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락 모락.파아란 연기가 허공에 감돌다가 흩어진다.그 아래에는 어두운 얼굴의 구승훈이 있었다.그가 서 있는 곳은 강하리의 방 앞 복도.‘처음 해 본 생각이지만, 저거 부럽네. ’금방 풀려 흩어지는 저 연기처럼 강하리를 향한 마음도 풀렸으면.딱딱하게 응어리가 진 그게 뭔지는 확실하진 않았다.확실한 건, 강하리를 이대로 포기하는 게 아직도 안 된다는 거였다.둘이 시작한 일인데, 혼자만 그 자리에 갇혀 지지부진하는 것만 같은 기분.강하리의 마음이 자신에게 머무른 적이 있단 건 확실했다.뭐든 들어줬고 뭐든 받아줬었다.그런데 지금 혼자만 쏙 빠지려고 한다.‘여태껏 길들여 놓고 버리는 건 좀 너무하잖아.’이래서 습관이 무섭다고 하는 거였구나 싶었다.연기는 오랫동안 구승훈을 감돌았다.줄담배를 태운 탓이었다.지나가던 사람들이 코를 싸쥐며 미간을 찌푸리건 말건.바닥에 쌓여가는 담배 꽁초에 보다 못한 직원이 재떨이를 가져올 때에도.한 대, 또 한 대, 끝낼 줄 모르고 씁쓸함을 태웠다.그러다가 날이 희끄무레 밝아올 무렵, 접근하는 사람이 없단 걸 확인하고서야 자리를 떴다.호텔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승훈의 핸드폰이 울렸다.딩! 디리리리딩 딩!액정에 송유라가 떴다.“오빠, 언제 돌아와요? 나 곧 수술인데.”“걱정 마. 수술 전에는 돌아갈 거니까.”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구승훈이 대꾸했다.“진짜?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빠!”막 통화를 마치고 고개를 든 순간, 저만치에서 음식 포장을 들고 호텔에 들어가는 주해찬이 보였다.또 가슴이 답답해났지만, 애써 눌러 내렸다.뭐, 어때. 아침밥 갖다주는 것 뿐인데.택시를 잡고 호텔로 돌아간 구승훈은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바로 회의장으로 향했다.……주해찬이 방에 들어섰을 때 강하리는 막 외출 준비를 하던 차였다.음식 포장을 벗기자 짠 나타나는 불고기 밥버거에 강하리가 환호성을 질렀다.“선배는 내 학창시절 식습관을 어디 적어라도 놓은 거예요? 이 아침에 밥버거는 어디서
강하리는 대답이 없었다. 입만 벙긋하면 이 남자가 또 화르륵 타오를 거니까.하지만 구승훈은 할 말이 남은 모양.“아침밥 맛있었어?”“네. 대표님은 아침 뭐 드셨어요?”엉겁결에 강하리가 대답하고 보니, 구승훈이 썩은 표정이다.내가 밥이 넘어갈 것처럼 보여? 라고 말해주는 듯한.아차 싶었다.“강 부장은 참 순진한 여자야. 고작 아침밥 한 끼에 좋아죽는 걸 보면.”더 한층 시큼텁텁해진 구승훈의 말투.누군 3년 간의 감정을 갈무리하느라 죽을 맛인데.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지금부터 구승훈의 업무 관련 외 질문은 사절하기로 했다.그때 마침 마중나온 부드러운 인상의 협력사 비서실장.“구 대표님, 강 부장님, 오셨어요?”비서실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강하리가 웃으며 대답하자, 비서실장이 친근하게 그녀의 곁에 다가갔다.“처음 뵐 때부터 느낀 건데, 우리 강 부장님은 어쩜 이리도 예쁘실까. 방금 남자친구분 차에서 내릴 때 아침햇살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 남자친구가 아니고 그냥 친구예요.”평소에 서류를 주고받으며 가끔씩 수다도 떤 친분이 있는 비서실장의 너스레에 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암요! 남자친구였다면 이마 쓱으로 끝나지 않으셨겠죠. 잘 생기신 분이 어쩜 그리 스윗하기까지 하실까. 우리 강 부장님한테 너무 잘 어울리지 뭐예요.”옆 구승훈이 썩소를 지었다.어울리긴 개뿔!비서실장, 사람 보는 눈이 동태 눈깔이었네. 그렇게 안 봤는데.강하리는 그런 스타일 안 좋아한다고.사실 강하리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는 미스터리지만.여태껏 자신이 강하리 스타일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지금은 영 모르겠다.저렇게나 매정하게 자신을 버리는 걸 보면.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나고 기분이 언짢아졌다.그게 강하리에게 고스란히 보였다.또, 또 시작이다. 또!“정 실장님, 진짜 그런 사이 아니에요.”다시 한 번 정정했지만.“압니다. ‘아직은’ 아닌 거죠.”비서실장, 정은숙이 눈까지 찡긋한다.이거야 원, 해명할수록 역효
”강 부장님, 남자친구분 데리러 오셨어요.”정 실장의 목소리에 협상회를 마치고 서류를 정리하던 강하리가 흠칫했다.회의장 밖에 심플한 정장 차람으로 우월한 기럭지를 자랑하는 주해찬이 보였다.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임원들마다 남자 여자 할것 없이 힐끗거릴 정도.“조 대표님, 죄송하지만 먼저 가 봐야 될 것 같아서요.”강하리가 미안한 얼굴로 조 대표를 돌아보았다.조 대표가 은근슬쩍 구승훈을 돌아보았다.두 사람의 수상한 관계를 알고있는 조 대표였다.딱 봐도 그림이 나왔다. 이윤을 양보할테니 식사자리 마련에 협조 좀 해달라는 은밀한 부탁까지 받은 마당인데.그랬는데. 지금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강 부장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 칼에 거절한다?밖에 남자친구란 사람은 또 뭐고?설마 구 대표님이 여자 뺏긴 건가? 천하에 구 대표가?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구승훈의 속에는 천불이 일어나고 있었다.‘저 낄끼빠빠를 모르는 새X가.’기어코 회의장에 돌아오냐.꺼지라고 좀!“강 부장, 그건 좀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애써 평온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지만.