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미세한 곡선을 그렸다.“민아 씨... 난 민아 씨가 그들의 희생품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민아 씨는 정말 착하고 귀한 사람이에요. 내 말 들어요... 성세 그룹을 떠나야 해요. 기성은이 놓아주지 않는다면 내가 전연우에게 말해볼게요. 기성은보단... 신이랑 씨가 민아 씨와 더 잘 어울려요.”소민아는 순진한 사람이다. 장소월 역시 직장 내 암투를 경험한 적은 없지만 소민아는 그들이 권력 다툼을 하는 데에 쓰이는 도구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기성은과 소민아의 스캔들이 전해진 그 순간부터 전연우와 송시아의 싸움이 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지금 상황에서 소민아에게 가장 최선의 선택은 바로 떠나는 것이다.장소월은 그녀에게 연고를 다 발라준 뒤 소염제를 손에 올려주었다.“몸 관리 잘해야 해요.”장소월의 시야에 머지않은 곳에서 달려오고 있는 벤틀리가 들어왔다.그녀는 그렇게 전연우와 함께 떠났다.소민아는 줄곧 그녀가 했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장소월이 뒷좌석에 올라타자 전연우는 들고 있던 담요를 그녀 다리에 덮어주었다.“아무한테나 다 잘해주면서 나한테만 쌀쌀맞지.”장소월이 차갑게 말했다.“네 말 한마디면 곧이곧대로 복종할 사람 줄 섰잖아.”전연우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왜 또 화가 난 거야. 하루 24시간 내가 네 옆에 있잖아. 그거로도 부족해?”장소월은 가감 없이 솔직하게 그에게 말했다.“난 민아 씨가 너와 송시아 두 사람의 싸움에 피해받는 희생품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아.”전연우가 어두워진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장소월도 똑바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송시아의 목적이 뭔지 너도 알고 있잖아. 널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야말로 성세 그룹 안주인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해. 너희 두 사람이 피 터지는 싸움 끝에 갈라섰을 때 영향받는 건 너희뿐만이 아니야! 지금의 넌 예전과는 달라, 전연우...”“수많은 사람들이 성세 그룹에서 일하며 가족들을 지키고 있어.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하여 그녀는 위층 회의실로 뛰어 올라갔다. 회사 직원들 모두가 소란을 떨고 있는 그녀를 보았지만 아무도 감히 뭐라고는 하지 못했다. 성세 그룹 안주인이라는 뒷배를 갖고 있는 그녀를 누가 건드리겠는가.저번 사모님이 직접 비서실로 걸음해 기 비서를 호되게 꾸짖었다는 소문이 회사에 자자했다. 대표님이 수십 년을 함께 해온 비서를 해고한다는 말도 함께 돌고 있었다.이후 소문은 점점 더 부풀어 올라 소민아가 강제로 결혼한다고까지 했다.소민아는 99층에서 마침 대표 사무실에서 나오는 기성은과 마주쳤다. 기성은은 서류를 들고 그녀를 못 본 척 지나가 버렸다. 소민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날 무시해?’소민아는 돌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기성은의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동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기성은은 그녀가 회사에서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조용한 복도, 센서등이 켜졌다가 몇 초 뒤 다시 꺼졌다. 비상구 표지판만 희미한 초록색 불빛을 내뿜는 어둠 속에서 소민아는 고개를 들고 빛나는 남자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기성은의 경고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소민아는 차가운 그 목소리를 들으니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기성은 씨, 나 이제 다 알겠어요... 당신이 내가 뭘 하길 원하는지 알겠다고요. 아니, 아직은 모른다고 해도 앞으로는 분명 알게 되겠죠. 지금은 때가 아니라면요.”“이거 놔요!”기성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일갈했다.소민아는 바로 손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에 꺼졌던 센서등이 다시 켜졌고 기성은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의 눈동자는 조금의 감정도 없는 기계 사람처럼 텅 비어 있었다. 정말...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던 말인가?“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회사에 계속 남아서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소민아 역시 자신은 이용당하는 도구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로울 것 하나 없는 이
