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경애는 그릇을 들고 의문스러운 얼굴로 계단을 향해 걸어가는 장소월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얼굴색이 저토록 어두워진단 말인가!그 날짜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계단에 발을 내디딘 순간, 등 뒤에서 돌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결혼식장 마음에 드는지 봐봐.”장소월은 왼손으로 난간을 꽉 잡았다. 너무 힘준 나머지 곱게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마음대로 해.”말을 마친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맥없이 올라갔다. 몸에 남아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서야 간신히 위층까지 도착했다.결혼식장 인테리어를 선택한 뒤 전연우가 뒤돌아 그녀를 쳐다보았다.매니저가 말했다.“대표님, 걱정 마세요. 사모님께선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꽃은 반드시 아이보리색 장미로 준비하겠습니다.”장소월은 화실에 들어가 또다시 안에서 잠가 버리고는 정신을 잃은 듯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었다.전연우는 계단을 오를 때 이미 그녀가 화실에 있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가려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문을 열리지 않았다.전연우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소월이한테 뭐라고 말한 거예요?”은경애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저는 별말 안 했어요! 그냥 결혼식 날짜가 2월 14일로 정해졌다고 말했을 뿐인데... 아가씨 얼굴이 바로 어두워졌어요.”그 눈빛은 마치 누군가의 사망 소식이라도 들은 듯 서글펐다.“열쇠 가져와요.”은경애는 재빨리 비상용 열쇠를 가져왔다. 전연우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엔 평소와 똑같은 듯한 모습의 장소월이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림판에 떨어지는 붓의 움직임을 보니 한눈에 그녀의 불편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전연우가 다가갔지만, 장소월은 자신의 세계에 빠져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전연우가 허리를 굽히고 팔을 뻗어 붓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까... 무슨 생각 했어?”“다음 달로 잡았다는 그 결혼식 날짜... 내 친구 기일이야.”“...”왜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전생의 2월 14일이 그와 송시아의 결혼
장소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그럼 그날로 해.”‘전연우... 내 기일 날 모든 것을 완전히 끝내줄게.’오후 여섯 시, 퇴근까지 아직 30분이 남았다.소민아는 얼굴에 난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소피아도 참 독한 사람이다. 하마터면 그녀의 예쁜 얼굴을 완전히 망가뜨릴 뻔하지 않았는가.백혜진이 부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민아 씨, 이 약 정말 사모님께서 사준 거예요?”소민아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당연하죠. 소월 언니가 얼굴에 연고도 발라줬어요. 그건 왜 물어요? 그냥 약일 뿐이잖아요.”백혜진이 코에 걸쳐있는 안경을 밀어 올리고는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갔다.“사모님이 민아 씨 편을 들어줄 때 직원들의 후회막심한 얼굴을 민아 씨가 봤어야 해요. 민아 씨한테 그렇게 든든한 지원군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참, 민아 씨, 물어볼 게 하나 더 있는데...”“뭔데요? 말해요.”백혜진이 물었다.“대표님이 정말 사모님을 무서워하는 거 맞아요? 회사 모든 일은 대표님 뜻대로 결정하시잖아요. 오늘 다른 비서님에게 들었는데 인사팀에서 민아 씨한테 내리려던 처벌 사모님께서 다 막아주셨대요. 하지만 소피아 씨는 아니에요. 회사에서 소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경고 처분을 받았어요. 이번 달 보너스도 취소됐고요.”“그리고 작년에 갓 들어온 인턴들 보너스가 500만 원 정도 되잖아요. 예전 남천 그룹에 있다가 우리 회사로 넘어온 직원들은 듣기론 3000만 원도 넘는다고 하더라고요. 기술팀 고 사원은 작년에 차도 한 대 뽑았대요. 그리고... 남천 그룹 직원 복지도 저희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아요.”“남천 그룹, 성세 그룹 모두 대표님이 관리하는 회사인데 그쪽 연봉이 우리보다 다섯 배는 더 많아요. 지금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도 없죠.”“대체 그 이유가 뭐예요?”소민아는 어리둥절해졌다.“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그녀도 조용히 백혜진에게 조금 알려주었다.“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아요. 소월 언니와 대표님의 관계는 조금 특별해
