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부장님, 남자친구분 데리러 오셨어요.”정 실장의 목소리에 협상회를 마치고 서류를 정리하던 강하리가 흠칫했다.회의장 밖에 심플한 정장 차람으로 우월한 기럭지를 자랑하는 주해찬이 보였다.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임원들마다 남자 여자 할것 없이 힐끗거릴 정도.“조 대표님, 죄송하지만 먼저 가 봐야 될 것 같아서요.”강하리가 미안한 얼굴로 조 대표를 돌아보았다.조 대표가 은근슬쩍 구승훈을 돌아보았다.두 사람의 수상한 관계를 알고있는 조 대표였다.딱 봐도 그림이 나왔다. 이윤을 양보할테니 식사자리 마련에 협조 좀 해달라는 은밀한 부탁까지 받은 마당인데.그랬는데. 지금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강 부장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 칼에 거절한다?밖에 남자친구란 사람은 또 뭐고?설마 구 대표님이 여자 뺏긴 건가? 천하에 구 대표가?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구승훈의 속에는 천불이 일어나고 있었다.‘저 낄끼빠빠를 모르는 새X가.’기어코 회의장에 돌아오냐.꺼지라고 좀!“강 부장, 그건 좀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애써 평온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지만.이미 조 대표의 눈은 가십거리를 포착한 파파라치의 그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이윤도 양도받고 구 대표님 연애사도 라이브로 직관하고.이거 이거, 웬 떡이냐.그러다가, 막 회의실에 들어서는 주해찬과 눈이 마주쳤다.‘히익! 주씨 가문 도련님??’조 대표는 삽시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보경시에서 조용하기만 한 주씨 가문이지만.잠잠한 호수가 더 깊듯, 그 실력이 어마어마한 가문이었다.외교부 해찬 도련님 얘기도 익히 들어온 터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뿌리부터 될성부른 다이아 미스터.명문가 위 명문가의 후계자.그런 분이라면 구 대표와의 경쟁구도가 너무나도 합리적이었다.대신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아, 이럴 줄 알았더라면 넙적 받아먹는 게 아닌데.’구승훈의 영향력이야 전국에 퍼져 있다지만.적어도 보경시에서만큼은 주씨 가문에 한 수 접어줘야 했다.그만큼 보경시에서 주씨 가문의
점심식사 약속이 흐지부지 파산되어 버렸다.조 대표는 주해찬이라도 따로 식사 약속을 잡고 싶었지만, 당사자는 별로 생각 없는 눈치였다.같이 회의장을 나서는 세 사람과 그들을 배웅하러 따라나선 조 대표.앞 쪽에서 강하리와 주해찬이 오순도순 국제박람회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구승훈은 그들 뒷쪽에서 청승맞게 담배를 태워대며 따라가고 있었다.“강 부장님이 대표님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만.”앞 쪽 둘을 바라보며 조 대표가 낮은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그러게요. 저도 그런 줄 알았거든요.”구승훈이 냉소를 지었다.정주현을 막았더니 주해찬이 나타나고.산 넘어 산이다.주해찬은 정주현과는 달랐다.정주현 때문에 강하리에게 화가 난 이유는, 정주현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게 더 컸었다.여자를 물 흐르듯 갈아치우는 정주현에게 강하리가 가 봤자, 얼마 못 가 밀려날 게 뻔했으니까.그걸 강하리도 아는 눈치인데도 자꾸 들러붙으니 구승훈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도 했다.하지만 그만큼 두 사람을 떼어놓기가 쉽다는 반증이기도 했다.주해찬은 아니었다. 약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남자였다.외모나 능력, 평판, 어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고.강하리에게 일편단심으로 진지했다.강하리를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무엇보다도, 강하리도 그게 싫은 눈치는 아니었고.성큼성큼, 구승훈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강 부장, 오늘 오후 항공편으로 돌아간다.”강하리가 우뚝 멈춰 구승훈을 돌아보았다.“저 내일 돌아갈 거니까 대표님 먼저 들어가 보시죠.”“오늘은 무슨 일인데?”“이따 저녁에 국제박람회에 가 봐야 해서요.”“그럼 내일 같이 돌아가. 그 국제박람회인가 뭔가 하는 거, 나도 흥미가 좀 생겨서.”“하양이 걱정 마시고, 바쁘실 텐데 먼저 들어가 보시죠.”주해찬이 웃으며 강하리 쪽 차 문을 열어주었다.‘또, 하양이.’구승훈의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강하리를 태운 뒤 운전석에 타려는 주해찬을 향해 냉소를 날렸다.“그러는 해찬 도련님은 꽤
