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십거리는 무슨, 목적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함정에 빠뜨릴 줄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당하고만 사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소민아는 팔꿈치로 옆에 앉은 사람을 툭 건드리고는 말했다.“어머, 저한테 월급을 하사하시는 물주님이 여기 계시잖아요? 이분이 계시는 한 오늘 밥값 결제는 제 차례까지 오지 못하겠네요.”성주미는 마케팅팀에서 영업 실적이 가장 좋은 에이스였다. 부드럽고 애교스러운 목소리는 사람들의 정신을 집중시키는 훌륭한 필살기였다. 예쁘게 매니큐어를 한 손을 아래턱에 괴고 기성은을 향해 큰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을 남자 동료들은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민아 씨 말투를 들어보니까 왠지 두 사람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설마 사귀고 있는 거예요?”“설마요! 성세 그룹은 사내 연애를 금지하잖아요. 들키면 바로 해고예요. 기 비서님은 절대 앞장서 회사 규정을 어길 분이 아니에요.”기성은은 신경 쓰지 않고 컵 안 물을 마시고 있었다. 상에 차려져 있는 꼬치구이엔 손도 대지 않았다.소민아가 한창 맛있게 먹고 있을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10만 원 이체 알림 문자와 자리를 바꿔 앉자는 성주미의 문자였다.돈 버는 게 이렇게나 쉬운 거였다니. 벌써 20만 원이나 손에 들어왔다.소민아는 얼른 알겠다고 답장했다.소민아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화장실에 갔고 성주미는 그 기회를 틈타 기성은의 옆에 자리 잡았다.화장실에서 나온 소민아의 눈에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는 성주미가 들어왔다. 기성은은 성주미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일할 땐 그토록 말이 없던 기성은이 말이다.소민아는 돌연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 하여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몸에 밴 냄새를 떨쳐내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걸어와 그녀 옆에 앉았다.“다 먹었어요?”소민아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남자 동료가 캔맥주를 건네자 그녀는 별다른 생각 없이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정말... 맛
“세상에, 민아 씨 대단하네요!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흠모를 받는 인기녀가 된 거죠?”기성은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으로 들고 있던 유리컵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얼굴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기성은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소민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그녀가 무언가 저지를 거라 예감하고는 있었지만...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맥주캔을 들고 기성은의 뒤까지 걸어오고는 철퍼덕 그의 등에 엎드려 한 손을 어깨에 걸쳐놓았다.“아이고, 이분 누구예요? 아까는 왜 못 봤죠? 이름이 뭐예요? 어느 팀 직원이에요? 어디 살아요? 애인은 있어요? 올해 몇 살이에요? 가족 관계는 어때요? 다 나한테 말해봐요.”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민아 씨, 미쳤어요!”기성은이 위압력 가득한 눈빛으로 옆에 있는 주건형을 쏘아보았다.“얼마나 마시게 한 거예요?”“아까 한 병 마셨을 때는 괜찮았었는데... 지금은 세 병 마신 상태예요. 하지만... 이 맥주 도수도 별로 안 높아서 이렇게 쉽게 취할 줄은 정말 몰랐어요.”“죄송합니다, 기 비서님. 제 잘못입니다. 이렇게 많이 마시게 하는 게 아니었어요. 제가 지금 집에 데려다줄게요.”“집에 간다고요? 난 안 가요!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고요!”소민아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기성은에게 헤헤 웃었다.“어이, 기생오라비, 누나한테 한 잔 따라봐.”기성은은 소민아의 허리를 감싸고 번쩍 들었다.“밥값은 내일 재무부에서 해결할 거예요. 내가 말해놓을게요.”그 한마디 말을 남긴 뒤 기성은은 쌀가마니 들 듯 소민아를 둘러메고 가게를 나섰다.소민아는 그렇게 강제로 차 조수석에 태워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직원들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럴 줄 알았다면 저도 취할 걸 그랬어요. 그럼 기 비서님한테 저렇게 안겼을지도 모르잖아요.”기성은이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해주려고 몸을 기울이자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던 소민아는 팔을 뻗어 그의 넥타이를 잡고는 입술을 슥슥
