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어릴 적 오빠랑 나랑 어촌에서 살던 거 기억나요? 그 때 정말 행복했었는데.”구승훈이 미간을 좁히며 뭐라 하려던 찰나 송유라가 말을 이어갔다.“그거 알아요? 오빠가 떠난 뒤로 나는 오빠만 기다렸어요. 오빠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지만.”송유라가 눈물을 흘렸다.어촌에서의 시간이 구승훈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송유라였다.이 정도는 들먹여 줘야 구승훈에게 통할 거다.아니나 다를까, 구승훈의 얼굴이 살짝 펴지더니, 티슈 한 장을 뽑아 건네주었다.“다신 안 버린다고 했지.”송유라가 뛸 듯이 기뻐지던 다음 순간.“하지만 유라야.”구승훈의 목소리가 다시 서늘해졌다.“앞으로 내 앞에선 알량한 수법 따윈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 나도 참아주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열린 송유라의 입이 어쩔 바를 모른 채 뻐금거렸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꾹 닫혔다.“일찍 들어가서 쉬어.”*강하리가 문 안에 들어서니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놓고 기다리는 정주현이 보였다.그녀를 보자 정주현의 눈이 반짝 빛났다.“착륙하면 연락하라고 했잖아요. 데리러 가겠다고.”“아닙니다. 택시가 편했어요.”“미안해요.”강하리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아셨어요?”정주현이 겸연쩍게 고개를 끄덕였다.“고이선이 거기까지 찾아갈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내가 먼저 하리 씨한테 접근한 거라고 일러뒀으니까 다신 찾아가지 않을 거예요.”정주현의 해명에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그렇다면 고맙네요.”정주현은 얼른 지사 오픈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한편, 프라이빗 룸 앞, 살짝 열린 문틈으로 귀를 쫑긋 세운 한 남자가 있었으니.바로 송유라를 돌려보낸 뒤 몰래 다시 돌아온 구승훈이었다.들리는 게 일 얘기 뿐이라 살짝 안심하고 있던 그 때.“주현 도련님, 죄송하지만 저 연성 지사에 입사하지 못할 것 같아요.”“왜요? 고이선 때문이에요 혹시?”정주현이 멍해졌다가 급급히 물었다.구승훈의 미간에도 다시 주름이 졌다.강하리는 담담한 표정이었
병실 앞에 도착하니 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는 간병인 아줌마가 보였다.“무슨 일이 있은 거예요?”강하리가 미간을 좁혔다. 아줌마의 얼굴에 벌건 손자국까지 나 있었던 것.“아니 글쎼 아가씨 아버님이요. 여태껏 코빼기도 비치질 않다가 잔뜩 취해 나타나서는 다짜고짜 병실에 들어가려고 하지 뭐예요. 그거 막다가 손찌검까지 당하고 결국 밀려났는데, 따라 들어가 보니까 세상에, 호흡기 전원 끄더라니까요. 돈 낭비하느니 빨리 죽는게 낫다고 중얼거리면서요. 의사선생님 불러오니까 그새 사라졌더라고요.”강하리의 얼굴에 찬 서리가 내려앉았다.사라졌던 강찬수 그 인간이 갑자기 나타나서 난동을 부릴 줄은 몰랐다.“미안해요 아줌마.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간병인 아줌마에게 오만원 권 몇 장을 쥐어주자 아줌마가 한사코 거절하면서 몇 마디 당부를 남기고 떠났다.병실에 들어가니 막 검진을 마친 담당 의사가 강하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간병인 아주머니가 제때 불러주셔서 다행히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일은 어머님이나 다른 환자분들에게도 안 좋으니까,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아버님과 잘 소통해주시기 바랍니다.”“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강하리가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의사가 나간 뒤, 강하리는 병상 위 창백한 정서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기억 속 너무나도 예뻤던 엄마의 얼굴이 너무나도 야위어 있었다.강하리는 말없이 한동안 서 있다가 병실을 나섰다.정주현은 저 켠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고, 언제 왔는지 구승훈이 문 옆에 서 있었다.“또 강찬수야?”서늘한 구승훈의 목소리.“네. 다행히도 엄마는 괜찮으세요.”구승훈을 본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강하리가 순순히 대답했다.통화를 마친 정주현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순간, 핸드폰이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여긴 괜찮으니까 두 분 다 들어가 봐요.”“어머님이 괜찮다니까 다행이네요. 저는 진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연락해요, 하리 씨.”정주현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노려보