”선배.”“응?”“나 때문에 불편한 자리에 나오느라 애쓰지 마요.”“애쓴 거 아닌데. 네가 간다니까 가고싶어서 그런 거야.”주해찬이 다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하리야. 나는 그저.”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네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싶을 뿐이야. 너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이야.”“선배는 내 과거에 대해 알아요?”강하리가 쓰거운 웃음을 흘렸다.“알고 나면 여태 나한테 해 줬던 게 전부 시간 낭비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걸요.”“과거가 어떻든 나한테는 중요한 게 아냐. 나는 그저 네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고 싶을 뿐이거든. 언제든 네가 돌아서면 닿을 수 있는 곳에서.”강하리가 또 웃었다.그래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들도 있으니까.“내 과거가 선배 앞길을 가로막는 가시 덤불이 될 수도 있단 생각, 안 해보셨어요?”“그 가시 덤불을 헤치고 나가지 못 한다면, 그건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고.”주해찬이 에누리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그리고 하리 너는 점점 더 빛이 날 거야. 언젠가는 이 선배가 다가가기 힘든 높이까지 올라가겠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놔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어느덧 해가 저물었다.외교부를 한 바퀴 빙 둘러본 두 사람은 바로 저녁에 있을 국제박람회 개막식장으로 향했다.저녁 일정이 바쁘게 흘러갔고.개막식을 마치고 간단하게 배를 채운 두 사람이 호텔에 돌아오니 어느덧 밤 열한 시.강하리를 호텔 로비에 데려다 준 주해찬이 돌아서려는 순간.어둑어둑한 저쪽 구석에서 빛나는 빠알간 담뱃불과, 냉랭한 빛을 뿜는 구승훈의 눈길이 시야에 들이닥쳤다.미간을 확 좁힌 주해찬이 다시 강하리의 팔을 잡았다.“하리야, 나 잠시 올라가서 앉았다 가도 돼?”강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해찬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구승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저 여자가! 이 밤중에 외간남자를
”방금 구승훈을 봤어. 또 너한테 집적거릴까 봐 같이 올라온 거야.”엘리베이터 안, 주해찬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방에 녹차 티백이랑 커피밖에 없던데, 밤에 그거 마시면 잠이 안 오지 않을까요?”엉뚱한 강하리의 대답에 주해찬이 멍해졌다가 곧 눈치를 챘다.하양이는 진짜 완전히 구승훈을 놔 줄 생각이구나.“나는 녹차는 괜찮아. 홍차라면 몰라도.”“언제 한 번 차 끓여줄게요 선배. 저 다도 좀 배웠거든요.”“오, 그래? 우리 할아버지께서 요즘 다도에 푹 빠져 계신데, 언제 한 번 소개시켜 줘야겠다.”도란도란 대화를 이어가던 중,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둘이 내렸다.그리고.바로 옆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구승훈과 맞닥뜨렸다.“대표님? 어쩐 일로?”자동반사적으로 찌푸려지는 강하리의 미간.“어, 어젯밤 사건도 있고 해서 여기로 옮겨왔어.”구승훈이 씩 웃으며 강하리의 방 바로 옆 방을 가리킨다.“우리 회사 에이스, 강 부장이 불이익 당하는 건 못 참지.”“네. 고. 맙. 네. 요.”기계적으로 대답한 강하리가 구승훈을 휙 지나쳐, 카드키를 대고 방으로 들어갔다.따라 들어가려는 주해찬을 막아선 구승훈.“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강하리 명예 들먹이시던 분이 이건 좀 아니지.”야유와 경고가 섞인 말에 주해찬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맘껏 말하라지. 지금 저 느낌 아니까.‘잠깐, 어젯밤 사건? 불이익?’“선배, 들어와서 문 닫아요!”날선 목소리와 함께 강하리가 주해찬을 잡아끌었다.쾅!문이 닫혔고, 그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구승훈의 얼굴에 차가운 서리가 피어났다.“저기 손님? 혹시 재떨이 필요하시면-.”찌릿!날카로운 눈길에 다가오던 직원이 줄행랑을 놓았다.방 안.티백을 담은 컵에 더운물을 붓는 강하리를 응시하는 주해찬의 표정이 어둡기만 했다.“하리야, 어젯밤 무슨 일 있었어?”“……고이선이 찾아왔었어요. 잡아먹을 기세로.”주해찬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그런
”어이쿠야! 젊은 총각, 여기서 뭐 혀?”건너편 방에서 나오던 한 아주머니가 기겁한 소리를 내질렀다.방 앞에 우뚝 서 있는 시커먼 인영에 한 번 놀라고, 그림 같은 구승훈의 얼굴에 또 한 번 놀랐다.구승훈이 말 없이 미간만 좁힌다.“여자친구랑 다툰 겨?”알겠다는 표정을 지으시는 아주머니.말을 섞고싶지 않았지만, 여자친구란 말에 저도 모르게 구승훈의 고개가 끄덕여졌다.“여자친구 화 났으믄 어여 사과부터 혀야지, 정승처럼 서 있기만 하면 우짤겨?”“녹록지 않은 애라서요. 여자친구가.”“그럴수록 대차게 밀어붙여야 하는 겨. 여자친구 놓치지 않을라믄.”마침 그때, 강하리의 방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이 방을 나섰다.구승훈에게 핀잔을 주던 아주머니가 황당한 얼굴로 주해찬을 빤히 바라보았다.곧 이어 복잡한 눈길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얼굴은 반반한 총각이 참 안됐구먼.”구승훈을 쫒겨난 세컨드 쯤으로 보는 눈길이었다.“…….”구승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내가 남친이라고! 저 자식이 아니라!”……를 외치기도 전, 아주머니가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조심해서 들어가요, 선배.”고개를 끄덕인 주해찬이 구승훈을 돌아보았다.“구 대표님은 여기서 뭐 하십니까?”“뭐 하면 어쩔 겁니까?”기분이 기분인 만큼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그런 구승훈에게서 불길함을 감지했는지, 주해찬이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도어락 잘 잠그고. 