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서가 바로 반격했다. “억울한 척하지 마. 애초에 나랑 같이 산 이유도 내 돈 보고 그런 거 아냐? 몇년간 사귄 남자친구도 차버렸잖아. 우리 둘이 같이 사는 건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야. 그러니까 누구도 서로를 탓할 수 없는 관계라고. 네가 가만히 있기만 하면 그냥 집에 강아지 한 마리 키운다 생각하고...” “넌 진짜 쓰레기야!”심연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허태서는 개의치 않았다. 서로를 물어뜯는 그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허태준 아버님이 나섰다. “둘 다 조용.” 아버지의 호통에 둘 다 행동을 멈췄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창피하게 할아버지 앞에서 이러지 말고.” 둘째 삼촌도 어쩌다가 그와 의견이 같았다. “태서야. 이런 하찮은 사람들이랑 이러지 마.” “누구보고 하찮다는 거야?” 심훈이 나서서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당신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좀 봐. 우리 딸 가지고 놀고는 뭐가 그렇게 떳떳해?” 심훈이 손을 대면서 상황이 매우 복잡해졌다. 사영은과 둘째 이모도 서로 머리채를 잡고 멱살을 잡으며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심유진은 이미 집 밖을 나섰으나 심연희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고 다시 돌아갔는데 이런 혼잡한 국면이 펼쳐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허태서네 가족에 비하면 심훈과 사영은은 훨씬 왜소했기에 이 “전쟁”은 금방 막을 내렸다. 심훈은 허태서 아버지에게 힘껏 밀쳐서 바닥에 주저앉았고 사영은도 허태서 어머니의 몸에 깔려 더 이상 반항하지 못했다. 맞고 있는 사영은의 모습을 바라보며 심유진은 사영은이 자신을 저렇게 대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순간 그녀는 사영은에 대한 일말의 동정이나 연민도 없었다. 그저 사영은이 이런 수모와 고통을 당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조문객들은 대부분 다급히 밖으로 나갔고 일부분은 심유진처럼 밖에 서서 싸움을 구경했다. 누가 신고한 건지는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들어와 싸움을 말렸다.
심씨네 일가가 떠나고 난 뒤 집안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모두가 전과는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허씨 어르신은 사업판에서 알아주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의 세 아들 모두 자질이 평범했다. 첫째가 그나마 나았지만 인품이 좋았을 뿐 사업 능력은 그저 평범했다. 그러니 세 아들 모두 성인이 되었어도 YT그룹은 여전히 어르신이 권력을 쥐고 있었고 돌아가실 때까지도 자리를 내놓지 않으셨다. 그리고 허씨네 3대손들은 어릴 때부터 곱게 자라서 그런지 그 아버지들보다도 더 못했다. 오직 허태준만 빼고. 어르신과 친한 사업친구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군 했다. “태준이는 네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태어난 애 같아.” 허태준의 능력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어르신도 암암리에 허태준에게 사업을 물려줄 준비를 했다. 허태준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대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상태로 CY그룹을 창립하고 신속하게 발전시켜 YT그룹과도 맞먹는 강한 기업으로 키워냈다. 모두가 허태준을 차기 회장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예상밖의 상황들이 자꾸 발생했다. 6년 전 허태준이 의식을 잃고 둘째와 셋째는 그룹 내에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그렇게 허태서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땐 모두가 YT그룹이 조만간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어르신 친구들이 평생을 바친 사업을 말아먹지 말고 유명한 기업인을 찾아 물려주라며 설득했지만 어르신은 그럴 때마다 담담하게 대답했다. “자식이 많은 것도 복이겠지 뭐. 몇 년 뒤에 내가 떠나면 이제 사업 걱정 따위 안해도 되겠어.” 몇 년이 걸릴 새도 없이 어르신은 급히 떠나버렸다. 아마 살아계셨더라면 장례식장에서의 그 사단을 보고 혈압이 올라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 허태서는 모두가 알다시피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 성적도 좋지 않았고 수능도 망해서 도피하다시피 해외로 유학을 갔다 온 사람이었다. 허태서는 귀국하고 나서 YT그룹에 이름만 걸고 월급을 많이 받으면서
