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식사 약속이 흐지부지 파산되어 버렸다.조 대표는 주해찬이라도 따로 식사 약속을 잡고 싶었지만, 당사자는 별로 생각 없는 눈치였다.같이 회의장을 나서는 세 사람과 그들을 배웅하러 따라나선 조 대표.앞 쪽에서 강하리와 주해찬이 오순도순 국제박람회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구승훈은 그들 뒷쪽에서 청승맞게 담배를 태워대며 따라가고 있었다.“강 부장님이 대표님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만.”앞 쪽 둘을 바라보며 조 대표가 낮은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그러게요. 저도 그런 줄 알았거든요.”구승훈이 냉소를 지었다.정주현을 막았더니 주해찬이 나타나고.산 넘어 산이다.주해찬은 정주현과는 달랐다.정주현 때문에 강하리에게 화가 난 이유는, 정주현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게 더 컸었다.여자를 물 흐르듯 갈아치우는 정주현에게 강하리가 가 봤자, 얼마 못 가 밀려날 게 뻔했으니까.그걸 강하리도 아는 눈치인데도 자꾸 들러붙으니 구승훈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도 했다.하지만 그만큼 두 사람을 떼어놓기가 쉽다는 반증이기도 했다.주해찬은 아니었다. 약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남자였다.외모나 능력, 평판, 어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고.강하리에게 일편단심으로 진지했다.강하리를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무엇보다도, 강하리도 그게 싫은 눈치는 아니었고.성큼성큼, 구승훈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강 부장, 오늘 오후 항공편으로 돌아간다.”강하리가 우뚝 멈춰 구승훈을 돌아보았다.“저 내일 돌아갈 거니까 대표님 먼저 들어가 보시죠.”“오늘은 무슨 일인데?”“이따 저녁에 국제박람회에 가 봐야 해서요.”“그럼 내일 같이 돌아가. 그 국제박람회인가 뭔가 하는 거, 나도 흥미가 좀 생겨서.”“하양이 걱정 마시고, 바쁘실 텐데 먼저 들어가 보시죠.”주해찬이 웃으며 강하리 쪽 차 문을 열어주었다.‘또, 하양이.’구승훈의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강하리를 태운 뒤 운전석에 타려는 주해찬을 향해 냉소를 날렸다.“그러는 해찬 도련님은 꽤
”선배.”“응?”“나 때문에 불편한 자리에 나오느라 애쓰지 마요.”“애쓴 거 아닌데. 네가 간다니까 가고싶어서 그런 거야.”주해찬이 다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하리야. 나는 그저.”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네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싶을 뿐이야. 너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이야.”“선배는 내 과거에 대해 알아요?”강하리가 쓰거운 웃음을 흘렸다.“알고 나면 여태 나한테 해 줬던 게 전부 시간 낭비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걸요.”“과거가 어떻든 나한테는 중요한 게 아냐. 나는 그저 네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고 싶을 뿐이거든. 언제든 네가 돌아서면 닿을 수 있는 곳에서.”강하리가 또 웃었다.그래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들도 있으니까.“내 과거가 선배 앞길을 가로막는 가시 덤불이 될 수도 있단 생각, 안 해보셨어요?”“그 가시 덤불을 헤치고 나가지 못 한다면, 그건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고.”주해찬이 에누리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그리고 하리 너는 점점 더 빛이 날 거야. 언젠가는 이 선배가 다가가기 힘든 높이까지 올라가겠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놔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어느덧 해가 저물었다.외교부를 한 바퀴 빙 둘러본 두 사람은 바로 저녁에 있을 국제박람회 개막식장으로 향했다.저녁 일정이 바쁘게 흘러갔고.개막식을 마치고 간단하게 배를 채운 두 사람이 호텔에 돌아오니 어느덧 밤 열한 시.강하리를 호텔 로비에 데려다 준 주해찬이 돌아서려는 순간.어둑어둑한 저쪽 구석에서 빛나는 빠알간 담뱃불과, 냉랭한 빛을 뿜는 구승훈의 눈길이 시야에 들이닥쳤다.미간을 확 좁힌 주해찬이 다시 강하리의 팔을 잡았다.“하리야, 나 잠시 올라가서 앉았다 가도 돼?”강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해찬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구승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저 여자가! 이 밤중에 외간남자를
