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요.”순간 불어온 바람 소리에 소민아는 신이랑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길옆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속에서 소민아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역시나 주가은을 데리고 사라져버렸다.소민아는 팔로 몸을 감싸고 귓가에 잔머리를 내리뜨린 채 물었다.“이랑 씨, 한번 말해봐요. 사귀자고 먼저 말한 건 저 사람인데 왜 항상 저한테 차갑게 대하는 걸까요?”“어제 제가 헤어지자고 말하니까 오늘 또 절 찾아왔어요. 절 어장에 가둔 물고기라고 생각하는 거 맞죠!”소민아는 명문대생은 아니지만 적어도 서울 유명 대학은 당당히 졸업한 사람이다. 학생 시절, 그녀는 연애를 별로 하지 않았다. 한 번 사귀었던 선배는 그녀가 너무 고지식하다는 이유로 무용과 퀸카와 바람을 피웠었다.지금까지 솔로로 지내오다가 겨우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녀를 이토록 냉담하게 대한다.소민아는 이처럼 억울하고 답답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제가 아무리 예전 그 사람에게 들이댔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장난감 다루듯 막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맞아요.”신이랑이 검고 짙은 속눈썹을 평온하게 내리뜨리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제가 그 사람에게 쓴 편지 봤을까요?”그날 밤 기성은이 그녀에게 키스한 게 맞나?그렇다. 소민아는 이미 오래전 기성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그의 비서로 일하며 기성은이 회의실에서 당당히 임원들에게 발언하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아니면 급히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발이 접질려 그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을 때부터?아니면... 처음 회사에 출근해 신입 사원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을 때 기성은이 그녀를 도와줬고 그 이후 비서로 일하게 해준 일로 좋아하게 된 건가?하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매일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성은과 붙어 있었다. 주말과 명절을 포함한 쉬는 날에도 그와 함께 늦게까지 회사에서 일했다.대표님이 회사에 계시지 않았던 저번 달 어느 날
소민아는 소파에 엎드려 초롱초롱한 눈으로 서류를 보는 모습까지도 멋있는 기성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서팀 모든 직원들은 기성은의 옆에서 일하는 소민아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그 준수한 얼굴과 마주하고 밥을 먹으면 맛없는 것도 맛있게 느껴질 것이다.그가 일을 끝마치자 소민아는 마지막으로 사무실 불을 껐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에 내려가니 마침 옆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직원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흥미진진하게 오늘 밤 야식 메뉴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중 용감한 여직원 한 명이 기성은을 불러세웠다.“기 비서님도 퇴근하시는 거예요? 저희랑 같이 야식 드시러 가요! 회사에서 이렇게나 큰 프로젝트를 따냈는데 기 비서님이 한턱 쏘셔야하지 않겠어요?”“그러니까요! 오랜만에 이렇게 늦게까지 야근했는데 저희랑 함께 가요.”한 무리의 직원들이 덩달아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그렇게 힘이 남아돌면 내일도 계속 야근하세요.”기성은이 찬물을 확 끼얹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앞장서 기성은을 조르던 직원이 소민아를 끌고 와 조용히 말했다.“민아 씨, 기 비서님과 접촉할 수 있는 이런 어려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그동안 우리 마케팅팀에서 가십거리 많이 들려줬잖아요. 마침 새 이야깃거리도 있으니까 식사할 때 몰래 알려줄게요.”소민아는 조용히 그녀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나만 믿어요.”소민아는 앞으로 총총 달려갔다.“헤헤헤. 기 비서님, 저 배고픈데 저희도 같이 야식 먹으러 갈까요?”“언제부터 저 사람들과 한패가 된 거예요? 안 힘들어요?”소민아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조금 전까지 푹 잤잖아요! 저희도 같이 가요. 저 사람들한테 호언장담했어요. 비서님이 함께 가신다에 10만 원 걸었고요. 10만 원 받으면 그중 4만 원 드릴게요.”“참 할 일 없네요.”“휴. 욕심 많으시네요. 알았어요. 그럼 6만 원 드릴게요.”기성은이 호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고 진정어린 눈
