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눈길을 고정한 채 빙그레 웃어 보였다.“아는 사이 맞아요.”“퇴근했어요? 내가 데려다줄게요.”“그건...”그럴 필요 없어요.소민아는 말을 채 마치기 전 회사 정류장을 지나치는 버스를 발견했다. 그러고는 바로 말을 바꾸었다.“그럼 부탁할게요.”옆에 있던 편집부 직원은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저기, 작가님, 제가 이미 차 불러뒀어요. 곧 올 거예요.”“네.”갑자기 이런 행운이?택시가 도착하자 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차에 올라탄 뒤 편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퇴근할 때마다 버스 탔었는데 오늘은 이랑 씨 덕분에 택시를 타고 집에 가네요. 헤헤헤... 고마워요.”신이랑은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소민아가 물었다.“이랑 씨, 저희 회사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왔으면서 왜 저한텐 아무 말 안 했어요. 말했으면 마중 나갔을 텐데.”“그냥 인터뷰 좀 했어요. 별거 아니에요.”“인터뷰요? 인터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사람들이 이랑 씨는 신비주의라던데...”신이랑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3일 뒤에 경시 도서관에서 사인회를 열 예정인데, 그날... 같이 가줄 수 있어요?”소민아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당연히 되죠! 저 정말 같이 가도 돼요?”그때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손끝이 잘못 스쳐 통화가 연결되었다. 그 순간에도 소민아는 쉴 새 없이 차 안에서 신이랑에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택시 운전기사까지도 귀가 얼얼해질 지경이었다.하지만 신이랑은 조금도 불편한 기색 없이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7시 반, 신이랑과 그녀는 함께 밥을 먹기로 했다.그들은 한 중식당에 들어가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컵에 물을 따라주자 그녀는 바로 목을 적시고는 말했다.“제가 말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랑 씨가 처음이에요. 제 말을 끊지 않는 사람도 이랑 씨가 처음이고요. 친구들도 제가 말이 많다며 짜증 내거든요.”신이랑
그와 회사에서 마주친다고 해도 상관없다. 여전히 다른 동료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그때 편집부 직원이 스태프 증 하나를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민아 씨... 신이랑 작가님과 무슨 사이예요? 오늘 사인회에 반드시 민아 씨를 들여보내 달라고 신신당부하시던데, 정말 너무 부러워요. 끝나면 사인받은 새 책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소민아는 흐뭇한 얼굴로 스태프 증을 목에 걸고는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걱정 말아요. 그것 하나 못 해주겠어요?”“그리고 하나 부탁할 게 더 있는데...”‘말해요.”“신이랑 씨 카톡에 친구추가 신청을 보냈는데 지금까지 계속 받지 않았어요. 신청 수락하게 도와줄 수 있어요?”“말해볼게요. 하지만... 그분이 정말 수락할지는 저도 장담 못 해요.”“괜찮아요. 제 느낌에 작가님은 민아 씨를 특별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민아 씨 말은 분명 효과적일 거예요.”“차가 밑에서 대기하고 있어요. 어서 가봐요. 작가님이 기다리고 계세요.”사인회는 9시 반 시작이라 아직 30분이 남아 있었다.사무실 사람들 모두 그녀가 신이랑의 사인을 받은 책을 가져다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경시 도서관, 그들은 조용한 직원 전용 통로를 통해 사인회장으로 향했다.2층까지 올라간 뒤, 소민아는 창가에서 잔뜩 흥분한 얼굴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이랑 씨, 진짜 톱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네요. 이랑 씨 진짜 얼굴을 보면 더 깊게 빠지겠어요.”동행하고 있던 편집부 직원이 말했다.“사인만 하시면 돼요. 누가 사진 찍자고 하시면 거절하세요.”소민아가 뒤를 돌아보니 신이랑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편집부 여우림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두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잘 어울리고 닮은 것 같아 보였다.정장을 갖춰 입은 여우림이 자리에서 일어서 말했다.“소민아 씨, 2분 뒤면 시작할 거예요. 사인회 동안 팬분들 잘 지켜봐 주세요. 전 다른 일이 있어요. 곧 중요한 손님이 도착하
차가 도착한 뒤, 여우림은 차 문을 열고 고개를 돌려 신이랑을 쳐다보았다.“왜 그래요?”“잠깐만 기다려요.”신이랑이 말하는 기다림의 대상은 다름 아닌 소민아였다. 머지않은 곳에서부터 소민아가 버블티 네 잔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 숨을 헉헉 몰아쉬며 말이다.“버블티 드세요. 제가 사는 거예요.”여우림은 잠시 고민하다가 거절했다.“죄송해요. 민아 씨. 저와 작가님은 다 버블티 안 마셔요. 마음만 받을게요.”신이랑은 소민아가 들고 있는 버블티를 가져갔다.“괜찮아요. 마실 수 있어요.”신이랑은 뒷좌석 차 문을 열어주었다.“타요.”소민아가 대답했다.“고마워요.”지금까지 바깥에서 이동할 때 신이랑은 늘 그녀와 함께 앉았었다. 그의 편집 어시스트라기보단 개인 비서에 더 가깝다 할 수 있었다. 예전 그들의 플랫폼은 그저 소수의 인원들이 드나드는 변방 문학 사이트에 불과했었다. 신이랑이 ‘풍신’이라는 이름으로 첫 책을 출간한 이후부터 방대한 이윤을 얻어 국내 유명 플랫폼들을 가뿐히 앞섰다.점점 커져가는 사이트의 영향력과 몸집 덕분에 이제 자신만의 판매 루트도 생겼다. 업계 가장 높은 위치까지 성장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그를 만난 건 여우림에겐 가장 큰 행운이었다.그녀의 엄마가 암 수술을 받고 입원했을 때, 병원 벤치에서 글을 쓰고 있는 신이랑을 만났다.그녀는 신이랑이 그저 작은 출판사 직원인 줄로 알았다.무협 소설 분야를 신설하려던 그때, 마침 신이랑도 비슷한 유형의 글을 쓰고 있었다.그렇게 여우림은 신이랑의 첫 독자가 되었다.신이랑의 소설은 세상에 얼굴을 내민 뒤 꽤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여우림도 적잖은 보너스를 받아 그 돈으로 자신의 소설 사이트를 개설했다.그녀가 신이랑의 손을 잡고 만든 사이트는 하루가 다르게 승승장구했다.단 두 명으로 시작해 점점 규모를 확장했다. 여우림의 뛰어난 사업가 기질과 신이랑의 현란한 글솜씨가 어우러진 결과였다. 다만... 그 과정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여우림이 조수석에 앉아
