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야, 괜찮아?”손연지의 격정스런 말투.한 시간째 욕실에 짱박혀 있다 겨우 나온 강하리를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개한테 물려서.”“……구승훈이 또 찾아갔었어?”“마주쳤는데 억지로 끌려갔어.”“저기,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손연지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구승훈이 여자가 없어서 너한테만 집적대는 건 아닐 거고. 혹시 진짜 너 좋아하게 된 거 아니야?”“퍽이나. 있을 땐 먼지 취급 하다가 없어지니까 매달리는 건 뭔데.”손연지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참 여러모로 답이 없네, 구승훈.……그 뒤로 며칠은 거짓말처럼 구승훈이 보이지 않았다.물론 왜 그런지는 강하리는 하나도 안 궁금했지만.그 대신 강하리가 매일 마주한 건, 산더미처럼 밀려 들어오는 일이었다.대타로 오기로 한 부장은 아직이고, 연말이 다가오다 보니 업무 양이 말도 안 되게 늘어나고 있었다.덕분에 강하리는 일정이 차다 못해 넘쳐나는, 알찬(?) 마지막 한 달을 보내야만 했다.정주현의 식사 요청도 번번이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퇴근해 집에 도착하면 밤 열한 시를 훌쩍 넘겼으니까.모처럼 정시 퇴근한 어느날, 막 퇴근 카드를 찍으려는 강하리애게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왔다.“강 부장, 묻고싶은 게 있는데.”“네, 얘기하세요.”“통화로 하긴 좀 그렇고, 어디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싫어요, 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누르고 승낙했다.요즘 들어 사내에서 만나기만 하면, 뭔가 할 얘기가 있는 것처럼 입을 벙긋거리던 구승재였다.무슨 얘기가 나올지는 대충 생각해도 짐작이 갔다.강하리와 구승훈 사이를 가장 응원하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구승훈과 끝났다는 걸 철저하게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강하리는 회사 건물을 나와 승재가 주소를 보내온 근처의 한 음식점에 도착했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막 주문을 마치는 구승재가 보였다.“강 부장이 단 거 좋아한다고 형이 그래서, 달착지근한 맛 위주로 시켰어요.”겸연쩍게 웃는 구승재.다, 보인다.
강하리가 고개를 들자, 정장 차림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의미를 알 수 없는 고요한 눈길로 강하리를 주시하고 있었다.“형, 여긴 어떻게 왔어?”승재가 벌떡 일어섰다.어색한 말투, 드디어 왔냐는 듯 빛나는 눈.강하리에겐 그저 대놓고 “작전 성공”이라고 들렸다.그러자 구승훈이 기다렸단 듯 옆에 앉는다.“퇴근길에 지나가다 승재가 보이길래.”짤막한 대답과 그렇지 않은, 강하리를 향한 눈길 속에 꾹꾹 눌러 담은 그리움.정말 미치도록 보고싶었다.모닝회의나 서류 이관을 핑계로 눈도장이라도 찍으려 했지만.강하리는 작정하고 자신을 피할 생각인 모양이었다.모닝 회의는 안예서를 대신 보냈고, 서류는 비서실장에게 맡기고 도망치듯 사라지곤 했다.그래서 미웠다. 화가 났다.하지만 조바심을 낼 수록 더 멀리 달아날 거란 걸 알기에 꾹 참았다.그런 구승훈과는 달리, 강하리는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옆에서 전해오는 구승훈의 시선이.아니, 둘을 감싼 공기마저도 껄끄러웠다.“저기, 승재 씨.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요.”구승재가 흠칫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렇게 보낼 거냐고, 뭐라도 좀 해 보라고 구승훈에게 바쁘게 눈짓했다.“거참, 밥 한 끼도 같이 못 먹나?”강하리의 손목을 덥석 잡는 구승훈.“배불러서요. 천천히 많이 드세요.”하지만 구승훈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정주현 만나러 가는 거야?”“네, 맞아요. 그러니까 이거 놔 주세요.”그러자 조롱 섞인 웃음을 날리는 구승훈.“확실해?”강하리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네. 확실합니다.”문득 강하리 앞에 핸드폰 한 대가 슥 내밀어졌다.강하리의 눈길이 화면에 멈췄다.사진 한 장이었다.정주현이 한 여자과 마주 앉아, 화기애애하게 식사하고 있는.여자는 강하리가 아는 사람이었다.심준호의 조카, 고이선.“여기 끼러 간다고? 진짜?”강하리가 무덤덤하게 사진에서 눈을 떼었다.“진짠데요.”망신살 한 번 뻗쳐 보라는 듯한 구승훈의 비아냥에
