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강하리가 멈춰섰다. 귀를 의심했다.“담당 프로젝트 중 하나가 계약에 문제가 좀 생겨서, 강 부장님 출장 일정이 잡혔어요.”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다시 들려오는 신도윤의 목소리.“……꼭 본인이 가야만 하나요?”“네, 협업사 쪽에서 꼭 담당자와 대면해 얘기해야겠다고 해서요.”“알겠습니다. 수하 직원 동반도 가능하죠?”신도윤이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곧 대답이 돌아왔다.“안예서 씨 말씀하시는 거죠? 그럼요. 내일 공항에서 합류하라고 일러둘게요.”다음날 아침.공항 터미널에 도착한 강하리에게 정주현의 전화가 걸려왔다.“주말인데 시간 되시죠?”강하리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죄송해요. 출장 일정이 잡혀서 지금 공항이에요.”“……주말인데 출장이요?”정주현의 어이 없다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이거 냄새가 확 나는데? 구승훈이 일부러 그런 거죠?”“그러게요. 이직 전에 아주 골수까지 쪽쪽 빼먹을 기세네요.”“언제 돌아와요? 지사 입사 전에 의논할 디테일이 있는데, 돌아오면 데리러 갈게요.”강하리는 돌아오는 날짜에 맞춰 정주현과 식사 약속을 잡았다.어제 봤던 사진에 대해선 한 마디도 언급이 없었다.정주현과 통화를 마친 후, 강하리는 서류들을 보며 안예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이륙 1시간 전이 되었지만 안예서는 나타나지 않았다.강하리는 연거푸 시간을 확인하며 미간을 좁히다가 결국 안예서한테 전화했다.“부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어지간히 놀란 듯한 안예서의 목소리.강하리의 얼굴이 급 어두워졌다.“어제 신 실장한테서 연락 못 받았어? 오늘 출장이라고.”“네? 출장이요? 오늘요?”“…….”강하리는 지끈거려 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아니야. 주말인데 잘 휴식하고.”통화를 마친 강하리가 깊게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구승훈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웬걸, 바로 끊어버리는 구승훈.‘이 인간이!’깊은 빡침(?)이 밀려왔다.설마 설마 했는데. 업무에서만큼은 장난치지 않을 줄 알았는데.이건
”표정이 왜 그렇지? 정주현의 차 옆 자리엔 잘도 앉더만.”“…….”강하리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피곤해 보이네. 수면 부족인가?”“…….”아예 눈을 꼭 감아버린 강하리.참자. 참아야 한다.저 깐족거림이 양아치 뺨치는 인간이 아직 내 대표님이다.왜 피곤한지 몰라서 물어, 라고 빼액 외치고 싶었다.갑작스레 잡힌 출장 때문에 관련 서류들을 준비하느라 날 새다시피 했으니까.우우우웅-.비행기 이륙 소리와 함께, 걷잡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강하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구승훈의 눈길이 그녀의 얼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눈 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이윽고 커다란 손으로 강하리의 머리를 받쳐,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에 내려놓았다.강하리가 깼을 때 비행기는 이미 착륙해 있었다.승객들이 분주하게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자신은 옆 남자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잠깐!강하리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그러고 보니 자신의 몸에는 어느샌가 수트 상의 한 벌이 덮어져 있었다.그 남자한테 선물했던 바로 그 수트.문득 강하리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는 느낌이 들었다.지난 3년동안, 몸에 배어버릴 정도로 익숙한 광경.매번 함께 출장갈 때마다 기대던 넓은 어깨.매번 잠에서 깨면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던 수트 상의.그리고, 그 모든 게 깨져버린 지금.아름답던 기억의 파편들이 날카롭게 목구멍에, 가슴에 파고든다.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옷, 감사해요.”“말로만?”부르퉁한 남자의 목소리.강하리는 대답이 없었다.흥, 콧방귀를 뀐 구승훈이 일어나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강하리는 캐리어를 내려 끌고 그 뒤를 따라갔다.출구를 나서자마자 갑자기 엄습하는 추위.보경시의 연말은 혹한기였다.훅 들어오는 찬 바람에 강하리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바로 그때, 두툼한 외투가 어깨에 내려앉았다. 외투에 배어 있는 깊은 우드향이 강하리의 코 끝을 간질였다.“얌전히 걸치고