이미 조 대표의 눈은 가십거리를 포착한 파파라치의 그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이윤도 양도받고 구 대표님 연애사도 라이브로 직관하고.이거 이거, 웬 떡이냐.그러다가, 막 회의실에 들어서는 주해찬과 눈이 마주쳤다.‘히익! 주씨 가문 도련님??’조 대표는 삽시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보경시에서 조용하기만 한 주씨 가문이지만.잠잠한 호수가 더 깊듯, 그 실력이 어마어마한 가문이었다.외교부 해찬 도련님 얘기도 익히 들어온 터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뿌리부터 될성부른 다이아 미스터.명문가 위 명문가의 후계자.그런 분이라면 구 대표와의 경쟁구도가 너무나도 합리적이었다.대신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아, 이럴 줄 알았더라면 넙적 받아먹는 게 아닌데.’구승훈의 영향력이야 전국에 퍼져 있다지만.적어도 보경시에서만큼은 주씨 가문에 한 수 접어줘야 했다.그만큼 보경시에서 주씨 가문의
점심식사 약속이 흐지부지 파산되어 버렸다.조 대표는 주해찬이라도 따로 식사 약속을 잡고 싶었지만, 당사자는 별로 생각 없는 눈치였다.같이 회의장을 나서는 세 사람과 그들을 배웅하러 따라나선 조 대표.앞 쪽에서 강하리와 주해찬이 오순도순 국제박람회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구승훈은 그들 뒷쪽에서 청승맞게 담배를 태워대며 따라가고 있었다.“강 부장님이 대표님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만.”앞 쪽 둘을 바라보며 조 대표가 낮은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그러게요. 저도 그런 줄 알았거든요.”구승훈이 냉소를 지었다.정주현을 막았더니 주해찬이 나타나고.산 넘어 산이다.주해찬은 정주현과는 달랐다.정주현 때문에 강하리에게 화가 난 이유는, 정주현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게 더 컸었다.여자를 물 흐르듯 갈아치우는 정주현에게 강하리가 가 봤자, 얼마 못 가 밀려날 게 뻔했으니까.그걸 강하리도 아는 눈치인데도 자꾸 들러붙으니 구승훈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도 했다.하지만 그만큼 두 사람을 떼어놓기가 쉽다는 반증이기도 했다.주해찬은 아니었다. 약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남자였다.외모나 능력, 평판, 어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고.강하리에게 일편단심으로 진지했다.강하리를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무엇보다도, 강하리도 그게 싫은 눈치는 아니었고.성큼성큼, 구승훈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강 부장, 오늘 오후 항공편으로 돌아간다.”강하리가 우뚝 멈춰 구승훈을 돌아보았다.“저 내일 돌아갈 거니까 대표님 먼저 들어가 보시죠.”“오늘은 무슨 일인데?”“이따 저녁에 국제박람회에 가 봐야 해서요.”“그럼 내일 같이 돌아가. 그 국제박람회인가 뭔가 하는 거, 나도 흥미가 좀 생겨서.”“하양이 걱정 마시고, 바쁘실 텐데 먼저 들어가 보시죠.”주해찬이 웃으며 강하리 쪽 차 문을 열어주었다.‘또, 하양이.’구승훈의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강하리를 태운 뒤 운전석에 타려는 주해찬을 향해 냉소를 날렸다.“그러는 해찬 도련님은 꽤
”선배.”“응?”“나 때문에 불편한 자리에 나오느라 애쓰지 마요.”“애쓴 거 아닌데. 네가 간다니까 가고싶어서 그런 거야.”주해찬이 다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하리야. 나는 그저.”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네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싶을 뿐이야. 너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이야.”“선배는 내 과거에 대해 알아요?”강하리가 쓰거운 웃음을 흘렸다.“알고 나면 여태 나한테 해 줬던 게 전부 시간 낭비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걸요.”“과거가 어떻든 나한테는 중요한 게 아냐. 나는 그저 네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고 싶을 뿐이거든. 언제든 네가 돌아서면 닿을 수 있는 곳에서.”강하리가 또 웃었다.그래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들도 있으니까.“내 과거가 선배 앞길을 가로막는 가시 덤불이 될 수도 있단 생각, 안 해보셨어요?”“그 가시 덤불을 헤치고 나가지 못 한다면, 그건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고.”주해찬이 에누리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그리고 하리 너는 점점 더 빛이 날 거야. 언젠가는 이 선배가 다가가기 힘든 높이까지 올라가겠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놔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어느덧 해가 저물었다.외교부를 한 바퀴 빙 둘러본 두 사람은 바로 저녁에 있을 국제박람회 개막식장으로 향했다.저녁 일정이 바쁘게 흘러갔고.개막식을 마치고 간단하게 배를 채운 두 사람이 호텔에 돌아오니 어느덧 밤 열한 시.강하리를 호텔 로비에 데려다 준 주해찬이 돌아서려는 순간.어둑어둑한 저쪽 구석에서 빛나는 빠알간 담뱃불과, 냉랭한 빛을 뿜는 구승훈의 눈길이 시야에 들이닥쳤다.미간을 확 좁힌 주해찬이 다시 강하리의 팔을 잡았다.“하리야, 나 잠시 올라가서 앉았다 가도 돼?”강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해찬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구승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저 여자가! 이 밤중에 외간남자를
