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씨?” 아주버님이 눈을 크게 뜨며 믿기 어렵다는 듯 바라봤다. 주위 사람들 모두 호기심에 고개를 돌렸다. 심유진은 어색해서 얼굴이 붉어졌지만 못 들은 척할 수는 없었다.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닌가요?” 아주버님은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심유진이 필사적으로 눈치를 줬기에 얼른 말을 고쳤다.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나이를 먹으니 시력이 안 좋아지나 보네요.” 심유진은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 “중간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고 나서야 아주버님이 심유진에게 조용히 얘기했다. “어르신은 자기 방에 계십니다. 보고 싶어 하실 텐데 한번 들어가 보세요.” 심유진은 그 말이 진짜일지 의심스러웠으나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유진은 먼저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조문객들이 보낸 화환들이 잔뜩 놓여있었고 향냄새가 가득했다. 허태준 가족들은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쭉 둘러보니 허태준만 없었다. 심유진은 조금 놀랐다. 아무리 기억을 못 한다고 해도 이런 자리에 빠져서는 안 됐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심유진은 허태준 생각을 하느라 허태준 가족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유진아.” 허태준 어머니가 먼저 다가와서 심유진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와줘서...” 어머니의 표정에 미안함과 창피함이 드러나 있었다. 심유진은 어머니가 오해하셨다는 걸 깨닫고 얼른 해석했다. “전 킹 호텔을 대표해서 온겁니다.” 어머니가 멈칫했다. 조금 실망하신 것 같았지만 그녀는 바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어떤 신분으로 왔던 아버님은 기뻐하실 거다.” 심유진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심유진은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전 이만 가볼게요.” 심유진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벌써?” 어머니는 상당히 아쉬워했다. “아버님 방에도 갔다 오지 그러니.” 심유진도 사실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님이 자기가 죽
“아...” 어머니는 심유진 뒤에서 기다리는 직원들을 보며 하려던 말을 삼켰다. 심유진은 동기들과 밖으로 나가면서 기세등등하게 이쪽으로 걸어오는 세 사람을 봤다. 심훈, 사영은과 심연희였다. 심연희가 이미 허태서와 이혼했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심유진은 그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방금 허태서 옆에 심연희가 없는 것을 보고 그냥 소문이 사실이었구나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 소문도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만약 둘이 남이라면 이렇게 장례식에도 오지 못했을 것이다. 뭐가 됐던 심유진은 일단 자리를 피해야 했다. 심유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빨리 지나가려 했으나 사영은이 그녀를 알아보고야 말았다. “심유진? 너 돌아온 거야?” 사영은은 심유진을 붙잡은 채 놀라워했다. 심유진은 더 이상 감출수가 없어 그냥 그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너!” 사영은은 심유진의 태도에 화가 나 쫓아가려 했으나 심훈이 말렸다. “일단 급한 일부터.”사영은은 심유진을 노려보고는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그 세명의 등장은 허태준 가족들의 경계를 불러일으켰다. 허태서가 나서서 그들을 막았다. “여긴 왜 오신 거죠? 저희 할아버지 장례에까지 와서 깽판 치지 마세요.” “깽판이라니?” 심훈은 가장으로서 나서서 허태서에게 맞섰다. “우리 연희도 이 집 며느리였는데 제사에 참여하는 게 뭐가 잘못된 거지?” “며느리라뇨.” 허태서는 심훈 등뒤에 숨어있는 심연희를 노려봤다. “얼른 이혼 협의서에 사인하고 나가!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내 생각은 바뀌지 않으니까. 넌 정말 최악의 여자야.” 이미 두 집안의 사이가 어긋난 지 오래됐기에 심연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가 최악이라고? 누가 더 최악인지 한번 얘기해 봐? 나한테서 심유진에 관한 정보를 얼마나 캐갔어! 심지어 난 아이도 낙태했어. 나중에 심유진이 떠나고 허태준이 쓰러지니까 넌 목적에 달성해서 날 그냥 버렸잖아. 맨날 연예인들이나 모델들 데리고 외박까지 하고.