”알겠습니다. 딴 데 알아볼께요.”휙 돌아선 강하리가 밖을 향해 걸어갔다.대뜸 구승훈에게 잡혔지만.“놔요!”안간힘을 쓰며 벗어나려는 강하리를 보는 구승훈의 눈이 위험하게 번득였다.“한 방 쓰면 죽기라도 해?”“아니, 지금 한 방 쓰는 게 옳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난 괜찮아.”“내가 안 괜찮거든요!”강하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와락!다시 강하리를 잡은 구승훈이 거칠게 그녀를 끌어당겨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강하리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들도 타고있어 가만히 있었지만.온 몸의 모든 신경세포들이 외치고 있었다.왜? 도대체 왜 매번 이러는 거냐고. 제발 좀 놔 달라고.엘리베이터가 멈췄고, 구승훈이 그대로 강하리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문이 닫히는 순간, 우악스럽게 강하리를 문에 밀어붙인 구승훈.강하리는 버둥거렸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광기로 물든 남자의 시선이 강하리에게 꽂혔고.곧 이어 묵직하고 거친 숨소리가 강하리의 입술을 덮쳤다.딩! 디리리딩! 딩!조용한 룸 안에 느닷없이 울려퍼진 전화벨 소리.콱!“으윽!”구승훈이 주춤한 순간, 강하리가 온 몸의 힘을 실은 힐로 그의 발을 밟았다.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구승훈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그 틈에 구승훈을 밀쳐낸 강하리는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멀어져가는 강하리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구승훈의 얼굴에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핏줄 돋아난 손으로 그때까지 멋 모르고 울려대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중요한 일 아니면 죽여버린다.”성난 야수의 으르렁거림에 핸드폰 저 쪽, 승재가 얼어붙었다.“……그, 뭐야, 형, 알아낸 게 있는데.”한참 뒤에야 승재가 말을 이어갔다.“강 부장이 납치당하기 바로 전, 송유라가 둘째 형을 만난 것 같아.”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구승훈의 손이 멈췄다.“확실한 증거는?”승재가 잠시 침묵했다.“……길가 CCTV에 포착된 화면이 있는데, 거리가 멀어서 좀 희미하지만 누가 봐도 송유
한참동안 승재는 할 말을 잃었다.물론 안다. 확실한 증거 없이는 송유라를 어쩌지 못하다는 걸.하지만…….“물어볼 수는 있잖아.”“어떻게? 혹시 그 납치 사건, 네가 주도한 게 아니냐고? 아니면 날 따돌리려고 일부러 얼굴 망가뜨린 거냐고?”승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물어 봤자, 수박 겉 핥기다.“계속 둘째 추격해. 다른 건 모른 척 하고.”구승훈이 전화를 끊었다.한편, 근처 다른 한 호텔에 찾아간 강하리는 로비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호텔마다 온라인 예약이 꽉 차 있었다.임시로 예약 취소된 방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직접 왔지만 허사였다.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 화면은 메시지들로 도배되어 있었다.-어디야?-전화해.-여기 투룸이야. 안 건드릴게. 돌아와.-강하리, 전화하라고!구승훈의 전화번호를 수신 거부로 설정해 놓은 탓에, 애꿎은 톡만 잔뜩 보낸 모양이다.-요즘 바빠?이건, 주해찬이 보낸 톡이었다.-좀 많이요 ㅋㅋ-그래? 내일 보성에서 열리는 국제박람회 개막식에 연수 차 부르려고 했는데.이런 우연이 있나.-선배, 저 지금 보성이에요.주해찬이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하리야, 진짜 보성이야?”목소리에서 뛸 듯이 기쁜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미리 얘기라도 해 주지. 섭섭하다 강하리?”“급하게 잡힌 출장이라서요. 오늘 막 도착했어요.”“어느 호텔이야? 관련 서류 보내주러 갈 테니까 잠시 내려올래?”“하, 예약이 너무 어려워요 선배. 가는 데마다 꽉 찼네요.”“아직 방 못 구헸어? 이 늦은 시간에?”주해찬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지금 어디야? 데리러 갈 테니까 위치 보내봐.”강하리는 톡으로 위치를 보낸 뒤, 몇 마디 더 나누고 통화를 마쳤다.……낯빛이 푸르딩딩한 구승훈이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호텔에서 나와 강하리를 찾는 내내 톡을 보냈지만 답장 한 글자 없다.‘내 이럴 줄 알고.’다른 유심이 꽂혀있는 핸드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전화했다.“어디야.”추운 날씨만큼이나 서늘한