회사 모든 부문에서 손을 잡고 서로 은애하는 한 쌍의 부부의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더욱 무서운 건 강씨 저택이 경매에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인터넷에선 강씨 가문에 관한 소식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다.예전 강씨 가문은 그야말로 진정한 명문가 집안이었다. 서울에서 뿌리박고 몇백 년을 강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애석하게도 강씨 가문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소민아는 늘 그게 아쉬웠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생각하고 있었다. 강씨 가문이 무너진 것과... 전연우 사이엔 연관이 있을 거라고.몇 명의 직원들이 소민아에게 사과하기 위해 물건을 들고 다가왔다. 디저트와 액세서리, 심지어 버블티까지 있었다.소민아는 늘 그랬듯 사양 없이 모두 받았다.소민아는 버블티를 마시며 바깥에서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는 기성은을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갓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것 같았다.소민아가 일어선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소민아는 버블티 한 잔을 들고 바로 기성은의 사무실에 들어갔다.기성은이 말했다.“아직 처분 결정이 내려오지 않았어요. 와서 날 꼬드기면 해결될 것 같아요?”소민아가 버블티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꼬드기다니요. 비서님에게 맞춰 연기하는 거잖아요! 회사 모든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알았는데 여자친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은 해야죠.”“언제 퇴근해요? 같이 나가죠! 남자친구분!”기성은은 메일을 열어 고위급 임원이 보내온 재무 보고서를 살펴보며 그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가져가요. 난 이런 거 안 마셔요. 퇴근은 알아서 해요. 나한텐 아무 영향 없으니까.”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저 먼저 갈게요. 마침 볼 일도 있고요.”사무실에서 나가니 퇴근 시간까지 2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 위 물건들을 가방에 정리해 넣었다.그녀가 사무실에서 나서려는 순간...신이랑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여섯 시 반에 촬영이 있는데 찾지 못
촬영팀 직원들은 8층에서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 소민아와 신이랑이 올라갔을 때 그들은 이미 세트 준비를 마치고 그들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신이랑이 그녀 얼굴 상처를 가리켰다.“얼굴이 왜...”소민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강아지가 할퀸 거예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누군가 카메라를 들고 와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민아 씨, 대단해요. 기 비서님과 사귄다면서요. 역시 민아 씨가 손이 빨라요. 더군다나 민아 씨한테는 든든한 뒷배도 있잖아요. 그거 알아요? 마케팅팀 팀장이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술을 퍼마셨다는 거. 취해서 야밤에 기 비서님한테 전화했다가 오늘 아침 된통 혼났어요. 아직도 마음 아파하고 있어요.”평소 핸드폰을 잘 갖고 나가지도 않는 기성은이 지금은 고개를 숙이고 문자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소민아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저희 기 비서님이 절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걸 어쩌겠어요. 그리고 기 비서님 성격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저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이 절대 끼어들 수 없죠.”촬영팀 책임자가 신이랑에게 말했다.“작가님,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여우림 씨와 상의해야 해서요.”“저희가 두 분을 위해 휴게실을 마련했습니다. 안에 과일과 간식들도 있어요. 곧 준비가 될 거예요.”신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소민아는 핸드폰으로 회사 어플에 접속해 출근 도장을 찍었다. 이것도 야근에 속하니 말이다.그녀는 신이랑과 함께 휴게실에 들어갔다. 정성스럽게 준비된 체리 등 과일을 보니 소민아는 감동에 눈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그녀가 몰래 체리 한 알 입에 넣었다.“이랑 씨, 그 편집장님은 오늘 왜 함께 오지 않은 거예요? 다행히 제가 퇴근하기 전에 만났으니 망정이니 아니면 어쩔 뻔했어요.”“오늘 무슨 촬영해요?”신이랑이 고개를 저었다.“기다려봐요.”소민아가 체리를 그에게 건네주었다.“먹을래요?”신이랑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민아 씨가 다 먹어요.”소
