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쿠야! 젊은 총각, 여기서 뭐 혀?”건너편 방에서 나오던 한 아주머니가 기겁한 소리를 내질렀다.방 앞에 우뚝 서 있는 시커먼 인영에 한 번 놀라고, 그림 같은 구승훈의 얼굴에 또 한 번 놀랐다.구승훈이 말 없이 미간만 좁힌다.“여자친구랑 다툰 겨?”알겠다는 표정을 지으시는 아주머니.말을 섞고싶지 않았지만, 여자친구란 말에 저도 모르게 구승훈의 고개가 끄덕여졌다.“여자친구 화 났으믄 어여 사과부터 혀야지, 정승처럼 서 있기만 하면 우짤겨?”“녹록지 않은 애라서요. 여자친구가.”“그럴수록 대차게 밀어붙여야 하는 겨. 여자친구 놓치지 않을라믄.”마침 그때, 강하리의 방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이 방을 나섰다.구승훈에게 핀잔을 주던 아주머니가 황당한 얼굴로 주해찬을 빤히 바라보았다.곧 이어 복잡한 눈길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얼굴은 반반한 총각이 참 안됐구먼.”구승훈을 쫒겨난 세컨드 쯤으로 보는 눈길이었다.“…….”구승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내가 남친이라고! 저 자식이 아니라!”……를 외치기도 전, 아주머니가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조심해서 들어가요, 선배.”고개를 끄덕인 주해찬이 구승훈을 돌아보았다.“구 대표님은 여기서 뭐 하십니까?”“뭐 하면 어쩔 겁니까?”기분이 기분인 만큼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그런 구승훈에게서 불길함을 감지했는지, 주해찬이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도어락 잘 잠그고. 이상한 사람이 문 두드리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 알았지?”그 말에 구승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저게 지금 누구 들으라고.그러건 말건 주해찬은 구승훈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버렸다.“하나만 묻자.”막 방으로 들어가려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막아섰다.“주해찬이 사귀자고 하면 사귈 거야?”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시도는 해보고 싶어요. 평범한 삶이란 걸 살아보고 싶거든요.”구승훈의 가슴 속, 간당간당하던 뭔가가 와장창 깨졌다.순간 나도 너한테 평범한 삶을 살게 해줄 수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하지만 목구
강하리를 본 안현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강하리에게 접근해보고 싶었지만 하도 싫어하는 티를 내는 바람에 겉돌기만 하던 차였다.“강 부장, 오랜만이네요.”강하리는 묵묵부답.“언제 한 번 제가 밥 사도 될까요?”그 한 마디에 강하리는 토가 나올 것 같았다.“아닙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을 것 같네요.”지나가려는 강하리의 앞을 안현우가 막아섰다. 얼굴에는 착잡한 기색이 어려있었다.“전에 일은 미안해요.”강하리에게 관심이 생길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심한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후회막급이었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지금 이 뜬금없는 사과도 강하리에게는 그저 생뚱맞은 지랄으로 보일 뿐이었다.“누구랑 왔어?”안현우를 에돌아 지나가려니 이번에는 구승훈이 팔목을 낚아챘다.“참나, 오지랖이 태평양이세요?”강하리가 구승훈의 손을 뿌리치고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갔다.그리고 정주현의 목소리가 룸 안에서 흘러나왔고.구승훈의 눈이 또 분노로 이글거렸다.좌 주해찬, 우 정주현, 하다하다 이젠 별볼일 없는 안현우까지.셋이 아주 세트로 제 속을 뒤집어놓으려고 작심한 것 같은 기분이다.구승훈의 표정 변화를 안현우는 똑똑히 보았다.‘이거, 강하리 구애가 점점 험난해질 것만 같은데.’쎄하다.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마음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재미 삼아 데리고 다니는 여자인 줄 알았다.냉철한 구 대표가 정부에게 감정을 주는 어리석은 짓은 안 할 줄로만 알았다.지금 와서 보니 어느샌가 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미친듯이 집착하고 있다.그 집착이 얼마나 커졌는지 제 스스로도 모를 만큼.“안 대표님도 강 부장님한테 푹 빠지셨나요? 우리 강 부장님 참, 인기도 많네요. 안 그래요, 오빠?”송유라의 한 마디가 기름이 되어 구승훈의 분노에 뿌려졌다.“너도 강하리한테 대시할 거냐?”영하로 떨어지는 구승훈의 목소리에 안현우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안 될건 없잖아. 강 부장 지금 싱글이니까.”“일찌감치 접어 둬.”말을 마친 구승훈이 밖으로 발길을
