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이 화장실 문 손잡이에 몸을 지탱하며 강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아니에요. 음식 때문이 아니라 제가 컨디션이 좀…….”저쪽에 얼굴이 시커매진 구승훈이 보였다.“강하리, 언제까지 이러는지 두고 보자.”낮은 웃음소리로 화답하는 강하리.그제야 아줌마는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의 불꽃이 튀고있단 걸 알아챘다.구승훈이 떠난 뒤, 아줌마가 강하리를 타이르기 시작했다.“아가씨. 이러시면 아가씨 몸만 망가지세요.”“다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그렇게 강하리는 사흘을 버텼다.구승훈의 강권에 저항하듯 단식 투쟁을 이어갔다.그동안 구승훈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고.그러면서도 갈 데까지 가보자는 듯 타협하지 않았다.총성 없는 사흘 간의 전쟁.“형, 강 부장은 요즘 좀 어때?”나흘째 되는 날, 얼굴색이 말이 아닌 형에게 구승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꾸준히 고얀 짓 중이시다.”구승훈의 냉랭한 말투에 구승재가 멈칫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 뭐야. 형이 먼저 잘못했다고 수그려 보는 건 어때?”“안 한 줄 아냐?”정말이지,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굽실댄 건 처음이다.물론 어디까지나 구승훈의 기준에서.다른 의미로는, 강하리만큼 고집 센 여자가 구승훈에겐 처음이다.구승재가 속으로 욕을 뱉었다.형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어떤 식으로 수그렸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내 말은, 윽박지르지만 말고 차근차근 잘 좀 달래 보라고. 강압적 포스남 컨셉이 모든 여자한테 먹히는 건 아니니까.” 구승훈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그 고집불통이 좋은 말로 달랜다고 퍽이나 잘 듣겠다.”“그건 형 추측일 뿐이잖아.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승재의 말에 구승훈의 눈에 살짝 광채가 감돌았다.그날 퇴근 후.구승훈은 액세서리 매장에 와 있었다.어렴풋하게나마, 강하리가 귀걸이는 안 좋아한다던 기억이 떠올랐다.꼼꼼히 둘러보며 고르고 골라, 목걸이 하나를 정교하게 포장했다.지이잉-!휴대폰이 울렸다.“대표님! 어디세요
강하리는 멍한 표정이었다.시종일관 한 마디도 없었다.소리 없는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서 흘러내렸을 뿐.드디어 원하던 결말인가.하지만 하나도 안 기쁜 건 왜일까.온통 상처만 남긴 둘의 관계.아주 미약하게나마 섞여있는 달콤함도.이런 방식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아름답게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었다.구승훈이 질리면 조용히 사라져 주는 시나리오도 생각했었다.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가 먼저 떠날 줄은 몰랐다.구승훈의 눈길이 그녀의 눈물에 멈췄다. 저도 모르게 닦아주려고 손이 올라갔다.하지만 강하리가 고개를 돌려 비켜버렸다.구승훈의 손이 허공에 얼어붙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손을 거둬들였다.“아줌마가 죽 보내왔으니까 조금이라도 먹어.”구승훈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 약은 안 먹어도 돼. 억지로 먹이지 않을게.”말을 마친 뒤, 뒤돌아 서서 아줌마가 가져온 죽을 그릇에 옯겨담았다.그릇을 든 손에 뼈마디가 하얗게 튀어올라와 있었다.다 뜨고 돌아서니, 강하리가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구승훈이 급급히 그릇을 한쪽에 놓고 강하리를 부축해 일으켰다.강하리의 입술이 일 자로 꽉 다물어졌다. 소리 없이 옆에 놓인 그릇과 숟가락을 가져와, 조용히 죽을 떠 먹기 시작했다.1인분이 채 안 되는 죽을 강하리는 30분동안이나 먹었다.구승훈은 조용히 서서 강하리가 죽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그녀가 그릇을 놓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앞으로 어떻게 지낼 건데?”“회사 다니면서 먹고 사는 거죠 뭐.”“회사는 다 나은 뒤에 나오는 걸로.”강하리가 멍해졌다가 곧 웃었다.“구 대표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 에비뉴에서 이직하려고요.”“이유는?”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가급적 그쪽이랑 직장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싶어서요.”“지금 나랑 생판 남남이 되겠다는 건가, 강 부장?”구승훈의 입에서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끝낼 거면 깨끗이 끝내는 게 좋을 것 같네요.”구승훈의 얼굴