이상한 사람이 문 두드리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 알았지?”그 말에 구승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저게 지금 누구 들으라고.그러건 말건 주해찬은 구승훈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버렸다.“하나만 묻자.”막 방으로 들어가려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막아섰다.“주해찬이 사귀자고 하면 사귈 거야?”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시도는 해보고 싶어요. 평범한 삶이란 걸 살아보고 싶거든요.”구승훈의 가슴 속, 간당간당하던 뭔가가 와장창 깨졌다.순간 나도 너한테 평범한 삶을 살게 해줄 수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하지만 목구
강하리를 본 안현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강하리에게 접근해보고 싶었지만 하도 싫어하는 티를 내는 바람에 겉돌기만 하던 차였다.“강 부장, 오랜만이네요.”강하리는 묵묵부답.“언제 한 번 제가 밥 사도 될까요?”그 한 마디에 강하리는 토가 나올 것 같았다.“아닙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을 것 같네요.”지나가려는 강하리의 앞을 안현우가 막아섰다. 얼굴에는 착잡한 기색이 어려있었다.“전에 일은 미안해요.”강하리에게 관심이 생길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심한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후회막급이었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지금 이 뜬금없는 사과도 강하리에게는 그저 생뚱맞은 지랄으로 보일 뿐이었다.“누구랑 왔어?”안현우를 에돌아 지나가려니 이번에는 구승훈이 팔목을 낚아챘다.“참나, 오지랖이 태평양이세요?”강하리가 구승훈의 손을 뿌리치고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갔다.그리고 정주현의 목소리가 룸 안에서 흘러나왔고.구승훈의 눈이 또 분노로 이글거렸다.좌 주해찬, 우 정주현, 하다하다 이젠 별볼일 없는 안현우까지.셋이 아주 세트로 제 속을 뒤집어놓으려고 작심한 것 같은 기분이다.구승훈의 표정 변화를 안현우는 똑똑히 보았다.‘이거, 강하리 구애가 점점 험난해질 것만 같은데.’쎄하다.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마음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재미 삼아 데리고 다니는 여자인 줄 알았다.냉철한 구 대표가 정부에게 감정을 주는 어리석은 짓은 안 할 줄로만 알았다.지금 와서 보니 어느샌가 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미친듯이 집착하고 있다.그 집착이 얼마나 커졌는지 제 스스로도 모를 만큼.“안 대표님도 강 부장님한테 푹 빠지셨나요? 우리 강 부장님 참, 인기도 많네요. 안 그래요, 오빠?”송유라의 한 마디가 기름이 되어 구승훈의 분노에 뿌려졌다.“너도 강하리한테 대시할 거냐?”영하로 떨어지는 구승훈의 목소리에 안현우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안 될건 없잖아. 강 부장 지금 싱글이니까.”“일찌감치 접어 둬.”말을 마친 구승훈이 밖으로 발길을
”오빠……. 어릴 적 오빠랑 나랑 어촌에서 살던 거 기억나요? 그 때 정말 행복했었는데.”구승훈이 미간을 좁히며 뭐라 하려던 찰나 송유라가 말을 이어갔다.“그거 알아요? 오빠가 떠난 뒤로 나는 오빠만 기다렸어요. 오빠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지만.”송유라가 눈물을 흘렸다.어촌에서의 시간이 구승훈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송유라였다.이 정도는 들먹여 줘야 구승훈에게 통할 거다.아니나 다를까, 구승훈의 얼굴이 살짝 펴지더니, 티슈 한 장을 뽑아 건네주었다.“다신 안 버린다고 했지.”송유라가 뛸 듯이 기뻐지던 다음 순간.“하지만 유라야.”구승훈의 목소리가 다시 서늘해졌다.“앞으로 내 앞에선 알량한 수법 따윈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 나도 참아주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열린 송유라의 입이 어쩔 바를 모른 채 뻐금거렸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꾹 닫혔다.“일찍 들어가서 쉬어.”*강하리가 문 안에 들어서니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놓고 기다리는 정주현이 보였다.그녀를 보자 정주현의 눈이 반짝 빛났다.“착륙하면 연락하라고 했잖아요. 데리러 가겠다고.”“아닙니다. 택시가 편했어요.”“미안해요.”강하리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아셨어요?”정주현이 겸연쩍게 고개를 끄덕였다.“고이선이 거기까지 찾아갈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내가 먼저 하리 씨한테 접근한 거라고 일러뒀으니까 다신 찾아가지 않을 거예요.”정주현의 해명에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그렇다면 고맙네요.”정주현은 얼른 지사 오픈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한편, 프라이빗 룸 앞, 살짝 열린 문틈으로 귀를 쫑긋 세운 한 남자가 있었으니.바로 송유라를 돌려보낸 뒤 몰래 다시 돌아온 구승훈이었다.들리는 게 일 얘기 뿐이라 살짝 안심하고 있던 그 때.“주현 도련님, 죄송하지만 저 연성 지사에 입사하지 못할 것 같아요.”“왜요? 고이선 때문이에요 혹시?”정주현이 멍해졌다가 급급히 물었다.구승훈의 미간에도 다시 주름이 졌다.강하리는 담담한 표정이었