자신이 알아서 경호원을 다시 보내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여태 이러고 있었는데.이번이 좋은 기회다 싶었다.강하리에게 엄마의 신변 보호는 꼭 필요한 거였으니까.적어도 강찬수를 막을 경호력은 있어야 했다.사실 강하리도 경호원의 필요성을 알고있었다.구승훈에게 손 내밀기가 싫었을 뿐.저 남자한테 진 신세를 갚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너무나도 잘 아니까.“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할께요.”뒤돌아 가려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콱 품 안에 껴안았다.“네가 알아서 한다고? 무슨 수로? 주해찬에게 도와달라고 할거야? 아님 정주현?”뜨거운 기운과 함께 문득, 결에 맞지 않는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구승훈의 향기가 아닌, 여성용 향수 냄새.‘송유라!’구승훈을 확 밀쳐버린 강하리.“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하든 그쪽한텐 손 안 내밀 거니까 제발 좀 꺼져줘요!”구승훈의 얼굴에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지금 네 곁에 있는 남자는 나 뿐인데도? 아직도 널 가장 신경 써주는 게 누군지 모르겠어?”강하리는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나왔다.“우리 엄마 위독하실 때 어디 있었죠? 내가 죽을 뻔할 때는요? 이제 와서 이깟 일로 구차하게 생색 내시는데, 진짜 필요 없거든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다시 병실로 들어가 버렸다.그 자리에 굳어진 구승훈.너무하네. 강하리.어떻게 매번 아픈 데만 쏙쏙 골라 건드리냐.가슴이 바늘에 찔리는 것만 같았다. 터질 것만 같은 것도 아니고 찢어질 듯 고통스럽지도 않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그런 아픔이었다.입가에 맺힌 냉소에 처연함 한 가락이 묻어났다.딩! 디리리딩 딩!승재의 전화였다.“무슨 일이야?”“형! 둘째 형 잡았어!”승재의 다급한 목소리에 구승훈이 번개같이 병원을 튀어나갔다.한편.정서원의 몸을 깨끗이 닦아준 뒤 병실을 나선 강하리는 곧장 강찬수에게 전화했다.“어이쿠, 이게 누구야. 평생 우리 딸내미 전화 한 번 못 받아볼 줄 알았더니만.”빈정이는 말투에 강하리의 관자놀이가 툭 튀었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하네요.”송유라의 어머니, 장진영이 우아하게 웃으며 일어섰다.“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입금이 제때에 안 된다면 어려워질 지도 모르지요. 제가 받을 돈을 못 받으면 입을 주체 못 하는 편이라서요.”장진영의 얼굴에서 빛의 속도로 웃음기가 사라졌다.“처음 합 맞춰보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수작질은 집어치우시죠. 나한테 위협이 통할 것 같습니까?”냉랭하게 한 마디 뱉고는 오만하게 턱을 쳐들고 밖으로 나갔다.“엄마, 어떻게 됐어?”장진영이 차에 오르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송유라가 물었다.“강찬수라는 사람, 멍청하고 탐욕스럽지만 강하리를 견졔하기에는 딱이야. 이 자만 우리 편이면 강하리는 반드시 고소 취하할 거야.”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 송유라는 손에 들고있던 소환장을 구겨 바닥에 던졌다.그 종이 뭉치를 바라보는 장진영의 눈빛도 어두워졌다.이틀 전, 송씨 가문에 도착한 소환장이었다.강하리가 간 크게도 송유라에게 법적 소송을 건다는.그것도 무려 심준호한테 위탁해서.심준호란 이름을 본 순간 장진영의 눈가가 파들파들 떨렸었다.이 지X 맞은 년이 무슨 수로 심준호를?“가장 좋은 해결책은 구승훈이 나서주는 건데.”장원영의 침음에 송유라가 낯빛을 흐렸다.구승훈에게 부탁을 안 한 게 아니었다. 밖에서 만나 식사할 때 진작 얘기를 꺼냈다.하지만 구승훈은 시종일관 대답이 없었고.처음부터 끝까지 성형 얘기 뿐이었다.“이런 일까지 오빠한테 부탁하고 싶지 않아.”짐짓 당차게 대답했었지만 송유라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구승훈이 자신을 도와줄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단 것을 말이다.……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며 강하리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다시 뱉은 뒤, 승재에게 전화했다.같은 시각, 연성시 외곽의 한 폐기창고 안.간간이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두터운 붕대를 겹겹이 감은 구승훈의 두 손은 검붉은 피로 얼룩이 진 지 오랬다.얼굴이며 셔츠에 핏자국이 튀어있었다.셔츠 맨 윗쪽 단추를 거칠게 풀어제낀 구승훈