소민아는 어쩔 수 없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길명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아주머니, 이런 우연이... 여기에 계셨네요!”소민아와 기성은의 일은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져버렸다.소민아가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간식과 선물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의 사원증을 목에 걸었다. 등 뒤에서 전해져오는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다들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소민아는 당연히 이 선물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 돈을 쓴 것도 아닌 공짜 선물이니 말이다.오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선 아무도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소민아에게 대표님의 와이프라는 거대한 뒷배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대표님이 사모님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는 회사 전체를 통틀어 모르는 사람이 없다.회사 직원들은 처음엔 그저 꽃뱀이 조강지처를 밀어내고 안주인 자리를 꿰찼다고 생각해 뒤에서 장소월을 욕하고 조롱했었다. 대표님은 그 사실을 알고는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을 모조리 해고해버렸다. 그들이 얼마나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대표님은 사모님에 관한 일에만 대면하면 정서가 불안정해지고 이성을 잃는다.남천 그룹 옛직원들이 회사에 들어와 알려줘서야 그들은 깨달았다. 장소월은 대표님과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온 죽마고우라는 걸... 또 전연우는 장소월의 아버지가 입양한 양자라는 걸...두 사람에게 이토록 깊은 역사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제아무리 배짱 있는 사람이라도 혀를 함부로 놀릴 수는 없다.또한... 그들은 대표님이 장소월을 얻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애쓰셨는지도 알고 있다. 대표님이 어쩔 수 없이 인씨 가문 딸과 결혼했을 때 장소월은 괴로워 서울을 떠나 4년 동안이나 실종된 상태로 지냈다. 그녀가 다시 돌아오고 나서야 두 사람 사이는 겨우 회복되었다.인시윤과 장소월을 대하는 전연우의 태도는 정말이지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 대표님은 정말 진심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오늘 아침 6시
은경애는 그릇을 들고 의문스러운 얼굴로 계단을 향해 걸어가는 장소월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얼굴색이 저토록 어두워진단 말인가!그 날짜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계단에 발을 내디딘 순간, 등 뒤에서 돌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결혼식장 마음에 드는지 봐봐.”장소월은 왼손으로 난간을 꽉 잡았다. 너무 힘준 나머지 곱게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마음대로 해.”말을 마친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맥없이 올라갔다. 몸에 남아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서야 간신히 위층까지 도착했다.결혼식장 인테리어를 선택한 뒤 전연우가 뒤돌아 그녀를 쳐다보았다.매니저가 말했다.“대표님, 걱정 마세요. 사모님께선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꽃은 반드시 아이보리색 장미로 준비하겠습니다.”장소월은 화실에 들어가 또다시 안에서 잠가 버리고는 정신을 잃은 듯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었다.전연우는 계단을 오를 때 이미 그녀가 화실에 있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가려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문을 열리지 않았다.전연우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소월이한테 뭐라고 말한 거예요?”은경애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저는 별말 안 했어요! 그냥 결혼식 날짜가 2월 14일로 정해졌다고 말했을 뿐인데... 아가씨 얼굴이 바로 어두워졌어요.”그 눈빛은 마치 누군가의 사망 소식이라도 들은 듯 서글펐다.“열쇠 가져와요.”은경애는 재빨리 비상용 열쇠를 가져왔다. 전연우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엔 평소와 똑같은 듯한 모습의 장소월이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림판에 떨어지는 붓의 움직임을 보니 한눈에 그녀의 불편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전연우가 다가갔지만, 장소월은 자신의 세계에 빠져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전연우가 허리를 굽히고 팔을 뻗어 붓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까... 무슨 생각 했어?”“다음 달로 잡았다는 그 결혼식 날짜... 내 친구 기일이야.”“...”왜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전생의 2월 14일이 그와 송시아의 결혼