구승훈의 급발진에 강하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심준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베일에 싸여있지만.적어도 자신한테 악의가 없단 건 보아낼 수 있었다.“대표님 속은 얼마나 깨끗하시길래.”“적어도 여자 여럿 농락하는 찌질한 사람은 아니야. 약혼자도 여친도 없고. 여자랑 잔 것도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유라도 건드린 적 없어.”강하리의 입가가 실룩였다.갑자기 무슨 고백 같은 대답을 들으니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이제 저 말의 진실 여부는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잘 알았으니까, 회사 나가는 대로 이직 신청할게요. 반려되면 법적으로 갈 거니까 그렇게 아시고요.”감정적인 대화는 더이상 나누고 싶지 않았다.“아, 그리고 계약해지 확인 서류도 빠른 시일 내로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구승훈이 냉소를 지었다.“왜? 내가 한 번 뱉은 말 번복이라도 할까 봐?”“꼭 그런 건 아니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 정규 절차대로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구승훈은 심란했다. 너무나.위약금 얘기도 사실 보내주기 싫어서 놓는 으름장 같은 거였다.너무 강경하게 나오는 그녀를 일단 달랠 생각으로 감정 쪽으로는 타협했지만.어떤 식으로든 곁에 두고 싶었다.시간이 지나면, 화가 풀리면 그때 다시 설득해 보려고 했다.하지만 강하리는 치밀했다.모든 요소를 다 고려한 빈틈 없는 계획으로 자신을 향해 가드를 올렸다.그게 구승훈을 미치게 만들었다.타협이고 뭐고 꽁꽁 묶어서 자신 곁에 붙들어 매고 싶었다.하지만 강하리의 핼쓱한 얼굴을 보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계약 해지를 번복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자해를 서슴지 않을 그녀였다.구승훈의 가슴속에 말 못할 울화가 치밀었다.이 여자한테 나약해지는 자신 때문일까.아니면, 이 독한 여자 때문일까.“일단 몸부터 챙겨.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다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돌봐주게 해 줘.”꾹꾹 눌러 참으며 다시 협상을 시도했지만.“몸은 나 스스로 알아서 챙겨요. 내일 오전 9시에 노을 카
”전 후회되는 일은 안 하거든요.”강하리의 결연한 대답이 돌아왔다.구승훈은 더 말 없이 강하리를 보고만 있다가, 강하리가 영양제를 다 맞은 후 그녀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죽도 먹고 영양제도 맞은 터라, 강하리는 힘이 좀 나기 시작했다.그래서 구승훈이 안아들려고 할 때 단 칼에 거절해 버렸다.돌아온 건 구승훈의 냉소.응급실을 나온 후, 구승훈이 지나치듯 한 마디 던졌다.“일단 집으로 가. 이 몸으로 밖에서 쓰러졌다가 나 탓하지 말고.”또 시작이다. 물고 늘어지기.이젠 웃기지도 않았다.“아니에요. 괜찮아요.”강하리는 짤막한 한 마디를 남기고, 뒤도 안 돌아보고 택시 잡으러 가 버렸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구승훈은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기분이 들었다.젠장, 거름밭 돌멩이처럼 고약하고 딱딱한 여자 같으니라고.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자괴감까지 들었다.미간 팍 찌푸린 채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그제야 옆 시트 위에 놔둔, 곱게 포장된 선물꾸러미가 보였다.내가 미쳤지. 저런 여자한테 잘 보이겠다고 선물을 다 사고.구승훈은 거칠게 선물꾸러미를 콘솔박스에 던져넣고는 시동을 걸어 떠났다.같은 시각, 강하리는 길가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기분이 착잡했다.후련한 느낌도 있었다. 다신 그 남자와 송유라와 엮일 일이 없었으니까.하지만 말 못할, 다른 무언가도 있었다.그게 뭔지 확인하기도 전, 손연지의 전화가 걸려왔다.“하리야, 어떻게 됐어?”손연지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검진을 받을 때 강하리가 먹었던 약 성분이 모두 검출된 터였다.손연지는 강하리에게 약을 준 게 자신이란 걸 구승훈이 알게 될까 조마조마했다.화가 나면 구승훈에게 대들기도 하는 그녀지만.그렇다고 구승훈이 무섭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잘 마무리되어 가는 중이야.”강하리가 씁쓸하게 웃었다.그러자 핸드폰 너머, 손연지의 눈이 반짝 빛났다.“진짜? 계약 해지하기로 한 거야?”“응.”손연지가 기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너무 잘됐다! 이따가 축하 파티라도
”그래. 밥 한 끼 같이 하자. 하리 너한테 할 얘기도 있고.”주해찬이 거들었다.강하리가 시간을 확인했다.식사 시간이 아니기도 했고, 사흘 동안이나 굶은 위장에 부담이라도 가지 않을까 걱정도 살짝 들었다.“네, 그러죠.”하지만 걱정과는 별개로 선뜻 응낙하고 차에 탔다.언제 또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지 몰랐다.과식만 하지 않으면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거다.세 사람은 소문난 근처 맛집에 도착했다.문을 열고 들어서는 찰나, 한 여인과 함께 나오는 안현우와 마주쳤다.강하리와 닮은 여인.강하리를 본 안현우가 멍해졌다.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는 강하리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왜인지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안현우였다.그냥 노리개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이 기분은 대체 뭘까.