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항공이 YT그룹과 합작하는 사실은 허태준도 알고 있었다. 허태준은 허태서 쪽에 사람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허태서는 여기저기에 투자를 했었지만 허태준이 뒤에서 몰래 수를 써놓았기에 대부분 실패로 막을 내려 몇십억의 손해를 본 상태였다. 허태서는 혼자 힘으로 그렇게 많은 투자금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모든 투자는 YT그룹의 명의 아니면 개인의 명의로 공금을 끌어 쓴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 손해를 입었고 공금은 갚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회사 대표들에게 시달림을 받을 것이다. 허태서는 돈을 모으기 위해 여러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고 허태준도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람을 구해 허태서를 무역에 뛰여 들게 하려고 구슬렸다. 허태서는 귀가 얇은 사람이었기에 결국 모험을 해볼 결심을 내렸다. 허태서는 껍데기뿐인 무역회사를 만들고 사람도 몇 명 채용한 다음 여러 항공회사들과 합작을 논했다. 허태준은 그가 어느 회사와 연계를 하는지는 관심하지 않았다. 그저 이번 합작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도록 보장하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허태서가 다시 한번 절망으로 빠져들기를 바랐다. 근데 이 일에 심유진이 말려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니 지금은 심유진과 육윤엽이 일 외에 사적으로 어떤 사이인지 알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일이 마무리되고 육윤엽이 피해를 입게 됐을 때 심유진이 자신을 탓할지도 모른다. “이따가 같이 병원까지 가자.” 허태준의 서의사에게 말했다. “형민이가 넌 병원에 가면 안 된다고 하던데.” “병문안.” 허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심유진은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보냈다. 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길에 객실 담당 매니저의 전화를 받았다. 스위트룸에 머무시는 손님이 간질병이 발작하여 구급차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심유진은 이미 육윤엽의 병세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었다. 다행히 매니저가 옆에 있었기에 일단 생명에는 위협이 없을
육윤엽이 흠칫했다. 방금까지 눈빛 속에 담겨있던 슬픔과 그리움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렇게 하죠.” 비서가 놀란 얼굴을 하였지만 육윤엽이 눈치를 주었기에 얼른 다시 표정을 관리했다. 심유진은 육윤엽을 따라 구급차에 올랐고 그의 비서도 올라탔다. 병원에 도착해서 간단한 검사를 마친 후 의사는 금방 진단을 내렸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제때에 약 챙겨드시고 푹 쉬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스트레스받지 마시고요.” 육윤엽이 심유진을 바라봤다. “그것 봐요, 제가 뭐라 했어요.” 심유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비서가 먼저 말했다. “대표님, 이왕 오신 김에 좀 더 경과를 지켜보면서 몇가지 더 검사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 육윤엽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비서는 계속 심유진에게 고자질했다. “어제도 두 번이나 아프셨거든요. 전에는 이렇게까지 자주 아프셨던 적이 없어서 걱정되네요.” 심유진도 깜짝 놀랐다. 육윤엽은 어두운 얼굴로 비서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비서는 잠깐 멈칫했지만 다시 심유진에게 애원했다. “저희 대표님 좀 설득해 주세요. 제 말은 듣지도 않아요.” “김비서!”육윤엽이 언성을 높였다. 비서는 여전히 간절한 눈빛으로 심유진을 바라봤다. “알겠어요. 의사를 불러올게요.” “아니...” 육윤엽은 심유진을 말리려 했으나 미처 잡을 새도 없이 심유진이 재빨리 나가버렸다.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육윤엽은 긴 한숨을 쉬었다. “김비서, 누가 함부로 행동하라 했지?” “삼촌.” 김욱이 오랫동안 부르지 않았던 호칭으로 육윤엽을 불렀다. “지금은 조카의 신분으로 걱정해 주는 거예요.” 순간 육윤엽의 굳은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따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삼촌은 제 유일한 가족이에요. 저 또한 삼촌의 유일한 가족이고요.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으셔야 해요.” 김욱의 매 한마디 말에 진심이 담겨있었다. “걱정해