여우림의 눈에 불편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를 신이랑에게 건넸다.“일단 이 구절들 외워두세요. 촬영할 때 필요할 거예요.”소민아는 과일을 먹으며 여우림이 신이랑의 옷을 정리해주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촬영 시작하면 긴장하지 말아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문제 있으면 수시로 얘기하고요.”“그래요.”신이랑은 고개를 숙이고 자료를 읽었다.“먼저 옷 갈아입어요.”신이랑이 탈의실에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뒤, 소민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몇 명의 직원이 더 와있었다.“소민아 씨, 촬영팀 일도 하는 거예요?”소민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퇴근하는 길에 궁금해서 와본 거예요.”여우림은 입을 다문 채 팔짱을 끼고 탈의실 쪽을 지켜보다가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랑 씨가 민아 씨와 있었던 일 말해줬어요. 두 사람 선봤다면서요.”“예전엔 항상 소개팅을 원하지 않아서 제가 대신 거절했었거든요.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어요. 민아 씨가 이랑 씨 어머니 친구 딸이라서요.”“지금까지 이랑 씨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늘 가장 처음으로 절 찾아 털어놓았어요. 이랑 씨가 민아 씨한테 많은 도움을 줄 테니까 민아 씨도 계속 노력하세요. 이번 일이 잘 성사되면 집에서 평생 놀고먹어도 될 거예요.”소민아는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꽤 긴 시간 비서로 일해온 경력이 있기 때문에 여우림의 행동과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조롱과 비난이 은은하게 담겨있는 말이었다. 회사가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여우림 씨,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하세요. 우림 씨는 이랑 씨의 편집장일 뿐, 집사가 아니에요. 저와 이랑 씨의 관계가 어떻든, 발전할 희망이 있든 없든, 우림 씨는 왈가왈부할 자격 없어요. 우림 씨도 이제 서른 살이 훌쩍 넘은 어른이잖아요. 저희 젊은 사람들의 일엔 자꾸 관심 둘 필요 없어요.”소민아는 그녀에게 눈을 까뒤집어 보이고는 아예 체리 접시를 들고 자리를 옮겨버렸다.“
소민아는 체리가 하마터면 목구멍에 걸릴 뻔했다. 한참을 용을 쓴 뒤에야 간신히 뱉어냈다.촬영팀 직원은 종래로 나타나지 않던 사람의 등장에 너무 놀라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옆에 있던 직원이 조심스레 그녀에게 말했다.“이 옷은 기 비서님이 대표님의 결혼식에 참석할 때 입으려고 맞춘 정장입니다. 그런 옷을...”소민아는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는 웃는 얼굴로 기성은의 손을 잡았다.“고작 옷 한 벌일 뿐이에요! 정 싫으면 지금 제가 나가서 사 올게요.”“기 비서님 이렇게 속 좁은 분 아니잖아요. 얼마 전엔 지갑 통째로 저한테 줬으면서.”기성은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차이나는 키의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간절함이 담긴 그녀의 눈동자에 그는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한 시간 뒤 지하주차장에서 날 기다려요.”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수신호를 보냈다.“알겠어요.”기성은은 대표님에 버금가는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어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그는 걸음을 옮기다가 돌연 문 앞에서 멈춰 섰다.“지금은 근무 시간인데 자리에 앉아있지 않으니 회사 방침대로 2만 원 벌금이에요.”“밴댕이 소갈딱지.”“상사를 모욕했으니 벌금 2만 원 추가.”그녀는 지금까지 이런 사람은 종래로 본 적이 없다.신이랑이 흰색 정장을 갈아입고 나왔다. 소민아는 몇 초간 멍하니 쳐다보다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이랑 씨는 글도 잘 쓰고 옷발도 잘 받네요. 진짜 멋있어요!”“민아 씨 마음에 들면 됐어요.”신이랑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소민아는 그 말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저 신이랑이 옷을 잘 골라주었다고 칭찬하는 거로 여겼다.소민아는 신이랑의 촬영이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쉬다가 가서 살펴보면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시간을 보니 여덟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소민아가 멍하니 앉아있을 때 기성은이 문자를 보내왔다.[지하 주차장으로 와요.]한창 촬영 중이라 소민아는 인사를
