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구승훈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얌전하던 고양이가 한 순간 살쾡이로 변할 수도 있단 말인가?“당장 꺼지라고! 귀 먹었어?”환청이 아니다. 살쾡이가 날카롭게 하악질을 하며 이빨을 드러낸다.이빨을 꽉 악다문 강하리가 눈가에 독기가 어린 채, 잇새로 다시 한 번 내뱉었다.그동안의 고통과 울분이, 찢겨져 너덜너덜한 가슴에서 맹렬히 폭발하는 순간이었다.더이상 참는 건 의미가 없었다.사실 애초부터 송유라와 관련된 일로 재협상을 시도할 필요조차 없었다.그냥 구승훈의 반응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정도.어쨌거나 송유라 편일 테니까.뭘 하든 그건 변하지 않으니까.몇 번이고 자신은 버려졌고, 이 남자는 송유라한테 가 있었으니까.지금도 이 남자는 내가 여태 받은 고통 따윈 안중에도 없으니까. 근본적으로 이 남자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구승훈의 눈이 사납게 번득였다.“너 지금 뭐라고?”경악으로 물들었던 눈동자에 분노가 차올랐다.“맞아죽을 뻔한 걸 구해 줬더니 이게 어따 대고 소리를!”차가운 그 한 마디가 폭주하던 강하리의 이성 한 조각을 건드렸다.“보답하겠다 그랬지.”강하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그 보답이란 거, 지금 당장 받아내야겠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목소리의 냉랭함 따윈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그 역시 끓어오른 가슴속 뭔가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정주현과 주해찬과 있을 때는 잘도 헤실거리다가 나한테만 못되게 군다 이거지?“몸으로 때워.”“?”강하리가 움찔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하지만 구승훈의 진지한 표정을 보는 순간 직감했다.‘나왔다. 또라이 전술.’“미치려면 좀 곱게 미치든가.”거침없이 악담을 뿜어내는 강하리를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하는 구승훈.“섹스 마려워? 출장마사지라도 불러 줘?”“너가 마려워. 강하리 너가.”어쩔 새도 없이, 남자의 뜨겁고 거친 숨결이 강하리를 덮쳤다.“야 이 미친 새-.”뒷말은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온 남자의 입술이 막아버렸다.강하리의 반항은 가볍게 힘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벼락처럼 구승훈의 귀에 꽂혔다.구승훈이 감전이라도 된 듯 움찔했다. 정수리까지 치밀었던 화와 욕정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강하리를 꽉 잡았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눈가에 고통스런 빛이 스쳐지났다.날 선 비수가 가슴을 긋고 지나간 기분이었다.그 사건 이후 강하리가 언급한 건 처음이었다.그래서 그냥 그대로 지나간 줄로만 알았다.입에 담지 않으면 천천히 나아지겠지.시간이 어루쓸다 보면 아물겠지.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시간이 지날수록 아물기는 커녕, 점점 더 깊어지기만 한 상처였다.강하리한테도, 자신한테도.살짝만 건드려도 쫙 갈라져, 두 사람을 갈라놓는 깊은 골짜기로 변해버렸다.구승훈의 울대뼈가 아래위로 요동쳤다.비틀비틀 뒤로 두 발작 물러났다.강하리가 지금 이 일을 다시 꺼낸 의도는 분명했다.이 상처 보이냐고.나 지금 이런 상태니까, 제발 건드리지 말라고.철저하게 선을 긋고 있는 거였다.“아플 거 뻔히 알면서, 그런데도 굳이 헤집어서 나를 밀어내는 거야?”구승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강하리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안 그러면 더 아플 거니까.”어느덧 강하리의 목소리와 눈빛은 깊은 호수처럼 잔잔해져 있었다.그만큼 차갑기도 했다.“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언젠가는 지나갈 거예요. 앞으로의 시간에 비하면 3년은 아무것도 아닐 거니까. 대표님이나 나나 아직 젊잖아요.”“그러니까, 더이상 피차 상처 내면서 엉켜있지 말자구요. 네?”담담한 강하리의 눈빛과 마주하는 구승훈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차올랐다.‘자존심 따위에 이러는 거 아니라고!’라고 외치고 싶었다.하지만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켰다.자존심이 아니면?사랑?X랄.어렸을 적부터 알았다.사랑, 결혼 따위는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것이란 걸.“그러니까 내가 뭘 하든, 우리 둘은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는 거네?”“네.”외마디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모든 소리가 사라진 방 안.
