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했던 대로 구승훈이 미간을 좁힌다.“우리 둘 사이 일에 왜 자꾸 송유라는 끌어들이는 거지?”데자뷰 저리가라 할 익숙한 레퍼토리다.엄한 사람 멕인다는 듯한 핀잔 섞인 저 말투.‘내가 끌어들이고 싶어서 끌어들이는 거냐고.’날이 갈수록 버라이어티해지는 수작질로 자꾸 언급하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가만히 있는다고 멈출 송유라도 아니고.구승훈과 엮여있는 한, 점점 더 심해질 거다.“송유라와 상관이 없다고요? 셀프최면 거는 게 재밌으세요? 송유라를 입 밖에 내지 않으면 대표님의 그 무책임함이 가려질 거라고 생각하세요?”싸늘한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말투가 구승훈의 눈과 가슴을 쿡 찔렀다.그 한기에 꽁꽁 얼어버린 심장이 발치에 툭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그런 뜻이 아니라…….”습관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급 후회가 밀려왔다.잠시 멈췄던 구승훈이 힘없이 한 마디 물었다.“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되는데?”강하리가 침묵에 빠졌다. 좀 의외였다. 구승훈의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하지만 곧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고의상해죄,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거예요. 나쁜 짓을 했으니 벌은 받아야죠. 대표님은 가만히 보고만 계시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아직도 안 잊었어?”“안 잊은 게 아니라 안 잊혀지는 겁니다.”아직도 눈만 감으면 끔찍했던 기억이 번뜩번뜩 튀어나오는데.아이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맴도는데.그 모든 걸 저지른 장본인이 발 편히 뻗고 자게 놔둘 수가 있을까.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강하리를 놓치기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송유라를 나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그 오랜 세월 동안 버릇처럼 몸에 배어버린, 송유라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나도 끈덕졌다.“그러잖아도 송유라한테서 멀어지느라 노력하는 중이야. 그러니까-.”“그래 봤자 일 나면 한걸음에 달려가실 거잖아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강하리가 냉소를 흘렸다.뒷말은 뻔했다. 그러니까 뭐? 적당한 선에서 그치라는 거겠지.‘웃기지도 않네
”뭐라고?”구승훈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얌전하던 고양이가 한 순간 살쾡이로 변할 수도 있단 말인가?“당장 꺼지라고! 귀 먹었어?”환청이 아니다. 살쾡이가 날카롭게 하악질을 하며 이빨을 드러낸다.이빨을 꽉 악다문 강하리가 눈가에 독기가 어린 채, 잇새로 다시 한 번 내뱉었다.그동안의 고통과 울분이, 찢겨져 너덜너덜한 가슴에서 맹렬히 폭발하는 순간이었다.더이상 참는 건 의미가 없었다.사실 애초부터 송유라와 관련된 일로 재협상을 시도할 필요조차 없었다.그냥 구승훈의 반응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정도.어쨌거나 송유라 편일 테니까.뭘 하든 그건 변하지 않으니까.몇 번이고 자신은 버려졌고, 이 남자는 송유라한테 가 있었으니까.지금도 이 남자는 내가 여태 받은 고통 따윈 안중에도 없으니까. 근본적으로 이 남자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구승훈의 눈이 사납게 번득였다.“너 지금 뭐라고?”경악으로 물들었던 눈동자에 분노가 차올랐다.“맞아죽을 뻔한 걸 구해 줬더니 이게 어따 대고 소리를!”차가운 그 한 마디가 폭주하던 강하리의 이성 한 조각을 건드렸다.“보답하겠다 그랬지.”강하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그 보답이란 거, 지금 당장 받아내야겠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목소리의 냉랭함 따윈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그 역시 끓어오른 가슴속 뭔가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정주현과 주해찬과 있을 때는 잘도 헤실거리다가 나한테만 못되게 군다 이거지?“몸으로 때워.”“?”강하리가 움찔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하지만 구승훈의 진지한 표정을 보는 순간 직감했다.‘나왔다. 또라이 전술.’“미치려면 좀 곱게 미치든가.”