”오빠……. 어릴 적 오빠랑 나랑 어촌에서 살던 거 기억나요? 그 때 정말 행복했었는데.”구승훈이 미간을 좁히며 뭐라 하려던 찰나 송유라가 말을 이어갔다.“그거 알아요? 오빠가 떠난 뒤로 나는 오빠만 기다렸어요. 오빠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지만.”송유라가 눈물을 흘렸다.어촌에서의 시간이 구승훈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송유라였다.이 정도는 들먹여 줘야 구승훈에게 통할 거다.아니나 다를까, 구승훈의 얼굴이 살짝 펴지더니, 티슈 한 장을 뽑아 건네주었다.“다신 안 버린다고 했지.”송유라가 뛸 듯이 기뻐지던 다음 순간.“하지만 유라야.”구승훈의 목소리가 다시 서늘해졌다.“앞으로 내 앞에선 알량한 수법 따윈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 나도 참아주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열린 송유라의 입이 어쩔 바를 모른 채 뻐금거렸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꾹 닫혔다.“일찍 들어가서 쉬어.”*강하리가 문 안에 들어서니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놓고 기다리는 정주현이 보였다.그녀를 보자 정주현의 눈이 반짝 빛났다.“착륙하면 연락하라고 했잖아요. 데리러 가겠다고.”“아닙니다. 택시가 편했어요.”“미안해요.”강하리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아셨어요?”정주현이 겸연쩍게 고개를 끄덕였다.“고이선이 거기까지 찾아갈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내가 먼저 하리 씨한테 접근한 거라고 일러뒀으니까 다신 찾아가지 않을 거예요.”정주현의 해명에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그렇다면 고맙네요.”정주현은 얼른 지사 오픈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한편, 프라이빗 룸 앞, 살짝 열린 문틈으로 귀를 쫑긋 세운 한 남자가 있었으니.바로 송유라를 돌려보낸 뒤 몰래 다시 돌아온 구승훈이었다.들리는 게 일 얘기 뿐이라 살짝 안심하고 있던 그 때.“주현 도련님, 죄송하지만 저 연성 지사에 입사하지 못할 것 같아요.”“왜요? 고이선 때문이에요 혹시?”정주현이 멍해졌다가 급급히 물었다.구승훈의 미간에도 다시 주름이 졌다.강하리는 담담한 표정이었
병실 앞에 도착하니 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는 간병인 아줌마가 보였다.“무슨 일이 있은 거예요?”강하리가 미간을 좁혔다. 아줌마의 얼굴에 벌건 손자국까지 나 있었던 것.“아니 글쎼 아가씨 아버님이요. 여태껏 코빼기도 비치질 않다가 잔뜩 취해 나타나서는 다짜고짜 병실에 들어가려고 하지 뭐예요. 그거 막다가 손찌검까지 당하고 결국 밀려났는데, 따라 들어가 보니까 세상에, 호흡기 전원 끄더라니까요. 돈 낭비하느니 빨리 죽는게 낫다고 중얼거리면서요. 의사선생님 불러오니까 그새 사라졌더라고요.”강하리의 얼굴에 찬 서리가 내려앉았다.사라졌던 강찬수 그 인간이 갑자기 나타나서 난동을 부릴 줄은 몰랐다.“미안해요 아줌마.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간병인 아줌마에게 오만원 권 몇 장을 쥐어주자 아줌마가 한사코 거절하면서 몇 마디 당부를 남기고 떠났다.병실에 들어가니 막 검진을 마친 담당 의사가 강하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간병인 아주머니가 제때 불러주셔서 다행히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일은 어머님이나 다른 환자분들에게도 안 좋으니까,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아버님과 잘 소통해주시기 바랍니다.”“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강하리가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의사가 나간 뒤, 강하리는 병상 위 창백한 정서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기억 속 너무나도 예뻤던 엄마의 얼굴이 너무나도 야위어 있었다.강하리는 말없이 한동안 서 있다가 병실을 나섰다.정주현은 저 켠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고, 언제 왔는지 구승훈이 문 옆에 서 있었다.“또 강찬수야?”서늘한 구승훈의 목소리.“네. 다행히도 엄마는 괜찮으세요.”구승훈을 본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강하리가 순순히 대답했다.통화를 마친 정주현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순간, 핸드폰이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여긴 괜찮으니까 두 분 다 들어가 봐요.”“어머님이 괜찮다니까 다행이네요. 저는 진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연락해요, 하리 씨.”정주현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노려보