병실 앞에 도착하니 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는 간병인 아줌마가 보였다.“무슨 일이 있은 거예요?”강하리가 미간을 좁혔다. 아줌마의 얼굴에 벌건 손자국까지 나 있었던 것.“아니 글쎼 아가씨 아버님이요. 여태껏 코빼기도 비치질 않다가 잔뜩 취해 나타나서는 다짜고짜 병실에 들어가려고 하지 뭐예요. 그거 막다가 손찌검까지 당하고 결국 밀려났는데, 따라 들어가 보니까 세상에, 호흡기 전원 끄더라니까요. 돈 낭비하느니 빨리 죽는게 낫다고 중얼거리면서요. 의사선생님 불러오니까 그새 사라졌더라고요.”강하리의 얼굴에 찬 서리가 내려앉았다.사라졌던 강찬수 그 인간이 갑자기 나타나서 난동을 부릴 줄은 몰랐다.“미안해요 아줌마.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간병인 아줌마에게 오만원 권 몇 장을 쥐어주자 아줌마가 한사코 거절하면서 몇 마디 당부를 남기고 떠났다.병실에 들어가니 막 검진을 마친 담당 의사가 강하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간병인 아주머니가 제때 불러주셔서 다행히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일은 어머님이나 다른 환자분들에게도 안 좋으니까,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아버님과 잘 소통해주시기 바랍니다.”“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강하리가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의사가 나간 뒤, 강하리는 병상 위 창백한 정서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기억 속 너무나도 예뻤던 엄마의 얼굴이 너무나도 야위어 있었다.강하리는 말없이 한동안 서 있다가 병실을 나섰다.정주현은 저 켠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고, 언제 왔는지 구승훈이 문 옆에 서 있었다.“또 강찬수야?”서늘한 구승훈의 목소리.“네. 다행히도 엄마는 괜찮으세요.”구승훈을 본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강하리가 순순히 대답했다.통화를 마친 정주현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순간, 핸드폰이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여긴 괜찮으니까 두 분 다 들어가 봐요.”“어머님이 괜찮다니까 다행이네요. 저는 진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연락해요, 하리 씨.”정주현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노려보
여명주가 반박하려는 순간 강하리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작업실의 주인인 천아름이었다.천아름은 짙은 눈동자와 붉은 입술 크고 우아한 웨이브 헤어 거기에 하이힐까지 착용하고 있었다.강하리 옆에 멈춰 선 천아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 오랜만이에요.”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이 마주한 건 단 한 번뿐이었다.그때 경매장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에비뉴를 인수하고 나서야 강하리는 그 두 개의 약혼반지가 사실 천아름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에비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을 뿐이었다.천아름은 조용히 강하리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여전히 마음에 드세요?”강하리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감사합니다.”천아름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반지가 예쁜 게 아니라 사실은 당신의 손이 예쁜 거예요. 구승훈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그 순간 손연지가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구승훈 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하리를 사로잡을 수 있었겠어요?”천아름은 손연지를 향해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했다.“역시 미녀끼리는 생각도 비슷하네요.”셋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여명주는 그들 사이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서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이건 대놓고 날 무시하는 거잖아.’“천아름 씨, 이게 무슨 뜻이죠?”천아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아직도 못 알아들었어요? 여명주 씨 B시에서는 당신네 가문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면 노민우 씨를 붙잡아다 가문 재정을 끊고 강제로 결혼이라도 시키시지 그러세요? 그런데 왜...”천아름은 옆에 있던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쁜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소연지입니다.”“아. 맞아요. 소연지