”방금 구승훈을 봤어. 또 너한테 집적거릴까 봐 같이 올라온 거야.”엘리베이터 안, 주해찬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방에 녹차 티백이랑 커피밖에 없던데, 밤에 그거 마시면 잠이 안 오지 않을까요?”엉뚱한 강하리의 대답에 주해찬이 멍해졌다가 곧 눈치를 챘다.하양이는 진짜 완전히 구승훈을 놔 줄 생각이구나.“나는 녹차는 괜찮아. 홍차라면 몰라도.”“언제 한 번 차 끓여줄게요 선배. 저 다도 좀 배웠거든요.”“오, 그래? 우리 할아버지께서 요즘 다도에 푹 빠져 계신데, 언제 한 번 소개시켜 줘야겠다.”도란도란 대화를 이어가던 중,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둘이 내렸다.그리고.바로 옆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구승훈과 맞닥뜨렸다.“대표님? 어쩐 일로?”자동반사적으로 찌푸려지는 강하리의 미간.“어, 어젯밤 사건도 있고 해서 여기로 옮겨왔어.”구승훈이 씩 웃으며 강하리의 방 바로 옆 방을 가리킨다.“우리 회사 에이스, 강 부장이 불이익 당하는 건 못 참지.”“네. 고. 맙. 네. 요.”기계적으로 대답한 강하리가 구승훈을 휙 지나쳐, 카드키를 대고 방으로 들어갔다.따라 들어가려는 주해찬을 막아선 구승훈.“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강하리 명예 들먹이시던 분이 이건 좀 아니지.”야유와 경고가 섞인 말에 주해찬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맘껏 말하라지. 지금 저 느낌 아니까.‘잠깐, 어젯밤 사건? 불이익?’“선배, 들어와서 문 닫아요!”날선 목소리와 함께 강하리가 주해찬을 잡아끌었다.쾅!문이 닫혔고, 그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구승훈의 얼굴에 차가운 서리가 피어났다.“저기 손님? 혹시 재떨이 필요하시면-.”찌릿!날카로운 눈길에 다가오던 직원이 줄행랑을 놓았다.방 안.티백을 담은 컵에 더운물을 붓는 강하리를 응시하는 주해찬의 표정이 어둡기만 했다.“하리야, 어젯밤 무슨 일 있었어?”“……고이선이 찾아왔었어요. 잡아먹을 기세로.”주해찬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그런
”어이쿠야! 젊은 총각, 여기서 뭐 혀?”건너편 방에서 나오던 한 아주머니가 기겁한 소리를 내질렀다.방 앞에 우뚝 서 있는 시커먼 인영에 한 번 놀라고, 그림 같은 구승훈의 얼굴에 또 한 번 놀랐다.구승훈이 말 없이 미간만 좁힌다.“여자친구랑 다툰 겨?”알겠다는 표정을 지으시는 아주머니.말을 섞고싶지 않았지만, 여자친구란 말에 저도 모르게 구승훈의 고개가 끄덕여졌다.“여자친구 화 났으믄 어여 사과부터 혀야지, 정승처럼 서 있기만 하면 우짤겨?”“녹록지 않은 애라서요. 여자친구가.”“그럴수록 대차게 밀어붙여야 하는 겨. 여자친구 놓치지 않을라믄.”마침 그때, 강하리의 방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이 방을 나섰다.구승훈에게 핀잔을 주던 아주머니가 황당한 얼굴로 주해찬을 빤히 바라보았다.곧 이어 복잡한 눈길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얼굴은 반반한 총각이 참 안됐구먼.”구승훈을 쫒겨난 세컨드 쯤으로 보는 눈길이었다.“…….”구승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내가 남친이라고! 저 자식이 아니라!”……를 외치기도 전, 아주머니가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조심해서 들어가요, 선배.”고개를 끄덕인 주해찬이 구승훈을 돌아보았다.“구 대표님은 여기서 뭐 하십니까?”“뭐 하면 어쩔 겁니까?”기분이 기분인 만큼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그런 구승훈에게서 불길함을 감지했는지, 주해찬이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도어락 잘 잠그고. 이상한 사람이 문 두드리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 알았지?”그 말에 구승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저게 지금 누구 들으라고.그러건 말건 주해찬은 구승훈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버렸다.“하나만 묻자.”막 방으로 들어가려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막아섰다.“주해찬이 사귀자고 하면 사귈 거야?”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시도는 해보고 싶어요. 평범한 삶이란 걸 살아보고 싶거든요.”구승훈의 가슴 속, 간당간당하던 뭔가가 와장창 깨졌다.순간 나도 너한테 평범한 삶을 살게 해줄 수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하지만 목구