바로 그날 야식 모임 이후로 기성은과 그녀의 관계는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데엔 특별한 이유가 필요 없다. 그저 자신만이 인정하는 마음이 움직인 순간 하나만 있으면 된다.그 일이 일어난 날짜는 다름 아닌 기성은이 그녀와 소현아를 남원 별장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들을 장소월을 협박하는 도구로 사용했을 때였다.그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소민아는 기성은에게 자신은 그저 부하직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에게 그 어떠한 특별한 감정도 없다.여자들은 마음속에 늘 자신보다 몇백 배 더 훌륭한 남자 한 명을 품고 있다.그런 때엔 눈에 콩깍지가 씌어 모든 것이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보인다...하지만 그저 환상일 뿐 현실과는 다르다...그 콩깍지가 벗겨진 순간에야 깨닫는다. 그 시절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은 실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는 걸.하지만 잊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소민아는 얼이 빠진 것 같은 상태로 고개를 푹 숙이고 아파트 단지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뒤에서 신이랑이 줄곧 따라오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 한 채 말이다. 그녀는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고는 바로 닫아버렸다.신이랑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말했다.“잘 자요.”소민아는 12시를 향하고 있는 벽시계를 한참 멍하니 쳐다보다가 100평이나 되는 넓은 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깊은 밤이 아닌데도 쓰라린 고독함이 엄습했다.이곳은 부모님 회사에서 보너스로 나눠준 오피스텔이다. 하여 매달 월세가 몇만 원밖에 되지 않을 뿐더러 지리 위치도 아주 좋다. 하지만 집이 아무리 좋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녀는 여전히 혼자인 것을.소민아는 손에 들고 있던 베개를 던져버렸다. 그 바람에 깔끔하게 정리해두었던 탁자 위 물건이 우수수 떨어졌고 컵 안에 담겼던 물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진짜 나쁜 놈이야!”마음에 담아두었던 모든 감정이 저 컵 안 물처럼 깨끗이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엘리트 개
도우미가 급히 앞으로 달려갔다.“아가씨, 왜 내려오셨어요. 얼른 침대에 누워서 쉬세요. 아버님께서 이미 차를 보내셨어요.”“아가씨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걸 알고 어르신이 얼마나 걱정하셨다고요.”“아가씨께선 서울시 시장님의 귀한 따님이세요. 기 선생님은 한낱 비서에 불과하고요. 어르신의 요구에 부합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그런 사람과 왕래한다는 걸 알면 노여워하실 거예요.”“둘째 아가씨 일도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요!”“어르신께선 원래 아가씨와 전 대표님의 식사 자리를 마련해주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듣기론 그 전 대표가 이미 결혼했다며 어르신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오늘 누군가 조사해봤는데 전 대표에겐 아이까지 있다고 하더라고요.”“하지만 어르신께선 아마 아가씨만 원한다면 성세 그룹과의 혼인을 성사시켜 아가씨를 성세 그룹 안주인으로 만들어드릴 겁니다.”주가은은 통증이 전해져오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창백한 얼굴로 기침했다.“내 이 병든 몸으론 그 안주인 자리 감당 못 해요. 이번 생엔... 나만의 온정한 삶도 살지 못할 거예요.”도우미가 곧바로 다급히 반박했다.“아가씨 걱정 마세요. 어르신께선 분명 심장을 구해오실 거예요. 병만 나으면 성세 그룹 대표는 물론이고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을 아가씨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겁니다.”주가은이 말했다.“그랬으면 좋겠네요.”한창 잠을 자고 있던 소민아의 귀에 돌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초인종이 연속 세 번이나 울리자 그녀는 베개를 안고 씩씩거리며 걸어갔다.“누구예요! 미쳤어요! 지금이 몇 시인지 몰라요?”거실에 나간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분명 문을 잠갔는데...“으악!”소파에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던 것이다.“기... 기성은?”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걸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우리 집 열쇠도 없으면서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기성은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고 나서야 다시 핸드폰을 정장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집이 원래 이래요? 평소에 청소 안