강하리는 안에서 밖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은 그 모습을 보며 저절로 입꼬리를 올렸다.“떠나기 아쉽네.”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노민준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지만 구승훈이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정 안 되겠으면 강하리 씨에게 솔직하게 말해. 그러면 강하리 씨도 기꺼이 너와 함께 돌아갈 거야. 그리고 계속 숨기기만 하면 강하리 씨도 불편할 거잖아?”구승훈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그는 작업실 안에서 웃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았다.노민준은 더 할 말이 없었고 그때 서야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승훈, 손연지 씨 지금 어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궁금해?”노민우는 급히 두 번 응답했다.“그러면 직접 와서 보면 되잖아?”“손연지 씨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구승훈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그때 내가 나가라고 했을 때는 왜 안 나갔어?”노민우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그것도 그렇네.”구승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준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희주를 철저히 조사해 줘.]강하리는 마침내 손연지에게 어울리는 주얼리를 골랐다.손연지는 몸에 맞춰보며 환하게 웃었지만 강하리는 그 웃음이 예전처럼 맑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꼈다.감정의 상처는 결국 스스로 치유해야 했고 강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연지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주얼리를 고른 뒤 강하리는 손연지와 함께 의류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곧 결혼식인데 다른 건 안 고를 거야?”손연지가 물었다.강하리는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구승훈이 몇 벌 주문해 놨고 또 에비뉴에서 우리 결혼식에 맞는 주얼리 세트를 준비해 줬어.”손연지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놈의 자본주의.”강하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두 사람은 웃으며 의류
구승훈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왜 갑자기 왔어?”강하리는 구승훈을 째려보며 말했다.“안 오면 당신이 예쁜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못 볼 거 아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질투나?”“아니.”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에는 질투의 냄새를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실제로 구승훈과 임희주 사이에 아무 일이 있을 거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그저... 다른 여자가 어떤 면에서 그녀의 남편을 더 잘 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잡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어쩌지?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침대에 묶어 두는 건 어때? 복수의 기회를 줄게.”강하리는 질색을 하며 손을 빼냈다.“염치를 좀 챙겨.”구승훈은 웃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휴대폰이 옷 속에서 가볍게 진동했지만 그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눈빛이 깊어졌다.마침내 강하리는 차를 개인 작업실 앞에 세웠고 구승훈이 주문한 주얼리를 오늘 착용해 보려고 했다.마침 이틀 후 손연지의 생일이었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휴식 중인 틈을 타 그녀를 불러냈다.강하리가 차에서 내리자 손연지는 작업실의 큰 창문 앞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녀는 강하리를 보고서야 마치 살아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손연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손연지 씨, 이렇게 한가해요?”손연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강하리를 따라 들어가자 직원이 다가왔다.“구승훈 씨, 주문하신 주얼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구승훈은 대답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고 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나서 직원에게 말했다.“주얼리는 내 아내에게 전달하세요.”그러고는 강하리를 향해 말했다.“전화 받고 올게. 주얼리 먼저 착용해 보고 안 맞으면 다시 수정해 달라고 하면 돼.”강하리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흘끗 보았는데 화면에 나타난 이름은 노민준이었다.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손