“강 부장, 잘 지냈어요?”예전 같으면 만나자마자 비아냥을 퍼부어댔을 안현우지만,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덕분에요.”짤막하게 대답하는 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웠다.눈빛 속에 혐오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그러고는 몹시 불편하다는 듯, 얼른 주해찬과 정주현을 따라 룸에 들어가 버렸다.닫히는 룸 문을 바라보며 안현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오빠, 왜 저 여자만 보는 거야.”옆에 여인이 뾰루퉁해 불렀다.“그래서?”안현우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냉랭하게 대답했다.여인은 분했으나 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웃다가도 다음 순간 천둥 번개가 치는 안현우의 괴랄한 성격을 잘 아니까.더군다나 지금 상태로 봐서는 기분 잡친 게 분명했다.역시 안현우는 기분이 잡칠 대로 잡쳐 있었다.강하리의 냉담한 태도에 짜증이 마구 솟구치는 중이었다.옆에 서 있는 여인이 순간 너무나도 성가시게 느껴졌다.“꺼져. 그리고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입금은 비서한테 시켜 놓을 테니까.”그 자리에 얼어붙은 여인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차에 타 잠시 고민하다가 구승훈에게 전화했다.……“대표님, 아가씨는요?”상다리 부러지게 한 상 가득 차려놓은 아줌마가 홀로 집에 들어
구승훈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가 곧 냉소를 지었다.웃기는 여자네.계약 해지 서류를 받기도 전에 날 차단해?[보면 전화해.]톡을 보낸 뒤,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하지만 회신이나 전화는 없었다.조용하기만 한 핸드폰. 대화창도 감감무소식 그 자체였다.구승훈은 또다시 열불이 치밀기 시작했다.누를래야 누를 길이 없었다.겨우 놓아주려고 마음먹었건만.그게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사실 강하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것 쯤은 너무 쉬웠다.당장 달려가고 싶었다.하지만 그게 강하리에게는 구질구질하게 보일 게 뻔했다.알량한 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참나, 그 여자 하나 없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그나저나 핸드폰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구승훈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그러나 여전히 조용하기만 한 핸드폰.구승훈은 강하리와의 톡 내역을 거칠게 내리기 시작했다.그제야 알 수 있었다.몇 줄 안되는 메시지들. 둘이 톡으로 나눈 대화가 거의 없었다.비서를 통해 찾거나, 집에서 바로 용건만 전달하곤 했으니까.일상 토크 같은 건 해본 기억조차 없다.구승훈은 갑자기 기분이 확 잡쳤다.나랑 나눌 얘기가 이렇게도 없었나?다른 사람들과도 이런 식인 건가?아마 아닐 거다.친구와는 너무나도 즐겁게 수다 떨던 강하리다.문득, 둘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강하리가 한동안 톡을 자주 보내던 게 생각났다.외출했다가 귀엽게 생긴 구름 송이를 봤다고.맛있는 요리 조리법을 새로 배웠다고.이것저것 사진도 많이 보냈고, 그날 기분도 공유했었다.그때마다 자신은 어떻게 회신했던가?기억을 짜내 봤지만, 없었다.아마 안 했을 거다.구승훈의 시점에서 그것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잡담에 불과했으니까.심지어 이런 쓸데없는 건 보내지 말라고 화를 냈을 수도 있었다.구승훈은 깊은 주름이 만들어진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꾹 집었다.그러다 벌떡 일어서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밖에 나간 구승훈이 구승재에게 전화했다.“승혁이 쪽은 얼마나 알아
”그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언제든 강 부장님을 영입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정주현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그렇다면 저야 고맙죠.”그렇게 몇 술 뜨지도 않은 저녁 식사 자리가 끝났다.주해찬이 정주현을 호텔에 데려다준 후, 차 안.“요즘 좀 어때? 구승훈이랑은…….”강하리가 잠시 침묵에 빠졌다.솔직히 구승훈 얘기는 하고싶지 않았다.정작 떠날 때가 되니 왠지 가슴이 답답해났다.좋든 나쁘든, 너무 깊숙히 새겨진 기억들 때문일까.“잘 끝나가는 중이에요. 그나저나 선배.”강하리가 급히 말을 돌렸다.“박 교수님께 일 좀 더 달라고 부탁해 줄래요?”“걱정 마. 내가 교수님께 잘 말씀드려 둘 테니까.”운전대를 돌리던 주해찬이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사실 나는 네가 통역실에 올인했으면 하거든. 정식 입문이 잘 돼야 일거리도 많아질 거니까. 교수님 곧 퇴직하실 건데, 네가 사업 이어받길 바라고 계셔.”올인하기 싫은 게 아니었다.하지만 구승훈의 지원이 없어지면, 통역실 하나로는 엄마 약값도 모자랐다.송유라와의 소송 비용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심준호가 도와주겠다고 해서 넙적 공짜로 받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네요. 