”예?”강하리가 멈춰섰다. 귀를 의심했다.“담당 프로젝트 중 하나가 계약에 문제가 좀 생겨서, 강 부장님 출장 일정이 잡혔어요.”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다시 들려오는 신도윤의 목소리.“……꼭 본인이 가야만 하나요?”“네, 협업사 쪽에서 꼭 담당자와 대면해 얘기해야겠다고 해서요.”“알겠습니다. 수하 직원 동반도 가능하죠?”신도윤이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곧 대답이 돌아왔다.“안예서 씨 말씀하시는 거죠? 그럼요. 내일 공항에서 합류하라고 일러둘게요.”다음날 아침.공항 터미널에 도착한 강하리에게 정주현의 전화가 걸려왔다.“주말인데 시간 되시죠?”강하리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죄송해요. 출장 일정이 잡혀서 지금 공항이에요.”“……주말인데 출장이요?”정주현의 어이 없다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이거 냄새가 확 나는데? 구승훈이 일부러 그런 거죠?”“그러게요. 이직 전에 아주 골수까지 쪽쪽 빼먹을 기세네요.”“언제 돌아와요? 지사 입사 전에 의논할 디테일이 있는데, 돌아오면 데리러 갈게요.”강하리는 돌아오는 날짜에 맞춰 정주현과 식사 약속을 잡았다.어제 봤던 사진에 대해선 한 마디도 언급이 없었다.정주현과 통화를 마친 후, 강하리는 서류들을 보며 안예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이륙 1시간 전이 되었지만 안예서는 나타나지 않았다.강하리는 연거푸 시간을 확인하며 미간을 좁히다가 결국 안예서한테 전화했다.“부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어지간히 놀란 듯한 안예서의 목소리.강하리의 얼굴이 급 어두워졌다.“어제 신 실장한테서 연락 못 받았어? 오늘 출장이라고.”“네? 출장이요? 오늘요?”“…….”강하리는 지끈거려 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아니야. 주말인데 잘 휴식하고.”통화를 마친 강하리가 깊게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구승훈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웬걸, 바로 끊어버리는 구승훈.‘이 인간이!’깊은 빡침(?)이 밀려왔다.설마 설마 했는데. 업무에서만큼은 장난치지 않을 줄 알았는데.이건
”표정이 왜 그렇지? 정주현의 차 옆 자리엔 잘도 앉더만.”“…….”강하리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피곤해 보이네. 수면 부족인가?”“…….”아예 눈을 꼭 감아버린 강하리.참자. 참아야 한다.저 깐족거림이 양아치 뺨치는 인간이 아직 내 대표님이다.왜 피곤한지 몰라서 물어, 라고 빼액 외치고 싶었다.갑작스레 잡힌 출장 때문에 관련 서류들을 준비하느라 날 새다시피 했으니까.우우우웅-.비행기 이륙 소리와 함께, 걷잡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강하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구승훈의 눈길이 그녀의 얼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눈 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이윽고 커다란 손으로 강하리의 머리를 받쳐,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에 내려놓았다.강하리가 깼을 때 비행기는 이미 착륙해 있었다.승객들이 분주하게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자신은 옆 남자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잠깐!강하리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그러고 보니 자신의 몸에는 어느샌가 수트 상의 한 벌이 덮어져 있었다.그 남자한테 선물했던 바로 그 수트.문득 강하리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는 느낌이 들었다.지난 3년동안, 몸에 배어버릴 정도로 익숙한 광경.매번 함께 출장갈 때마다 기대던 넓은 어깨.매번 잠에서 깨면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던 수트 상의.그리고, 그 모든 게 깨져버린 지금.아름답던 기억의 파편들이 날카롭게 목구멍에, 가슴에 파고든다.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옷, 감사해요.”“말로만?”부르퉁한 남자의 목소리.강하리는 대답이 없었다.흥, 콧방귀를 뀐 구승훈이 일어나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강하리는 캐리어를 내려 끌고 그 뒤를 따라갔다.출구를 나서자마자 갑자기 엄습하는 추위.보경시의 연말은 혹한기였다.훅 들어오는 찬 바람에 강하리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바로 그때, 두툼한 외투가 어깨에 내려앉았다. 외투에 배어 있는 깊은 우드향이 강하리의 코 끝을 간질였다.“얌전히 걸치고