기성은이 설명했다.“주가은 씨는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회사 몇몇 프로젝트들은 시장 승인을 받아야 하고요.”젠장!소민아는 기성은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손에 들고 있는 물을 반병 들이키고 기성은의 몸에 던져버렸다.“죄송해요. 지금은 퇴근 이후라 혼자 가셔야겠네요. 전 두 분 오붓한 시간 방해하지 않고 가볼게요.”바로 옆에 엘리트 개인 병원이라 이 부근에서 식사를 해결하면 될 것이다. 이곳에서 집까지 걸어가려면 20분 정도 걸린다. 소민아는 호주머니에서 4천 원을 꺼내 기성은의 손에 꾸겨 넣었다.“차비예요.”이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뒤 다시 문을 닫았다. 일련의 깔끔한 동작을 마치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걸어갔다.배고파 미치겠는데 밥도 먹지 못하고 기성은을 따라 이딴 곳에 오다니.소민아는 길거리 끝자락에 있는 중식당에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종업원이 서빙하러 오자 그녀는 음식을 가득 시켰다.기성은은 머지않은 거리의 식당에서 주문하고 있는 그녀를 지켜보았다.몇 분 뒤, 소민아가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민아는 분노가 차올라 젓가락을 반으로 끊어버렸다.아직도 뭘 기대한단 말인가!신이랑의 촬영이 끝났을 때, 소민아가 주문한 음식도 모두 올랐다.신이랑은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여우림이 물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고생했어요. 이제 다 끝났어요. 이랑 씨가 좋아하는 식당 예약해뒀어요.”신이랑이 물었다.“그 사람은요?”여우림이 대답했다.“아까 갔어요. 민아 씨에게 할 말 있어요?”신이랑은 소민아가 놓고 간 약을 보고는 여우림에게 말했다.“먼저 가세요.”신이랑은 소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혼자예요?”“네. 저 혼자예요. 이랑 씨도 올 거예요?”“그래요.”소민아가 보내온 주소를 받은 신이랑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걸렸다.“저 먼저 갈게요.”“하지만...”신이랑은 바로 몸을 돌려 가버린 탓에 여우림의 굳은 얼굴을 보지 못했다.소민아는 음식이 식을까 봐 종업원에게
“조심해요.”신이랑이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조심하지 않아 그녀와 부딪힌 사람이 바로 사과했다.그때 녹색 신호등이 깜빡이자 신이랑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민아는 깜짝 놀라 꼭 맞잡은 두 손을 쳐다보고는 길을 다 건너고 난 뒤 당황스러운 얼굴로 손을 빼냈다.“고마워요. 또 말만 하느라 길을 제대로 보지 못했네요. 다음엔... 꼭 조심할게요.”신이랑이 손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민아 씨 손... 좀 차갑네요.”소민아가 말했다.“저 원래 이래요. 태어났을 때부터 겨울만 되면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요. 하지만 이미 익숙해졌으니까 괜찮아요.”신이랑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침묵 속에서 걸어갔다. 얼마 후 소민아가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이랑 씨 집은 저랑 반대 방향 아니에요?”신이랑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대답했다.“저 이사했어요.”“어디로요?”“곧 알게 될 거예요.”검은색 승용차 안, 주가은이 넋이 빠진 듯한 기성은을 보고는 말했다.“기성은 씨, 경매 곧 시작될 거예요.”기성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액셀을 밟았다.소민아는 줄곧 시선 하나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방향에 따라 고개를 돌린 순간, 주가은의 맑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익숙한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가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조금의 불편함 외에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기성은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에겐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상대는 시장의 따님이자 단아하고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다. 말투까지 부드럽고 친절하니 어떤 남자가 마다하겠는가.그녀가 줄곧 혼자 김칫국을 마신 것이다.됐다. 이제 그녀는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지금 그녀는 소월 언니를 위해 그와 연극을 하고 있다. 아니면... 그와 회사에서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신이랑 씨, 선봤던 거...