”방금 구승훈을 봤어. 또 너한테 집적거릴까 봐 같이 올라온 거야.”엘리베이터 안, 주해찬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방에 녹차 티백이랑 커피밖에 없던데, 밤에 그거 마시면 잠이 안 오지 않을까요?”엉뚱한 강하리의 대답에 주해찬이 멍해졌다가 곧 눈치를 챘다.하양이는 진짜 완전히 구승훈을 놔 줄 생각이구나.“나는 녹차는 괜찮아. 홍차라면 몰라도.”“언제 한 번 차 끓여줄게요 선배. 저 다도 좀 배웠거든요.”“오, 그래? 우리 할아버지께서 요즘 다도에 푹 빠져 계신데, 언제 한 번 소개시켜 줘야겠다.”도란도란 대화를 이어가던 중,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둘이 내렸다.그리고.바로 옆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구승훈과 맞닥뜨렸다.“대표님? 어쩐 일로?”자동반사적으로 찌푸려지는 강하리의 미간.“어, 어젯밤 사건도 있고 해서 여기로 옮겨왔어.”구승훈이 씩 웃으며 강하리의 방 바로 옆 방을 가리킨다.“우리 회사 에이스, 강 부장이 불이익 당하는 건 못 참지.”“네. 고. 맙. 네. 요.”기계적으로 대답한 강하리가 구승훈을 휙 지나쳐, 카드키를 대고 방으로 들어갔다.따라 들어가려는 주해찬을 막아선 구승훈.“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강하리 명예 들먹이시던 분이 이건 좀 아니지.”야유와 경고가 섞인 말에 주해찬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맘껏 말하라지. 지금 저 느낌 아니까.‘잠깐, 어젯밤 사건? 불이익?’“선배, 들어와서 문 닫아요!”날선 목소리와 함께 강하리가 주해찬을 잡아끌었다.쾅!문이 닫혔고, 그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구승훈의 얼굴에 차가운 서리가 피어났다.“저기 손님? 혹시 재떨이 필요하시면-.”찌릿!날카로운 눈길에 다가오던 직원이 줄행랑을 놓았다.방 안.티백을 담은 컵에 더운물을 붓는 강하리를 응시하는 주해찬의 표정이 어둡기만 했다.“하리야, 어젯밤 무슨 일 있었어?”“……고이선이 찾아왔었어요. 잡아먹을 기세로.”주해찬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그런
”어이쿠야! 젊은 총각, 여기서 뭐 혀?”건너편 방에서 나오던 한 아주머니가 기겁한 소리를 내질렀다.방 앞에 우뚝 서 있는 시커먼 인영에 한 번 놀라고, 그림 같은 구승훈의 얼굴에 또 한 번 놀랐다.구승훈이 말 없이 미간만 좁힌다.“여자친구랑 다툰 겨?”알겠다는 표정을 지으시는 아주머니.말을 섞고싶지 않았지만, 여자친구란 말에 저도 모르게 구승훈의 고개가 끄덕여졌다.“여자친구 화 났으믄 어여 사과부터 혀야지, 정승처럼 서 있기만 하면 우짤겨?”“녹록지 않은 애라서요. 여자친구가.”“그럴수록 대차게 밀어붙여야 하는 겨. 여자친구 놓치지 않을라믄.”마침 그때, 강하리의 방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이 방을 나섰다.구승훈에게 핀잔을 주던 아주머니가 황당한 얼굴로 주해찬을 빤히 바라보았다.곧 이어 복잡한 눈길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얼굴은 반반한 총각이 참 안됐구먼.”구승훈을 쫒겨난 세컨드 쯤으로 보는 눈길이었다.“…….”구승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내가 남친이라고! 저 자식이 아니라!”……를 외치기도 전, 아주머니가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조심해서 들어가요, 선배.”고개를 끄덕인 주해찬이 구승훈을 돌아보았다.“구 대표님은 여기서 뭐 하십니까?”“뭐 하면 어쩔 겁니까?”기분이 기분인 만큼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그런 구승훈에게서 불길함을 감지했는지, 주해찬이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도어락 잘 잠그고. 이상한 사람이 문 두드리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 알았지?”그 말에 구승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저게 지금 누구 들으라고.그러건 말건 주해찬은 구승훈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버렸다.“하나만 묻자.”막 방으로 들어가려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막아섰다.“주해찬이 사귀자고 하면 사귈 거야?”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시도는 해보고 싶어요. 평범한 삶이란 걸 살아보고 싶거든요.”구승훈의 가슴 속, 간당간당하던 뭔가가 와장창 깨졌다.순간 나도 너한테 평범한 삶을 살게 해줄 수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하지만 목구