자신이 알아서 경호원을 다시 보내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여태 이러고 있었는데.이번이 좋은 기회다 싶었다.강하리에게 엄마의 신변 보호는 꼭 필요한 거였으니까.적어도 강찬수를 막을 경호력은 있어야 했다.사실 강하리도 경호원의 필요성을 알고있었다.구승훈에게 손 내밀기가 싫었을 뿐.저 남자한테 진 신세를 갚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너무나도 잘 아니까.“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할께요.”뒤돌아 가려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콱 품 안에 껴안았다.“네가 알아서 한다고? 무슨 수로? 주해찬에게 도와달라고 할거야? 아님 정주현?”뜨거운 기운과 함께 문득, 결에 맞지 않는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구승훈의 향기가 아닌, 여성용 향수 냄새.‘송유라!’구승훈을 확 밀쳐버린 강하리.“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하든 그쪽한텐 손 안 내밀 거니까 제발 좀 꺼져줘요!”구승훈의 얼굴에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지금 네 곁에 있는 남자는 나 뿐인데도? 아직도 널 가장 신경 써주는 게 누군지 모르겠어?”강하리는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나왔다.“우리 엄마 위독하실 때 어디 있었죠? 내가 죽을 뻔할 때는요? 이제 와서 이깟 일로 구차하게 생색 내시는데, 진짜 필요 없거든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다시 병실로 들어가 버렸다.그 자리에 굳어진 구승훈.너무하네. 강하리.어떻게 매번 아픈 데만 쏙쏙 골라 건드리냐.가슴이 바늘에 찔리는 것만 같았다. 터질 것만 같은 것도 아니고 찢어질 듯 고통스럽지도 않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그런 아픔이었다.입가에 맺힌 냉소에 처연함 한 가락이 묻어났다.딩! 디리리딩 딩!승재의 전화였다.“무슨 일이야?”“형! 둘째 형 잡았어!”승재의 다급한 목소리에 구승훈이 번개같이 병원을 튀어나갔다.한편.정서원의 몸을 깨끗이 닦아준 뒤 병실을 나선 강하리는 곧장 강찬수에게 전화했다.“어이쿠, 이게 누구야. 평생 우리 딸내미 전화 한 번 못 받아볼 줄 알았더니만.”빈정이는 말투에 강하리의 관자놀이가 툭 튀었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하네요.”송유라의 어머니, 장진영이 우아하게 웃으며 일어섰다.“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입금이 제때에 안 된다면 어려워질 지도 모르지요. 제가 받을 돈을 못 받으면 입을 주체 못 하는 편이라서요.”장진영의 얼굴에서 빛의 속도로 웃음기가 사라졌다.“처음 합 맞춰보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수작질은 집어치우시죠. 나한테 위협이 통할 것 같습니까?”냉랭하게 한 마디 뱉고는 오만하게 턱을 쳐들고 밖으로 나갔다.“엄마, 어떻게 됐어?”장진영이 차에 오르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송유라가 물었다.“강찬수라는 사람, 멍청하고 탐욕스럽지만 강하리를 견졔하기에는 딱이야. 이 자만 우리 편이면 강하리는 반드시 고소 취하할 거야.”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 송유라는 손에 들고있던 소환장을 구겨 바닥에 던졌다.그 종이 뭉치를 바라보는 장진영의 눈빛도 어두워졌다.이틀 전, 송씨 가문에 도착한 소환장이었다.강하리가 간 크게도 송유라에게 법적 소송을 건다는.그것도 무려 심준호한테 위탁해서.심준호란 이름을 본 순간 장진영의 눈가가 파들파들 떨렸었다.이 지X 맞은 년이 무슨 수로 심준호를?“가장 좋은 해결책은 구승훈이 나서주는 건데.”장원영의 침음에 송유라가 낯빛을 흐렸다.구승훈에게 부탁을 안 한 게 아니었다. 밖에서 만나 식사할 때 진작 얘기를 꺼냈다.하지만 구승훈은 시종일관 대답이 없었고.처음부터 끝까지 성형 얘기 뿐이었다.“이런 일까지 오빠한테 부탁하고 싶지 않아.”짐짓 당차게 대답했었지만 송유라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구승훈이 자신을 도와줄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단 것을 말이다.……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며 강하리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다시 뱉은 뒤, 승재에게 전화했다.같은 시각, 연성시 외곽의 한 폐기창고 안.간간이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두터운 붕대를 겹겹이 감은 구승훈의 두 손은 검붉은 피로 얼룩이 진 지 오랬다.얼굴이며 셔츠에 핏자국이 튀어있었다.셔츠 맨 윗쪽 단추를 거칠게 풀어제낀 구승훈
