 있는 심씨 가문 사람 중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구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복잡한 표정이었고 구동근은 더더욱 그러했다.그는 강하리가 구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늘 생각해 왔다.출신이 비천한 데다 안주인이 될 만한 자질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겼다.시골 출신인 계집이 성격도 연약하고 소심해서 훌륭한 안주인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의 섣부른 판단이었다.거실에서 심준호는 눈썹을 치켜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