강하리를 본 안현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강하리에게 접근해보고 싶었지만 하도 싫어하는 티를 내는 바람에 겉돌기만 하던 차였다.“강 부장, 오랜만이네요.”강하리는 묵묵부답.“언제 한 번 제가 밥 사도 될까요?”그 한 마디에 강하리는 토가 나올 것 같았다.“아닙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을 것 같네요.”지나가려는 강하리의 앞을 안현우가 막아섰다. 얼굴에는 착잡한 기색이 어려있었다.“전에 일은 미안해요.”강하리에게 관심이 생길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심한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후회막급이었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지금 이 뜬금없는 사과도 강하리에게는 그저 생뚱맞은 지랄으로 보일 뿐이었다.“누구랑 왔어?”안현우를 에돌아 지나가려니 이번에는 구승훈이 팔목을 낚아챘다.“참나, 오지랖이 태평양이세요?”강하리가 구승훈의 손을 뿌리치고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갔다.그리고 정주현의 목소리가 룸 안에서 흘러나왔고.구승훈의 눈이 또 분노로 이글거렸다.좌 주해찬, 우 정주현, 하다하다 이젠 별볼일 없는 안현우까지.셋이 아주 세트로 제 속을 뒤집어놓으려고 작심한 것 같은 기분이다.구승훈의 표정 변화를 안현우는 똑똑히 보았다.‘이거, 강하리 구애가 점점 험난해질 것만 같은데.’쎄하다.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마음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재미 삼아 데리고 다니는 여자인 줄 알았다.냉철한 구 대표가 정부에게 감정을 주는 어리석은 짓은 안 할 줄로만 알았다.지금 와서 보니 어느샌가 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미친듯이 집착하고 있다.그 집착이 얼마나 커졌는지 제 스스로도 모를 만큼.“안 대표님도 강 부장님한테 푹 빠지셨나요? 우리 강 부장님 참, 인기도 많네요. 안 그래요, 오빠?”송유라의 한 마디가 기름이 되어 구승훈의 분노에 뿌려졌다.“너도 강하리한테 대시할 거냐?”영하로 떨어지는 구승훈의 목소리에 안현우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안 될건 없잖아. 강 부장 지금 싱글이니까.”“일찌감치 접어 둬.”말을 마친 구승훈이 밖으로 발길을
”오빠……. 어릴 적 오빠랑 나랑 어촌에서 살던 거 기억나요? 그 때 정말 행복했었는데.”구승훈이 미간을 좁히며 뭐라 하려던 찰나 송유라가 말을 이어갔다.“그거 알아요? 오빠가 떠난 뒤로 나는 오빠만 기다렸어요. 오빠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지만.”송유라가 눈물을 흘렸다.어촌에서의 시간이 구승훈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송유라였다.이 정도는 들먹여 줘야 구승훈에게 통할 거다.아니나 다를까, 구승훈의 얼굴이 살짝 펴지더니, 티슈 한 장을 뽑아 건네주었다.“다신 안 버린다고 했지.”송유라가 뛸 듯이 기뻐지던 다음 순간.“하지만 유라야.”구승훈의 목소리가 다시 서늘해졌다.“앞으로 내 앞에선 알량한 수법 따윈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 나도 참아주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열린 송유라의 입이 어쩔 바를 모른 채 뻐금거렸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꾹 닫혔다.“일찍 들어가서 쉬어.”*강하리가 문 안에 들어서니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놓고 기다리는 정주현이 보였다.그녀를 보자 정주현의 눈이 반짝 빛났다.“착륙하면 연락하라고 했잖아요. 데리러 가겠다고.”“아닙니다. 택시가 편했어요.”“미안해요.”강하리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아셨어요?”정주현이 겸연쩍게 고개를 끄덕였다.“고이선이 거기까지 찾아갈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내가 먼저 하리 씨한테 접근한 거라고 일러뒀으니까 다신 찾아가지 않을 거예요.”정주현의 해명에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그렇다면 고맙네요.”정주현은 얼른 지사 오픈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한편, 프라이빗 룸 앞, 살짝 열린 문틈으로 귀를 쫑긋 세운 한 남자가 있었으니.바로 송유라를 돌려보낸 뒤 몰래 다시 돌아온 구승훈이었다.들리는 게 일 얘기 뿐이라 살짝 안심하고 있던 그 때.“주현 도련님, 죄송하지만 저 연성 지사에 입사하지 못할 것 같아요.”“왜요? 고이선 때문이에요 혹시?”정주현이 멍해졌다가 급급히 물었다.구승훈의 미간에도 다시 주름이 졌다.강하리는 담담한 표정이었