가십거리는 무슨, 목적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함정에 빠뜨릴 줄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당하고만 사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소민아는 팔꿈치로 옆에 앉은 사람을 툭 건드리고는 말했다.“어머, 저한테 월급을 하사하시는 물주님이 여기 계시잖아요? 이분이 계시는 한 오늘 밥값 결제는 제 차례까지 오지 못하겠네요.”성주미는 마케팅팀에서 영업 실적이 가장 좋은 에이스였다. 부드럽고 애교스러운 목소리는 사람들의 정신을 집중시키는 훌륭한 필살기였다. 예쁘게 매니큐어를 한 손을 아래턱에 괴고 기성은을 향해 큰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을 남자 동료들은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민아 씨 말투를 들어보니까 왠지 두 사람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설마 사귀고 있는 거예요?”“설마요! 성세 그룹은 사내 연애를 금지하잖아요. 들키면 바로 해고예요. 기 비서님은 절대 앞장서 회사 규정을 어길 분이 아니에요.”기성은은 신경 쓰지 않고 컵 안 물을 마시고 있었다. 상에 차려져 있는 꼬치구이엔 손도 대지 않았다.소민아가 한창 맛있게 먹고 있을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10만 원 이체 알림 문자와 자리를 바꿔 앉자는 성주미의 문자였다.돈 버는 게 이렇게나 쉬운 거였다니. 벌써 20만 원이나 손에 들어왔다.소민아는 얼른 알겠다고 답장했다.소민아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화장실에 갔고 성주미는 그 기회를 틈타 기성은의 옆에 자리 잡았다.화장실에서 나온 소민아의 눈에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는 성주미가 들어왔다. 기성은은 성주미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일할 땐 그토록 말이 없던 기성은이 말이다.소민아는 돌연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 하여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몸에 밴 냄새를 떨쳐내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걸어와 그녀 옆에 앉았다.“다 먹었어요?”소민아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남자 동료가 캔맥주를 건네자 그녀는 별다른 생각 없이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정말... 맛
“세상에, 민아 씨 대단하네요!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흠모를 받는 인기녀가 된 거죠?”기성은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으로 들고 있던 유리컵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얼굴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기성은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소민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그녀가 무언가 저지를 거라 예감하고는 있었지만...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맥주캔을 들고 기성은의 뒤까지 걸어오고는 철퍼덕 그의 등에 엎드려 한 손을 어깨에 걸쳐놓았다.“아이고, 이분 누구예요? 아까는 왜 못 봤죠? 이름이 뭐예요? 어느 팀 직원이에요? 어디 살아요? 애인은 있어요? 올해 몇 살이에요? 가족 관계는 어때요? 다 나한테 말해봐요.”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민아 씨, 미쳤어요!”기성은이 위압력 가득한 눈빛으로 옆에 있는 주건형을 쏘아보았다.“얼마나 마시게 한 거예요?”“아까 한 병 마셨을 때는 괜찮았었는데... 지금은 세 병 마신 상태예요. 하지만... 이 맥주 도수도 별로 안 높아서 이렇게 쉽게 취할 줄은 정말 몰랐어요.”“죄송합니다, 기 비서님. 제 잘못입니다. 이렇게 많이 마시게 하는 게 아니었어요. 제가 지금 집에 데려다줄게요.”“집에 간다고요? 난 안 가요!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고요!”소민아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기성은에게 헤헤 웃었다.“어이, 기생오라비, 누나한테 한 잔 따라봐.”기성은은 소민아의 허리를 감싸고 번쩍 들었다.“밥값은 내일 재무부에서 해결할 거예요. 내가 말해놓을게요.”그 한마디 말을 남긴 뒤 기성은은 쌀가마니 들 듯 소민아를 둘러메고 가게를 나섰다.소민아는 그렇게 강제로 차 조수석에 태워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직원들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럴 줄 알았다면 저도 취할 걸 그랬어요. 그럼 기 비서님한테 저렇게 안겼을지도 모르잖아요.”기성은이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해주려고 몸을 기울이자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던 소민아는 팔을 뻗어 그의 넥타이를 잡고는 입술을 슥슥