매니저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오늘 귀한 세 분과의 약속을 위해 전 대표님과 사모님께서 식당 전체를 빌리셨습니다.”소민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역시 부자는 다르네요. 부러워 죽겠어요. 저에게도 그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신이랑이 그를 바라보며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분명 올 거예요.”룸 문 앞, 여우림이 걸음을 멈추었다.“사모님이 만나고 싶어 하시는 사람은 이랑 씨예요. 민아 씨, 우린 들어가지 말고 로비에서 기다리죠.”소민아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미안해서 어쩌죠? 저 이미 오는 길에 소월 언니한테 문자 보냈어요.”그녀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새하얀 치아를 드러냈다.신이랑도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아는 사이든 아니든 상관없으니까 나랑 같이 가요.”“우림 씨는 먼저 돌아가요. 식사 끝나면 내가 민아 씨 집에 데려다줄게요.”여우림은 잠깐 이마를 찌푸렸다가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잘됐네요. 마침 저도 책 출간에 관한 일 때문에 가려던 참이었어요. 이번 달 원고료 확인해봐요. 서프라이즈가 도착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들어가요.”신이랑은 그녀의 말을 별로 귀담아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소민아는 그를 보고 피식 웃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룸 안에선 장소월이 아이를 안고 젖병을 물리고 있었고 은경애는 뒤에서 상에 차려진 음식을 보며 조용히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세상에, 족발 먹음직스러운 것 좀 봐. 한 입 삼키면... 얼마나 맛있을까.’“소월 언니...”소민아가 엉덩이를 흔들거리며 달려와 장소월의 옆에 앉았다.“어머나, 아기 너무 예뻐요.”“왔어요?”“네. 오늘 길이 막혀서 좀 늦었어요. 저 빨리 아기 안아보고 싶어요.”장소월은 별이를 그녀에게 안겨준 뒤 신이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풍신 작가님?”신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장소월은 방긋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젊은 분일 줄은 몰랐네요. 얼른 앉아서 식사하세요.”소민아는 룸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그 사람이 보
신이랑은 자리에 앉아있었다.“사 온 버블티 왜 안 드렸어요.”소민아는 바닥에서 버블티 석 잔을 들어 올렸다.“소월 언니는 얼마 전에 수술받아서 아직 몸을 채 회복되지 못한 상태예요. 이런 음료 마시면 안 돼요. 그리고 시간이 꽤 오래 지나서 상했을지도 모르잖아요. 만에 하나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대표님은 절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 이랑 씨는 몰라요... 그분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소민아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역시 제가 나서서 다 먹어치워야겠네요.”신형 벤틀리 하이브리드 벤, 바로 전연우가 최근 새로 뽑은 자동차였다. 요즘 전연우는 결혼식 준비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의 곁에서 보냈다. 조금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는 훌륭한 승차감을 자랑하는 차 안, 거대한 공간에 술과 음료, 대량의 아기용품... 그리고 각종 간식들도 들어있었다.전연우가 물었다.“만났어?”“응. 되게 젊더라고. 내가 보기에 민아 씨랑 이랑 씨 사귀는 것 같아. 엄청 잘 어울려.”전연우의 얼굴 표정은 변덕스러운 오늘의 날씨와도 같았다. 첫 마디에 확연히 어두워졌다가 마지막까지 들으니 바로 정상으로 회복됐다.“넌 이미 결혼한 몸이니까 다른 생각 하면 안 돼.”강렬한 소유욕이 가득 담겨 있는 한 마디였다.하지만 장소월은 바로 전연우의 숨통을 옥죄었다.“현실은 인정해야지. 신이랑 씨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16살에 을 쓰기 시작해 17살에 출간했어. 18살엔 완전한 유명세를 탔고. 중요한 건 너보다 젊다는 거야.”전연우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느릿하게 입고 있던 정장을 벗고 셔츠 손목 단추를 풀고는 소매를 걷어 올려 건장한 팔뚝을 드러냈다.“혼나고 싶은가 보네.”“기획팀에서 신이랑 작품 편집권을 손에 넣었어. 지금쯤 스카이 스튜디오에 계약서가 갔을 거야. 곧 네 남신의 작품을 직접 그리게 될 텐데 만족해?”장소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휴가 내겠다고 작업실에 얘기했어.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일 받지 않고