”알겠습니다. 딴 데 알아볼께요.”휙 돌아선 강하리가 밖을 향해 걸어갔다.대뜸 구승훈에게 잡혔지만.“놔요!”안간힘을 쓰며 벗어나려는 강하리를 보는 구승훈의 눈이 위험하게 번득였다.“한 방 쓰면 죽기라도 해?”“아니, 지금 한 방 쓰는 게 옳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난 괜찮아.”“내가 안 괜찮거든요!”강하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와락!다시 강하리를 잡은 구승훈이 거칠게 그녀를 끌어당겨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강하리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들도 타고있어 가만히 있었지만.온 몸의 모든 신경세포들이 외치고 있었다.왜? 도대체 왜 매번 이러는 거냐고. 제발 좀 놔 달라고.엘리베이터가 멈췄고, 구승훈이 그대로 강하리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문이 닫히는 순간, 우악스럽게 강하리를 문에 밀어붙인 구승훈.강하리는 버둥거렸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광기로 물든 남자의 시선이 강하리에게 꽂혔고.곧 이어 묵직하고 거친 숨소리가 강하리의 입술을 덮쳤다.딩! 디리리딩! 딩!조용한 룸 안에 느닷없이 울려퍼진 전화벨 소리.콱!“으윽!”구승훈이 주춤한 순간, 강하리가 온 몸의 힘을 실은 힐로 그의 발을 밟았다.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구승훈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그 틈에 구승훈을 밀쳐낸 강하리는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멀어져가는 강하리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구승훈의 얼굴에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핏줄 돋아난 손으로 그때까지 멋 모르고 울려대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중요한 일 아니면 죽여버린다.”성난 야수의 으르렁거림에 핸드폰 저 쪽, 승재가 얼어붙었다.“……그, 뭐야, 형, 알아낸 게 있는데.”한참 뒤에야 승재가 말을 이어갔다.“강 부장이 납치당하기 바로 전, 송유라가 둘째 형을 만난 것 같아.”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구승훈의 손이 멈췄다.“확실한 증거는?”승재가 잠시 침묵했다.“……길가 CCTV에 포착된 화면이 있는데, 거리가 멀어서 좀 희미하지만 누가 봐도 송유
한참동안 승재는 할 말을 잃었다.물론 안다. 확실한 증거 없이는 송유라를 어쩌지 못하다는 걸.하지만…….“물어볼 수는 있잖아.”“어떻게? 혹시 그 납치 사건, 네가 주도한 게 아니냐고? 아니면 날 따돌리려고 일부러 얼굴 망가뜨린 거냐고?”승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물어 봤자, 수박 겉 핥기다.“계속 둘째 추격해. 다른 건 모른 척 하고.”구승훈이 전화를 끊었다.한편, 근처 다른 한 호텔에 찾아간 강하리는 로비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호텔마다 온라인 예약이 꽉 차 있었다.임시로 예약 취소된 방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직접 왔지만 허사였다.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 화면은 메시지들로 도배되어 있었다.-어디야?-전화해.-여기 투룸이야. 안 건드릴게. 돌아와.-강하리, 전화하라고!구승훈의 전화번호를 수신 거부로 설정해 놓은 탓에, 애꿎은 톡만 잔뜩 보낸 모양이다.-요즘 바빠?이건, 주해찬이 보낸 톡이었다.-좀 많이요 ㅋㅋ-그래? 내일 보성에서 열리는 국제박람회 개막식에 연수 차 부르려고 했는데.이런 우연이 있나.-선배, 저 지금 보성이에요.주해찬이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하리야, 진짜 보성이야?”목소리에서 뛸 듯이 기쁜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미리 얘기라도 해 주지. 섭섭하다 강하리?”“급하게 잡힌 출장이라서요. 오늘 막 도착했어요.”“어느 호텔이야? 관련 서류 보내주러 갈 테니까 잠시 내려올래?”“하, 예약이 너무 어려워요 선배. 가는 데마다 꽉 찼네요.”“아직 방 못 구헸어? 이 늦은 시간에?”주해찬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지금 어디야? 데리러 갈 테니까 위치 보내봐.”강하리는 톡으로 위치를 보낸 뒤, 몇 마디 더 나누고 통화를 마쳤다.……낯빛이 푸르딩딩한 구승훈이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호텔에서 나와 강하리를 찾는 내내 톡을 보냈지만 답장 한 글자 없다.‘내 이럴 줄 알고.’다른 유심이 꽂혀있는 핸드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전화했다.“어디야.”추운 날씨만큼이나 서늘한