기성은은 더는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는 자신과 머리 하나는 차이나는 아담한 키의 소민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알아서 생각해봐요.”소민아는 멍하니 문 앞까지 나가는 기성은을 쳐다보고 있었다.돌연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분이 좋아지고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기성은이 나가기 전, 소민아는 뒤에서 그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하게 가라앉았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저랑 화해하러 올 줄 알았어요. 성은 씨... 사실 나 성은 씨도 날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제 헤어지자고 했던 말 취소할게요! 성은 씨가 모든 재산을 다 나한테 줬으니까 성은 씨는 이제 제 남자친구예요!”소민아는 참 다루기 쉬운 사람이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조금 달래면 금방 풀리곤 한다.더욱이 오늘은 기성은이 직접 집에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그 효과는 더할 나위 없었다.기성은은 별다른 감정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후회 안 하는 거예요?”무언가 의미하는 바가 있는 뼈 있는 말이었다.하지만 소민아는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한 듯 의문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머리 위에 털 한 오리를 붙이고 있는 그녀는 어딘가 약간 어리숙해 보이기도 했다.“제가 왜 후회하겠어요? 언젠간 후회한다고 해도 그때 가서 볼 일이에요. 성은 씨가 나한테 이렇게나 많은 돈을 줬잖아요. 서울에서 별장 하나는 거뜬히 살 수 있지 않아요?”기성은이 눈을 내리뜨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네.”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소민아의 머리 위에 달려있는 털을 잡아냈다.소민아가 흐뭇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됐어요. 제 목숨을 요구하거나 장기를 빼내겠다고만 하지 않으면 뭘 하든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앞으로 나 상처 주면 안 돼요. 또 그랬다간 이 돈 다 써버릴지도 몰라요!”그 순간 소민아는 너무 신나 수소 풍선처럼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소민아는 순간 화가 치밀어올랐다.“기본적인 부끄러움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물었다.“기성은 씨,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요. 정말 나 좋아하는 거 맞아요? 진심으로 나랑 사귀려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갖고 놀고 싶은 거예요?”기성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소민아는 이미 그의 눈동자에서 답을 찾은 것 같았다.일분일초 그녀의 마음은 커다란 기복을 보였다.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침대 끝에 놓인 잠옷을 깔고 앉았다.“기 비서님이 저 같은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사귀자고 했을 때부터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 맞죠?”“그냥 나한테 솔직히 말해요. 대체 무슨 목적이길래 자신의 감정을 이용하고 이렇게 많은 돈까지 쓰면서 여기에서 연기하는 거예요? 제가 철이 좀 없긴 해도 바보는 아니에요. 상대가 날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눈을 보면 다 알 수 있어요. 난 기 비서님 좋아하고 있다는 거 인정해요. 진심으로 기 비서님과 사귀어보고 싶고요. 전 종래로 제 감정을 이용해 장난을 치지는 않아요.”소민아는 발갛게 실핏줄이 선 눈으로 묵묵부답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쥐 잡듯 잡으며 사납게 구는 것보다 지금 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더 비참했다.그녀를 이용해 뭘 하려는지 왜 지어내서라도 말하지 않는단 말인가.짧게라도 좋아한다고 하면 될 텐데...그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아마도... 어제 만났던 주가은 씨야말로 그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겠지.“가세요. 저랑 같이 있는 거 힘들잖아요. 당신 같은 사람은 연기에 소질 없어요.”기성은은 확실히 사람을 속이는 데에 능하지 않았다.“민아 씨 사직서는 내가 없앴어요. 회사 규정대로 다시 들어와 일할 수 있을 거예요. 월급은 전의 3배로 줄게요. 왜 이렇게 하는지는 알 필요 없어요.”그는 단호히 몸을 돌렸다. 나가기 전 탁자 위에 지갑도 다시 내려놓았다.“꺼져요! 나한테서 썩 떨어져요!