”승재 씨, 믿을 만한 경호원 두 사람만 구해줄래요?”구승훈이 냉소를 지었다.‘하다하다 승재한테까지 부탁하면서.’구승현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나한테는 철벽이란 거지?’우드득!둔탁한 소리와 함께, 구승현이 단 방에 또 까무러쳤다.“승재 씨? 방금 그건 무슨 소리죠?”뭔가 섬찟한 소리에 강하리가 흠칫 놀랐다.급급히 스피커폰을 끈 승재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는 구승훈을 째릿 노려보고는 한 켠으로 걸어가 통화를 이어갔다.승재가 돌아왔을 때 구승현은 개처럼 바닥이 퍼져있었고, 구승훈은 느긋하게 붕대를 풀고있었다.“형, 형! 잘못했어! 제발 살려줘! 제발!”눈물 콧물 짜내며 싹싹 비는 구승현.“하나만 묻겠다. 납치 사건에 송유라도 참여했냐?”그러자 구승현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송유라가 먼저 날 찾아와서 협력하자고 했어! 난 강하리를 죽일 생각까진 아니었는데, 그 여자가 협력 조건이 강하리를 죽이는 거라고…….”구구절절 털어놓은 구승현의 말에, 구승훈의 눈 속에 오싹한 빛이 감돌았다.얼마나 지났을까, 구승훈이 픽 웃고는 밖으로 걸어나갔다.“경찰에 넘겨.”승재가 재빨리 수하들에게 구승현을 데려가라고 손짓했다.‘휴, 난 또 정말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려는 줄.’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나가 보니 구승훈이 차에 기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이제 어떡할 거야, 형?”구승훈이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뱉었다. 아주 오랜 한참이 지난 뒤 입을 열었다.“네가 강하리라면, 날 용서할 거냐?”뜬금없는 질문에 승재가 잠시 멘탈이 나갔다.구승훈 자신도 이런 의문이 들 줄은 몰랐다. 이유 모를 초조하고 당황한 기분에 가슴이 막 떨렸다.승재는 어떻게 대답해야 될 지 몰랐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상실감과 실망과 고통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형, 이젠 확실한 증거도 있겠다, 송유라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야. 강 부장이 용서하고 말고는 그 다음 스텝이고.”“처리? 어떻게?”“최소한 선은 그어야지.”“…….”‘왜
사실 납치 건은 형사 쪽이라 심준호가 관여할 분야는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역시나 심준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강하리가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네?”잘못 들은 건가? 아님 내가 이해를 잘 못 한 걸까?심준호가 천천히, 또박또박 한 번 더 말해주었다.“송유라가 하리 씨 납치 사건에 참여했다고요. 구승현이랑 공범이에요.”강하리는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변호사님은 어떻게 아셨어요?”핸드폰을 꺼낸 심준호가 동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구승현이 떠듬떠듬 사건 경유를 말하는 영상이었다.강하리를 납치한 이유, 송유라의 협력 제안, 궁지에 몰려 강하리를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린 것까지.소름이 돋도록 상세한 자술이었다.핸드폰을 든 강하리의 손 뼈마디가 하얗게 변했다.그런 거였구나.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된 거였구나.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벌겋게 되어있었다.“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까지 합치면 송유라를 감형 또는 보석이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까요?”사실 구승현의 자술서가 있으면 납치는 빼박 못 하고 성립될 죄명이었지만.송유라나 송씨 가문이나 그렇게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었다.더군다나 어쩌면…… 그 인간이 송유라를 도와줄지도.강하리가 울컥울컥 치미는 씁쓸함을 삼키며 물었다.그러자 씩 웃어보이는 심준호.“방법이 없을 거면 얘기하지도 않았겠죠. 나한테 맡겨요.”“감사합니다. 이거 왠지 자꾸 감사하단 말뿐이네요.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 지도 잘 모르는데.”“내가 알려줄까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심준호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갔다.“우리 집 노부인께서 요즘 좀 편찮으신데, 다음에 보경시에 갈 때 한번 들러 줘요.”“아, 네!”고개를 끄덕인 강하리가 갸웃하더니 물었다.“감사는 어떻게 드리죠?”“노부인 만나뵈는 건데요.”“네에?”“만나면 무척이나 좋아하실 거라서요.”강하리가 웃었다. 농담도.“네, 꼭 가 보겠습니다!”심준호와 소송 건에