소홀했다.정주현을 피해 강하리를 연성시에서 멀찍이 데려갈 생각만 했다. 꿈에도 몰랐다. 주해찬이 여기서 나올 줄은.그야말로 늑대 피해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격.구승훈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택시를 세워둔 뒤, 성큼성큼 걸어갔다.가까이 가기도 전,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구승훈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두 사람 곁에 구승훈이 나타나는 순간, 강하리의 웃음이 그대로 굳어졌다.“선배, 가요 우리.”구승훈을 본 주해찬이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어디 가려고.”들은 척도 않고 주해찬의 차 문을 여는 강하리.“귀 먹었어? 어디 가냐고 묻잖아!”한 데시벨 높아진 구승훈의 차가운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직원 사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시는 거 아닌가요? 대. 표. 님.”강하리가 냉랭하게 쏘아붙였다.“출장 와서 한밤에 남자 만나는 직원의 행보를 묻는 게 지나친 간섭이다?”“대표님이 한밤에 여자 만나러 가면서 그러셨잖아요. 지나친 간섭이라고.”“…….”구승훈은 할 말이 없어졌다. 뭔가가 터질 듯 차올랐다.-이 밤중에 어디 가시게요?-지나친 간섭은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자다가 송유라의 전화 한 통에 벌떡 일어나 옷을 주워입으며, 강하리에게 던진 말이다.강하리가 코웃음을 치며 문을 열려는 순간.구승훈의 손이 우악스레 문을 밀쳐 막았다.“구 대표님. 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주해찬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강하리는 출장 온 겁니다. 그쪽 만나러 온 게 아니라. 내일 협상회에 대해 의논할 게 있으니까 그쪽이야말로 방해하지 마시죠.”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받아치는 구승훈.주해찬은 어이가 없어졌다.시커먼 속이 다 보이는데 의논은 개뿔.이 한밤중에 의논할 게 뭐가 있다고.“하리의 명예 같은 건 안중에도 없으시네요. 다 끝난 마당에 같은 방을 쓰는 게 가당키나 하십니까?”“명예 좋아하시네. 그러는 그쪽이랑 같은 방 쓰는 건 괜찮고?”구승훈의 말투가 위험하게 삐딱해졌다.“나야 3년이나 같이 잤으니까 거리낌 없는 건
”미안해요, 선배.”차 안.한참동안 말이 없던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어느모로 보나 빠진 구석 하나 없는 주해찬이었다.그런 사람이 자신 때문에 구승훈에게 비하당한 게 속상했다.“뭐가 미안해. 구승훈이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웃으며 대답하는 주해찬의 따뜻한 목소리에 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나 따위가 뭐가 좋다고.’자신이 주해찬에게 어울리는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그만큼 높은 곳에 서 있는 선배였으니까.강하리가 말이 없어졌지만, 주해찬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다 보였다. 아직 지난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급할 건 없었다. 3년이나 기다렸는데, 몇 년쯤 더 기다린다고 해도.“저녁 먹었어?”“아직이요.”“그럼 우선 밥 먹으러 가야겠네.”“대충 요기만 하면 돼요. 편의점 가서 컵라면이나 먹으려고 했는데.”주해찬이 문득 차를 세우고 내렸다. 옆에 아직 불이 켜진 디저트 가게가 보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해찬이 디저트 가게에서 나왔고, 손에는 케익 한 조각이 들려있었다.‘어, 저건?’강하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학생시절, 중독됐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사족을 못 쓰던 초코케익.구승훈과 함께일 때 한 번도 못 먹어봤던.주해찬이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가슴 한 구석에서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뭔가가 차올랐다.받아들어 한입 베어문 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함박 웃음을 지어버렸다.기억 저 편, 잊혀졌던 맛이 미각을 깨웠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고 목구멍이 간질여졌다. 그 정도로 맛있었다.‘저렇게나 행복하게 웃는다고?’뒷쪽 택시에서 지켜보는 구승훈은 죽을 맛이었다.초코케익 좋아하는 걸 알았더라면 한 트럭이라도 사줄 수 있었는데.‘3년동안 나는 뭐 한 거지?’어쩌다가 이렇게 남의 데이트나 훔쳐보는 변태 같은 꼬라지가 됐냐고.주해찬의 차가 어느 호텔에 들어섰다.“여기 심씨 가문이 경영하는 호텔이야. 여분으로 비워두는 방이 언제든 있으니까, 앞으로 보성에 출장 오면 준호한테 바로 전화하도록.”“알겠어요.