소민아가 말했다.“안 탈 거예요. 이미 퇴근했어요.”“오늘 내가 했던 말 잊었어요? 안 타면 그 후과 책임져야 할 거예요.”흑흑... 또 협박하고 있다.소민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향해 소리쳤다.“헤어졌는데 왜 날 찾아왔어요! 퇴근했는데도 시간을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못 써요? 정말 양심도 없는 사람이야!”그녀는 일부러 상처받은 모습으로 눈물을 훔치는 척했다.인내심이 바닥난 기성은은 차에서 내렸다.“닦기 전에 먼저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려 왔는지나 확인하는 게 어때요?”“기 비서님.”더없이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가 머지않은 곳에서 들려왔다.소민아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주가은 씨.”“이런 우연이! 또 만나네요.”“민아 씨, 오늘 바람이 너무 거세네요. 우리 얼른 집에 들어가요.”주가은은 하얀색 털 외투로 온몸을 꽁꽁 감싸고 있었다. 긴 머리는 깔끔하게 위로 올려 묶었고, 온몸에선 단아하고 부드러운 기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몸매는 바람이라도 불면 흔들려 나갈 것처럼 여리여리했다.“전 괜찮아요. 나온 김에 좀 걷고 싶어요.”주가은은 무슨 병에라도 걸린 사람같이 얼굴이 창백했다. 하지만 핑크색을 띄는 입술만큼은 반짝반짝 아주 예뻤다.“기 비서님, 다친 데는 좀 어때요? 당분간 상처에 물이 닿으면 안 돼요.”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이제 많이 괜찮아졌어요. 전 다른 일이 있어 먼저 가볼게요. 가은 씨, 몸조심해요.”주가은의 입꼬리가 빙그레 말려 올라갔다.“네.”소민아는 기성은이 누군가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마음속에서 순간 살벌한 불길이 밀려 올라오는 것 같았다.여자의 직감이 두 사람은 예사로운 관계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그녀는 주가은을 아래위로 살펴보고는 자신과 비교하기 시작했다.가슴도 그녀보다 크지 않고, 엉덩이도 그녀보다 탱탱하지 않으며 허리 역시 그녀보다 가늘지 않았다.또한 그녀는 목소리도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입만 열면 쩌렁
“있어요.”순간 불어온 바람 소리에 소민아는 신이랑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길옆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속에서 소민아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역시나 주가은을 데리고 사라져버렸다.소민아는 팔로 몸을 감싸고 귓가에 잔머리를 내리뜨린 채 물었다.“이랑 씨, 한번 말해봐요. 사귀자고 먼저 말한 건 저 사람인데 왜 항상 저한테 차갑게 대하는 걸까요?”“어제 제가 헤어지자고 말하니까 오늘 또 절 찾아왔어요. 절 어장에 가둔 물고기라고 생각하는 거 맞죠!”소민아는 명문대생은 아니지만 적어도 서울 유명 대학은 당당히 졸업한 사람이다. 학생 시절, 그녀는 연애를 별로 하지 않았다. 한 번 사귀었던 선배는 그녀가 너무 고지식하다는 이유로 무용과 퀸카와 바람을 피웠었다.지금까지 솔로로 지내오다가 겨우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녀를 이토록 냉담하게 대한다.소민아는 이처럼 억울하고 답답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제가 아무리 예전 그 사람에게 들이댔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장난감 다루듯 막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맞아요.”신이랑이 검고 짙은 속눈썹을 평온하게 내리뜨리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제가 그 사람에게 쓴 편지 봤을까요?”그날 밤 기성은이 그녀에게 키스한 게 맞나?그렇다. 소민아는 이미 오래전 기성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그의 비서로 일하며 기성은이 회의실에서 당당히 임원들에게 발언하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아니면 급히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발이 접질려 그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을 때부터?아니면... 처음 회사에 출근해 신입 사원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을 때 기성은이 그녀를 도와줬고 그 이후 비서로 일하게 해준 일로 좋아하게 된 건가?하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매일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성은과 붙어 있었다. 주말과 명절을 포함한 쉬는 날에도 그와 함께 늦게까지 회사에서 일했다.대표님이 회사에 계시지 않았던 저번 달 어느 날
소민아는 소파에 엎드려 초롱초롱한 눈으로 서류를 보는 모습까지도 멋있는 기성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서팀 모든 직원들은 기성은의 옆에서 일하는 소민아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그 준수한 얼굴과 마주하고 밥을 먹으면 맛없는 것도 맛있게 느껴질 것이다.그가 일을 끝마치자 소민아는 마지막으로 사무실 불을 껐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에 내려가니 마침 옆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직원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흥미진진하게 오늘 밤 야식 메뉴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중 용감한 여직원 한 명이 기성은을 불러세웠다.“기 비서님도 퇴근하시는 거예요? 저희랑 같이 야식 드시러 가요! 회사에서 이렇게나 큰 프로젝트를 따냈는데 기 비서님이 한턱 쏘셔야하지 않겠어요?”“그러니까요! 오랜만에 이렇게 늦게까지 야근했는데 저희랑 함께 가요.”