허태서가 바로 반격했다. “억울한 척하지 마. 애초에 나랑 같이 산 이유도 내 돈 보고 그런 거 아냐? 몇년간 사귄 남자친구도 차버렸잖아. 우리 둘이 같이 사는 건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야. 그러니까 누구도 서로를 탓할 수 없는 관계라고. 네가 가만히 있기만 하면 그냥 집에 강아지 한 마리 키운다 생각하고...” “넌 진짜 쓰레기야!”심연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허태서는 개의치 않았다. 서로를 물어뜯는 그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허태준 아버님이 나섰다. “둘 다 조용.” 아버지의 호통에 둘 다 행동을 멈췄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창피하게 할아버지 앞에서 이러지 말고.” 둘째 삼촌도 어쩌다가 그와 의견이 같았다. “태서야. 이런 하찮은 사람들이랑 이러지 마.” “누구보고 하찮다는 거야?” 심훈이 나서서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당신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좀 봐. 우리 딸 가지고 놀고는 뭐가 그렇게 떳떳해?” 심훈이 손을 대면서 상황이 매우 복잡해졌다. 사영은과 둘째 이모도 서로 머리채를 잡고 멱살을 잡으며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심유진은 이미 집 밖을 나섰으나 심연희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고 다시 돌아갔는데 이런 혼잡한 국면이 펼쳐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허태서네 가족에 비하면 심훈과 사영은은 훨씬 왜소했기에 이 “전쟁”은 금방 막을 내렸다. 심훈은 허태서 아버지에게 힘껏 밀쳐서 바닥에 주저앉았고 사영은도 허태서 어머니의 몸에 깔려 더 이상 반항하지 못했다. 맞고 있는 사영은의 모습을 바라보며 심유진은 사영은이 자신을 저렇게 대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순간 그녀는 사영은에 대한 일말의 동정이나 연민도 없었다. 그저 사영은이 이런 수모와 고통을 당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조문객들은 대부분 다급히 밖으로 나갔고 일부분은 심유진처럼 밖에 서서 싸움을 구경했다. 누가 신고한 건지는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들어와 싸움을 말렸다.
심씨네 일가가 떠나고 난 뒤 집안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모두가 전과는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허씨 어르신은 사업판에서 알아주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의 세 아들 모두 자질이 평범했다. 첫째가 그나마 나았지만 인품이 좋았을 뿐 사업 능력은 그저 평범했다. 그러니 세 아들 모두 성인이 되었어도 YT그룹은 여전히 어르신이 권력을 쥐고 있었고 돌아가실 때까지도 자리를 내놓지 않으셨다. 그리고 허씨네 3대손들은 어릴 때부터 곱게 자라서 그런지 그 아버지들보다도 더 못했다. 오직 허태준만 빼고. 어르신과 친한 사업친구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군 했다. “태준이는 네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태어난 애 같아.” 허태준의 능력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어르신도 암암리에 허태준에게 사업을 물려줄 준비를 했다. 허태준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대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상태로 CY그룹을 창립하고 신속하게 발전시켜 YT그룹과도 맞먹는 강한 기업으로 키워냈다. 모두가 허태준을 차기 회장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예상밖의 상황들이 자꾸 발생했다. 6년 전 허태준이 의식을 잃고 둘째와 셋째는 그룹 내에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그렇게 허태서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땐 모두가 YT그룹이 조만간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어르신 친구들이 평생을 바친 사업을 말아먹지 말고 유명한 기업인을 찾아 물려주라며 설득했지만 어르신은 그럴 때마다 담담하게 대답했다. “자식이 많은 것도 복이겠지 뭐. 몇 년 뒤에 내가 떠나면 이제 사업 걱정 따위 안해도 되겠어.” 몇 년이 걸릴 새도 없이 어르신은 급히 떠나버렸다. 아마 살아계셨더라면 장례식장에서의 그 사단을 보고 혈압이 올라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 허태서는 모두가 알다시피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 성적도 좋지 않았고 수능도 망해서 도피하다시피 해외로 유학을 갔다 온 사람이었다. 허태서는 귀국하고 나서 YT그룹에 이름만 걸고 월급을 많이 받으면서