강하리 얼굴에 약간 어색함이 스쳤다. 하지만 백아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들어와 그녀의 옷을 갈아입혀 주며 넌지시 말할 뿐이었다.“너희 할아버지 말이야. 이렇게 즐거워하신 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역시 저 양반을 웃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시욱이 뿐인가봐.”강하리는 자연스럽게 백아영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할머니, 전 에비뉴 주얼리와 JM 그룹을 잘 운영하고 싶어요. 그리고 연정이도 잘 키우고 싶고요.”고요한 방 안이라서 그런지 강하리의 목소리는 유난히 담담하게 들렸다.창밖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봤을 때, 마음 한편이 여전히 아파져 오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그에게 어떤 이유가 있었든,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강하리는 그때와 같은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아래층 거실은 여전히 왁자지껄했고 설날이 다가오며 곳곳에 명절 분위기가 감돌았다.심씨 가문은 정말 오랜만에 모두 함께 모여서 화목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한편, 심준호는 팔짱을 끼고 별장 밖에 서서 그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난 네가 다시는 안 올 줄 알았어.”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그때 심준호가 갑자기 다가와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너 대체 뭐 하는 짓이야?”그동안 심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화를 꾹꾹 참고 있었다.구승훈을 믿고 강하리를 맡겼는데 돌아온 건 이런 결과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지금까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심준호도 그를 감싸주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그저 가만히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난 하리가 갑자기 뛰어내릴 줄 몰랐어.”그는 원래 조금만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노진우가 여초천을 손에 넣기만 하면 임희주가 죽든 말든 그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만약 노진우가 실패한다면
진태형은 병원에서 강하리 곁을 밤새 지켰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꽃다발을 안은 채 이쪽으로 걸어오는 임명우와 마주치게 되었다.임명우는 진태형을 보고 살짝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었다.“진 장관님, 오랜만입니다.”진태형은 눈빛을 가라앉힌 채 임명우를 바라봤다.“하리를 보러 온 건가요?”임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강 대표님과는 업무적으로 조금 얽힌 부분이 있어서요. 입원하셨다는 말 듣고 병문안 왔습니다.”진태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렇군요. 하지만 임 대표님, 하리한테 마음을 두진 마셨으면 좋겠어요.”임명우는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진 장관님,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랑 강 대표님은 정말 업무적인 관계예요. 그리고 시연 씨랑도 몇 년 전에 헤어졌고요. 제가 정말 강 대표님을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잖아요?”진태형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하리한테 마음 두지 마세요. 충고가 아니라 경고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하리한테 손을 대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미소를 짓고 있던 임명우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누구든 진태형 앞에서는 결국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장관님.”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임명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시연 씨 말이 맞았어요. 진 장관님은 시연 씨한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거 말이에요. 당신은 강하리 씨랑 비교도 안 되는 존재라는 거죠. 그러니까 저도 이제 시연 씨 따위 필요 없어요.]문자를 보낸 그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M 국에 있는 진시연은 그 문자를 보자마자 분노에 휩싸여 핸드폰을 그대로 던져버렸다.구승훈과 강하리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당장 귀국하려 했었다. 하지만 떠나기 직전에 여초연이 그녀의 길을 막았다.하지만 진시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임명우의 문자를 받고 당황한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
손연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마침 행사 중이더라고. 쿠팡 연말 세일에서 로열 프리미엄 네덜란드 분유 있거든? 영양 흡수도 잘 되고 우리 소아과 아기들도 다 그거 먹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손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봤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병원 응급실에서는 생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급히 달려온 구승재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핸드폰 화면엔 강하리의 연락처가 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매번 손이 닿았다가도 다시 멈췄다.