강하리를 본 안현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강하리에게 접근해보고 싶었지만 하도 싫어하는 티를 내는 바람에 겉돌기만 하던 차였다.“강 부장, 오랜만이네요.”강하리는 묵묵부답.“언제 한 번 제가 밥 사도 될까요?”그 한 마디에 강하리는 토가 나올 것 같았다.“아닙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을 것 같네요.”지나가려는 강하리의 앞을 안현우가 막아섰다. 얼굴에는 착잡한 기색이 어려있었다.“전에 일은 미안해요.”강하리에게 관심이 생길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심한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후회막급이었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지금 이 뜬금없는 사과도 강하리에게는 그저 생뚱맞은 지랄으로 보일 뿐이었다.“누구랑 왔어?”안현우를 에돌아 지나가려니 이번에는 구승훈이 팔목을 낚아챘다.“참나, 오지랖이 태평양이세요?”강하리가 구승훈의 손을 뿌리치고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갔다.그리고 정주현의 목소리가 룸 안에서 흘러나왔고.구승훈의 눈이 또 분노로 이글거렸다.좌 주해찬, 우 정주현, 하다하다 이젠 별볼일 없는 안현우까지.셋이 아주 세트로 제 속을 뒤집어놓으려고 작심한 것 같은 기분이다.구승훈의 표정 변화를 안현우는 똑똑히 보았다.‘이거, 강하리 구애가 점점 험난해질 것만 같은데.’쎄하다.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마음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재미 삼아 데리고 다니는 여자인 줄 알았다.냉철한 구 대표가 정부에게 감정을 주는 어리석은 짓은 안 할 줄로만 알았다.지금 와서 보니 어느샌가 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미친듯이 집착하고 있다.그 집착이 얼마나 커졌는지 제 스스로도 모를 만큼.“안 대표님도 강 부장님한테 푹 빠지셨나요? 우리 강 부장님 참, 인기도 많네요. 안 그래요, 오빠?”송유라의 한 마디가 기름이 되어 구승훈의 분노에 뿌려졌다.“너도 강하리한테 대시할 거냐?”영하로 떨어지는 구승훈의 목소리에 안현우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안 될건 없잖아. 강 부장 지금 싱글이니까.”“일찌감치 접어 둬.”말을 마친 구승훈이 밖으로 발길을
“그동안 누가 임희주를 지원했는지 조사해 봐.”준봉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러나 사무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한마디 했다.“임희주와 여초연 씨의 관계를 확인해 줘.”...결혼식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심문석은 병원에 며칠 입원했다가 퇴원했고 결혼식의 모든 과정과 세부 사항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강하리는 처음에는 노인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심문석이 바빠지자 오히려 더 건강해 보였고 그녀는 그가 바쁘게 지내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이 시기 구승훈은 유난히 바빠 보였다.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고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피곤함을 숨기지 못했지만 강하리는 그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시곗바늘은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강하리는 옆에 빈 침대에 잠시 눈을 두고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에서 우유 한 잔을 데웠다.서재의 불빛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강하리는 서재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문을 열고 들어간 강하리는 우유를 책상 위에 놓았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휴대폰 화면을 끄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나에게 주는 거야?”구승훈이 그렇게 물었을 때 강하리는 그를 꾸짖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냥 ‘응’하고 대답한 후 그의 옆에 앉았다.“내가 도와줄 일이 있어?”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도와줄 거야?”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 부하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러 온 거야.”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이제는 에비뉴와 정안 모두 강 부장이 최대 주주라서 그런 것들이 다 중요하겠지.”강하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의자 하나를 가져다 앉아 책상 위의 서류를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그녀는 금세 서류에 몰입했고 구승훈은 그녀 옆에 앉아 있는데도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서재의 불빛은 따뜻하지 않았지만 강하리가 앉자 공간 곳곳이