”승재 씨, 믿을 만한 경호원 두 사람만 구해줄래요?”구승훈이 냉소를 지었다.‘하다하다 승재한테까지 부탁하면서.’구승현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나한테는 철벽이란 거지?’우드득!둔탁한 소리와 함께, 구승현이 단 방에 또 까무러쳤다.“승재 씨? 방금 그건 무슨 소리죠?”뭔가 섬찟한 소리에 강하리가 흠칫 놀랐다.급급히 스피커폰을 끈 승재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는 구승훈을 째릿 노려보고는 한 켠으로 걸어가 통화를 이어갔다.승재가 돌아왔을 때 구승현은 개처럼 바닥이 퍼져있었고, 구승훈은 느긋하게 붕대를 풀고있었다.“형, 형! 잘못했어! 제발 살려줘! 제발!”눈물 콧물 짜내며 싹싹 비는 구승현.“하나만 묻겠다. 납치 사건에 송유라도 참여했냐?”그러자 구승현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송유라가 먼저 날 찾아와서 협력하자고 했어! 난 강하리를 죽일 생각까진 아니었는데, 그 여자가 협력 조건이 강하리를 죽이는 거라고…….”구구절절 털어놓은 구승현의 말에, 구승훈의 눈 속에 오싹한 빛이 감돌았다.얼마나 지났을까, 구승훈이 픽 웃고는 밖으로 걸어나갔다.“경찰에 넘겨.”승재가 재빨리 수하들에게 구승현을 데려가라고 손짓했다.‘휴, 난 또 정말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려는 줄.’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나가 보니 구승훈이 차에 기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이제 어떡할 거야, 형?”구승훈이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뱉었다. 아주 오랜 한참이 지난 뒤 입을 열었다.“네가 강하리라면, 날 용서할 거냐?”뜬금없는 질문에 승재가 잠시 멘탈이 나갔다.구승훈 자신도 이런 의문이 들 줄은 몰랐다. 이유 모를 초조하고 당황한 기분에 가슴이 막 떨렸다.승재는 어떻게 대답해야 될 지 몰랐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상실감과 실망과 고통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형, 이젠 확실한 증거도 있겠다, 송유라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야. 강 부장이 용서하고 말고는 그 다음 스텝이고.”“처리? 어떻게?”“최소한 선은 그어야지.”“…….”‘왜
사실 납치 건은 형사 쪽이라 심준호가 관여할 분야는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역시나 심준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강하리가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네?”잘못 들은 건가? 아님 내가 이해를 잘 못 한 걸까?심준호가 천천히, 또박또박 한 번 더 말해주었다.“송유라가 하리 씨 납치 사건에 참여했다고요. 구승현이랑 공범이에요.”강하리는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변호사님은 어떻게 아셨어요?”핸드폰을 꺼낸 심준호가 동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구승현이 떠듬떠듬 사건 경유를 말하는 영상이었다.강하리를 납치한 이유, 송유라의 협력 제안, 궁지에 몰려 강하리를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린 것까지.소름이 돋도록 상세한 자술이었다.핸드폰을 든 강하리의 손 뼈마디가 하얗게 변했다.그런 거였구나.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된 거였구나.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벌겋게 되어있었다.“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까지 합치면 송유라를 감형 또는 보석이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까요?”사실 구승현의 자술서가 있으면 납치는 빼박 못 하고 성립될 죄명이었지만.송유라나 송씨 가문이나 그렇게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었다.더군다나 어쩌면…… 그 인간이 송유라를 도와줄지도.강하리가 울컥울컥 치미는 씁쓸함을 삼키며 물었다.그러자 씩 웃어보이는 심준호.“방법이 없을 거면 얘기하지도 않았겠죠. 나한테 맡겨요.”“감사합니다. 이거 왠지 자꾸 감사하단 말뿐이네요.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 지도 잘 모르는데.”“내가 알려줄까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심준호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갔다.“우리 집 노부인께서 요즘 좀 편찮으신데, 다음에 보경시에 갈 때 한번 들러 줘요.”“아, 네!”고개를 끄덕인 강하리가 갸웃하더니 물었다.“감사는 어떻게 드리죠?”“노부인 만나뵈는 건데요.”“네에?”“만나면 무척이나 좋아하실 거라서요.”강하리가 웃었다. 농담도.“네, 꼭 가 보겠습니다!”심준호와 소송 건에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