소홀했다.정주현을 피해 강하리를 연성시에서 멀찍이 데려갈 생각만 했다. 꿈에도 몰랐다. 주해찬이 여기서 나올 줄은.그야말로 늑대 피해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격.구승훈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택시를 세워둔 뒤, 성큼성큼 걸어갔다.가까이 가기도 전,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구승훈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두 사람 곁에 구승훈이 나타나는 순간, 강하리의 웃음이 그대로 굳어졌다.“선배, 가요 우리.”구승훈을 본 주해찬이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어디 가려고.”들은 척도 않고 주해찬의 차 문을 여는 강하리.“귀 먹었어? 어디 가냐고 묻잖아!”한 데시벨 높아진 구승훈의 차가운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직원 사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시는 거 아닌가요? 대. 표. 님.”강하리가 냉랭하게 쏘아붙였다.“출장 와서 한밤에 남자 만나는 직원의 행보를 묻는 게 지나친 간섭이다?”“대표님이 한밤에 여자 만나러 가면서 그러셨잖아요. 지나친 간섭이라고.”“…….”구승훈은 할 말이 없어졌다. 뭔가가 터질 듯 차올랐다.-이 밤중에 어디 가시게요?-지나친 간섭은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자다가 송유라의 전화 한 통에 벌떡 일어나 옷을 주워입으며, 강하리에게 던진 말이다.강하리가 코웃음을 치며 문을 열려는 순간.구승훈의 손이 우악스레 문을 밀쳐 막았다.“구 대표님. 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주해찬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강하리는 출장 온 겁니다. 그쪽 만나러 온 게 아니라. 내일 협상회에 대해 의논할 게 있으니까 그쪽이야말로 방해하지 마시죠.”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받아치는 구승훈.주해찬은 어이가 없어졌다.시커먼 속이 다 보이는데 의논은 개뿔.이 한밤중에 의논할 게 뭐가 있다고.“하리의 명예 같은 건 안중에도 없으시네요. 다 끝난 마당에 같은 방을 쓰는 게 가당키나 하십니까?”“명예 좋아하시네. 그러는 그쪽이랑 같은 방 쓰는 건 괜찮고?”구승훈의 말투가 위험하게 삐딱해졌다.“나야 3년이나 같이 잤으니까 거리낌 없는 건
”미안해요, 선배.”차 안.한참동안 말이 없던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어느모로 보나 빠진 구석 하나 없는 주해찬이었다.그런 사람이 자신 때문에 구승훈에게 비하당한 게 속상했다.“뭐가 미안해. 구승훈이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웃으며 대답하는 주해찬의 따뜻한 목소리에 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나 따위가 뭐가 좋다고.’자신이 주해찬에게 어울리는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그만큼 높은 곳에 서 있는 선배였으니까.강하리가 말이 없어졌지만, 주해찬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다 보였다. 아직 지난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급할 건 없었다. 3년이나 기다렸는데, 몇 년쯤 더 기다린다고 해도.“저녁 먹었어?”“아직이요.”“그럼 우선 밥 먹으러 가야겠네.”“대충 요기만 하면 돼요. 편의점 가서 컵라면이나 먹으려고 했는데.”주해찬이 문득 차를 세우고 내렸다. 옆에 아직 불이 켜진 디저트 가게가 보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해찬이 디저트 가게에서 나왔고, 손에는 케익 한 조각이 들려있었다.‘어, 저건?’강하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학생시절, 중독됐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사족을 못 쓰던 초코케익.구승훈과 함께일 때 한 번도 못 먹어봤던.주해찬이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가슴 한 구석에서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뭔가가 차올랐다.받아들어 한입 베어문 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함박 웃음을 지어버렸다.기억 저 편, 잊혀졌던 맛이 미각을 깨웠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고 목구멍이 간질여졌다. 그 정도로 맛있었다.‘저렇게나 행복하게 웃는다고?’뒷쪽 택시에서 지켜보는 구승훈은 죽을 맛이었다.초코케익 좋아하는 걸 알았더라면 한 트럭이라도 사줄 수 있었는데.‘3년동안 나는 뭐 한 거지?’어쩌다가 이렇게 남의 데이트나 훔쳐보는 변태 같은 꼬라지가 됐냐고.주해찬의 차가 어느 호텔에 들어섰다.“여기 심씨 가문이 경영하는 호텔이야. 여분으로 비워두는 방이 언제든 있으니까, 앞으로 보성에 출장 오면 준호한테 바로 전화하도록.”“알겠어요.