거침없이 악담을 뿜어내는 강하리를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하는 구승훈.“섹스 마려워? 출장마사지라도 불러 줘?”“너가 마려워. 강하리 너가.”어쩔 새도 없이, 남자의 뜨겁고 거친 숨결이 강하리를 덮쳤다.“야 이 미친 새-.”뒷말은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온 남자의 입술이 막아버렸다.강하리의 반항은 가볍게 힘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벼락처럼 구승훈의 귀에 꽂혔다.구승훈이 감전이라도 된 듯 움찔했다. 정수리까지 치밀었던 화와 욕정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강하리를 꽉 잡았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눈가에 고통스런 빛이 스쳐지났다.날 선 비수가 가슴을 긋고 지나간 기분이었다.그 사건 이후 강하리가 언급한 건 처음이었다.그래서 그냥 그대로 지나간 줄로만 알았다.입에 담지 않으면 천천히 나아지겠지.시간이 어루쓸다 보면 아물겠지.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시간이 지날수록 아물기는 커녕, 점점 더 깊어지기만 한 상처였다.강하리한테도, 자신한테도.살짝만 건드려도 쫙 갈라져, 두 사람을 갈라놓는 깊은 골짜기로 변해버렸다.구승훈의 울대뼈가 아래위로 요동쳤다.비틀비틀 뒤로 두 발작 물러났다.강하리가 지금 이 일을 다시 꺼낸 의도는 분명했다.이 상처 보이냐고.나 지금 이런 상태니까, 제발 건드리지 말라고.철저하게 선을 긋고 있는 거였다.“아플 거 뻔히 알면서, 그런데도 굳이 헤집어서 나를 밀어내는 거야?”구승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강하리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안 그러면 더 아플 거니까.”어느덧 강하리의 목소리와 눈빛은 깊은 호수처럼 잔잔해져 있었다.그만큼 차갑기도 했다.“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언젠가는 지나갈 거예요. 앞으로의 시간에 비하면 3년은 아무것도 아닐 거니까. 대표님이나 나나 아직 젊잖아요.”“그러니까, 더이상 피차 상처 내면서 엉켜있지 말자구요. 네?”담담한 강하리의 눈빛과 마주하는 구승훈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차올랐다.‘자존심 따위에 이러는 거 아니라고!’라고 외치고 싶었다.하지만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켰다.자존심이 아니면?사랑?X랄.어렸을 적부터 알았다.사랑, 결혼 따위는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것이란 걸.“그러니까 내가 뭘 하든, 우리 둘은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는 거네?”“네.”외마디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모든 소리가 사라진 방 안.
모락 모락.파아란 연기가 허공에 감돌다가 흩어진다.그 아래에는 어두운 얼굴의 구승훈이 있었다.그가 서 있는 곳은 강하리의 방 앞 복도.‘처음 해 본 생각이지만, 저거 부럽네. ’금방 풀려 흩어지는 저 연기처럼 강하리를 향한 마음도 풀렸으면.딱딱하게 응어리가 진 그게 뭔지는 확실하진 않았다.확실한 건, 강하리를 이대로 포기하는 게 아직도 안 된다는 거였다.둘이 시작한 일인데, 혼자만 그 자리에 갇혀 지지부진하는 것만 같은 기분.강하리의 마음이 자신에게 머무른 적이 있단 건 확실했다.뭐든 들어줬고 뭐든 받아줬었다.그런데 지금 혼자만 쏙 빠지려고 한다.‘여태껏 길들여 놓고 버리는 건 좀 너무하잖아.’이래서 습관이 무섭다고 하는 거였구나 싶었다.연기는 오랫동안 구승훈을 감돌았다.줄담배를 태운 탓이었다.지나가던 사람들이 코를 싸쥐며 미간을 찌푸리건 말건.바닥에 쌓여가는 담배 꽁초에 보다 못한 직원이 재떨이를 가져올 때에도.한 대, 또 한 대, 끝낼 줄 모르고 씁쓸함을 태웠다.그러다가 날이 희끄무레 밝아올 무렵, 접근하는 사람이 없단 걸 확인하고서야 자리를 떴다.호텔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승훈의 핸드폰이 울렸다.딩! 디리리리딩 딩!액정에 송유라가 떴다.“오빠, 언제 돌아와요? 나 곧 수술인데.”“걱정 마. 수술 전에는 돌아갈 거니까.”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구승훈이 대꾸했다.“진짜?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빠!”막 통화를 마치고 고개를 든 순간, 저만치에서 음식 포장을 들고 호텔에 들어가는 주해찬이 보였다.또 가슴이 답답해났지만, 애써 눌러 내렸다.뭐, 어때. 아침밥 갖다주는 것 뿐인데.택시를 잡고 호텔로 돌아간 구승훈은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바로 회의장으로 향했다.……주해찬이 방에 들어섰을 때 강하리는 막 외출 준비를 하던 차였다.음식 포장을 벗기자 짠 나타나는 불고기 밥버거에 강하리가 환호성을 질렀다.“선배는 내 학창시절 식습관을 어디 적어라도 놓은 거예요? 이 아침에 밥버거는 어디서
