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처가 대표님과 결혼했어요의 모든 챕터: 챕터 481 - 챕터 490

1009 챕터

제481화

허태준은 아무 표정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기계처럼 위로를 건넸다. “명복을 빕니다.” 그 냉담함이 허태준의 어머니를 슬프게 했다. 어머니는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준이 왔니?” 삼촌 두 분이 가족들을 데리고 왔다. 다들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있었다. 슬픔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둘째 삼촌이 허태준의 어머니를 책망했다. “제가 호상이라고 했잖아요. 어르신 편안하게 가셨는데 이렇게 우시면 황천길도 편하게 못 가실 거예요.”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허태준의 손을 더 꼭 잡을 뿐이었다. 허태준은 참지 않고 받아쳤다. “가족이 돌아가셨을 때는 슬퍼하는 게 당연한 거죠. 근데 이렇게 좋아하시는 건 호상이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곧 재산을 상속받을 생각에 기뻐서 그러시는 건가요?” “너!” 삼촌이 눈을 부릅떴다. “어디 어른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허태준 아버지가 허태준을 말렸다. “일이 바쁘다며.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먼저 돌아가.” 허태준은 가기 싫었지만, 삼촌들 얼굴이 보기 싫었다. “네.” 허태준은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떴다. 허태준이 떠나자, 삼촌네 가족들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살아생전에 쟤를 그렇게 이뻐했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래. 돌아가시니 장례식장도 안 지키려는 것 봐.” 목소리가 결코 작지 않았기에 어머니는 그 대화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 아버지가 말리는데도 그들에게 달려가 울면서 소리쳤다. “태준이가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그때 그 일이 있을 때 너희 중 누구 한 명이라도 관심해 준 적 있어? 다들 뒤에서 사실은 좋아하고 있는 거 우리가 모를 것 같아? 우린 너희들이랑 아버님 재산으로 다툴 생각 없어.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랑 다르게 우리 태준이는 엄청 대단하거든. 근데 너희는 남 등골 빼먹는 것 빼고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 화가 나서 뱉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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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2화

여형민은 허태준과 안지 몇십 년이 되었지만 허태준의 이런 모습은 처음 봤다. 그의 기억 속에 허태준은 늘 침착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여형민도 당연히 어르신이 허태준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고 허태준이 지금 어떤 심정일지도 이해가 갔다. 여형민은 더 이상 허태준을 말리지 않았다. 그저 허태준이 취해서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허태준이 몸집이 큰 데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리니 여형민도 그를 움직이기 힘들었다. 여형민은 직원에게 부탁해서 허태준을 연회장 내부의 소파에 눕혀 하룻밤 재웠다.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허태준은 새벽에 열이 펄펄 끓었고 헛소리까지 했다. 할아버지를 부르다가 심유진을 부르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물까지 흘렸다. 여형민은 허태준이 걱정되어 잠을 설쳤다.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면서도 무력감이 몰려왔다. 친구가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자신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비참했다. 허태준을 병원에 데려갈 수도 없었다. 만약 병원에 데려간다면 허태준 집안사람들이 또 뭔가를 알아낼지도 모른다. 여형민은 직원에게 해열제와 얼음물을 부탁했다. 그리고 허태준에게 해열제를 먹이고 얼음물에 적신 수건으로 온몸을 닦아줬다. 새벽 네다섯 시가 되여서야 허태준은 깊게 잠들었다. 여형민도 지쳐서 주저앉았다.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여형민은 아는 의사에게 연락했다. 지금 허태준의 상황을 봐서는 진료를 받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허태준은 아무리 취했어도 어김없이 아침 여덟 시에 눈을 떴다.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팠고 몸은 불덩이 같았다. 손에 수액바늘이 꽂혀있는 것이 보였다. 여형민은 한시도 허태준 곁을 떠나지 않다가 허태준이 일어난 것을 보고 급히 말했다. “일어나지 마. 바늘 뽑히면 어떡해.” 허태준이 다시 눕더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나 어떻게 된 거야?” 어젯밤에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목이 불타는듯한 느낌이어서 말하기도 힘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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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3화