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준봉과 노진우도 속만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그제야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이 다시 의식을 찾은 건 해 질 무렵이었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강하리에겐... 알리지 마.”구승재는 목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 형수한테는 말 안 할게.”그제야 구승훈은 안도한 듯 눈을 감았지만 구승재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병원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를 아는 터라, 강하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빠져야만 했다.그날 밤, 노민준이 직접 차를 몰고 구승훈을 요양원으로 데려갔다.“네가 또 도망치면... 그땐 나도 강하리한테 전부 말할 수밖에 없어.”구승훈은 창밖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노민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푹 쉬어.”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구승훈의 머릿속엔 강하리가 조시욱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
청소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아까 구 대표님이랑 병실 안에 계시던 남자분이랑 여기서 싸웠어요. 아마... 그중 누가 코피를 흘린 것 같더라고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에게 병실 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조시욱이 전화를 받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마쳤다.“오늘 일은, 미안해.”그는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 침대로 옮겨주려 했지만 강하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잠시 후에 또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까?”그 말에 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조시욱 씨. 선배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누굴 다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고요. 그러니까 굳이 매일 오시거나 이렇게 곁에 계실 필요 없어요.”조시욱은 사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처음 만난 그날 밤부터 이미 느꼈다.하지만 그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그녀를 두 눈으로 본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각오로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알고 싶어졌다.설령 그게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라 해도,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내가 좀 성급했으면 미안. 진짜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선배 부탁이라서 온 것도 맞지만... 난 그냥, 친구로서 너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어릴 때부터 정 회장님이랑 우리 할아버지 사이도 꽤 각별하셨잖아. 집안끼리도 인연이 깊고.”조시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은, 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과거 놓고 새로운 시작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하리는 조용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불렀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어쩐지 너무나 낯설었다.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애써 눌러왔던 감정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심장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저릿했고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임희주가... 이렇게 이 사람을 돌본 건가? 그렇다면 지금쯤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더 이상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전 이제 검사를 받아야 해요. 구 대표님, 손 좀 놓아주세요.”“같이 가줄게.”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갈라지고 낮았다.“괜찮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그 말과 함께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휠체어 좀 부탁드릴게요.”간호사는 그제야 얼떨결에 제자리를 찾은 듯 다가와 그녀의 휠체어를 받았다.조시욱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 손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구 대표님, 강 대표님 검사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간호사의 말이 이어지자, 구승훈은 천천히, 마치 억지로 손을 떼듯 그녀를 놓았다.강하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지던 기침이 터졌다. 거칠고 깊은 기침 소리, 그리고 피비린 냄새에 조시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너, 다쳤냐?”구승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지금 따라가서 뭐 하려고?”조시욱은 다급히 앞을 막아섰다.“넌 지금 상태부터 회복해야 해. 이러다 정말 쓰러진다고.”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그를 벽에 밀쳤다.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그의 입가엔 다시 피가 번졌다.조시욱은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약해 빠져선... 넌 내 상대도 안 돼.”