의사가 들어와 손이준을 진찰했다.장소월은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의사가 대답했다.“상처 회복은 잘 되고 있습니다. 휴식만 잘 취하면 됩니다.”“네, 알겠습니다.”의사가 떠나자, 장소월은 다가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때 갑자기 강용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이, 전 씨, 그 총알 맞고 왜 안 죽은 거요.”“무... 무슨 소리야?” 이불을 덮어주던 장소월의 손이 경직되어 멈춰 섰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강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거두려던 순간, 돌연 그의 손에 잡혀버렸다.“언제 알아차린 거야? 눈썰미 꽤 쓸만하네.”정... 정말 그 사람이었다!장소월은 충격에 휩싸여 병상에 누워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저항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강용은 재빨리 그들을 떼어놓았다. 전연우가 일어나려고 하자 강용은 순식간에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접근하려고 정말 애썼네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 누구예요?”강용의 손은 전연우의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웠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연우 씨, 내 손에 잡히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죠?”장소월은 여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전연우였다니.그를 본 순간 도망쳤어야 했지만, 그녀의 발은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거라고 했었잖아.”“소월아, 넌 내 아내야.”그 애절한 말에 장소월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아... 아니에요. 당신이 전연우일 리 없어요...”장소월은 뒷걸음질 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악마와 마주치기라도 한 듯, 강력한 충격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급기야 그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소월아...”강용이 그녀를 재빨리 붙잡았다.전연우는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아내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
강지훈이 명령했다.“말해.”부관은 손에 든 정보를 강지훈에게 건넸다. “최근 근처 도시에 세 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현재 저희가 일차적으로 걸러낸 상태이고, 곧 시스템으로 소현아 씨의 사진을 인식할 겁니다. 30분 안에 결과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강지훈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권총을 건네며 말했다.“지금 호텔로 간다.”“알겠습니다, 주인님.”거꾸로 매달려 있던 흑인 남자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곳은 사막과 가까운지라 지면에서 뜨거운 열기까지 올라오고 있었다.“가지 마세요! 형님!”“저 혼자 여기 두지 마세요. 무서워요, 아빠!”옆에 있던 규영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 사람 풀어주는 게 어떠십니까.”“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덕을 쌓는 셈 치는 거죠.”“제가 옛날 어르신께 듣기로는...” 그 순간 규영은 자기도 모르게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어르신의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강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뭐라고? 계속해!”규영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집안에 임신한 사람이 있을 때는 피를 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 재앙이 닥친다고요.”강지훈은 그 말을 듣고 황당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신은 대체 어디에서 주워들은 거야? 북경 감옥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그럼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지 못한다는 거야?”“주인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혹시 모르니 믿는 게 좋습니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작은 주인님을 위해서라도요.”“주인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면 자연히 작은 주인님에게 복이 쌓일 겁니다. 또한 현아 아가씨께서 순산도 하실 수 있을 거고요.”강지훈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예전에는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서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우리 둘 다 옷도 입고 있었어. 그냥 너무 추워서 그랬어. 강용 몸은 뜨겁고 따뜻하더라고.”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횡설수설 변명하는 소현아의 모습이 귀여워 장소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 나는 단지 강용의 안전을 걱정하는 거야. 그 강지훈이라는 사람은 아주 나쁜 놈이거든. 혹시 그 사람이 강용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야 해. 강용과 모르는 사이인 척, 전혀 개의치 않는 척해야 해. 알았지?”“그럼 소월이랑도 모르는 사이라고 해야 해?”장소월은 소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내가 방법을 알려줄게. 나중에 돌아가서 강지훈의 입에서 남자 이름이 나오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야 해. 여자는 괜찮아.”“그리고... 혹시 다른 사람이 널 괴롭히면 울면서 그 사람이 너를 때렸다고, 욕했다고 말해야 해. 강지훈한테 전부 고자질해.”소현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눈물이 안 나오면 어떡해? 꼭 울어야 해?”장소월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현아야, 넌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나중에 나한테도 딸이 생기면 너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하게 자라줬으면 좋겠어.”그녀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다.사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감옥에 가두기 십상이니까.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 그녀처럼 되어버리고 만다.소현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소현아는 장소월의 손을 잡고 북경 감옥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장소월은 강지훈이 소현아를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사랑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어오르는 감정이다.왜 하필 강지훈이란 말인가!장소월은 잠들어 있는 소현아를 보며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강지훈 같은 사람은 무해하고 천진난만한 소현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꺼려질