장소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그럼 그날로 해.”‘전연우... 내 기일 날 모든 것을 완전히 끝내줄게.’오후 여섯 시, 퇴근까지 아직 30분이 남았다.소민아는 얼굴에 난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소피아도 참 독한 사람이다. 하마터면 그녀의 예쁜 얼굴을 완전히 망가뜨릴 뻔하지 않았는가.백혜진이 부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민아 씨, 이 약 정말 사모님께서 사준 거예요?”소민아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당연하죠. 소월 언니가 얼굴에 연고도 발라줬어요. 그건 왜 물어요? 그냥 약일 뿐이잖아요.”백혜진이 코에 걸쳐있는 안경을 밀어 올리고는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갔다.“사모님이 민아 씨 편을 들어줄 때 직원들의 후회막심한 얼굴을 민아 씨가 봤어야 해요. 민아 씨한테 그렇게 든든한 지원군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참, 민아 씨, 물어볼 게 하나 더 있는데...”“뭔데요? 말해요.”백혜진이 물었다.“대표님이 정말 사모님을 무서워하는 거 맞아요? 회사 모든 일은 대표님 뜻대로 결정하시잖아요. 오늘 다른 비서님에게 들었는데 인사팀에서 민아 씨한테 내리려던 처벌 사모님께서 다 막아주셨대요. 하지만 소피아 씨는 아니에요. 회사에서 소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경고 처분을 받았어요. 이번 달 보너스도 취소됐고요.”“그리고 작년에 갓 들어온 인턴들 보너스가 500만 원 정도 되잖아요. 예전 남천 그룹에 있다가 우리 회사로 넘어온 직원들은 듣기론 3000만 원도 넘는다고 하더라고요. 기술팀 고 사원은 작년에 차도 한 대 뽑았대요. 그리고... 남천 그룹 직원 복지도 저희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아요.”“남천 그룹, 성세 그룹 모두 대표님이 관리하는 회사인데 그쪽 연봉이 우리보다 다섯 배는 더 많아요. 지금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도 없죠.”“대체 그 이유가 뭐예요?”소민아는 어리둥절해졌다.“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그녀도 조용히 백혜진에게 조금 알려주었다.“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아요. 소월 언니와 대표님의 관계는 조금 특별해
회사 모든 부문에서 손을 잡고 서로 은애하는 한 쌍의 부부의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더욱 무서운 건 강씨 저택이 경매에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인터넷에선 강씨 가문에 관한 소식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다.예전 강씨 가문은 그야말로 진정한 명문가 집안이었다. 서울에서 뿌리박고 몇백 년을 강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애석하게도 강씨 가문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소민아는 늘 그게 아쉬웠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생각하고 있었다. 강씨 가문이 무너진 것과... 전연우 사이엔 연관이 있을 거라고.몇 명의 직원들이 소민아에게 사과하기 위해 물건을 들고 다가왔다. 디저트와 액세서리, 심지어 버블티까지 있었다.소민아는 늘 그랬듯 사양 없이 모두 받았다.소민아는 버블티를 마시며 바깥에서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는 기성은을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갓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것 같았다.소민아가 일어선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소민아는 버블티 한 잔을 들고 바로 기성은의 사무실에 들어갔다.기성은이 말했다.“아직 처분 결정이 내려오지 않았어요. 와서 날 꼬드기면 해결될 것 같아요?”소민아가 버블티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꼬드기다니요. 비서님에게 맞춰 연기하는 거잖아요! 회사 모든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알았는데 여자친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은 해야죠.”“언제 퇴근해요? 같이 나가죠! 남자친구분!”기성은은 메일을 열어 고위급 임원이 보내온 재무 보고서를 살펴보며 그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가져가요. 난 이런 거 안 마셔요. 퇴근은 알아서 해요. 나한텐 아무 영향 없으니까.”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저 먼저 갈게요. 마침 볼 일도 있고요.”사무실에서 나가니 퇴근 시간까지 2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 위 물건들을 가방에 정리해 넣었다.그녀가 사무실에서 나서려는 순간...신이랑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여섯 시 반에 촬영이 있는데 찾지 못