한 무리의 직원들이 덩달아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그렇게 힘이 남아돌면 내일도 계속 야근하세요.”기성은이 찬물을 확 끼얹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앞장서 기성은을 조르던 직원이 소민아를 끌고 와 조용히 말했다.“민아 씨, 기 비서님과 접촉할 수 있는 이런 어려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그동안 우리 마케팅팀에서 가십거리 많이 들려줬잖아요. 마침 새 이야깃거리도 있으니까 식사할 때 몰래 알려줄게요.”소민아는 조용히 그녀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나만 믿어요.”소민아는 앞으로 총총 달려갔다.“헤헤헤. 기 비서님, 저 배고픈데 저희도 같이 야식 먹으러 갈까요?”“언제부터 저 사람들과 한패가 된 거예요? 안 힘들어요?”소민아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조금 전까지 푹 잤잖아요! 저희도 같이 가요. 저 사람들한테 호언장담했어요. 비서님이 함께 가신다에 10만 원 걸었고요. 10만 원 받으면 그중 4만 원 드릴게요.”“참 할 일 없네요.”“휴. 욕심 많으시네요. 알았어요. 그럼 6만 원 드릴게요.”기성은이 호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고 진정어린 눈
의사가 들어와 손이준을 진찰했다.장소월은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의사가 대답했다.“상처 회복은 잘 되고 있습니다. 휴식만 잘 취하면 됩니다.”“네, 알겠습니다.”의사가 떠나자, 장소월은 다가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때 갑자기 강용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이, 전 씨, 그 총알 맞고 왜 안 죽은 거요.”“무... 무슨 소리야?” 이불을 덮어주던 장소월의 손이 경직되어 멈춰 섰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강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거두려던 순간, 돌연 그의 손에 잡혀버렸다.“언제 알아차린 거야? 눈썰미 꽤 쓸만하네.”정... 정말 그 사람이었다!장소월은 충격에 휩싸여 병상에 누워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저항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강용은 재빨리 그들을 떼어놓았다. 전연우가 일어나려고 하자 강용은 순식간에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접근하려고 정말 애썼네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 누구예요?”강용의 손은 전연우의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웠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연우 씨, 내 손에 잡히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죠?”장소월은 여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전연우였다니.그를 본 순간 도망쳤어야 했지만, 그녀의 발은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거라고 했었잖아.”“소월아, 넌 내 아내야.”그 애절한 말에 장소월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아... 아니에요. 당신이 전연우일 리 없어요...”장소월은 뒷걸음질 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악마와 마주치기라도 한 듯, 강력한 충격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급기야 그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소월아...”강용이 그녀를 재빨리 붙잡았다.전연우는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아내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
강지훈이 명령했다.“말해.”부관은 손에 든 정보를 강지훈에게 건넸다. “최근 근처 도시에 세 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현재 저희가 일차적으로 걸러낸 상태이고, 곧 시스템으로 소현아 씨의 사진을 인식할 겁니다. 30분 안에 결과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강지훈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권총을 건네며 말했다.“지금 호텔로 간다.”“알겠습니다, 주인님.”거꾸로 매달려 있던 흑인 남자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곳은 사막과 가까운지라 지면에서 뜨거운 열기까지 올라오고 있었다.“가지 마세요! 형님!”“저 혼자 여기 두지 마세요. 무서워요, 아빠!”옆에 있던 규영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 사람 풀어주는 게 어떠십니까.”“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덕을 쌓는 셈 치는 거죠.”“제가 옛날 어르신께 듣기로는...” 그 순간 규영은 자기도 모르게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어르신의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강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뭐라고? 계속해!”규영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집안에 임신한 사람이 있을 때는 피를 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 재앙이 닥친다고요.”강지훈은 그 말을 듣고 황당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신은 대체 어디에서 주워들은 거야? 북경 감옥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그럼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지 못한다는 거야?”