“아직도 그 병은 못 고쳤어?” 여형민은 어이가 없었다. 허태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지로 옷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겨우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메마른 입술에도 생기가 돌았다. 허태준은 수액을 보면서 말했다. “아직도 얼마나 더 있어야 돼?” 수액이 반 병정도 남은 것이 보였다. “반시간정도.” 여형민이 말했다. “조금 있다가 서 의사가 바늘 뽑아주러 올 거야. 지금 담배 피우러 나갔어.” 서의사는 허태준의 의사 친구였다. 이미 주임자리까지 올라가서 환자에게 직접 바늘을 꽂아본지도 오래됐을 것이다. “걘 왜 불렀어.” 허태준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병원 관리층 일 때문에 바쁘다던데.” “그럼 뭐 어떡해. 병원도 못 가고 다른 의사를 부르기엔 믿음직스럽지 않잖아.” 허태준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서의사는 금방 돌아왔다. “금방 깼네?” 그가 허태준과 인사를 나눴다. 허태준도 미소로 대답했다. “근데 이 수액 좀 빨리 맞을 수는 없어?”허태준이 물었다. “되면 진작 했지. 나도 빨리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얼씨구?” 여형민이 놀란 표정을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일을 열심히 했대? 주임 되고 나서부터는 매일 출근시간도 간당간당하고 맞추고 어떻게든 자기 일 줄이려고 하더니?” “요즘 병원 인사이동 중이라고 했잖아. 더 높이 올라가야지! 그리고 오늘 아침에 들은 소식인데 우리 병동에 엄청 대단한 환자가 한분 오셨대. 킹 호텔의 총지배인이 직접 모셔오셨는데 그 환자랑 관계를 잘 처리해서 우리 병동에 기계 몇 대 놔주면 승진은 따놓은 당상이지.” 허태준은 킹 호텔의 총지배인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전화 쳐서 그 환자가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좀 물어봐봐.” 비록 심유진이 직접 병원까지 데려온 걸 보면 호텔 vip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이 있었다. 허태준은 그 어떤 예외도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 서 의사는 그런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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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4화

블루항공이 YT그룹과 합작하는 사실은 허태준도 알고 있었다. 허태준은 허태서 쪽에 사람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허태서는 여기저기에 투자를 했었지만 허태준이 뒤에서 몰래 수를 써놓았기에 대부분 실패로 막을 내려 몇십억의 손해를 본 상태였다. 허태서는 혼자 힘으로 그렇게 많은 투자금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모든 투자는 YT그룹의 명의 아니면 개인의 명의로 공금을 끌어 쓴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 손해를 입었고 공금은 갚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회사 대표들에게 시달림을 받을 것이다. 허태서는 돈을 모으기 위해 여러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고 허태준도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람을 구해 허태서를 무역에 뛰여 들게 하려고 구슬렸다. 허태서는 귀가 얇은 사람이었기에 결국 모험을 해볼 결심을 내렸다. 허태서는 껍데기뿐인 무역회사를 만들고 사람도 몇 명 채용한 다음 여러 항공회사들과 합작을 논했다. 허태준은 그가 어느 회사와 연계를 하는지는 관심하지 않았다. 그저 이번 합작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도록 보장하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허태서가 다시 한번 절망으로 빠져들기를 바랐다. 근데 이 일에 심유진이 말려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니 지금은 심유진과 육윤엽이 일 외에 사적으로 어떤 사이인지 알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일이 마무리되고 육윤엽이 피해를 입게 됐을 때 심유진이 자신을 탓할지도 모른다. “이따가 같이 병원까지 가자.” 허태준의 서의사에게 말했다. “형민이가 넌 병원에 가면 안 된다고 하던데.” “병문안.” 허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심유진은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보냈다. 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길에 객실 담당 매니저의 전화를 받았다. 스위트룸에 머무시는 손님이 간질병이 발작하여 구급차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심유진은 이미 육윤엽의 병세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었다. 다행히 매니저가 옆에 있었기에 일단 생명에는 위협이 없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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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5화