바로 그날 야식 모임 이후로 기성은과 그녀의 관계는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데엔 특별한 이유가 필요 없다. 그저 자신만이 인정하는 마음이 움직인 순간 하나만 있으면 된다.그 일이 일어난 날짜는 다름 아닌 기성은이 그녀와 소현아를 남원 별장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들을 장소월을 협박하는 도구로 사용했을 때였다.그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소민아는 기성은에게 자신은 그저 부하직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에게 그 어떠한 특별한 감정도 없다.여자들은 마음속에 늘 자신보다 몇백 배 더 훌륭한 남자 한 명을 품고 있다.그런 때엔 눈에 콩깍지가 씌어 모든 것이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보인다...하지만 그저 환상일 뿐 현실과는 다르다...그 콩깍지가 벗겨진 순간에야 깨닫는다. 그 시절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은 실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는 걸.하지만 잊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소민아는 얼이 빠진 것 같은 상태로 고개를 푹 숙이고 아파트 단지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뒤에서 신이랑이 줄곧 따라오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 한 채 말이다. 그녀는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고는 바로 닫아버렸다.신이랑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말했다.“잘 자요.”소민아는 12시를 향하고 있는 벽시계를 한참 멍하니 쳐다보다가 100평이나 되는 넓은 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깊은 밤이 아닌데도 쓰라린 고독함이 엄습했다.이곳은 부모님 회사에서 보너스로 나눠준 오피스텔이다. 하여 매달 월세가 몇만 원밖에 되지 않을 뿐더러 지리 위치도 아주 좋다. 하지만 집이 아무리 좋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녀는 여전히 혼자인 것을.소민아는 손에 들고 있던 베개를 던져버렸다. 그 바람에 깔끔하게 정리해두었던 탁자 위 물건이 우수수 떨어졌고 컵 안에 담겼던 물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진짜 나쁜 놈이야!”마음에 담아두었던 모든 감정이 저 컵 안 물처럼 깨끗이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엘리트 개
도우미가 급히 앞으로 달려갔다.“아가씨, 왜 내려오셨어요. 얼른 침대에 누워서 쉬세요. 아버님께서 이미 차를 보내셨어요.”“아가씨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걸 알고 어르신이 얼마나 걱정하셨다고요.”“아가씨께선 서울시 시장님의 귀한 따님이세요. 기 선생님은 한낱 비서에 불과하고요. 어르신의 요구에 부합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그런 사람과 왕래한다는 걸 알면 노여워하실 거예요.”“둘째 아가씨 일도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요!”“어르신께선 원래 아가씨와 전 대표님의 식사 자리를 마련해주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듣기론 그 전 대표가 이미 결혼했다며 어르신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오늘 누군가 조사해봤는데 전 대표에겐 아이까지 있다고 하더라고요.”“하지만 어르신께선 아마 아가씨만 원한다면 성세 그룹과의 혼인을 성사시켜 아가씨를 성세 그룹 안주인으로 만들어드릴 겁니다.”주가은은 통증이 전해져오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창백한 얼굴로 기침했다.“내 이 병든 몸으론 그 안주인 자리 감당 못 해요. 이번 생엔... 나만의 온정한 삶도 살지 못할 거예요.”도우미가 곧바로 다급히 반박했다.“아가씨 걱정 마세요. 어르신께선 분명 심장을 구해오실 거예요. 병만 나으면 성세 그룹 대표는 물론이고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을 아가씨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겁니다.”주가은이 말했다.“그랬으면 좋겠네요.”한창 잠을 자고 있던 소민아의 귀에 돌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초인종이 연속 세 번이나 울리자 그녀는 베개를 안고 씩씩거리며 걸어갔다.“누구예요! 미쳤어요! 지금이 몇 시인지 몰라요?”거실에 나간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분명 문을 잠갔는데...“으악!”소파에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던 것이다.“기... 기성은?”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걸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우리 집 열쇠도 없으면서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기성은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고 나서야 다시 핸드폰을 정장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집이 원래 이래요? 