차 안은 숨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구승훈은 팔꿈치를 팔걸이에 올린 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준봉은 그가 곧 움직일 거라 예상했다.심지어 M국으로 떠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30분이 흘러도 구승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준봉이 막 입을 떼려던 순간 구승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노진우에게 사람을 데리고 곧장 그 장소로 가라고 해. 그가 출발하면 구승재에게 연락해 조용히 그쪽으로 가게 해. 노진우가 움직이는 순간 구승재는 바깥을 봉쇄하도록 해.”준봉은 잠시 말을 잃었다.“대표님, 혹시 함정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몸을 기댄 구승훈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그는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여초연은 복수를 위해서라면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그가 아는 여초연이라면 일부러 그를 또 다른 함정으로 유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쉽게 자신의 흔적을 드러낼 리 없었다.그때 노연정을 납치했던 일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이 몇 년 간 여초연은 분명 자신의 세력을 키워왔을 것이다.그는 여초연을 항상 감시할 사람을 배치해 두었지만 그녀가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여초연은 별다른 은폐 없이 M국으로 갔고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한 점은 나문빈이 너무 빨리 그녀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사실이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가장 큰 손실은 단지 노연정을 곁에 두는 시간이 짧았고 그 사이 구승훈과 강하리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그녀가 계획한 대로 그 약물이 그의 몸에 투여되었다.여초연의 계획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짜여 있었고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 구승훈과 강하리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여초연이 이렇게 허술한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다.게다가...구동근이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구승훈은 구동근과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지만 여초연보다는 그를 조금 더 신뢰하는 편이었다.한편 M국에서 여초연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집사에게서 휴대폰을 건네
손연지는 강하리와 천아름의 손을 잡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이런 사람들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진짜 역겹다니까요.”천아름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손연지를 따라가며 뒤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던졌다.“여씨 가문의 두 분 내 가게에서 당장 꺼져요.”여명희는 순간 얼어붙었다.“천아름 씨, 미쳤어요? 이런 천한 년 하나 때문에 우리를 쫓아내겠다고요?”천아름은 걸음을 멈추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쫓아내는 게 아니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거죠.”그러고는 매장 직원을 향해 손짓하며 덧붙였다.“앞으로 이 두 사람 내 모든 매장 출입 금지야. 알아들었지?”그러자 강하리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두 분은 심 씨 가문 명의로 된 모든 장소에 출입할 수 없어요.”그렇게 단호하게 선언한 후 더 이상 그녀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손연지와 함께 매장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온 뒤 손연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통유리 창에 몸을 기댄 채 안쪽을 몰래 들여다봤다.“하하. 저렇게 분노에 차서 발악하는 꼴을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요.”그러더니 갑자기 강하리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하리야,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이 울분을 풀지도 못했을 거야. 너 모를 거야 그때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쁜이 정말 고마워...”그러자 천아름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말을 끊었다.“저기...나한테는 고맙다는 말 없어요?”손연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고마워요!”천아름은 손연지에게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웃었다.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래요? 결혼할래요? 내가 말인데 나랑 같이 지내면 앞으로 주얼리랑 옷은 내가 다 사줄게요.”“콜!”옆에서 듣고 있던 강하리는 입을 삐죽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손연지의 해맑은 웃음을 보자 결국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천아름 씨, 고마워요.”강하리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천아름은 손을 휘휘 저으며 시큰둥하게 답했다.“우리 사이에 무슨 고맙다는 말을 해요? 진짜로 고맙다면 당신 남편