심유진은 육윤엽의 병실을 정리하고 모든 검사를 다 마치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병원에서 나왔다. 심유진이 가자마자 서의사가 육윤엽을 찾아왔다. 원래 몸이 안 좋은 데다가 검사를 하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닌 육윤엽은 지쳐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가 눈을 떴다. 서의사는 흰색 가운을 입고 있었기에 육윤엽은 의사가 진찰을 온건줄 알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근데 서의사가 웃는 표정으로 굽신거리며 다가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육윤엽은 멈칫했지만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었던 터라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육윤엽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서의사가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이 병원 주임 서강혁이라고 합니다.” 육윤엽이 그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서주임님이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서강혁은 할 말이 많았지만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 때문에 자신의 목적은 뒤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제 일은 아니고요.” 서강혁이 뒤를 돌아봤다. “제 친구가...” 육윤엽은 인상을 찌푸렸다. 병원내부 사람들이 자신과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건 그렇다 쳐도 외부에 자신의 정보를 유출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외부인을 병실에 들인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육윤엽이 화를 내며 내쫓으려는 찰나 서강혁 뒤에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육윤엽은 하려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YT그룹이 합작 제안을 했을 때부터 육윤엽은 철저한 사전조사를 했다. 허태준은 그의 친척들만큼 밖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정보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육윤엽은 그의 신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비록 CY그룹과 블루항공이 지금은 아무런 연계도 없다지만 나중에 합작을 논할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분은?” 육윤엽이 허태준을 보며 물었다. 냉담하지도 열정적이지도 않은 태도였다. 허태준이 가까이 다가가서 웃으며 말했다. “YT그룹 허태서 대표님의 사촌 허태준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 YT그룹에서 일
어색한 웃음을 끝으로 병실에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허태준이 얼른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번에는 로열 호텔이 아니라 킹 호텔로 가셨다면서요.” 육윤엽은 킹 호텔로 가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로열 호텔의 스위트룸이 이미 예약이 다 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안 좋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맞아요.” 허태준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기에 그 작은 감정의 파동도 바로 알아챘다. 비록 전에도 답답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허태서를 욕하고 싶었다. 분명 블루항공과 합작할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자기가 차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허태준은 자신이 아무 짓도 안 해도 1,2년 내에 YT그룹은 허태서 손에서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허태준은 허태서를 대신해 사과했다. “로열 호텔의 스위트룸은 장기적으로 예약을 해둔 손님이 계시거든요. 대표님이 일부러 예약을 못 받으신 건 아닙니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육윤엽이 손을 저었다. 비록 허태서에게 불만이 있긴 했지만 그걸 허태준에게 풀 수는 없었다. “사과의 의미와 원만한 합작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경주에 머무시는 내내 모든 지출은 저희 YT그룹이 부담하겠습니다. 호텔비와 입원비까지도요.” 허태준이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육윤엽은 그 정도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제 입원비는 이미 킹 호텔의 심지배인님이 부담해 주셨습니다.” 허태준은 심유진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까 하다가 마침 말이 나오니 바로 대화를 이어갔다. “심유진 씨인가요? 제 친구예요.” 허태준은 YT그룹과 크게 연계가 없었기에 육윤엽은 그의 사생활까지는 조사해보지 않았다. 그러니 그와 심유진의 과거 또한 모르고 있었다. 심유진과 친구라는 소리를 듣자 육윤엽은 더욱 흥미를 느꼈다. “친한 사이예요?” 허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한 편이죠. 근데 사실 유진 씨 아들이랑 더 친한 것 같아요.” 육윤엽이 심유진