평소에 청소 안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장소월, 31세, 암으로 사망.서울 강남병원,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연우야, 오늘 의사선생님이 투석한다고 주사를 놓아주셨는데 너무 아팠어.」「나 곧 죽어. 보러 와 줄 거지?」「제발, 연우야...」장소월이 힘겹게 머리를 돌려 전화기의 메시지 창을 보고 있다. 메시지를 몇 개나 보냈건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전연우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그녀의 손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뼈만 남아 앙상했고 두 눈은 안쪽으로 푹 꺼져 있었다.사지는 이미 암 후유증으로 인해 썩어가고 있었다.몸을 까딱할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책임 간호사도 거의 보름 너머 와보지 않았다.원인: 더 이상 치료해도 의미 없음.그녀는 사실 엄살이 많았고 아픈 걸 끔찍이 무서워했다. 암 말기라 그녀는 매일 고통에 시달렸고 전연우에 대한 사랑만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하지만 이 넘쳐나던 사랑이 메말라가자 그녀에게 남은 건 뼈만 남은 몸뚱이였다.장소월은 전화기를 꺼버리고 조용히 죽기를 기다렸다.고통으로 그녀는 의식이 흐릿해졌다. 씁쓸하게 느껴졌다. 안 깐 힘을 다해 전연우와 결혼했고 8년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좋은 아내가 되려 했다. 모든 걸 다 바쳐 그 사람 곁을 지켰는데 그녀가 얻은 건 무엇인가?사람들은 하나 둘 그녀의 곁을 떠났고 가난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그녀가 죽으면 제일 기뻐할 사람이 전연우다. 이제 그는 자유의 몸이다. 더 이상 징그러운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전연우, 드디어 소원대로 송시아와 결혼할 수 있다.8개월 전.전연우의 생일날,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장소월은 소파에 앉아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테이블 위 그녀가 정성껏 차린 음식들도 이미 차갑게 식어갔다.기다리던 전연우는 오지 않고 비서가 이혼서류를 가져왔다. 비서가 싱겁게 입을 열었다.“사모님, 사장님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요. 이렇게 큰 전 씨 집안 산업을 누군가는 물려받아야 되잖아요.”장
새벽 12시.장소월이 악몽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다. 이마엔 땀이 맺혀있다.순간 익숙한 소독제 냄새가 코끝에 스친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냄새다.장소월은 잠시 멍해졌다. 죽은 거 아니었나?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탈칵’하는 소리와 함께 깜깜했던 병실이 밝아졌다. 눈부신 불빛에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악몽이라도 꾼 거야?”긴 다리로 침대 곁에 다가왔다. 큰 체구가 그녀의 왜소한 몸에 비친 빛을 막아주기엔 넉넉했다.“전...전연우?”장소월이 머리를 들어 뼈속까지 증오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다가오지 마!”왜 또 이 악마의 곁으로 돌아온 걸까?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뒤로 물러선다.장소월의 머리는 지금 복잡하기 그지없다. 전연우를 본 순간 크나큰 두려움과 절망이 몰려와 숨이 막혔다.전연우가 멈칫한다. 이내 가느다란 눈은 차가움으로 가득 찬다. 불쾌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고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졌다.“의사 불러줄게.”남자의 차가운 저음이 칼처럼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문이 쾅 하고 닫기고 나서야 장소월도 긴장이 풀렸다.남자가 떠난 후 방안에 떠돌던 강렬한 압박감도 사라졌다. 장소월은 황급히 이불을 걷어냈다. 순간 째질듯한 아픔이 손목에 전해졌다.손목을 보니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손목을 그은 건가?장소월은 아픔을 견디면서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테이블에서 구식 전화기를 들어 달력을 찾아보았다.시간을 본 순간 장소월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지금은 무려 2000년, 그녀가 18살 되던 그해였다.장소월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녀는 지금 입원 중이고 손목을 그어 전연우를 협박해 고백을 받아달라는 중인 것 같았다.전연우는 장소월이 10살 되던 해에 장해진이 밖에서 데려온 양자였다.장소월이 그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 건 그녀가 15살 되던 해 집에서 키우던 티베탄 마스티프가 갑자기 실성해 그녀한테 달려들어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