심유진네 회사 직원들도 슬슬 자리를 뜨며 낮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이런 집안 내부는 이렇게 소란스럽구나.” 사실 그들 모두 심연희의 입에서 나온 심유진이라는 사람이 궁금했지만 자기 회사 상사이니 함부로 뭔가를 물어보기는 힘들었다. 호텔로 돌아오니 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심유진은 마음이 무거워 별이를 만나고 나서도 표정이 줄곧 어두웠다. 별이는 걱정되어 계속 심유진에게 물었다. “엄마 왜 그래?” 심유진은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가 알던 사람이 돌아가셔서 좀 속상해서 그래.” 돌아가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별이도 알고 있었다. 별이가 심유진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엄마 너무 속상해하지 마.” 별이는 심유진을 위로하며 예전에 심유진이 했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반복했다. “하늘의 별이 되여서 엄마 곁에 있을 거야.” 진지하게 얘기하는 그 조그만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심유진도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아는 것도 많네 우리 별이.” 심유진은 마음이 울적해 저녁을 준비할 기분도 안 났다. 심유진은 배달음식을 시켜 별이와 저녁을 먹었다. 별이는 계속 기운 없이 앉아서 TV만 들여다보고 있는 심유진을 보며 더욱 마음이 조급해졌다. 별이는 방에 몰래 숨어 허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촌, 저희 엄마 좀 보러 와 주세요.” 허태준은 오후에 심씨네 집안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찾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그때 마침 별이에게 전화가 오자 그는 바로 기사님에게 차를 돌려달라고 얘기했다. 허태준이 별이에게 물었다. “엄마가 왜?” 별이의 다급한 말투를 들으니 뭔가 큰일이 생긴 것만 같았다. “아는 분이 돌아가셔서 속상하대요.” 별이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슬퍼서 저녁도 안 만들었어요.” 심유진이 아는 분 중에 돌아가신 분이라 하면 할아버지밖에 생각이 안 났다. 어머니가 아까 심유진이 왔다 갔다고 통화 중 얘기를 했지만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
인터폰으로 문 앞에 서있는 허태준을 봤을 때 심유진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심유진은 궁금증을 안고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심유진은 허태준을 훑어봤다. 허태준은 굉장히 평온해 보이는듯한 모습이었다. 할아버지의 부고가 그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머니가 오늘 유진 씨도 장례식장에 다녀갔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허태준은 얘기를 하면서도 심유진을 살폈다. 심유진은 별이가 말한 것처럼 속상해서 넋이 나간 모습은 아니었다. 허태준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심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허태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까 상황이 소란스러워서 제대로 인사를 못했다고 미안해하시더라고요.” 허태준은 별이 얘기는 할수 없어 대충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대신 감사인사 전하고 오라고 하셨어요.” “괜찮아요.” 심유진이 웃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마음 쓰실 필요 없어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다행이네요.” 대화가 끊기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괜찮아요?” 허태준은 자꾸 새여 나오는 슬픔을 겨우 가라앉히며 말했다. “별로 감흥이 없어요. 제 기억으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그분을 처음 뵌 거나 다름없거든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라는 존재가 그에게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심유진은 어떤 대답을 했으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위로를 하기에는 너무 과한 것 같았고 이런 상황에 다른 얘기를 꺼내는 것도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한테 가보실 거예요?” 허태준은 사실 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가면 자신의 모든 행동이 가족들에게 노출되니 한시도 긴장을 놓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에 밤새 고열에 시달리기까지 했으니 허태준도 지금 몸이 만신창이였다. 허태준은 그냥 조용한 곳에 가서 감정을 달래고 싶을 뿐이었다. “아니요.” 허태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거기