돈 벌어야 해서요.”주해찬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도와줄게, 가 입가에서 맴돌았지만, 결국 입 밖에 나오진 못했다.강하리에게 급급히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그녀의 주위에, 그녀의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고 싶었다.손연지네 아파트단지 앞에 도착하자 주해찬이 차를 세웠다.“하리야, 통역실 전담 말인데. 다시 생각해 보길 바란다. 흔한 기회도 아니고, 박 교수님께서 여러 번 꺼낸 얘기기도 해.”강하리가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차에서 내렸다.그때 마침 손연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언제 와? 나 자금 맛있는 거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얼른 와서 먹어. 아참, 과식은 안돼?”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알았어. 곧 도착해.”“맞다, 나
”미안하다.”한 마디가 구승훈의 입에서 힘겹게 흘러나왔다.“뭐, 됐어요. 다 지나간 일인걸요. 송유라가 그렇게 중요하면 걔랑 잘 지내요. 두 사람 다내 주위에 더이상 보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송유라 얘기에 구승훈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이렇게 나를 혐오했던 건가?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송유라는 왜 여기서 나오고?내가 언제 송유라와 지내겠다고 했나?돌아서서 갈 길을 가려고 하는 강하리의 팔목을 붙잡았다.“또 왜요?”강하리가 의아한 눈길을 보내왔다.“조금이라도 만회할 기회를 줘. 연락 씹는 일 같은 거,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 네 전화는 자다가도 받을께.”“만회할 기회라고 했나요?”강하리가 픽 웃었다.“뭐든 말만 해. 다 들어줄게.”“송유라가 나한테 했던 짓들, 그대로 돌려줘요.”“…….”구승훈이 뚝 멈췄다.강하리의 팔목을 잡은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얼마나 지났을까, 구승훈이 겨우 입을 뗐다.“유라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우리 둘 사이.”“아, 그래요?”강하리가 냉소를 지으며 팔목을 빼냈다.“그럼 내일 계약 해지 깔끔하게 끝내는 걸로 해요.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죠?”한 마디를 남기고, 강하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 버렸다.구승훈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참 달래기 힘들다, 강하리.……초인종을 누르자 우다다 달려나오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여는 손연지.“구승훈이 아직 밖에 있어!”살 떨리는 듯한 손연지의 말투에, 강하리는 별 흥미가 없단 듯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주방에 들어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나오는 밥솥을 열었다.전복죽이었다.강하리는 죽 한 그릇을 떠서 식탁 앞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하리야, 괜찮아?”맞은 편에 앉은 손연지가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응.”“구승훈이랑 얘기 다 나눴고?”“내일 계약 해지 서류 확인하러 가. 그거 가져오면 우리 둘은 영영 끝인 거고.”“손해배상으로 받는 건 없고?”손연지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그냥 끝내면 안 되지! 그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
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가늘어졌다.바의 어둡고 밝은 조명 아래,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깊게 가라앉았다.“최하영 씨에게 전화해서, 연성시에 있는 형수님을 잘 돌봐주라고 해. 필요하면 안현우에게 직접 손을 써도 돼.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구승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임희주 씨는 어떻게 할 거야?”구승훈은 비웃음을 띠며 눈을 내리깔았다.“임희주는 아직 시험하고 있어. 하지만 오래가진 않을 거야. 여초연이 임희주에게 그렇게 긴 시간을 주진 않을 거니까.”구승재는 잠시 형을 바라보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왜?”구승훈이 시선을 돌렸다.구승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방금 형수님이 이혼 서류를 서산 퍼스트 빌리지로 보냈어.”구승훈은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입가에는 쓴웃음이 맴돌았다.“정말 빠르네.”그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폭탄을 보내지 않은 걸 보면 봐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구승재는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입을 다시 다물었다.