모락 모락.파아란 연기가 허공에 감돌다가 흩어진다.그 아래에는 어두운 얼굴의 구승훈이 있었다.그가 서 있는 곳은 강하리의 방 앞 복도.‘처음 해 본 생각이지만, 저거 부럽네. ’금방 풀려 흩어지는 저 연기처럼 강하리를 향한 마음도 풀렸으면.딱딱하게 응어리가 진 그게 뭔지는 확실하진 않았다.확실한 건, 강하리를 이대로 포기하는 게 아직도 안 된다는 거였다.둘이 시작한 일인데, 혼자만 그 자리에 갇혀 지지부진하는 것만 같은 기분.강하리의 마음이 자신에게 머무른 적이 있단 건 확실했다.뭐든 들어줬고 뭐든 받아줬었다.그런데 지금 혼자만 쏙 빠지려고 한다.‘여태껏 길들여 놓고 버리는 건 좀 너무하잖아.’이래서 습관이 무섭다고 하는 거였구나 싶었다.연기는 오랫동안 구승훈을 감돌았다.줄담배를 태운 탓이었다.지나가던 사람들이 코를 싸쥐며 미간을 찌푸리건 말건.바닥에 쌓여가는 담배 꽁초에 보다 못한 직원이 재떨이를 가져올 때에도.한 대, 또 한 대, 끝낼 줄 모르고 씁쓸함을 태웠다.그러다가 날이 희끄무레 밝아올 무렵, 접근하는 사람이 없단 걸 확인하고서야 자리를 떴다.호텔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승훈의 핸드폰이 울렸다.딩! 디리리리딩 딩!액정에 송유라가 떴다.“오빠, 언제 돌아와요? 나 곧 수술인데.”“걱정 마. 수술 전에는 돌아갈 거니까.”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구승훈이 대꾸했다.“진짜?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빠!”막 통화를 마치고 고개를 든 순간, 저만치에서 음식 포장을 들고 호텔에 들어가는 주해찬이 보였다.또 가슴이 답답해났지만, 애써 눌러 내렸다.뭐, 어때. 아침밥 갖다주는 것 뿐인데.택시를 잡고 호텔로 돌아간 구승훈은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바로 회의장으로 향했다.……주해찬이 방에 들어섰을 때 강하리는 막 외출 준비를 하던 차였다.음식 포장을 벗기자 짠 나타나는 불고기 밥버거에 강하리가 환호성을 질렀다.“선배는 내 학창시절 식습관을 어디 적어라도 놓은 거예요? 이 아침에 밥버거는 어디서
강하리는 대답이 없었다. 입만 벙긋하면 이 남자가 또 화르륵 타오를 거니까.하지만 구승훈은 할 말이 남은 모양.“아침밥 맛있었어?”“네. 대표님은 아침 뭐 드셨어요?”엉겁결에 강하리가 대답하고 보니, 구승훈이 썩은 표정이다.내가 밥이 넘어갈 것처럼 보여? 라고 말해주는 듯한.아차 싶었다.“강 부장은 참 순진한 여자야. 고작 아침밥 한 끼에 좋아죽는 걸 보면.”더 한층 시큼텁텁해진 구승훈의 말투.누군 3년 간의 감정을 갈무리하느라 죽을 맛인데.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지금부터 구승훈의 업무 관련 외 질문은 사절하기로 했다.그때 마침 마중나온 부드러운 인상의 협력사 비서실장.“구 대표님, 강 부장님, 오셨어요?”비서실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강하리가 웃으며 대답하자, 비서실장이 친근하게 그녀의 곁에 다가갔다.“처음 뵐 때부터 느낀 건데, 우리 강 부장님은 어쩜 이리도 예쁘실까. 방금 남자친구분 차에서 내릴 때 아침햇살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 남자친구가 아니고 그냥 친구예요.”평소에 서류를 주고받으며 가끔씩 수다도 떤 친분이 있는 비서실장의 너스레에 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암요! 남자친구였다면 이마 쓱으로 끝나지 않으셨겠죠. 잘 생기신 분이 어쩜 그리 스윗하기까지 하실까. 우리 강 부장님한테 너무 잘 어울리지 뭐예요.”옆 구승훈이 썩소를 지었다.어울리긴 개뿔!비서실장, 사람 보는 눈이 동태 눈깔이었네. 그렇게 안 봤는데.강하리는 그런 스타일 안 좋아한다고.사실 강하리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는 미스터리지만.여태껏 자신이 강하리 스타일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지금은 영 모르겠다.저렇게나 매정하게 자신을 버리는 걸 보면.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나고 기분이 언짢아졌다.그게 강하리에게 고스란히 보였다.또, 또 시작이다. 또!“정 실장님, 진짜 그런 사이 아니에요.”다시 한 번 정정했지만.“압니다. ‘아직은’ 아닌 거죠.”비서실장, 정은숙이 눈까지 찡긋한다.이거야 원, 해명할수록 역효