심유진네 회사 직원들도 슬슬 자리를 뜨며 낮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이런 집안 내부는 이렇게 소란스럽구나.” 사실 그들 모두 심연희의 입에서 나온 심유진이라는 사람이 궁금했지만 자기 회사 상사이니 함부로 뭔가를 물어보기는 힘들었다. 호텔로 돌아오니 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심유진은 마음이 무거워 별이를 만나고 나서도 표정이 줄곧 어두웠다. 별이는 걱정되어 계속 심유진에게 물었다. “엄마 왜 그래?” 심유진은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가 알던 사람이 돌아가셔서 좀 속상해서 그래.” 돌아가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별이도 알고 있었다. 별이가 심유진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엄마 너무 속상해하지 마.” 별이는 심유진을 위로하며 예전에 심유진이 했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반복했다. “하늘의 별이 되여서 엄마 곁에 있을 거야.” 진지하게 얘기하는 그 조그만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심유진도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아는 것도 많네 우리 별이.” 심유진은 마음이 울적해 저녁을 준비할 기분도 안 났다. 심유진은 배달음식을 시켜 별이와 저녁을 먹었다. 별이는 계속 기운 없이 앉아서 TV만 들여다보고 있는 심유진을 보며 더욱 마음이 조급해졌다. 별이는 방에 몰래 숨어 허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촌, 저희 엄마 좀 보러 와 주세요.” 허태준은 오후에 심씨네 집안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찾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그때 마침 별이에게 전화가 오자 그는 바로 기사님에게 차를 돌려달라고 얘기했다. 허태준이 별이에게 물었다. “엄마가 왜?” 별이의 다급한 말투를 들으니 뭔가 큰일이 생긴 것만 같았다. “아는 분이 돌아가셔서 속상하대요.” 별이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슬퍼서 저녁도 안 만들었어요.” 심유진이 아는 분 중에 돌아가신 분이라 하면 할아버지밖에 생각이 안 났다. 어머니가 아까 심유진이 왔다 갔다고 통화 중 얘기를 했지만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
인터폰으로 문 앞에 서있는 허태준을 봤을 때 심유진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심유진은 궁금증을 안고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심유진은 허태준을 훑어봤다. 허태준은 굉장히 평온해 보이는듯한 모습이었다. 할아버지의 부고가 그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머니가 오늘 유진 씨도 장례식장에 다녀갔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허태준은 얘기를 하면서도 심유진을 살폈다. 심유진은 별이가 말한 것처럼 속상해서 넋이 나간 모습은 아니었다. 허태준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심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허태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까 상황이 소란스러워서 제대로 인사를 못했다고 미안해하시더라고요.” 허태준은 별이 얘기는 할수 없어 대충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대신 감사인사 전하고 오라고 하셨어요.” “괜찮아요.” 심유진이 웃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마음 쓰실 필요 없어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다행이네요.” 대화가 끊기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괜찮아요?” 허태준은 자꾸 새여 나오는 슬픔을 겨우 가라앉히며 말했다. “별로 감흥이 없어요. 제 기억으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그분을 처음 뵌 거나 다름없거든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라는 존재가 그에게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심유진은 어떤 대답을 했으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위로를 하기에는 너무 과한 것 같았고 이런 상황에 다른 얘기를 꺼내는 것도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한테 가보실 거예요?” 허태준은 사실 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가면 자신의 모든 행동이 가족들에게 노출되니 한시도 긴장을 놓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에 밤새 고열에 시달리기까지 했으니 허태준도 지금 몸이 만신창이였다. 허태준은 그냥 조용한 곳에 가서 감정을 달래고 싶을 뿐이었다. “아니요.” 허태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거기