육윤엽이 흠칫했다. 방금까지 눈빛 속에 담겨있던 슬픔과 그리움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렇게 하죠.” 비서가 놀란 얼굴을 하였지만 육윤엽이 눈치를 주었기에 얼른 다시 표정을 관리했다. 심유진은 육윤엽을 따라 구급차에 올랐고 그의 비서도 올라탔다. 병원에 도착해서 간단한 검사를 마친 후 의사는 금방 진단을 내렸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제때에 약 챙겨드시고 푹 쉬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스트레스받지 마시고요.” 육윤엽이 심유진을 바라봤다. “그것 봐요, 제가 뭐라 했어요.” 심유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비서가 먼저 말했다. “대표님, 이왕 오신 김에 좀 더 경과를 지켜보면서 몇가지 더 검사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 육윤엽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비서는 계속 심유진에게 고자질했다. “어제도 두 번이나 아프셨거든요. 전에는 이렇게까지 자주 아프셨던 적이 없어서 걱정되네요.” 심유진도 깜짝 놀랐다. 육윤엽은 어두운 얼굴로 비서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비서는 잠깐 멈칫했지만 다시 심유진에게 애원했다. “저희 대표님 좀 설득해 주세요. 제 말은 듣지도 않아요.” “김비서!”육윤엽이 언성을 높였다. 비서는 여전히 간절한 눈빛으로 심유진을 바라봤다. “알겠어요. 의사를 불러올게요.” “아니...” 육윤엽은 심유진을 말리려 했으나 미처 잡을 새도 없이 심유진이 재빨리 나가버렸다.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육윤엽은 긴 한숨을 쉬었다. “김비서, 누가 함부로 행동하라 했지?” “삼촌.” 김욱이 오랫동안 부르지 않았던 호칭으로 육윤엽을 불렀다. “지금은 조카의 신분으로 걱정해 주는 거예요.” 순간 육윤엽의 굳은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따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삼촌은 제 유일한 가족이에요. 저 또한 삼촌의 유일한 가족이고요.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으셔야 해요.” 김욱의 매 한마디 말에 진심이 담겨있었다. “걱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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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6화

심유진은 육윤엽의 병실을 정리하고 모든 검사를 다 마치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병원에서 나왔다. 심유진이 가자마자 서의사가 육윤엽을 찾아왔다. 원래 몸이 안 좋은 데다가 검사를 하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닌 육윤엽은 지쳐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가 눈을 떴다. 서의사는 흰색 가운을 입고 있었기에 육윤엽은 의사가 진찰을 온건줄 알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근데 서의사가 웃는 표정으로 굽신거리며 다가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육윤엽은 멈칫했지만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었던 터라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육윤엽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서의사가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이 병원 주임 서강혁이라고 합니다.” 육윤엽이 그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서주임님이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서강혁은 할 말이 많았지만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 때문에 자신의 목적은 뒤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제 일은 아니고요.” 서강혁이 뒤를 돌아봤다. “제 친구가...” 육윤엽은 인상을 찌푸렸다. 병원내부 사람들이 자신과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건 그렇다 쳐도 외부에 자신의 정보를 유출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외부인을 병실에 들인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육윤엽이 화를 내며 내쫓으려는 찰나 서강혁 뒤에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육윤엽은 하려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YT그룹이 합작 제안을 했을 때부터 육윤엽은 철저한 사전조사를 했다. 허태준은 그의 친척들만큼 밖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정보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육윤엽은 그의 신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비록 CY그룹과 블루항공이 지금은 아무런 연계도 없다지만 나중에 합작을 논할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분은?” 육윤엽이 허태준을 보며 물었다. 냉담하지도 열정적이지도 않은 태도였다. 허태준이 가까이 다가가서 웃으며 말했다. “YT그룹 허태서 대표님의 사촌 허태준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 YT그룹에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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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7화