서산 퍼스트 빌리지의 정원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구승훈은 이곳에 리시안셔스를 가득 심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이 정원에서 강하리와 함께 늙어갈 거라 믿었다.하지만 텅 빈 지금의 주택은 그의 마음처럼 공허했다.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이혼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약속을 상징하는 결혼반지도 그 위에 놓여 있었다.구승훈은 반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자기야, 나 이혼하고 싶지 않아. 괜찮을까?”그러나 텅 빈 주택에는 그의 말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다음 날, 드물게 햇살이 쨍쨍했다.강하리는 붉은색 긴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화장을 했다.가정 법원에는 사람들이 북적였고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도로 건너편에서 구승훈은 묵묵히 강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휴대폰은 계속 울렸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준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바는 여전히 활기 넘쳤지만 구승훈이 앉아 있는 바 카운터 앞에는 텅 빈 술잔이 열 개도 넘게 쌓여 있었다.천아름은 한 칸 떨어진 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결혼식을 취소한 건 분명 구 대표님이면서 강하리보다 더 힘들어 보이네요.”구승훈은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가볍게 웃으며 술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천아름은 바 카운터에서 술잔을 집어 들고 따라 마시며 말했다.“남자들에게 여자는 그저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인가 봐요?”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어 구승훈에게 내밀었다.“결혼식 날, 우리 하리 사진이에요.”구승훈의 시선이 사진으로 향했다.메이크업실에서 찍은 듯한 사진이었다.강하리는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옆에는 천아름과 손연지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사진 속 강하리는 이후에 닥칠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두 번 숨을 내쉬었다.“그날, 하리는...”천아름은 휴대폰 화면을 끄며 말했다.“그날 하리는 구 대표님을 찾으러 갔어요. 우리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죠.”구승훈은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몸을 기울였다.천아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이유라고 물어봅시다. 구 대표님이 여태 사랑했던 여자는 강하리뿐이었잖아요. 분명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그런 선택을 한 거예요?”구승훈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깊게 빨아들인 후에야 대답했다.“아무 이유 없어요. 그냥 갑자기 재미없어져서, 결혼하기 싫어졌어요.”천아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알겠어요. 지금이 재밌다면 계속 그렇게 살아요. 하지만 하리 같은 여자는 아이가 있어도 구혼자가 줄을 설 걸요? 구 대표님, 후회하지나 말아요.”그녀는 의자에 걸쳐 둔 헬멧을 들고 구승훈의 어깨를 툭 치며 돌아섰다.때마침 구승재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헬멧을 안은 채 나오는 천아름과 마주쳤다
하지만 몸은 탈진한 듯 힘이 빠졌다.그저 질렸을 뿐이라니.강하리는 웃으며 눈가의 씁쓸함을 애써 삼켰다.“강 대표님, 제가 모셔다드릴까요?”임명우가 그녀의 등 뒤에서 조심스레 물었다.“괜찮아요.”강하리는 짧게 대답하고 자신의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대리운전을 불러 차를 맡긴 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집으로 향했다.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고 길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그러나 강하리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하이힐을 손에 들고 맨발로 차가운 아스팔트를 밟으며 걸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가 짧아졌다.강하리는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애초에 도박을 건 것은 자신이 아닌가?이제 패배를 인정할 때였다.하지만 가슴 한편이 텅 빈 듯 아팠고 숨을 쉴 때마다 폐 깊숙이 스며드는 통증이 뼛속까지 얼어붙었다.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자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시 후, 차가운 공기 속에서 눈물은 투명한 이슬로 변했다.한편, 구승훈은 핸들을 부술 듯이 꽉 쥐고 천천히 움직였다.