별이는 계속 심유진의 눈치를 보며 그 과자를 받지 않았다. 심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먹어, 삼촌 때문에 오늘은 봐줄게.” 심유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별이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삼촌!”별이가 허태준의 팔을 끌어안으며 기대에 찬 눈길로 말했다. “삼촌 맨날 우리 집에 오면 안 돼요?” 심유진이 별이를 아프지 않게 살짝 때렸다. “삼촌이 얼마나 바쁜데 어떻게 너랑 맨날 놀아줘.” 허태준은 그저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별이는 9시가 되자 심유진이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침실로 갔다. 허태준은 심유진을 도와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정리해 놓고 소파에 벗어두었던 외투를 챙겼다. “저도 가볼게요.” 그때 심유진이 그를 막았다. “잠시만요.” 심유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세요.” 허태준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왜요?” “형민 씨는 출장 갔으니까 옆에 못 있어줄 거 아니에요.” 허태준과 별이가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여형민이 심유진에게 전화를 했었다. 허태준이 전화를 안 받는다며 어디 있는지 아냐는 질문에 심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형민은 심유진과 같이 있다는 말에 한시름 놓은 것 같았다. “다행이네요. 태준이한테 제가 급한 일 때문에 대구에 갔다 와야 한다고 좀 전해주세요. 오늘 저녁에는 챙겨주러 갈 수 없을 것 같으니까요.” “뭘 챙겨줘요?”여형민은 허태준이 어제 고열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허태준이 한번 열이 나면 얼마나 심하게 앓는지는 심유진도 알고 있었기에 옆에서 챙겨줘야 한다는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태준이가 원래 잔병이 많은데 간호사를 붙여둘 수는 없잖아요. 혹시 괜찮으시면 하룻밤 거기서 재워주면 안 돼요?” 평소 같으면 심유진은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같은 상황에서 아픈 사람을 혼자 집에 보내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심유진은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허락하
별이의 방에도 트윈 베드여서 두 사람이 자기에는 충분했다.별이는 일찍 잠들었다. 심유진은 한켠에 누워있었다. 아픈 허태준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그녀는 참다못해 한밤중에 일어났다.그녀는 살금살금 안방 방문을 열었다. 침대 곁에는 따뜻한 등불이 켜져 있었다. 희미한 불빛을 빌어 그녀는 허태준의 눈을 볼 수 있었다.허태준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히자 심유진은 멋쩍게 웃었다.“아직 안잤어요?”그녀는 방문을 닫지 않고 틈을 남겨두었다.허태준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시들시들한 목소리로 말했다.“머리가 아파서 잠이 안 와.”심유진의 가슴은 찌릿해났다.“아직도 열이 나나요?”그녀는 다가가 그의 이마를 짚었다.에어컨을 틀어놓은 방에 계속 있자 그녀의 손도 차가웠다. 심지어 그의 손보다도 더차가웠다. 그래서 그의 이마를 짚었을 때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해열제를 줄까요?”그녀는 다급히 물었다.허태준의 열은 진작에 내렸다. 그래서 약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자신한테 베풀어준 그녀의 관심이 그리웠다.“그래.”그는 대답했다.아이를 낳고 나서부터 심유진의 집에는 늘 약을 구비하고 있었다.그녀는 해열제와 테이프를 들고 왔다.“여기요. 아동용이지만 쓸 만할 거예요. 효과가 없으면 양을 늘리시면 돼요.”허태준은 그녀의 주시하에 알약 하나를 삼켰다. 그리고 그녀가 해열 테이프를 이마에 붙이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얘기 좀 하다 가면 안돼?”그가 물었다.심유진은 원래 갈 예산이 없었다. 그가 이런 요구를 제기하니 그녀도 못이기는척 대답했다.“그래요.”그녀는 침대끝에 앉아 물었다.“무슨 얘기를 할까요?”허태준은 잠깐 생각했다.“할아버지 얘기를 하지. 뵈러 갔었다며? 기억하지?”심유진은 그가 이런 얘기를 할 줄 몰랐다.“몇번 만난 적은 있어요.”그녀는 덧붙였다.“잘 알지는 못하고요.”기회가 된다면 그녀는 허태준에게 허 할아버지를 다시 잘 소개해 주고 싶었다. 소개해 주고 싶은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