병실 앞에 도착하니 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는 간병인 아줌마가 보였다.“무슨 일이 있은 거예요?”강하리가 미간을 좁혔다. 아줌마의 얼굴에 벌건 손자국까지 나 있었던 것.“아니 글쎼 아가씨 아버님이요. 여태껏 코빼기도 비치질 않다가 잔뜩 취해 나타나서는 다짜고짜 병실에 들어가려고 하지 뭐예요. 그거 막다가 손찌검까지 당하고 결국 밀려났는데, 따라 들어가 보니까 세상에, 호흡기 전원 끄더라니까요. 돈 낭비하느니 빨리 죽는게 낫다고 중얼거리면서요. 의사선생님 불러오니까 그새 사라졌더라고요.”강하리의 얼굴에 찬 서리가 내려앉았다.사라졌던 강찬수 그 인간이 갑자기 나타나서 난동을 부릴 줄은 몰랐다.“미안해요 아줌마.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간병인 아줌마에게 오만원 권 몇 장을 쥐어주자 아줌마가 한사코 거절하면서 몇 마디 당부를 남기고 떠났다.병실에 들어가니 막 검진을 마친 담당 의사가 강하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간병인 아주머니가 제때 불러주셔서 다행히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일은 어머님이나 다른 환자분들에게도 안 좋으니까,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아버님과 잘 소통해주시기 바랍니다.”“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강하리가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의사가 나간 뒤, 강하리는 병상 위 창백한 정서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기억 속 너무나도 예뻤던 엄마의 얼굴이 너무나도 야위어 있었다.강하리는 말없이 한동안 서 있다가 병실을 나섰다.정주현은 저 켠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고, 언제 왔는지 구승훈이 문 옆에 서 있었다.“또 강찬수야?”서늘한 구승훈의 목소리.“네. 다행히도 엄마는 괜찮으세요.”구승훈을 본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강하리가 순순히 대답했다.통화를 마친 정주현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순간, 핸드폰이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여긴 괜찮으니까 두 분 다 들어가 봐요.”“어머님이 괜찮다니까 다행이네요. 저는 진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연락해요, 하리 씨.”정주현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노려보
자신이 알아서 경호원을 다시 보내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여태 이러고 있었는데.이번이 좋은 기회다 싶었다.강하리에게 엄마의 신변 보호는 꼭 필요한 거였으니까.적어도 강찬수를 막을 경호력은 있어야 했다.사실 강하리도 경호원의 필요성을 알고있었다.구승훈에게 손 내밀기가 싫었을 뿐.저 남자한테 진 신세를 갚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너무나도 잘 아니까.“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할께요.”뒤돌아 가려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콱 품 안에 껴안았다.“네가 알아서 한다고? 무슨 수로? 주해찬에게 도와달라고 할거야? 아님 정주현?”뜨거운 기운과 함께 문득, 결에 맞지 않는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구승훈의 향기가 아닌, 여성용 향수 냄새.‘송유라!’구승훈을 확 밀쳐버린 강하리.“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하든 그쪽한텐 손 안 내밀 거니까 제발 좀 꺼져줘요!”구승훈의 얼굴에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지금 네 곁에 있는 남자는 나 뿐인데도? 아직도 널 가장 신경 써주는 게 누군지 모르겠어?”강하리는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나왔다.“우리 엄마 위독하실 때 어디 있었죠? 내가 죽을 뻔할 때는요? 이제 와서 이깟 일로 구차하게 생색 내시는데, 진짜 필요 없거든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다시 병실로 들어가 버렸다.그 자리에 굳어진 구승훈.너무하네. 강하리.어떻게 매번 아픈 데만 쏙쏙 골라 건드리냐.가슴이 바늘에 찔리는 것만 같았다. 터질 것만 같은 것도 아니고 찢어질 듯 고통스럽지도 않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그런 아픔이었다.입가에 맺힌 냉소에 처연함 한 가락이 묻어났다.딩! 디리리딩 딩!승재의 전화였다.“무슨 일이야?”“형! 둘째 형 잡았어!”승재의 다급한 목소리에 구승훈이 번개같이 병원을 튀어나갔다.한편.정서원의 몸을 깨끗이 닦아준 뒤 병실을 나선 강하리는 곧장 강찬수에게 전화했다.“어이쿠, 이게 누구야. 평생 우리 딸내미 전화 한 번 못 받아볼 줄 알았더니만.”빈정이는 말투에 강하리의 관자놀이가 툭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