검은색 마이바흐는 그렇게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강하리의 뒤를 따라갔다.한참 뒤, 그는 결국 휴대폰을 들어 ‘강하리’라는 이름 위에서 머뭇거리다 이내 다른 번호를 눌렀다.“구승훈 씨, 전화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손연지는 전화를 받자마자 화가 난 듯 소리쳤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앞에서 홀로 걷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제가 잘못했어요.”“미안했다고 하면 다예요?”손연지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결혼하기 싫었으면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요? 하리를 결혼식장에 혼자 남겨두고, 사람들이 어떻게 수군거리는지 알기나 해요?”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꾸짖음을 묵묵히 받아들였다.한참을 쏟아내던 손연지가 한숨을 내쉬고 조용해진 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리 데리러 와줘요.”손연지는 곧장 강하리에게 달려갔
강하리가 떠난 후, 복도는 다시 고요해졌다.구승훈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창가에 서 있었고 손에 든 은은한 불꽃이 계속 깜박거리고 있었다.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다 봤어요?”임명우가 빙긋 웃으며 방에서 걸어 나왔다.“참 우연이네요, 구 대표님.”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가볍게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임 대표님의 취미가 남의 사생활 엿듣기였나?”임명우는 옆으로 다가와 낮게 웃으며 아래층 불빛을 바라보았다.“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저는 단지 강 대표님과 구 대표님 사이의 일에 관심이 많을 뿐인데요.”그는 한 박자 쉬고 덧붙였다.“아, 맞다. 구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오래전부터 강 대표님께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항상 구 대표님만 바라보았고 저는 다가갈 틈조차 없었죠. 한때는 포기했어요. 강 대표님이 저를 싫어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기회를 주시다니,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그의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스며 있었다.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담배를 피우며 어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임명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삭이듯 말했다.“설마 구 대표님, 정말로 강 대표님을 포기하시려는 건 아니죠? 저는 혹시나 연기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렇다면 이제 저는 당당하게 강 대표님에게 다가가도 되겠네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이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날렵한 팔이 순식간에 움직였고 힘줄이 선명하게 돋아난 손가락이 임명우의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쾅!순간,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임명우의 머리가 강화 유리에 부딪혔다.유리는 거미줄처럼 촘촘한 금이 번지며 위태롭게 흔들렸고 구승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붉어진 얼굴의 임명우를 바라보았다.표정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깊은 눈동자에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무슨 수작을 부리든 상관없어. 하지만 강하리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넌 살아 있는 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임명우는
강하리는 비웃으며 시선을 돌렸다.“임 대표님, 사회적 거리 두기, 모르세요?”임명우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아무 반응도 없네요?”“장난에 굳이 반응할 필요가 있나요?”강하리는 무심하게 답했고 임명우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구승훈은 어떻게 생각할까요?”강하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무슨 생각을 하든 이제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진실을 밝히는 것이지, 이미 끝난 관계에 미련을 두는 게 아니었다.그가 그녀를 결혼식장에 혼자 남겨두고 떠난 그 순간부터, 모든 건 끝났으니까.“혹시 나중에 찾아와서 주먹이라도 날릴까요?”