심유진은 호텔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허태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분의 신분이라면 은퇴를 하셔도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을 받을 텐데 돌아가셨으니 더욱 상황이 안 좋았다. 어젯밤부터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어르신의 거처를 방문하여 주변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각종 매체나 정부기관에 신고전화가 잔뜩 들어온다는 소식도 들었다. 킹 호텔은 로열 호텔의 적이긴 했으나 반이 넘는 호텔 관리층 직원들은 로열 호텔 아니면 YT그룹 산하에 있는 호텔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예전 회사에 어느정도 감사함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비록 대부분 사람들이 어르신을 만난 적은 없었지만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들 놀라워하거나 슬퍼했다. 심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생각이 더욱 복잡했다. 만난 적이 있는 데다가 자신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물해 줬던 분이셨다. 비록 마무리가 좋지는 않았어도 심유진은 부고를 듣고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심유진은 얼른 감정을 컨트롤했다. 다른 것보다 허태준의 상황이 가장 걱정됐다. 어르신과의 만남이 잦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이 허태준을 유독 아끼셨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심유진은 가족의 부고를 겪어본 적도 없거니와 친한 가족도 없었기에 허태준의 심정이 어떨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심유진은 도저히 허태준에게 연락은 못하고 여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YT그룹 회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도 며느리였던 사람인데 너무 딱딱하게 부르시네.” 여형민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원망했다. 그래도 편안해 보이는 말투에 심유진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허태준 쪽 상황이 너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예요.” 심유진은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눈빛에는 어둠이 깔려있었다.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심유진이 정신을 차리고 하려던 말을 꺼냈다. “저희 회사에 YT그룹의 직원이셨던 분들이 많아서 조문을 드리러 갈 가해요. 회사를 대표하는 입장이기도 하고요. 혹시 장
“유진 씨?” 아주버님이 눈을 크게 뜨며 믿기 어렵다는 듯 바라봤다. 주위 사람들 모두 호기심에 고개를 돌렸다. 심유진은 어색해서 얼굴이 붉어졌지만 못 들은 척할 수는 없었다.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닌가요?” 아주버님은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심유진이 필사적으로 눈치를 줬기에 얼른 말을 고쳤다.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나이를 먹으니 시력이 안 좋아지나 보네요.” 심유진은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 “중간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고 나서야 아주버님이 심유진에게 조용히 얘기했다. “어르신은 자기 방에 계십니다. 보고 싶어 하실 텐데 한번 들어가 보세요.” 심유진은 그 말이 진짜일지 의심스러웠으나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유진은 먼저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조문객들이 보낸 화환들이 잔뜩 놓여있었고 향냄새가 가득했다. 허태준 가족들은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쭉 둘러보니 허태준만 없었다. 심유진은 조금 놀랐다. 아무리 기억을 못 한다고 해도 이런 자리에 빠져서는 안 됐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심유진은 허태준 생각을 하느라 허태준 가족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유진아.” 허태준 어머니가 먼저 다가와서 심유진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와줘서...” 어머니의 표정에 미안함과 창피함이 드러나 있었다. 심유진은 어머니가 오해하셨다는 걸 깨닫고 얼른 해석했다. “전 킹 호텔을 대표해서 온겁니다.” 어머니가 멈칫했다. 조금 실망하신 것 같았지만 그녀는 바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어떤 신분으로 왔던 아버님은 기뻐하실 거다.” 심유진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심유진은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전 이만 가볼게요.” 심유진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벌써?” 어머니는 상당히 아쉬워했다. “아버님 방에도 갔다 오지 그러니.” 심유진도 사실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님이 자기가 죽