‘심리 의사들은 원래 이렇게 강한 심장을 가진 걸까 아니면 이 임 선생이 유독 뻔뻔한 걸까? 만약 이 사람이 노민준 씨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대표님은 진작 화를 냈을지도 몰라.’하지만 임희주는 분위기를 살피고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바로 다른 치료 방안을 구승훈에게 설명했다.“간단히 말하면 이전 치료 방안은 증상을 억제하는 방식이었어요. 예를 들어 노민준 씨가 처방한 약들도 증상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죠. 하지만 이런 억제는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해 약효가 떨어지면 증상이 더 심해질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억제보다는 근본적인 해소를 목표로 하는 방향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약효를 완전히 끌어낸 뒤 점차 증상을 약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물론 한 번에 모든 약효를 없애는 건 아니고 몸과 신경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이 방법은 다소 위험할 수도 있어요. 구승훈 씨가 신중히 고민한 후 결정하시면 좋겠습니다.”임희주가 말을 마치자 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준봉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이 방법을 선택하면 어떤 위험이 따를까요?”임희주는 커피를 천천히 저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약효를 모두 끌어낼 경우 증상이 얼마나 심각해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렇기에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준봉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반면 구승훈은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구승훈이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방안을 만든 사람이 누구죠? 노민준인가요?”임희주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제가 만든 방안이지만 노민준 씨와도 논의했습니다. 그는 이 방법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어요.”구승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생각해 보겠습니다.”임희주는 한 발짝 다가서며 덧붙였다.“빠른 답변 부탁드려요.”구승훈은 대답 없이 조용히 카페
구동근은 방에서 밤새 소란을 피운 끝에 다음 날 아침 병원으로 실려 갔다.그는 병원에 가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만 도착한 후에도 구승훈의 철저한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휴대폰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그가 난동을 부린 탓에 병실은 엉망이었지만 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직도 부수고 있네요? 그럼 내가 잠깐 밖에서 기다렸다 들어올까요?”구동근은 화가 나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이미 말했잖아. 여초연 씨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구승훈은 대꾸하지 않은 채 보온병에서 밥을 퍼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건가요?”구동근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확실히 몰라. 여초연 씨가 떠날 때 난 보내주기로 약속했고 그 이후로 여초연 씨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어. 물론 나중에 행방을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얻은 단서는 거의 없었고 여초연 씨는 아마도 M국에 있을 거야. 그 팔찌는 어제 아침 하인이 집 앞에서 발견한 거야. 안에는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고 여초연 씨의 필체로 ‘너희 부인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어.”말을 마친 구동근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여초연 씨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결국 내가 여초연 씨에게 휘둘리고 있었더라고. 만약 그때 여초연 씨가 너에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넌 여전히 나를 미워하고 있었을까?”구동근은 말을 마친 뒤 묵묵히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때 너희가 여초연 씨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여초연 씨가 나에게 그렇게 했을까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죠. 결국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밖으로 나온 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 속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그가 조롱하는 대상이 다른 사