여명주가 반박하려는 순간 강하리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작업실의 주인인 천아름이었다.천아름은 짙은 눈동자와 붉은 입술 크고 우아한 웨이브 헤어 거기에 하이힐까지 착용하고 있었다.강하리 옆에 멈춰 선 천아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 오랜만이에요.”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이 마주한 건 단 한 번뿐이었다.그때 경매장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에비뉴를 인수하고 나서야 강하리는 그 두 개의 약혼반지가 사실 천아름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에비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을 뿐이었다.천아름은 조용히 강하리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여전히 마음에 드세요?”강하리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감사합니다.”천아름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반지가 예쁜 게 아니라 사실은 당신의 손이 예쁜 거예요. 구승훈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그 순간 손연지가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구승훈 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하리를 사로잡을 수 있었겠어요?”천아름은 손연지를 향해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했다.“역시 미녀끼리는 생각도 비슷하네요.”셋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여명주는 그들 사이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서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이건 대놓고 날 무시하는 거잖아.’“천아름 씨, 이게 무슨 뜻이죠?”천아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아직도 못 알아들었어요? 여명주 씨 B시에서는 당신네 가문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면 노민우 씨를 붙잡아다 가문 재정을 끊고 강제로 결혼이라도 시키시지 그러세요? 그런데 왜...”천아름은 옆에 있던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쁜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소연지입니다.”“아. 맞아요. 소연지
강하리는 안에서 밖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은 그 모습을 보며 저절로 입꼬리를 올렸다.“떠나기 아쉽네.”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노민준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지만 구승훈이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정 안 되겠으면 강하리 씨에게 솔직하게 말해. 그러면 강하리 씨도 기꺼이 너와 함께 돌아갈 거야. 그리고 계속 숨기기만 하면 강하리 씨도 불편할 거잖아?”구승훈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그는 작업실 안에서 웃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았다.노민준은 더 할 말이 없었고 그때 서야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승훈, 손연지 씨 지금 어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궁금해?”노민우는 급히 두 번 응답했다.“그러면 직접 와서 보면 되잖아?”“손연지 씨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구승훈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그때 내가 나가라고 했을 때는 왜 안 나갔어?”노민우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그것도 그렇네.”구승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준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희주를 철저히 조사해 줘.]강하리는 마침내 손연지에게 어울리는 주얼리를 골랐다.손연지는 몸에 맞춰보며 환하게 웃었지만 강하리는 그 웃음이 예전처럼 맑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꼈다.감정의 상처는 결국 스스로 치유해야 했고 강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연지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주얼리를 고른 뒤 강하리는 손연지와 함께 의류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곧 결혼식인데 다른 건 안 고를 거야?”손연지가 물었다.강하리는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구승훈이 몇 벌 주문해 놨고 또 에비뉴에서 우리 결혼식에 맞는 주얼리 세트를 준비해 줬어.”손연지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놈의 자본주의.”강하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두 사람은 웃으며 의류