임명우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강하리는 조용히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임 대표님, 계속 장난칠 생각이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임명우는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가벼운 농담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는 곧장 태도를 바꿔 다음 회의 내용을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레스토랑 저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계속 신경에 거슬렸고 손에 쥔 젓가락을 무의식적으로 움켜쥐었다.“죄송하지만, 술 좀 주세요.”강하리는 갑자기 임명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임명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음을 지었다.“어이구, 강 대표님이 술 마시고 싶었나 봐요?”강하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 시선에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임명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거두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종업원을 불렀다.곧 레드 와인 한 병이 테이블에 놓였고 강하리는 잔을 들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마셨다.그러나 와인 한 잔은 금세 다 비워졌고 술이 들어가자 강하리의 마음도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멀리서 들려오던 웃음소리도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고 눈앞의 세상은 희미하게 번져갔다.구승훈은 자주 강하리를 냉정하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이 세상에서 구승훈보다 더 냉정한 사람이 있을까?구승훈은 지금도 저쪽에
임명우가 강하리와 약속한 장소는 펠리스 빌딩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강하리는 임명우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순간, 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잠깐만요! 구승훈 씨, 빨리요!”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강하리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바로 그때, 임희주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강하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듯,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강 대표님, 우연이네요.”강하리는 차가운 눈빛을 던지며 가볍게 웃었다.“결혼 증명서 받기 전까지는 저, 아직 구 대표님 아내예요.”짧은 한마디에 임희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이내 구승훈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강하리의 굳은 표정과 달리 구승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러웠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힐끗 보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엘리베이터 문은 좁은 공간은 순식간에 무겁고 숨 막히는 공기로 가득 찼다.임희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가볍게 웃었다.“구 대표님, 아내분께 인사 안 하세요?”강하리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필요 없어.”단 네 글자. 그 짧은 말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이미 상처 난 마음을 다시 한번 깊숙이 베어냈다.강하리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결혼식도 제멋대로 취소하고 오지 않은 사람이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건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엘리베이터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1층에서 68층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분 남짓이었지만 강하리에게는 두 시간처럼 길고도 고통스러웠다.마침내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강하리는 주저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임명우는 미소를 머금고 구승훈을 힐끗 바라보고는 이내 강하리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우리도 나가요.”임희주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구승훈의 표정은 아무 변화도 없었고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한참 후에야 짧게 입을 열었다.“가요.”임희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구 대표님, 정말 병