촬영팀 직원들은 8층에서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 소민아와 신이랑이 올라갔을 때 그들은 이미 세트 준비를 마치고 그들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신이랑이 그녀 얼굴 상처를 가리켰다.“얼굴이 왜...”소민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강아지가 할퀸 거예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누군가 카메라를 들고 와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민아 씨, 대단해요. 기 비서님과 사귄다면서요. 역시 민아 씨가 손이 빨라요. 더군다나 민아 씨한테는 든든한 뒷배도 있잖아요. 그거 알아요? 마케팅팀 팀장이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술을 퍼마셨다는 거. 취해서 야밤에 기 비서님한테 전화했다가 오늘 아침 된통 혼났어요. 아직도 마음 아파하고 있어요.”평소 핸드폰을 잘 갖고 나가지도 않는 기성은이 지금은 고개를 숙이고 문자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소민아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저희 기 비서님이 절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걸 어쩌겠어요. 그리고 기 비서님 성격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저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이 절대 끼어들 수 없죠.”촬영팀 책임자가 신이랑에게 말했다.“작가님,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여우림 씨와 상의해야 해서요.”“저희가 두 분을 위해 휴게실을 마련했습니다. 안에 과일과 간식들도 있어요. 곧 준비가 될 거예요.”신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소민아는 핸드폰으로 회사 어플에 접속해 출근 도장을 찍었다. 이것도 야근에 속하니 말이다.그녀는 신이랑과 함께 휴게실에 들어갔다. 정성스럽게 준비된 체리 등 과일을 보니 소민아는 감동에 눈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그녀가 몰래 체리 한 알 입에 넣었다.“이랑 씨, 그 편집장님은 오늘 왜 함께 오지 않은 거예요? 다행히 제가 퇴근하기 전에 만났으니 망정이니 아니면 어쩔 뻔했어요.”“오늘 무슨 촬영해요?”신이랑이 고개를 저었다.“기다려봐요.”소민아가 체리를 그에게 건네주었다.“먹을래요?”신이랑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민아 씨가 다 먹어요.”소
여우림의 눈에 불편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를 신이랑에게 건넸다.“일단 이 구절들 외워두세요. 촬영할 때 필요할 거예요.”소민아는 과일을 먹으며 여우림이 신이랑의 옷을 정리해주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촬영 시작하면 긴장하지 말아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문제 있으면 수시로 얘기하고요.”“그래요.”신이랑은 고개를 숙이고 자료를 읽었다.“먼저 옷 갈아입어요.”신이랑이 탈의실에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뒤, 소민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몇 명의 직원이 더 와있었다.“소민아 씨, 촬영팀 일도 하는 거예요?”소민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퇴근하는 길에 궁금해서 와본 거예요.”여우림은 입을 다문 채 팔짱을 끼고 탈의실 쪽을 지켜보다가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랑 씨가 민아 씨와 있었던 일 말해줬어요. 두 사람 선봤다면서요.”“예전엔 항상 소개팅을 원하지 않아서 제가 대신 거절했었거든요.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어요. 민아 씨가 이랑 씨 어머니 친구 딸이라서요.”“지금까지 이랑 씨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늘 가장 처음으로 절 찾아 털어놓았어요. 이랑 씨가 민아 씨한테 많은 도움을 줄 테니까 민아 씨도 계속 노력하세요. 이번 일이 잘 성사되면 집에서 평생 놀고먹어도 될 거예요.”소민아는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꽤 긴 시간 비서로 일해온 경력이 있기 때문에 여우림의 행동과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조롱과 비난이 은은하게 담겨있는 말이었다. 회사가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여우림 씨,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하세요. 우림 씨는 이랑 씨의 편집장일 뿐, 집사가 아니에요. 저와 이랑 씨의 관계가 어떻든, 발전할 희망이 있든 없든, 우림 씨는 왈가왈부할 자격 없어요. 우림 씨도 이제 서른 살이 훌쩍 넘은 어른이잖아요. 저희 젊은 사람들의 일엔 자꾸 관심 둘 필요 없어요.”소민아는 그녀에게 눈을 까뒤집어 보이고는 아예 체리 접시를 들고 자리를 옮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