그가... 지각했다.성세 그룹이 설립된 이후로 기성은은 단 한 번도 지각했던 적이 없다. 오늘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백혜진은 발갛게 부은 얼굴로 출근한 소민아를 보고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민아 씨, 눈이 왜 그래요? 어젯밤 울었어요? 소피아 씨가 또 괴롭혔어요?”“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제 슬픈 영화를 많이 봐서 그래요. 송 부대표님께서 찾으셔서 올라가 볼게요.”송시아가 그녀를 찾은 건 회사 일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일 때문이었다.오랜만에 보는 송시아는 평소와 약간 다른 듯한 모습이었다. 오늘은 반듯한 정장이 아닌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기성은과 사귀어요?”송시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민아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쭈뼛거리며 말했다.“부대표님...”송시아는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마우스를 움직여 메일함을 열었다.“오늘 아침 기성은이 나한테 메일을 하나 보냈어요. 무슨 내용인지 알아요?”기성은이 그녀에게 메일을 보내다니. 기성은과 송시아는 늘 서로 터치하지 않고 각자의 일만 해왔다. 또한 기성은이 자리 잡은 방향은 아주 명확하다. 무슨 일이 있든 그는 줄곧 전연우 편이다.송 부대표와 대표님의 관계는 그 시작부터 뚜렷하지가 않았다. 회사 직원들 모두 그녀가 성세 그룹 다음 안주인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소월이 귀국한 이후부터 송시아는 대표님의 총애를 잃었고, 급기야 대표님은 장소월과 결혼 발표까지 했다.그 뒤로부터 송시아와 전연우의 관계엔 금이 가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젠 완전히 두 패로 나뉘었다. 송시아가 비서로부터 부대표까지 승진한 건 대표님이 그녀에게 준 공헌에 대한 보상이다.성세 그룹은 두 사람이 함께 일으켜 세운 회사다. 지금 이 위치까지 오르는 데에 송시아의 노력을 무시할 수 없다.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저... 전 모르겠어요.”송시아는 컴퓨터 모니터를 돌려 그녀에게 메일을 보여주었다. “기성은이 나한테 민아 씨 사직서 수리하
소민아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메일을 열어보았다. 정직원으로 전환된 인턴들 명단이었다. 한 명은 디자인팀, 한 명은 마케팅팀, 그리고 소민아였다.소민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정말 그녀의 이름이 쓰여있었다.비서실 문밖에서 몇 명 여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요. 소피아 씨. 울지 말아요. 이번 달엔 안 됐지만 다음 달엔 분명 기회가 있을 거예요.”“맞아요! 다들 뒷배가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이기겠어요. 원망할 건 한 사람밖에 없어요. 말로는 퇴사하겠다고 해놓고선 뒤로는 소피아 씨 자리 차지한 그 사람 말이에요!”“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진짜 처음 봐요.”벽을 뚫고 들어오는 커다란 소리에 소민아는 더는 못 들은 척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소피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위로를 받고 있었다. 정직원 자리 하나 때문에 소민아는 그들에게 상종도 하지 못할 파렴치한 인간말종이 되어버렸다.소민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책상을 쾅 치고는 일어섰다.“다시 한번 말해봐요! 비겁하게 뒷담화나 하지 말고!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말아요. 나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니에요!”소피아는 방금 울었는지 눈시울이 새빨개진 상태였다. 그녀가 씩씩거리며 소민아 앞으로 걸어가 따귀를 날렸다.“소민아 씨! 능력이면 능력, 학력이면 학력 다 나보다 한 수 아래잖아요. 사모님이 뒤를 봐주는 것 외에 소민아 씨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는데요! 그래요! 난 당신처럼 뻔뻔하지 못해서 정직원 자리 하나 때문에 기 비서님을 침대까지 꼬드기지 못했어요. 나한테 이번 정직원 전환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아요?”소민아의 얼굴에 곧바로 다섯 개 손가락 자국이 남았다. 그녀는 참지 않고 바로 따귀를 날려 받은 대로 되돌려주었다.“그깟 정직원 자리 난 관심도 없어요. 갖고 싶으면 기성은에게 직접 말해요. 병신처럼 내 앞에서 징징거리지 말고.”“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우리 엄마도 내 몸엔 손 안 댄다고요! 소민아 씨, 당신 죽여버릴 거예요!”소피아는 미친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