수술실 문밖에 돌아와 보니, 강용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었다.“수고했어. 먼저 가서 쉬어. 나랑 현아가 근처에 방 두 개 잡아놨어. 현아는 당분간 나랑 같이 잘 거고, 이건 네 방 카드야. 현아랑 같이 먼저 가 있어.”“됐어, 너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나중에 그 사람이 나오면 내가 도와야할 일이 있을 거야. 여자인 너 혼자서는 불편해.”장소월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소현아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간식 두 봉지도 들려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많이 못 챙겨왔거든.”“그래, 갔다 와.” 강용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모두 비웠다.장소월이 물었다. “옷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무거나, 네 맘대로 해.”강용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돈 좀 있어. 내 걸로 결제해.”“됐어. 이 돈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너는 남자니까, 나중에 뭐라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지”무거워진 장소월의 말투를 눈치챈 강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쳇, 네 그림 한 점이 몇천만 원이나 된다고 지금 날 비웃는 거지? 어휴. 아가씨, 절 키워주시는 건 어때요?“계속 아가씨의 개가 될게요.”장소월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개는 무슨.”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쇼핑몰에 가서 옷을 몇 벌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등록하려고 프런트에 선 순간,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하여 새로운 신분증을 꺼내 등록 정보로 사용했다.“미카엘 씨, 여기 객실 카드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감사합니다.”원래는 저렴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소현아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10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강 풍경이 눈
아이...지금 세 사람은 확실히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다.전 부인이 말했다. “절대 월이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내 아이 뺏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우리 셋 다 당신 아이 봐줄 시간 없어요. 당신이 준다고 해도 우리가 싫어요.”“참, 그리고 전 남편 치료비도 잊지 말고 내줘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때 부부였는데 너무 매정하게 굴지는 말아야죠.”그녀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던졌다. “그동안 아이를 키워준 양육비와 예전 나한테 줬던 돈 전부 갚았어요. 이제 각자 갈 길 가고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고요.”별이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장소월은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필경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니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엄마다. 엄마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무에게도 막을 권리가 없다.그들이 위풍당당하게 떠난 후, 강용은 돈을 세어보았다. 몇백 달러 정도였다. “제기랄, 몇만 달러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전 남편에게는 쥐꼬리만큼도 안 주다니. 빨리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내는 건가. 이 돈으로는 수술도 못 하겠네.”장소월이 말했다. “됐어, 강용.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거야. 일단 이준 씨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보자.”“그래.”소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월아, 아기가 배고픈 것 같아. 들어봐... 얘네 둘이 소리치고 있어.”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배고픈 거면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밥 먹을 시간이긴 하네. 넌 소현아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밥 먹어. 이준 씨한테는 내가 가볼게.”며칠 동안 강용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빨리 먹고 포장해서 갖다 줄게.”“그래.”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산부인과로 향했다. 30분 후, 결과가 나왔고 예상외로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의사는 검사
바로 맞은편 길에서 또 한 무리의 차량이 웅장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규영이 돌연 즉시 차를 세우라며 소리쳤다. “...저... 현아 아가씨 목소리 들은 것 같아요.”강지훈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그 말에 번쩍 눈을 떴다. “확실해?”규영은 확신할 수는 없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정말 현아 아가씨 같았어요. 소월이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요. 현아 아가씨 친구분이 장소월 씨잖아요. 그냥 우연인 걸까요?”강지훈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까지 바닥난 듯 말했다. “얼마나 남았지?”운전석에 묶여 있던 남자는 강지훈이 꽤 많은 힘을 들여서 찾아낸 인물이었다. 소현아의 행방을 쫓다가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 바로 이 남자가 소현아에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강지훈의 정보 조직이 오랫동안 소현아의 소식을 찾지 못했던 이유였다.강지훈은 항공편 정보를 토대로 소현아의 사진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그녀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이곳 사막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얼마 전 폭동이 일어났고, 소현아는 무사하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흑인 남자가 한 민박집 앞에 차를 세웠다. “여깁니다, 바로 여기예요.” 사투리가 가득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강지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이어 뒤따라오던 몇 대의 검은색 승용차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잠겨 있는 대문을 본 강지훈은 그대로 발로 쾅 하고 걷어찼다. 몇몇 사람들이 신속하게 위층으로 올라갔고, 강지훈도 천천히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규영과 미경은 주방으로 향했다.2분 후, 위층으로 올라갔던 흑인 남자가 보고했다. “위층에는 세 명이 살고 있고, 옷가지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떠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규영이 말했다.“주인님, 냉장고에 현아 아가씨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와 포도가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흔적도 있습니다.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강지훈은 베개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