”강 부장님, 남자친구분 데리러 오셨어요.”정 실장의 목소리에 협상회를 마치고 서류를 정리하던 강하리가 흠칫했다.회의장 밖에 심플한 정장 차람으로 우월한 기럭지를 자랑하는 주해찬이 보였다.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임원들마다 남자 여자 할것 없이 힐끗거릴 정도.“조 대표님, 죄송하지만 먼저 가 봐야 될 것 같아서요.”강하리가 미안한 얼굴로 조 대표를 돌아보았다.조 대표가 은근슬쩍 구승훈을 돌아보았다.두 사람의 수상한 관계를 알고있는 조 대표였다.딱 봐도 그림이 나왔다. 이윤을 양보할테니 식사자리 마련에 협조 좀 해달라는 은밀한 부탁까지 받은 마당인데.그랬는데. 지금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강 부장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 칼에 거절한다?밖에 남자친구란 사람은 또 뭐고?설마 구 대표님이 여자 뺏긴 건가? 천하에 구 대표가?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구승훈의 속에는 천불이 일어나고 있었다.‘저 낄끼빠빠를 모르는 새X가.’기어코 회의장에 돌아오냐.꺼지라고 좀!“강 부장, 그건 좀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애써 평온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지만.이미 조 대표의 눈은 가십거리를 포착한 파파라치의 그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이윤도 양도받고 구 대표님 연애사도 라이브로 직관하고.이거 이거, 웬 떡이냐.그러다가, 막 회의실에 들어서는 주해찬과 눈이 마주쳤다.‘히익! 주씨 가문 도련님??’조 대표는 삽시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보경시에서 조용하기만 한 주씨 가문이지만.잠잠한 호수가 더 깊듯, 그 실력이 어마어마한 가문이었다.외교부 해찬 도련님 얘기도 익히 들어온 터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뿌리부터 될성부른 다이아 미스터.명문가 위 명문가의 후계자.그런 분이라면 구 대표와의 경쟁구도가 너무나도 합리적이었다.대신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아, 이럴 줄 알았더라면 넙적 받아먹는 게 아닌데.’구승훈의 영향력이야 전국에 퍼져 있다지만.적어도 보경시에서만큼은 주씨 가문에 한 수 접어줘야 했다.그만큼 보경시에서 주씨 가문의
점심식사 약속이 흐지부지 파산되어 버렸다.조 대표는 주해찬이라도 따로 식사 약속을 잡고 싶었지만, 당사자는 별로 생각 없는 눈치였다.같이 회의장을 나서는 세 사람과 그들을 배웅하러 따라나선 조 대표.앞 쪽에서 강하리와 주해찬이 오순도순 국제박람회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구승훈은 그들 뒷쪽에서 청승맞게 담배를 태워대며 따라가고 있었다.“강 부장님이 대표님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만.”앞 쪽 둘을 바라보며 조 대표가 낮은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그러게요. 저도 그런 줄 알았거든요.”구승훈이 냉소를 지었다.정주현을 막았더니 주해찬이 나타나고.산 넘어 산이다.주해찬은 정주현과는 달랐다.정주현 때문에 강하리에게 화가 난 이유는, 정주현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게 더 컸었다.여자를 물 흐르듯 갈아치우는 정주현에게 강하리가 가 봤자, 얼마 못 가 밀려날 게 뻔했으니까.그걸 강하리도 아는 눈치인데도 자꾸 들러붙으니 구승훈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도 했다.하지만 그만큼 두 사람을 떼어놓기가 쉽다는 반증이기도 했다.주해찬은 아니었다. 약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남자였다.외모나 능력, 평판, 어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고.강하리에게 일편단심으로 진지했다.강하리를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무엇보다도, 강하리도 그게 싫은 눈치는 아니었고.성큼성큼, 구승훈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강 부장, 오늘 오후 항공편으로 돌아간다.”강하리가 우뚝 멈춰 구승훈을 돌아보았다.“저 내일 돌아갈 거니까 대표님 먼저 들어가 보시죠.”“오늘은 무슨 일인데?”“이따 저녁에 국제박람회에 가 봐야 해서요.”“그럼 내일 같이 돌아가. 그 국제박람회인가 뭔가 하는 거, 나도 흥미가 좀 생겨서.”“하양이 걱정 마시고, 바쁘실 텐데 먼저 들어가 보시죠.”주해찬이 웃으며 강하리 쪽 차 문을 열어주었다.‘또, 하양이.’구승훈의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강하리를 태운 뒤 운전석에 타려는 주해찬을 향해 냉소를 날렸다.“그러는 해찬 도련님은 꽤