어색한 웃음을 끝으로 병실에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허태준이 얼른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번에는 로열 호텔이 아니라 킹 호텔로 가셨다면서요.” 육윤엽은 킹 호텔로 가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로열 호텔의 스위트룸이 이미 예약이 다 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안 좋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맞아요.” 허태준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기에 그 작은 감정의 파동도 바로 알아챘다. 비록 전에도 답답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허태서를 욕하고 싶었다. 분명 블루항공과 합작할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자기가 차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허태준은 자신이 아무 짓도 안 해도 1,2년 내에 YT그룹은 허태서 손에서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허태준은 허태서를 대신해 사과했다. “로열 호텔의 스위트룸은 장기적으로 예약을 해둔 손님이 계시거든요. 대표님이 일부러 예약을 못 받으신 건 아닙니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육윤엽이 손을 저었다. 비록 허태서에게 불만이 있긴 했지만 그걸 허태준에게 풀 수는 없었다. “사과의 의미와 원만한 합작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경주에 머무시는 내내 모든 지출은 저희 YT그룹이 부담하겠습니다. 호텔비와 입원비까지도요.” 허태준이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육윤엽은 그 정도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제 입원비는 이미 킹 호텔의 심지배인님이 부담해 주셨습니다.” 허태준은 심유진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까 하다가 마침 말이 나오니 바로 대화를 이어갔다. “심유진 씨인가요? 제 친구예요.” 허태준은 YT그룹과 크게 연계가 없었기에 육윤엽은 그의 사생활까지는 조사해보지 않았다. 그러니 그와 심유진의 과거 또한 모르고 있었다. 심유진과 친구라는 소리를 듣자 육윤엽은 더욱 흥미를 느꼈다. “친한 사이예요?” 허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한 편이죠. 근데 사실 유진 씨 아들이랑 더 친한 것 같아요.” 육윤엽이 심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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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8화

심유진은 호텔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허태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분의 신분이라면 은퇴를 하셔도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을 받을 텐데 돌아가셨으니 더욱 상황이 안 좋았다. 어젯밤부터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어르신의 거처를 방문하여 주변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각종 매체나 정부기관에 신고전화가 잔뜩 들어온다는 소식도 들었다. 킹 호텔은 로열 호텔의 적이긴 했으나 반이 넘는 호텔 관리층 직원들은 로열 호텔 아니면 YT그룹 산하에 있는 호텔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예전 회사에 어느정도 감사함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비록 대부분 사람들이 어르신을 만난 적은 없었지만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들 놀라워하거나 슬퍼했다. 심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생각이 더욱 복잡했다. 만난 적이 있는 데다가 자신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물해 줬던 분이셨다. 비록 마무리가 좋지는 않았어도 심유진은 부고를 듣고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심유진은 얼른 감정을 컨트롤했다. 다른 것보다 허태준의 상황이 가장 걱정됐다. 어르신과의 만남이 잦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이 허태준을 유독 아끼셨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심유진은 가족의 부고를 겪어본 적도 없거니와 친한 가족도 없었기에 허태준의 심정이 어떨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심유진은 도저히 허태준에게 연락은 못하고 여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YT그룹 회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도 며느리였던 사람인데 너무 딱딱하게 부르시네.” 여형민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원망했다. 그래도 편안해 보이는 말투에 심유진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허태준 쪽 상황이 너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예요.” 심유진은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눈빛에는 어둠이 깔려있었다.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심유진이 정신을 차리고 하려던 말을 꺼냈다. “저희 회사에 YT그룹의 직원이셨던 분들이 많아서 조문을 드리러 갈 가해요. 회사를 대표하는 입장이기도 하고요. 혹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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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9화