구승훈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왜 갑자기 왔어?”강하리는 구승훈을 째려보며 말했다.“안 오면 당신이 예쁜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못 볼 거 아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질투나?”“아니.”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에는 질투의 냄새를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실제로 구승훈과 임희주 사이에 아무 일이 있을 거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그저... 다른 여자가 어떤 면에서 그녀의 남편을 더 잘 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잡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어쩌지?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침대에 묶어 두는 건 어때? 복수의 기회를 줄게.”강하리는 질색을 하며 손을 빼냈다.“염치를 좀 챙겨.”구승훈은 웃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휴대폰이 옷 속에서 가볍게 진동했지만 그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눈빛이 깊어졌다.마침내 강하리는 차를 개인 작업실 앞에 세웠고 구승훈이 주문한 주얼리를 오늘 착용해 보려고 했다.마침 이틀 후 손연지의 생일이었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휴식 중인 틈을 타 그녀를 불러냈다.강하리가 차에서 내리자 손연지는 작업실의 큰 창문 앞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녀는 강하리를 보고서야 마치 살아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손연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손연지 씨, 이렇게 한가해요?”손연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강하리를 따라 들어가자 직원이 다가왔다.“구승훈 씨, 주문하신 주얼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구승훈은 대답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고 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나서 직원에게 말했다.“주얼리는 내 아내에게 전달하세요.”그러고는 강하리를 향해 말했다.“전화 받고 올게. 주얼리 먼저 착용해 보고 안 맞으면 다시 수정해 달라고 하면 돼.”강하리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흘끗 보았는데 화면에 나타난 이름은 노민준이었다.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손
‘심리 의사들은 원래 이렇게 강한 심장을 가진 걸까 아니면 이 임 선생이 유독 뻔뻔한 걸까? 만약 이 사람이 노민준 씨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대표님은 진작 화를 냈을지도 몰라.’하지만 임희주는 분위기를 살피고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바로 다른 치료 방안을 구승훈에게 설명했다.“간단히 말하면 이전 치료 방안은 증상을 억제하는 방식이었어요. 예를 들어 노민준 씨가 처방한 약들도 증상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죠. 하지만 이런 억제는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해 약효가 떨어지면 증상이 더 심해질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억제보다는 근본적인 해소를 목표로 하는 방향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약효를 완전히 끌어낸 뒤 점차 증상을 약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물론 한 번에 모든 약효를 없애는 건 아니고 몸과 신경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이 방법은 다소 위험할 수도 있어요. 구승훈 씨가 신중히 고민한 후 결정하시면 좋겠습니다.”임희주가 말을 마치자 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준봉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이 방법을 선택하면 어떤 위험이 따를까요?”임희주는 커피를 천천히 저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약효를 모두 끌어낼 경우 증상이 얼마나 심각해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렇기에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준봉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반면 구승훈은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구승훈이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방안을 만든 사람이 누구죠? 노민준인가요?”임희주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제가 만든 방안이지만 노민준 씨와도 논의했습니다. 그는 이 방법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어요.”구승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생각해 보겠습니다.”임희주는 한 발짝 다가서며 덧붙였다.“빠른 답변 부탁드려요.”구승훈은 대답 없이 조용히 카페