구승훈은 오늘 여기서 조시욱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조시욱이든, 주해찬이든 상관없었다. 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였으니까.“내가 자리를 피할까?”조시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제야 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아니요, 그냥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조시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강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네 지목했던 그 여자, 국정원을 통해서 확인해 봤는데... 국제 쪽에서 활동하는 킬러였어. 주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움직이던 인물인데 이번에 국내에 들어왔다는 건 좀 의외더라.”강하리는 놀란 눈으로 조시욱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진짜 직업 킬러였다니.“안현우가 고용한 건가요? 아니면... 임희주 쪽?”“아직 확실하진 않아. 근데 지금까지 조사로는 둘 다 그 여자랑 직접 연결된 흔적은 없어. 오히려 둘 다 접촉한 적이 없다는 쪽이 유력해.”조시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네 생각엔, 그 외에 또 누가 너를 죽이려 들었을 것 같아?”‘죽이려 든다’는 말에 강하리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사실 그날 자신을 진짜로 죽이려 했다면 안현우에게 넘기기 전에 이미 끝냈을 터였다.그렇다면 그 여자의 목적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조용히 말했다.“전, 적이 꽤 많아요. 임희주, 안현우는 물론이고... 심씨 집안, 여씨 자매, 진시연... 어쩌면 문씨나 구씨 가문에서도 누군가는 원하고 있었겠죠.”조시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서 내가 네 주변에 사람 몇 명 붙여놨어. 걱정하지 마. 사생활 간섭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 바로 다 뺄게.”“감사합니다.” 강하리는 짧게 대답했고 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근데 혹시 그거 알고 있어? 우리 할아버지랑 네 외할아버지, 전우였던 거?”강하리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자주 저희 집
노민준이 떠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좀 나아졌어?]하지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화면엔 전송 실패 알림이 떴다.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고 가슴 속 깊은 통증이 일며 피를 토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구승재가 황급히 달려왔다.“형!”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등으로 피를 닦고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냐. 그리고... 여초천 병세 위중하다는 소문 퍼뜨려.”“형, 제발 이러다 진짜 형수님도 못 돌려놓고 큰어머님까지 막을 수 없게 될 거야!”“됐어. 내가 괜찮다는데 못 알아들어?”구승훈은 지친 얼굴로 키를 집어 들고 병실을 나섰고 구승재는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얼굴로 뒤를 쫓았다.“형!”하지만 그가 병원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구승훈의 차는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노민준도 뒤늦게 병실에서 뛰쳐나왔고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내버려둬. 저렇게 살다가 죽겠다는데 어쩌겠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구승재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편,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분명히, 충분히 명확하게 말한 줄 알았다.“받아. 안 받으면 그 꼬맹이 울지도 몰라.”천아름은 옆에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정리하더니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고 구승재의 목소리는 확실히 맥이 빠져 있었다.“하리 누나.”이번엔 ‘형수님’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강하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세요?”“형이... 또 병원 쪽으로 가면 한 번만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 이제 구승훈 씨랑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 사람이 올 일도 없고 와도... 저는 안 볼 거예요. 제게 부탁하지 마시고 차라리 임희주 씨에게 부탁하세요.”“형수님...”구승재는
사실 그 남자는 임희주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입이 단단히 막힌 그녀의 눈엔 점점 절망이 차오르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눈물이 뚝 떨어진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서 다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배신할 때부터 알았어야지. 이런 꼴 당할 줄. 임희주, 감히 누굴 믿고 사모님을 배신했냐? 응?”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며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임희주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한 번만 기회만 더 달라고.하지만 남자는 그 비참한 눈빛조차 즐기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너 생각엔, 구승훈이 너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할 거 같냐?”그 말에 임희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순간의 정적. 이어지는 건, 저항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에 날카로운 바늘이 살을 찢고 서늘한 약물이 천천히 몸속에 스며들었다.몸부림치던 동작은 어느새 멈췄고 그의 눈빛을 따라 움직이던 임희주의 시선도 점점 흐려졌다.여초연 곁에서 오래 지낸 그녀는, 지금 이 약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완전히 무너지진 않지만 식물인간처럼 의식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 그 약은, 그렇게 사람을 파괴했다.바늘을 뽑아낸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딱 좋아. 테스트 겸 써보기엔 안성맞춤이지. 덕분에 새 약 연구도 진도 좀 나가겠네. 너한텐 마지막 명예다, 그렇게 알아.”병실 문이 다시 열렸고 하얀 가운에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그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꺼져 있던 복도 CCTV가 하나둘 다시 켜졌고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두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가볍게 경례하듯 인사를 건넸다.그 화면을 지켜보던 구승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이게, 대놓고 도발 아니고 뭐야.”구승훈도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승훈 씨, 어젯밤 그 시간대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창가 쪽으로 그림자가 스쳤습니다. 저희가 곧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