“유진 씨?” 아주버님이 눈을 크게 뜨며 믿기 어렵다는 듯 바라봤다. 주위 사람들 모두 호기심에 고개를 돌렸다. 심유진은 어색해서 얼굴이 붉어졌지만 못 들은 척할 수는 없었다.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닌가요?” 아주버님은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심유진이 필사적으로 눈치를 줬기에 얼른 말을 고쳤다.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나이를 먹으니 시력이 안 좋아지나 보네요.” 심유진은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 “중간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고 나서야 아주버님이 심유진에게 조용히 얘기했다. “어르신은 자기 방에 계십니다. 보고 싶어 하실 텐데 한번 들어가 보세요.” 심유진은 그 말이 진짜일지 의심스러웠으나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유진은 먼저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조문객들이 보낸 화환들이 잔뜩 놓여있었고 향냄새가 가득했다. 허태준 가족들은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쭉 둘러보니 허태준만 없었다. 심유진은 조금 놀랐다. 아무리 기억을 못 한다고 해도 이런 자리에 빠져서는 안 됐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심유진은 허태준 생각을 하느라 허태준 가족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유진아.” 허태준 어머니가 먼저 다가와서 심유진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와줘서...” 어머니의 표정에 미안함과 창피함이 드러나 있었다. 심유진은 어머니가 오해하셨다는 걸 깨닫고 얼른 해석했다. “전 킹 호텔을 대표해서 온겁니다.” 어머니가 멈칫했다. 조금 실망하신 것 같았지만 그녀는 바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어떤 신분으로 왔던 아버님은 기뻐하실 거다.” 심유진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심유진은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전 이만 가볼게요.” 심유진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벌써?” 어머니는 상당히 아쉬워했다. “아버님 방에도 갔다 오지 그러니.” 심유진도 사실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님이 자기가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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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0화

“아...” 어머니는 심유진 뒤에서 기다리는 직원들을 보며 하려던 말을 삼켰다. 심유진은 동기들과 밖으로 나가면서 기세등등하게 이쪽으로 걸어오는 세 사람을 봤다. 심훈, 사영은과 심연희였다. 심연희가 이미 허태서와 이혼했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심유진은 그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방금 허태서 옆에 심연희가 없는 것을 보고 그냥 소문이 사실이었구나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 소문도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만약 둘이 남이라면 이렇게 장례식에도 오지 못했을 것이다. 뭐가 됐던 심유진은 일단 자리를 피해야 했다. 심유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빨리 지나가려 했으나 사영은이 그녀를 알아보고야 말았다. “심유진? 너 돌아온 거야?” 사영은은 심유진을 붙잡은 채 놀라워했다. 심유진은 더 이상 감출수가 없어 그냥 그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너!” 사영은은 심유진의 태도에 화가 나 쫓아가려 했으나 심훈이 말렸다. “일단 급한 일부터.”사영은은 심유진을 노려보고는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그 세명의 등장은 허태준 가족들의 경계를 불러일으켰다. 허태서가 나서서 그들을 막았다. “여긴 왜 오신 거죠? 저희 할아버지 장례에까지 와서 깽판 치지 마세요.” “깽판이라니?” 심훈은 가장으로서 나서서 허태서에게 맞섰다. “우리 연희도 이 집 며느리였는데 제사에 참여하는 게 뭐가 잘못된 거지?” “며느리라뇨.” 허태서는 심훈 등뒤에 숨어있는 심연희를 노려봤다. “얼른 이혼 협의서에 사인하고 나가!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내 생각은 바뀌지 않으니까. 넌 정말 최악의 여자야.” 이미 두 집안의 사이가 어긋난 지 오래됐기에 심연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가 최악이라고? 누가 더 최악인지 한번 얘기해 봐? 나한테서 심유진에 관한 정보를 얼마나 캐갔어! 심지어 난 아이도 낙태했어. 나중에 심유진이 떠나고 허태준이 쓰러지니까 넌 목적에 달성해서 날 그냥 버렸잖아. 맨날 연예인들이나 모델들 데리고 외박까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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