강하리는 구승훈이 그 팔찌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아마 그 감정 속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이 시점에서 여초연이 팔찌를 보내는 것은 분명 도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구승훈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느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내가 안아줄까?”구승훈은 억지로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그럼 강 부장님은 어떻게 나를 위로할 생각이에요?”강하리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키스해 주고 안아주고 오빠라고 불러주면서 달래주면 되지 않을까?”구승훈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고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그는 빗속을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그때 그는 매우 슬펐고 심지어… 죽고 싶다고 느꼈다.구승훈이 강가에 서서 몸을 던지려는 순간 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구승훈 오빠.”그가 돌아보자 한 어린 소녀가 비를 맞으며 구승훈에게 달려와 작은 분홍색 우산을 그의 손에 건네며 말했다.“구승훈 오빠, 슬퍼하지 말아요.”그 말이 끝나자 그녀는 젖은 옷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비가 내리는 중에 힘겹게 사탕 포장을 뜯고 그에게 사탕을 건네주었다.“달콤한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빗속에서 소녀는 반달처럼 꺾인 눈으로 웃으며 물었다.“달콤해요?”구승훈은 그때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저 그 장면이 떠오르자 가슴속에 있던 서글픈 감정이 점차 따뜻하게 변해갔다.그의 어린 시절은 아마도 온통 계산과 속임수로 가득했을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의 마음에 조금의 사랑도 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잊힌 구석에서 어린 시절의 달콤함을 맛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그것은 구승훈의 삶에 존재한 빛과 같았고 아주 달콤했다.강하리는 구승훈이 말하지 않자 여전히 그가 마음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그녀의
구동근은 갑자기 침묵하더니 지팡이를 짚고 다소 힘겹게 걸으며 창문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를 부축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지만 피우지 않고 손에 쥔 채 시선을 내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구동근은 말없이 창가에 서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다그치지 않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구동근이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창밖으로 보이는 아래층 정원에서 기사가 가정부와 연정이를 데려다주었다.연정이는 진태형이 얼마 전 사준 작은 패딩에 토끼 목도리를 두르고 곱슬곱슬한 머리에 예쁜 머리핀 두 개를 하자 작고 하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인형처럼 귀여웠다.차에서 내려와 강하리를 보자마자 아이는 신이 나서 가정부가 내려주기 바쁘게 뒤뚱거리며 강하리를 향해 달려가면서 깔깔 웃었다.강하리가 다가가 연정이를 안고 볼에 입 맞추었다. 정원의 조명은 그리 밝지 않았지만 이 장면은 유난히 선명하게 구동근의 눈에 각인되었다.희미한 눈동자에 잠시 복잡한 감정이 섬광처럼 번쩍이다가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그가 말을 꺼냈다.“솔직히 나도 어디 있는지 몰라.”구승훈은 그의 대답에 놀라지 않은 듯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요. 난 기다릴 수 있어요. 아시게 됐을 때 다시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구승훈은 뒤돌아 문을 나섰고 단호한 발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구동근은 순간 불안한 마음에 주름진 노인의 얼굴엔 금세 화난 기색이 돌았다.“이 자식, 무슨 뜻이야? 날 가두는 거야?”구승훈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고개를 돌려 소위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상대를 바라보았다.“그럴 리가요. 할아버지 안위가 걱정돼서요. 오늘 피까지 토하셨는데 제가 잘 챙겨드려야죠.”“이놈 자식이!”구동근이 지팡이를 내리쳤지만 구승훈은 이미 문을 닫고 나간 뒤 문 앞에 있던 사람에게 잘 지켜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방을 나선 구승훈은 혼자 3층 테라스로 올라갔다.저녁 바람은