강하리는 그 길로 아파트로 달려왔다.아줌마가 환하게 반겼다.“아가씨, 드디어 돌아오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리고 그 뒤 편으로 보이는, 느긋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있는 구승훈.‘X폼은. 나 기다리고 있었으면서.’강하리는 구승훈을 보는 척도 않고 곧장 침실로 걸어갔다.침실 문을 여는 순간.침대에 가득 쌓인 새빨간 장미 꽃잎.싱그러운 장미 향이 덮쳐왔다. 옆 테이블에는 커다란 케이크가 있었다.“마음에 들어?”뒷쪽에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언제 온 건지 강하리의 바로 뒷쪽에 구승훈이 서 있었다.강하리는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예전에 구승훈이 이랬다면 좋아 죽었으련만.지금은…….모든 게 의미가 없어진 이 시점에 마구마구 퍼 준다 한들 무슨 쓸모가 있을까.“이럴 시간 있으면 나한테 낭비하지 말고, 새 여자한테 해 주란 말이에요.”구승훈이 인상을 구겼다.“강하리, 날 뭘로 보고!”“개요. 개.”구승훈의 눈가가 꿈틀했다. 강하리의 허리를 끌어안아 침대에 넘어뜨렸다.장미 향기로 꽉 찬 침대.“개라고 했으니까 개 같은 짓 좀 할게.”으르렁거린 구승훈이 강하리의 목덜미를 덮쳤다.손이 그녀의 몸을 누비며 그녀를 자극시키려고 했다.하지만 강하리는 반응이 꼬물만치도 없었다.오히려 담담히 입을 열었다.“안 좋아졌다고 했잖아요.”거짓말.구승훈은 믿을 수가 없었다.3년간 둘의 속궁합은 기가 막혔다.그는 그녀의 모든 민감대를 꿰고있었고, 그가 즐기는 모든 자세를 그녀도 즐겼다.이런 본능에 가까운 것들마저 안 좋아졌다고?믿기지가 않았다.재시도하려는 구승훈을 밀쳐버린 강하리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장미꽃도 싫고 다 싫으니까,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말고 첫사랑한테 하라고요!”꽃잎 한 줌을 집어 구승훈에게 던지고 벌떡 일어나 드레스룸에 들어갔다.캐리어 속 모든 게 원위치로 돌아가 있었다.강하리는 그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되넣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얼굴빛이 몇 번이고 바뀌었다.짐 옮기랴 침실 꾸미랴 반나절을 바삐 돌아쳤는데
강하리는 눈 앞의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한참 뒤, 입을 열었다.“송유라가 내 납치에 참여한 거, 알고 있었어요?”구승훈이 움찔했다. 천천히 입이 열렸다.“……네가 그걸 어떻게?”짜악!강하리의 모든 힘을 실은 손이 구승훈의 뺨을 갈겼다.“구승훈, 송유라보다 당신이 더 역겨워.”강하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남기고,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걸어나갔다.가슴부터 목구멍까지 꽉 막혀 숨이 안 쉬어지는 기분이었다.걸어나갈 힘마저도 겨우 짜낸 거였다.‘알면서, 내버려 둔 거였다고?’송유라가 날 죽일 거란 걸 뻔히 알면서?그런 송유라를 감싸준 거라고?심장 끝을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파났다.강하리가 출입문 앞에 거의 다다를 때에야 구승훈은 정신을 차렸다.“화 풀릴 때까지 더 때려도 돼.”나가려는 강하리의 앞을 막았다.“비켜!”눈이 벌개진 강하리가 그의 다리를 냅다 걷어찼다. 구승훈의 눈썹이 움찔했다. 이를 악물었다.하지만 꿈쩍하지도 않았다.“네가 그랬잖아. 송유라 일에 간섭 안 하면 기회를 주겠다고.”“그때나 지금이나 같냐? 당신이 감싸준 첫사랑 때문에 내가 죽을 뻔했다고! 이 간접 살인자야!”분노가 힘으로 바뀌었다. 힘껏 구승훈을 밀어낸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아 다시 붙잡는 구승훈.“그 첫사랑인지 뭔지 맘껏 고소해! 기회 한 번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강하리, 너무 비싸게 구는 거 아니야?”몇 번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자 강하리는 바로 구승훈의 팔목을 물어버렸다.입 속에 비릿한 냄새가 퍼질 때에야 입을 떼었다.“꿈도 꾸지 마.”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구승훈의 가라앉은 눈길 속에서 강하리가 사라졌다.그의 눈에 위험한 빛이 감돌았다. 핸드폰을 꺼내 심준호에게 전화했다.회의 중이던 심준호가 회의를 중단하고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어, 무슨 일이야?”“할 일 없으면 발 닦고 잠이나 자든가.”“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오리발 내미시겠다? 강하리한테 일러바칠 명분이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