강하리는 대답이 없었다. 입만 벙긋하면 이 남자가 또 화르륵 타오를 거니까.하지만 구승훈은 할 말이 남은 모양.“아침밥 맛있었어?”“네. 대표님은 아침 뭐 드셨어요?”엉겁결에 강하리가 대답하고 보니, 구승훈이 썩은 표정이다.내가 밥이 넘어갈 것처럼 보여? 라고 말해주는 듯한.아차 싶었다.“강 부장은 참 순진한 여자야. 고작 아침밥 한 끼에 좋아죽는 걸 보면.”더 한층 시큼텁텁해진 구승훈의 말투.누군 3년 간의 감정을 갈무리하느라 죽을 맛인데.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지금부터 구승훈의 업무 관련 외 질문은 사절하기로 했다.그때 마침 마중나온 부드러운 인상의 협력사 비서실장.“구 대표님, 강 부장님, 오셨어요?”비서실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강하리가 웃으며 대답하자, 비서실장이 친근하게 그녀의 곁에 다가갔다.“처음 뵐 때부터 느낀 건데, 우리 강 부장님은 어쩜 이리도 예쁘실까. 방금 남자친구분 차에서 내릴 때 아침햇살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 남자친구가 아니고 그냥 친구예요.”평소에 서류를 주고받으며 가끔씩 수다도 떤 친분이 있는 비서실장의 너스레에 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암요! 남자친구였다면 이마 쓱으로 끝나지 않으셨겠죠. 잘 생기신 분이 어쩜 그리 스윗하기까지 하실까. 우리 강 부장님한테 너무 잘 어울리지 뭐예요.”옆 구승훈이 썩소를 지었다.어울리긴 개뿔!비서실장, 사람 보는 눈이 동태 눈깔이었네. 그렇게 안 봤는데.강하리는 그런 스타일 안 좋아한다고.사실 강하리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는 미스터리지만.여태껏 자신이 강하리 스타일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지금은 영 모르겠다.저렇게나 매정하게 자신을 버리는 걸 보면.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나고 기분이 언짢아졌다.그게 강하리에게 고스란히 보였다.또, 또 시작이다. 또!“정 실장님, 진짜 그런 사이 아니에요.”다시 한 번 정정했지만.“압니다. ‘아직은’ 아닌 거죠.”비서실장, 정은숙이 눈까지 찡긋한다.이거야 원, 해명할수록 역효
”강 부장님, 남자친구분 데리러 오셨어요.”정 실장의 목소리에 협상회를 마치고 서류를 정리하던 강하리가 흠칫했다.회의장 밖에 심플한 정장 차람으로 우월한 기럭지를 자랑하는 주해찬이 보였다.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임원들마다 남자 여자 할것 없이 힐끗거릴 정도.“조 대표님, 죄송하지만 먼저 가 봐야 될 것 같아서요.”강하리가 미안한 얼굴로 조 대표를 돌아보았다.조 대표가 은근슬쩍 구승훈을 돌아보았다.두 사람의 수상한 관계를 알고있는 조 대표였다.딱 봐도 그림이 나왔다. 이윤을 양보할테니 식사자리 마련에 협조 좀 해달라는 은밀한 부탁까지 받은 마당인데.그랬는데. 지금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강 부장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 칼에 거절한다?밖에 남자친구란 사람은 또 뭐고?설마 구 대표님이 여자 뺏긴 건가? 천하에 구 대표가?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구승훈의 속에는 천불이 일어나고 있었다.‘저 낄끼빠빠를 모르는 새X가.’기어코 회의장에 돌아오냐.꺼지라고 좀!“강 부장, 그건 좀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애써 평온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지만.이미 조 대표의 눈은 가십거리를 포착한 파파라치의 그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이윤도 양도받고 구 대표님 연애사도 라이브로 직관하고.이거 이거, 웬 떡이냐.그러다가, 막 회의실에 들어서는 주해찬과 눈이 마주쳤다.‘히익! 주씨 가문 도련님??’조 대표는 삽시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보경시에서 조용하기만 한 주씨 가문이지만.잠잠한 호수가 더 깊듯, 그 실력이 어마어마한 가문이었다.외교부 해찬 도련님 얘기도 익히 들어온 터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뿌리부터 될성부른 다이아 미스터.명문가 위 명문가의 후계자.그런 분이라면 구 대표와의 경쟁구도가 너무나도 합리적이었다.대신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아, 이럴 줄 알았더라면 넙적 받아먹는 게 아닌데.’구승훈의 영향력이야 전국에 퍼져 있다지만.적어도 보경시에서만큼은 주씨 가문에 한 수 접어줘야 했다.그만큼 보경시에서 주씨 가문의