”선배.”“응?”“나 때문에 불편한 자리에 나오느라 애쓰지 마요.”“애쓴 거 아닌데. 네가 간다니까 가고싶어서 그런 거야.”주해찬이 다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하리야. 나는 그저.”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네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싶을 뿐이야. 너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이야.”“선배는 내 과거에 대해 알아요?”강하리가 쓰거운 웃음을 흘렸다.“알고 나면 여태 나한테 해 줬던 게 전부 시간 낭비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걸요.”“과거가 어떻든 나한테는 중요한 게 아냐. 나는 그저 네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고 싶을 뿐이거든. 언제든 네가 돌아서면 닿을 수 있는 곳에서.”강하리가 또 웃었다.그래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들도 있으니까.“내 과거가 선배 앞길을 가로막는 가시 덤불이 될 수도 있단 생각, 안 해보셨어요?”“그 가시 덤불을 헤치고 나가지 못 한다면, 그건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고.”주해찬이 에누리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그리고 하리 너는 점점 더 빛이 날 거야. 언젠가는 이 선배가 다가가기 힘든 높이까지 올라가겠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놔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어느덧 해가 저물었다.외교부를 한 바퀴 빙 둘러본 두 사람은 바로 저녁에 있을 국제박람회 개막식장으로 향했다.저녁 일정이 바쁘게 흘러갔고.개막식을 마치고 간단하게 배를 채운 두 사람이 호텔에 돌아오니 어느덧 밤 열한 시.강하리를 호텔 로비에 데려다 준 주해찬이 돌아서려는 순간.어둑어둑한 저쪽 구석에서 빛나는 빠알간 담뱃불과, 냉랭한 빛을 뿜는 구승훈의 눈길이 시야에 들이닥쳤다.미간을 확 좁힌 주해찬이 다시 강하리의 팔을 잡았다.“하리야, 나 잠시 올라가서 앉았다 가도 돼?”강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해찬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구승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저 여자가! 이 밤중에 외간남자를
”방금 구승훈을 봤어. 또 너한테 집적거릴까 봐 같이 올라온 거야.”엘리베이터 안, 주해찬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방에 녹차 티백이랑 커피밖에 없던데, 밤에 그거 마시면 잠이 안 오지 않을까요?”엉뚱한 강하리의 대답에 주해찬이 멍해졌다가 곧 눈치를 챘다.하양이는 진짜 완전히 구승훈을 놔 줄 생각이구나.“나는 녹차는 괜찮아. 홍차라면 몰라도.”“언제 한 번 차 끓여줄게요 선배. 저 다도 좀 배웠거든요.”“오, 그래? 우리 할아버지께서 요즘 다도에 푹 빠져 계신데, 언제 한 번 소개시켜 줘야겠다.”도란도란 대화를 이어가던 중,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둘이 내렸다.그리고.바로 옆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구승훈과 맞닥뜨렸다.“대표님? 어쩐 일로?”자동반사적으로 찌푸려지는 강하리의 미간.“어, 어젯밤 사건도 있고 해서 여기로 옮겨왔어.”구승훈이 씩 웃으며 강하리의 방 바로 옆 방을 가리킨다.“우리 회사 에이스, 강 부장이 불이익 당하는 건 못 참지.”“네. 고. 맙. 네. 요.”기계적으로 대답한 강하리가 구승훈을 휙 지나쳐, 카드키를 대고 방으로 들어갔다.따라 들어가려는 주해찬을 막아선 구승훈.“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강하리 명예 들먹이시던 분이 이건 좀 아니지.”야유와 경고가 섞인 말에 주해찬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맘껏 말하라지. 지금 저 느낌 아니까.‘잠깐, 어젯밤 사건? 불이익?’“선배, 들어와서 문 닫아요!”날선 목소리와 함께 강하리가 주해찬을 잡아끌었다.쾅!문이 닫혔고, 그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구승훈의 얼굴에 차가운 서리가 피어났다.“저기 손님? 혹시 재떨이 필요하시면-.”찌릿!날카로운 눈길에 다가오던 직원이 줄행랑을 놓았다.방 안.티백을 담은 컵에 더운물을 붓는 강하리를 응시하는 주해찬의 표정이 어둡기만 했다.“하리야, 어젯밤 무슨 일 있었어?”“……고이선이 찾아왔었어요. 잡아먹을 기세로.”주해찬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