구승훈은 여전히 아파트 건물 아래에 서 있었다.연성시의 겨울은 눈조차 내리지 않았지만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그는 잔뜩 움츠린 채 목을 움직이며 대답했다.“알았어. 최대한 빨리 간다고 전해줘.”짧게 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준봉은 끊긴 휴대폰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창가에 앉아 있는 강하리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건지, 깊은 생각에 잠긴 건지 알 수 없었다.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한참 뒤, 강하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준봉을 바라보았다.“부탁드려요. 주식 양도는 이미 공증을 마쳤고 그가 줬던 옷과 장신구도 모두 정리해서 보냈어요. 구씨 가문 할아버지가 주신 재산도 돌려드릴 거예요. 그리고 연정이 양육권은 제가 가질 겁니다.”마치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 강하리는 짧게 말을 끝맺고 방을 나섰다.준봉은 그녀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방을 나선 강하리는 문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서 주택을 한동안 바라보았다.구승훈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오는 듯했다.또한, 연정이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강하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참았다.강하리가 결혼 증명서를 바꾸자고 했을 때, 적어도 잠시라도 망설일 줄 알았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냉정했다. 이성적인 태도 뒤에 감춰진 무심함이 오히려 그녀를 조롱하는 듯했다.강하리는 시들어버린 정원을 바라보았다.강하리는 결국 포기할 수 없었다.이렇게 오랜 시간 노력하며 그녀가 원했던 건 단지 구성훈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그러나 그 단순한 바람조차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미안함도 없이 이뤄지지 않는 꿈이 되어 버렸다.크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차고 쪽에서 연정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심준호는 연정이를 안고 땅에 떨어진 참
강하리는 자신이 어떻게 호텔을 빠져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차를 몰고 나온 순간부터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까지, 모든 것이 흐릿했다.그저 추웠다.차 안의 에어컨을 최대로 올렸지만 차가운 공기는 심장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창밖에는 녹지 않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통화 중’ 상태를 반복하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강하리는 핸들을 틀어 차를 길가에 세웠다.그 순간, 애써 참았던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현실을 부정하려고 애썼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포기했다.그에게 어떤 이유와 사정이 있었든, 결국 그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그동안 자신이 쏟아부었던 모든 노력이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했음을 깨닫고 강하리는 눈물을 머금은 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뒤따라오던 심준호와 손연지도 급히 차를 세우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맨발로 차에서 내리는 강하리였다.운전하려고 하이힐을 벗어 던진 듯했지만 차가운 눈밭 위에서도 그녀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녀의 모습은 마치 시들어 버린 꽃잎처럼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을 찾아가고 싶지도 않았다.이제 그녀도 포기했다.그토록 오랫동안 얽매였던 남자를,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너무 지쳤고 더는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그가 어떤 이유에서 그녀를 떠난 건지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남는 건 결국 상처뿐이었다.심준호는 다급히 코트를 벗어 강하리의 어깨에 덮어주었다.“걱정하지 마. 삼촌이 너를 위해 꼭 복수해 줄게.”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올린 강하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삼촌, 너무 힘들어.”심준호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괜찮아. 삼촌이 있잖아. 울고 싶으면 울어.”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그저 심준호의 품에 기대어 쓰러질 듯 몸을 맡겼다.“하리야!”의식을 잃기 전, 그녀가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