“주인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혹시 모르니 믿는 게 좋습니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작은 주인님을 위해서라도요.”“주인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면 자연히 작은 주인님에게 복이 쌓일 겁니다. 또한 현아 아가씨께서 순산도 하실 수 있을 거고요.”강지훈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예전에는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서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우리 둘 다 옷도 입고 있었어. 그냥 너무 추워서 그랬어. 강용 몸은 뜨겁고 따뜻하더라고.”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횡설수설 변명하는 소현아의 모습이 귀여워 장소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 나는 단지 강용의 안전을 걱정하는 거야. 그 강지훈이라는 사람은 아주 나쁜 놈이거든. 혹시 그 사람이 강용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야 해. 강용과 모르는 사이인 척, 전혀 개의치 않는 척해야 해. 알았지?”“그럼 소월이랑도 모르는 사이라고 해야 해?”장소월은 소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내가 방법을 알려줄게. 나중에 돌아가서 강지훈의 입에서 남자 이름이 나오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야 해. 여자는 괜찮아.”“그리고... 혹시 다른 사람이 널 괴롭히면 울면서 그 사람이 너를 때렸다고, 욕했다고 말해야 해. 강지훈한테 전부 고자질해.”소현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눈물이 안 나오면 어떡해? 꼭 울어야 해?”장소월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현아야, 넌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나중에 나한테도 딸이 생기면 너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하게 자라줬으면 좋겠어.”그녀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다.사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감옥에 가두기 십상이니까.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 그녀처럼 되어버리고 만다.소현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소현아는 장소월의 손을 잡고 북경 감옥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장소월은 강지훈이 소현아를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사랑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어오르는 감정이다.왜 하필 강지훈이란 말인가!장소월은 잠들어 있는 소현아를 보며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강지훈 같은 사람은 무해하고 천진난만한 소현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꺼려질
수술실 문밖에 돌아와 보니, 강용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었다.“수고했어. 먼저 가서 쉬어. 나랑 현아가 근처에 방 두 개 잡아놨어. 현아는 당분간 나랑 같이 잘 거고, 이건 네 방 카드야. 현아랑 같이 먼저 가 있어.”“됐어, 너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나중에 그 사람이 나오면 내가 도와야할 일이 있을 거야. 여자인 너 혼자서는 불편해.”장소월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소현아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간식 두 봉지도 들려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많이 못 챙겨왔거든.”“그래, 갔다 와.” 강용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모두 비웠다.장소월이 물었다. “옷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무거나, 네 맘대로 해.”강용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돈 좀 있어. 내 걸로 결제해.”“됐어. 이 돈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너는 남자니까, 나중에 뭐라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지”무거워진 장소월의 말투를 눈치챈 강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쳇, 네 그림 한 점이 몇천만 원이나 된다고 지금 날 비웃는 거지? 어휴. 아가씨, 절 키워주시는 건 어때요?“계속 아가씨의 개가 될게요.”장소월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개는 무슨.”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쇼핑몰에 가서 옷을 몇 벌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등록하려고 프런트에 선 순간,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하여 새로운 신분증을 꺼내 등록 정보로 사용했다.“미카엘 씨, 여기 객실 카드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감사합니다.”원래는 저렴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소현아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10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강 풍경이 눈