점심식사 약속이 흐지부지 파산되어 버렸다.조 대표는 주해찬이라도 따로 식사 약속을 잡고 싶었지만, 당사자는 별로 생각 없는 눈치였다.같이 회의장을 나서는 세 사람과 그들을 배웅하러 따라나선 조 대표.앞 쪽에서 강하리와 주해찬이 오순도순 국제박람회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구승훈은 그들 뒷쪽에서 청승맞게 담배를 태워대며 따라가고 있었다.“강 부장님이 대표님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만.”앞 쪽 둘을 바라보며 조 대표가 낮은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그러게요. 저도 그런 줄 알았거든요.”구승훈이 냉소를 지었다.정주현을 막았더니 주해찬이 나타나고.산 넘어 산이다.주해찬은 정주현과는 달랐다.정주현 때문에 강하리에게 화가 난 이유는, 정주현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게 더 컸었다.여자를 물 흐르듯 갈아치우는 정주현에게 강하리가 가 봤자, 얼마 못 가 밀려날 게 뻔했으니까.그걸 강하리도 아는 눈치인데도 자꾸 들러붙으니 구승훈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도 했다.하지만 그만큼 두 사람을 떼어놓기가 쉽다는 반증이기도 했다.주해찬은 아니었다. 약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남자였다.외모나 능력, 평판, 어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고.강하리에게 일편단심으로 진지했다.강하리를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무엇보다도, 강하리도 그게 싫은 눈치는 아니었고.성큼성큼, 구승훈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강 부장, 오늘 오후 항공편으로 돌아간다.”강하리가 우뚝 멈춰 구승훈을 돌아보았다.“저 내일 돌아갈 거니까 대표님 먼저 들어가 보시죠.”“오늘은 무슨 일인데?”“이따 저녁에 국제박람회에 가 봐야 해서요.”“그럼 내일 같이 돌아가. 그 국제박람회인가 뭔가 하는 거, 나도 흥미가 좀 생겨서.”“하양이 걱정 마시고, 바쁘실 텐데 먼저 들어가 보시죠.”주해찬이 웃으며 강하리 쪽 차 문을 열어주었다.‘또, 하양이.’구승훈의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강하리를 태운 뒤 운전석에 타려는 주해찬을 향해 냉소를 날렸다.“그러는 해찬 도련님은 꽤
”선배.”“응?”“나 때문에 불편한 자리에 나오느라 애쓰지 마요.”“애쓴 거 아닌데. 네가 간다니까 가고싶어서 그런 거야.”주해찬이 다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하리야. 나는 그저.”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네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싶을 뿐이야. 너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이야.”“선배는 내 과거에 대해 알아요?”강하리가 쓰거운 웃음을 흘렸다.“알고 나면 여태 나한테 해 줬던 게 전부 시간 낭비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걸요.”“과거가 어떻든 나한테는 중요한 게 아냐. 나는 그저 네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고 싶을 뿐이거든. 언제든 네가 돌아서면 닿을 수 있는 곳에서.”강하리가 또 웃었다.그래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들도 있으니까.“내 과거가 선배 앞길을 가로막는 가시 덤불이 될 수도 있단 생각, 안 해보셨어요?”“그 가시 덤불을 헤치고 나가지 못 한다면, 그건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고.”주해찬이 에누리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그리고 하리 너는 점점 더 빛이 날 거야. 언젠가는 이 선배가 다가가기 힘든 높이까지 올라가겠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놔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어느덧 해가 저물었다.외교부를 한 바퀴 빙 둘러본 두 사람은 바로 저녁에 있을 국제박람회 개막식장으로 향했다.저녁 일정이 바쁘게 흘러갔고.개막식을 마치고 간단하게 배를 채운 두 사람이 호텔에 돌아오니 어느덧 밤 열한 시.강하리를 호텔 로비에 데려다 준 주해찬이 돌아서려는 순간.어둑어둑한 저쪽 구석에서 빛나는 빠알간 담뱃불과, 냉랭한 빛을 뿜는 구승훈의 눈길이 시야에 들이닥쳤다.미간을 확 좁힌 주해찬이 다시 강하리의 팔을 잡았다.“하리야, 나 잠시 올라가서 앉았다 가도 돼?”강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해찬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구승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저 여자가! 이 밤중에 외간남자를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