구동근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이 장면을 지켜보던 구민성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화가 났다.“구승훈! 할아버지에게 강요해서 무덤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이젠 억지로 결혼까지 밀어붙여? 우린 다 앞 못 보는 장님인 줄 알아? 네가 오늘 할아버지를 강요해 결혼을 진행해도 우린 인정하지 않아!”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고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할아버지, 제가 강요했어요?”구동근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손자 하나는 참 잘 키웠다.구승훈을 노려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구씨 가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결혼 허락받으러 온 거야. 심씨 가문에서 동의하면 앞으로 강하리는 구씨 가문의 당당한 며느리가 될 거야.”구동근의 말이 떨어지자 구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한 겹 내려앉은 듯 어두운 표정이 역력했다.“아버지, 미쳤어요?” 구민성이 성큼성큼 다가왔지만 구동근은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는 한숨을 쉬며 거실로 들어서면서 마음속으로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뭐라고 해도 반대하지 말았을걸. 그러면 이 지경으로 되지도 않았고 구씨 가문도 망하지 않았을 텐데.구동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백아영을 바라보았다.백아영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구동근의 체면을 생각해 별다른 거친 말을 하지 않았다.구동근 역시 빙빙 돌리지 않고 자리에 앉은 뒤 곧장 입을 열었다.결혼 허락은 물론 예물까지 전부 준비할 생각이었다.SH그룹은 무너졌지만 구동근은 여전히 많은 개인 재산을 가지고 있고 그중 일부는 구승훈의 예비 신부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선물이다. 연성 중심가에 있는 사무 빌딩, 그리고...원래 여초연의 손에 있던 팔찌까지.“승훈이 엄마가 며느리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보낸 겁니다.”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고 말을 마친 구동근은 강하리에게 팔찌를 건넸다.하지만 강하리는 팔찌를 받을 생각이
강하리의 말에 진시연은 물론 이정숙도 당황했고 곧바로 이정숙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강하리, 주제넘게 굴지 마!”강하리가 웃었다.“앞으로 저한테 잘해준다는 게 이런 건가요?”이정숙의 말문이 막히자 진시연이 곧장 입을 열었다.“난 무릎은 꿇을 수 있지만 할머니는 그냥 두면 안 될까요? 연세가 있고 그쪽 할머니인데 아무리 그래도 어른은 존중해야죠.”또다시 강하리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는 말에 강하리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아주머니, 손님 내보내세요.”오영숙이 서둘러 달려왔다.“어르신, 진시연 씨, 나가시죠.”오영숙이 말을 마치자 진시연은 이를 악문 채 정말로 무릎을 꿇었다.“시연아!”소리를 지르며 이정숙은 진시연을 끌어당기려 했고 진시연의 몸도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앞으로 다시는 건드리거나 성가신 일 만들지 않을게요. 강하리 씨,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강하리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진시연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난 후 이렇게 말했다.“꺼져요. 앞으로 나랑 내 가족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고.”진시연은 나지막이 고맙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이정숙과 함께 떠났고 거실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구씨 가문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들 눈에 강하리는 줄곧 만만하고 연약한 상대였다.그게 아니면 구승훈이 아니라 바로 강하리의 회사로 찾아가지도 않았을 거다.그런데 지금 보니 구승훈이 만나는 여자가 진태형의 양딸과 어머니도 몰아붙일 만큼 독한 사람이고 거실에 있는 심씨 가문 사람 중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구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복잡한 표정이었고 구동근은 더더욱 그러했다.그는 강하리가 구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늘 생각해 왔다.출신이 비천한 데다 안주인이 될 만한 자질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겼다.시골 출신인 계집이 성격도 연약하고 소심해서 훌륭한 안주인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의 섣부른 판단이었다.거실에서 심준호는 눈썹을 치켜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