아이...지금 세 사람은 확실히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다.전 부인이 말했다. “절대 월이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내 아이 뺏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우리 셋 다 당신 아이 봐줄 시간 없어요. 당신이 준다고 해도 우리가 싫어요.”“참, 그리고 전 남편 치료비도 잊지 말고 내줘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때 부부였는데 너무 매정하게 굴지는 말아야죠.”그녀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던졌다. “그동안 아이를 키워준 양육비와 예전 나한테 줬던 돈 전부 갚았어요. 이제 각자 갈 길 가고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고요.”별이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장소월은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필경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니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엄마다. 엄마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무에게도 막을 권리가 없다.그들이 위풍당당하게 떠난 후, 강용은 돈을 세어보았다. 몇백 달러 정도였다. “제기랄, 몇만 달러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전 남편에게는 쥐꼬리만큼도 안 주다니. 빨리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내는 건가. 이 돈으로는 수술도 못 하겠네.”장소월이 말했다. “됐어, 강용.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거야. 일단 이준 씨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보자.”“그래.”소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월아, 아기가 배고픈 것 같아. 들어봐... 얘네 둘이 소리치고 있어.”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배고픈 거면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밥 먹을 시간이긴 하네. 넌 소현아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밥 먹어. 이준 씨한테는 내가 가볼게.”며칠 동안 강용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빨리 먹고 포장해서 갖다 줄게.”“그래.”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산부인과로 향했다. 30분 후, 결과가 나왔고 예상외로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의사는 검사
바로 맞은편 길에서 또 한 무리의 차량이 웅장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규영이 돌연 즉시 차를 세우라며 소리쳤다. “...저... 현아 아가씨 목소리 들은 것 같아요.”강지훈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그 말에 번쩍 눈을 떴다. “확실해?”규영은 확신할 수는 없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정말 현아 아가씨 같았어요. 소월이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요. 현아 아가씨 친구분이 장소월 씨잖아요. 그냥 우연인 걸까요?”강지훈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까지 바닥난 듯 말했다. “얼마나 남았지?”운전석에 묶여 있던 남자는 강지훈이 꽤 많은 힘을 들여서 찾아낸 인물이었다. 소현아의 행방을 쫓다가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 바로 이 남자가 소현아에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강지훈의 정보 조직이 오랫동안 소현아의 소식을 찾지 못했던 이유였다.강지훈은 항공편 정보를 토대로 소현아의 사진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그녀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이곳 사막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얼마 전 폭동이 일어났고, 소현아는 무사하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흑인 남자가 한 민박집 앞에 차를 세웠다. “여깁니다, 바로 여기예요.” 사투리가 가득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강지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이어 뒤따라오던 몇 대의 검은색 승용차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잠겨 있는 대문을 본 강지훈은 그대로 발로 쾅 하고 걷어찼다. 몇몇 사람들이 신속하게 위층으로 올라갔고, 강지훈도 천천히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규영과 미경은 주방으로 향했다.2분 후, 위층으로 올라갔던 흑인 남자가 보고했다. “위층에는 세 명이 살고 있고, 옷가지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떠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규영이 말했다.“주인님, 냉장고에 현아 아가씨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와 포도가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흔적도 있습니다.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강지훈은 베개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