구동근은 방에서 밤새 소란을 피운 끝에 다음 날 아침 병원으로 실려 갔다.그는 병원에 가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만 도착한 후에도 구승훈의 철저한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휴대폰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그가 난동을 부린 탓에 병실은 엉망이었지만 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직도 부수고 있네요? 그럼 내가 잠깐 밖에서 기다렸다 들어올까요?”구동근은 화가 나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이미 말했잖아. 여초연 씨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구승훈은 대꾸하지 않은 채 보온병에서 밥을 퍼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건가요?”구동근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확실히 몰라. 여초연 씨가 떠날 때 난 보내주기로 약속했고 그 이후로 여초연 씨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어. 물론 나중에 행방을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얻은 단서는 거의 없었고 여초연 씨는 아마도 M국에 있을 거야. 그 팔찌는 어제 아침 하인이 집 앞에서 발견한 거야. 안에는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고 여초연 씨의 필체로 ‘너희 부인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어.”말을 마친 구동근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여초연 씨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결국 내가 여초연 씨에게 휘둘리고 있었더라고. 만약 그때 여초연 씨가 너에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넌 여전히 나를 미워하고 있었을까?”구동근은 말을 마친 뒤 묵묵히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때 너희가 여초연 씨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여초연 씨가 나에게 그렇게 했을까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죠. 결국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밖으로 나온 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 속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그가 조롱하는 대상이 다른 사
강하리는 구승훈이 그 팔찌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아마 그 감정 속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이 시점에서 여초연이 팔찌를 보내는 것은 분명 도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구승훈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느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내가 안아줄까?”구승훈은 억지로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그럼 강 부장님은 어떻게 나를 위로할 생각이에요?”강하리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키스해 주고 안아주고 오빠라고 불러주면서 달래주면 되지 않을까?”구승훈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고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그는 빗속을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그때 그는 매우 슬펐고 심지어… 죽고 싶다고 느꼈다.구승훈이 강가에 서서 몸을 던지려는 순간 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구승훈 오빠.”그가 돌아보자 한 어린 소녀가 비를 맞으며 구승훈에게 달려와 작은 분홍색 우산을 그의 손에 건네며 말했다.“구승훈 오빠, 슬퍼하지 말아요.”그 말이 끝나자 그녀는 젖은 옷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비가 내리는 중에 힘겹게 사탕 포장을 뜯고 그에게 사탕을 건네주었다.“달콤한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빗속에서 소녀는 반달처럼 꺾인 눈으로 웃으며 물었다.“달콤해요?”구승훈은 그때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저 그 장면이 떠오르자 가슴속에 있던 서글픈 감정이 점차 따뜻하게 변해갔다.그의 어린 시절은 아마도 온통 계산과 속임수로 가득했을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의 마음에 조금의 사랑도 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잊힌 구석에서 어린 시절의 달콤함을 맛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그것은 구승훈의 삶에 존재한 빛과 같았고 아주 달콤했다.강하리는 구승훈이 말하지 않자 여전히 그가 마음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