“아...” 어머니는 심유진 뒤에서 기다리는 직원들을 보며 하려던 말을 삼켰다. 심유진은 동기들과 밖으로 나가면서 기세등등하게 이쪽으로 걸어오는 세 사람을 봤다. 심훈, 사영은과 심연희였다. 심연희가 이미 허태서와 이혼했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심유진은 그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방금 허태서 옆에 심연희가 없는 것을 보고 그냥 소문이 사실이었구나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 소문도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만약 둘이 남이라면 이렇게 장례식에도 오지 못했을 것이다. 뭐가 됐던 심유진은 일단 자리를 피해야 했다. 심유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빨리 지나가려 했으나 사영은이 그녀를 알아보고야 말았다. “심유진? 너 돌아온 거야?” 사영은은 심유진을 붙잡은 채 놀라워했다. 심유진은 더 이상 감출수가 없어 그냥 그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너!” 사영은은 심유진의 태도에 화가 나 쫓아가려 했으나 심훈이 말렸다. “일단 급한 일부터.”사영은은 심유진을 노려보고는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그 세명의 등장은 허태준 가족들의 경계를 불러일으켰다. 허태서가 나서서 그들을 막았다. “여긴 왜 오신 거죠? 저희 할아버지 장례에까지 와서 깽판 치지 마세요.” “깽판이라니?” 심훈은 가장으로서 나서서 허태서에게 맞섰다. “우리 연희도 이 집 며느리였는데 제사에 참여하는 게 뭐가 잘못된 거지?” “며느리라뇨.” 허태서는 심훈 등뒤에 숨어있는 심연희를 노려봤다. “얼른 이혼 협의서에 사인하고 나가!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내 생각은 바뀌지 않으니까. 넌 정말 최악의 여자야.” 이미 두 집안의 사이가 어긋난 지 오래됐기에 심연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가 최악이라고? 누가 더 최악인지 한번 얘기해 봐? 나한테서 심유진에 관한 정보를 얼마나 캐갔어! 심지어 난 아이도 낙태했어. 나중에 심유진이 떠나고 허태준이 쓰러지니까 넌 목적에 달성해서 날 그냥 버렸잖아. 맨날 연예인들이나 모델들 데리고 외박까지 하고.
허태서가 바로 반격했다. “억울한 척하지 마. 애초에 나랑 같이 산 이유도 내 돈 보고 그런 거 아냐? 몇년간 사귄 남자친구도 차버렸잖아. 우리 둘이 같이 사는 건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야. 그러니까 누구도 서로를 탓할 수 없는 관계라고. 네가 가만히 있기만 하면 그냥 집에 강아지 한 마리 키운다 생각하고...” “넌 진짜 쓰레기야!”심연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허태서는 개의치 않았다. 서로를 물어뜯는 그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허태준 아버님이 나섰다. “둘 다 조용.” 아버지의 호통에 둘 다 행동을 멈췄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창피하게 할아버지 앞에서 이러지 말고.” 둘째 삼촌도 어쩌다가 그와 의견이 같았다. “태서야. 이런 하찮은 사람들이랑 이러지 마.” “누구보고 하찮다는 거야?” 심훈이 나서서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당신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좀 봐. 우리 딸 가지고 놀고는 뭐가 그렇게 떳떳해?” 심훈이 손을 대면서 상황이 매우 복잡해졌다. 사영은과 둘째 이모도 서로 머리채를 잡고 멱살을 잡으며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심유진은 이미 집 밖을 나섰으나 심연희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고 다시 돌아갔는데 이런 혼잡한 국면이 펼쳐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허태서네 가족에 비하면 심훈과 사영은은 훨씬 왜소했기에 이 “전쟁”은 금방 막을 내렸다. 심훈은 허태서 아버지에게 힘껏 밀쳐서 바닥에 주저앉았고 사영은도 허태서 어머니의 몸에 깔려 더 이상 반항하지 못했다. 맞고 있는 사영은의 모습을 바라보며 심유진은 사영은이 자신을 저렇게 대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순간 그녀는 사영은에 대한 일말의 동정이나 연민도 없었다. 그저 사영은이 이런 수모와 고통을 당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조문객들은 대부분 다급히 밖으로 나갔고 일부분은 심유진처럼 밖에 서서 싸움을 구경했다. 누가 신고한 건지는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들어와 싸움을 말렸다.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