별이는 계속 심유진의 눈치를 보며 그 과자를 받지 않았다. 심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먹어, 삼촌 때문에 오늘은 봐줄게.” 심유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별이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삼촌!”별이가 허태준의 팔을 끌어안으며 기대에 찬 눈길로 말했다. “삼촌 맨날 우리 집에 오면 안 돼요?” 심유진이 별이를 아프지 않게 살짝 때렸다. “삼촌이 얼마나 바쁜데 어떻게 너랑 맨날 놀아줘.” 허태준은 그저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별이는 9시가 되자 심유진이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침실로 갔다. 허태준은 심유진을 도와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정리해 놓고 소파에 벗어두었던 외투를 챙겼다. “저도 가볼게요.” 그때 심유진이 그를 막았다. “잠시만요.” 심유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세요.” 허태준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왜요?” “형민 씨는 출장 갔으니까 옆에 못 있어줄 거 아니에요.” 허태준과 별이가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여형민이 심유진에게 전화를 했었다. 허태준이 전화를 안 받는다며 어디 있는지 아냐는 질문에 심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형민은 심유진과 같이 있다는 말에 한시름 놓은 것 같았다. “다행이네요. 태준이한테 제가 급한 일 때문에 대구에 갔다 와야 한다고 좀 전해주세요. 오늘 저녁에는 챙겨주러 갈 수 없을 것 같으니까요.” “뭘 챙겨줘요?”여형민은 허태준이 어제 고열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허태준이 한번 열이 나면 얼마나 심하게 앓는지는 심유진도 알고 있었기에 옆에서 챙겨줘야 한다는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태준이가 원래 잔병이 많은데 간호사를 붙여둘 수는 없잖아요. 혹시 괜찮으시면 하룻밤 거기서 재워주면 안 돼요?” 평소 같으면 심유진은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같은 상황에서 아픈 사람을 혼자 집에 보내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심유진은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허락하
별이의 방에도 트윈 베드여서 두 사람이 자기에는 충분했다.별이는 일찍 잠들었다. 심유진은 한켠에 누워있었다. 아픈 허태준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그녀는 참다못해 한밤중에 일어났다.그녀는 살금살금 안방 방문을 열었다. 침대 곁에는 따뜻한 등불이 켜져 있었다. 희미한 불빛을 빌어 그녀는 허태준의 눈을 볼 수 있었다.허태준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히자 심유진은 멋쩍게 웃었다.“아직 안잤어요?”그녀는 방문을 닫지 않고 틈을 남겨두었다.허태준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시들시들한 목소리로 말했다.“머리가 아파서 잠이 안 와.”심유진의 가슴은 찌릿해났다.“아직도 열이 나나요?”그녀는 다가가 그의 이마를 짚었다.에어컨을 틀어놓은 방에 계속 있자 그녀의 손도 차가웠다. 심지어 그의 손보다도 더차가웠다. 그래서 그의 이마를 짚었을 때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해열제를 줄까요?”그녀는 다급히 물었다.허태준의 열은 진작에 내렸다. 그래서 약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자신한테 베풀어준 그녀의 관심이 그리웠다.“그래.”그는 대답했다.아이를 낳고 나서부터 심유진의 집에는 늘 약을 구비하고 있었다.그녀는 해열제와 테이프를 들고 왔다.“여기요. 아동용이지만 쓸 만할 거예요. 효과가 없으면 양을 늘리시면 돼요.”허태준은 그녀의 주시하에 알약 하나를 삼켰다. 그리고 그녀가 해열 테이프를 이마에 붙이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얘기 좀 하다 가면 안돼?”그가 물었다.심유진은 원래 갈 예산이 없었다. 그가 이런 요구를 제기하니 그녀도 못이기는척 대답했다.“그래요.”그녀는 침대끝에 앉아 물었다.“무슨 얘기를 할까요?”허태준은 잠깐 생각했다.“할아버지 얘기를 하지. 뵈러 갔었다며? 기억하지?”심유진은 그가 이런 얘기를 할 줄 몰랐다.“몇번 만난 적은 있어요.”그녀는 덧붙였다.“잘 알지는 못하고요.”기회가 된다면 그녀는 허태준에게 허 할아버지를 다시 잘 소개해 주고 싶었다. 소개해 주고 싶은 마음