어쩔 새도 없이, 강하리의 뺨이 데인 듯 홧홧해났다.룸서비스 직원 옆에 서 있는 고이선이 보인 건 다음 순간이었다.“X년이, 구승훈 꼬신 것도 모자라서 주현 오빠까지 넘봐? 제 주제도 모르고!”악다문 이빨 사이로 말을 뱉으며 고이선이 다시 손을 드는 순간.짜악-!찰진 소리와 함께, 강하리의 손이 고이선의 뺨에 날아들었다.룸서비스 직원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저, 손님? 경찰 불러드릴까요?”“네. 경비원도요.”직원의 물음에 강하리가 냉랭하게 대답했다.“……심씨 가문 호텔에서 감히 나를 때려? X년이 죽을라고!”강하리의 반격을 예상하지 못했던지 잠시 멍해졌던 고이선이 날카롭게 울부짖었다.고이선의 고함과 함께, 험상궃은 인상의 우락부락한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번들번들한 사내의 눈길이 목욕가운 하나만 입은 강하리의 몸에 멈췄다.순간 소름이 쫙 끼친 강하리가 문을 닫으려고 돌아서는 순간.고이선이 그녀의 머리채를 콱 잡았다.“어디 가려고? 남자라면 환장하는 거 아니었니? 맘껏 놀라고 데려왔는데 왜 빼?”콰직-!“끼아아악!”무기로 쓸 수 있는 식기들은 많았다.예를 들면, 강하리의 손에 들려있던 디저트용 포크라든지.디저트용 포크가 머리채를 움켜쥔 고이선의 손에 꽂혔고,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저 년 죽여! 당장!”고이선이 미친듯이 소리쳤고, 험상궃은 사내가 강하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하지만 그 주먹은 강하리에게 닿지 못했다.으스러질 듯 팔목을 잡힌 사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다음 순간.사내가 뒤로 날아갔다.쿠당탕!벽에 부딪쳐 스르르 무너지는 사내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는 구승훈.온 몸에 시커먼 아우라가 감돌고 있었다. 눈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시퍼렇게 타오르고 있었다.퍼억!사내의 면상에 한번 더 강펀치를 날린 구승훈이 휙 고이선을 돌아보았다.고이선이 흠칫 몸을 떨었다.“고이선 씨,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어둠의 심연에서 나올 법한 목소리에 고이선은 소름이 쫙 돋았다.구승훈이 여기 나타날 줄이야
쾅!문이 닫히면서 고이선의 시선을 가로막았다.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진 고이선.“야 강하리! 죽여버릴 거야! 잡히기만 해 봐!”히스테리에 찬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방 안.착 가라앉은 눈길로 구승훈이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피투성이가 된 강하리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얼마나 놀랐을까.구승훈은 마음 한 켠이 아프게 찔려왔다.떨리는 강하리의 손을 꼭 잡고 화장실로 들어가, 묵묵히 손에 묻은 피를 씻어주었다.얼굴에 튄 핏자국까지 꼼꼼히 닦아준 뒤 찬찬히 뜯어보았다.“다친 데는 없고?”“없어요.”그제야 한 시름 놓은 구승훈은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다.강하리의 아랫턱을 잡아 들어올려 눈을 맞췄다.“봤지? 이게 너 좋아한다는 남자한테 붙어있은 대가야. 정주현이 보이는 대로 깨끗하기만 할 것 같지? 남자는 다 한통속이야.”말없이 구승훈의 손을 벗어나 화장실 밖으로 향하는 강하리.“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구승훈의 얼굴이 또 일그러졌다.“구해주신 건 고마웠어요. 대표님이 안 오셨더라면 무슨 꼴을 당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하지만.”강하리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그렇다고 대표님이 내 일에 간섭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에요.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든 보답하겠습니다.”“그래서? 여전히 정주현에게 붙어 있으시겠다?”구승훈의 눈매가 위험하게 가늘어졌다.강하리는 눈을 내리 깔았다.솔직히 정주현에 대해선 업무를 제외한 다른 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감정 쪽으로 발전할 일도 없을 거고.정주현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복잡한 관계라면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으니까.정주현이 그걸 받아들이면 좋고, 감정적으로 물고 늘어진다면 다른 길도 생각해 볼 예정이었다.하지만 어쨌든, 이 모든 게 구승훈과는 상관없는 일.“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강하리.”“그건 내가 할 말 아닌가요? 대표님이야말로 점점 더 꼬여가는 걸 뻔히 보면서 왜 자꾸 질척거리시는 거예요?” “내가 질척거린다고? 정주현이 싸지른 똥을 막아 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