그녀는 줄곧 생각했다. 그때 허태준한테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정소월은 지금 그렇게 예민하지 않지 않을까?혹시 세식구가 단란하고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겠다.하지만 이 세상에 혹시는 없었다.허태준은 이마를 더 찌푸렸다.“정소월을 잊은 건 실억의 유일한 좋은 점인 것 같아.”그는 말했다.“하늘이 내게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기회를 준 거야. 예전에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을수 있게.”심유진은 동의하지 않았다.“기억이 돌아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요?”그는 정소월을 사랑했다. 그래서 기억이 돌아온다면 후회만 남을 것이다.“아니.”허태준의 태도는 견결했다. 심유진은 그와 더 이상 쟁론을 벌이지 않았다.허태준은 느닷없이 질문했다.“그런데...어떻게 내 과거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지?”그는 그녀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내 할아버지도 만났고 여형민과도 친구고...심유진씨 혹시 저한테 숨기는 거라도 있나?”그의 눈빛은 뜨거웠고 유독 날카로웠다. 심유진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유명 인사신 것을 잊었나요?”그녀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자신이 없는 목소리였다.“그 얘기들은 뉴스에서도 보고 여형민씨 한테도 들었어요.”그녀는 분명 그와 관계를 정리하고 있었다.허태준은 실망스러웠고 화가 났지만, 그녀한테 추궁하지 못했다─언젠가 그녀가 허태준이 기억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늘 이 모든 것은 그녀가 그를 상대할 무기가 된다.물론 그녀가 여전히 그와 얘기를 한다는 전제하에.“그래.”그는 납득이 간 척하고 물었다.“또 무슨 일에 대해 알고 있지? 더 말해줄 수 있어? 내가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이 될수도 있을 것 같아서.”“몰라요.”심유진은 들통날까 봐 더 말하지 못했다.허태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사람들은 내 과거에 대해 얘기를 안 해. 나를 자극 준다고 생각하는지.”“아마도 과거가 현재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러겠죠!”가능하다면 심유진은 그가 과거를 떠올리지 말았으면 했
심유진은 멈칫했다.그녀는 한 손으로 침대를 잡고 도로 앉았다.“주물러...줄까요?”허태준은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진중한 척 사양했다.“됐어.”심유진은 그가 사람과의 접촉을 꺼리는 습관을 깨닫고 말했다.“당돌했네요.”그녀는 사과하면서 말했다.“잠깐만 기다려봐요─”그녀는 잡동사니 수납장에서 구매 후 포장을 뜯지도 않은 디퓨저를 꺼냈다. 물을 가득 담고 라벤더 아로마 오일을 몇 방울 떨궈 넣었다.“이게 안정을 취하게 하고 숙면에 좋대요.”그녀는 허태준한테 소개를 했다.“눈을 감고 한참 있으면 잠이 올 거예요.”담담한 라벤더 향은 촘촘한 안개와 같이 공기 중에 퍼졌다.허태준은 온순히 눈을 감았다. 아마도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그런지 두통은 감소되지 않았다.한참 후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침대 곁에 잠들어 있는 심유진의 모습을 보았다.그녀의 두 눈은 굳게 닫혀 있었고 가슴은 규율이 있게 오르내렸다. 콧날도 숨소리에 따라 움직였다.허태준은 호흡마저 참았다. 그녀를 깨우게 될가봐서였다.침대 옆 희미한 불빛을 빌어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이렇게 그녀를 쳐다보게 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다음이 언제일지 모르겠다.그가 유일하게 할수 있는것은 오늘밤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보는 것이었다.**허태준은 온밤을 못 잤다. 심유진이 꿈에서 화들짝 깨어나자 그제서야 황급히 눈을 감았다.심유진은 몸을 바로 폈다. 피곤함은 삽시간에 온데간데 없어졌다.침대 옆에 놓여진 디퓨저는 여전히 작동되고 있었다. 뽀얀 안개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이 디퓨저는 하은설이 사다 준 것이다. 그녀가 오래동안 밤을 새면서 일을 했기 때문에 하은설은 그녀의 수면의 질을 생각해서 사주었다.그녀는 인정샷을 찍었지만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효과가 이렇게 좋을지 몰랐다.그녀의 머리가 거의 침대에 닿자마자 눈꺼풀이 감겼다.심유진은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서 자고있는 허태준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