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때문에 펄쩍 뛰는 권하윤의 모습에 기분이 좋았는지 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쓸었다.“급할 거 뭐 있어?”“제가 언제 급했다고 그래요?”매번 놀림만 당한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짜증이 올라왔다.“말 안 하겠으면 말고요.”권하윤은 삐지기라도 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하지만 그 순간 민도준의 긴 팔이 앞으로 쭉 뻗더니 그녀를 다시 자기 다리 위에 눌렀다.“안 그럴게. 내가 잘못했어, 응?”갑자기 변한 민도준의 태도에 권하윤은 오히려 불편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대체 뭔 일을 시키려고 이래요?”“간단해. 민승현과 자지 마, 만지게도 하지 마.”그 말에 놀란 권하윤은 흠칫 몸을 떨더니 고개를 돌렸다.“왜요?”“아무 이유 없어. 그냥 하지 말라면 하지 마.”“혹시 지금 질투해요?”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의 쪽으로 몸을 바싹 붙였다.눈을 반짝거리며 귀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권하윤의 눈빛은 의외로 집요했다.분명 상대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약간의 기대가 차있었다.그런데 그때,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민도준은 고개만 숙이면 권하윤과 입술이 부딪힐 거리까지 가까이 붙었다.숨결이 서로 뒤엉키더니 남자의 나지막하고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말 들어.”권하윤은 대답을 피하는 민도준에게 불만이 생겼는지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민승현이 안 되면 다른 사람은요?”“나랑 만나는 동안 그 누구도 안 돼. 내가 질리면 그때 마음대로 해.”두 머리가 서로 맞닿아 한없이 다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민도준의 말은 야속하기만 했다.그 말을 들은 순간 두근거리던 권하윤의 마음은 이내 차갑게 식었다.솔직히 민도준이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 권하윤은 민승현과 뭘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밖에 있는 다른 남자와는 더더욱 그럴 일 없었고.하지만 권하윤은 방금 전 솔직히 해서는 안 될 기대를 했었다. 그의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오히
목욕 타월을 두르고 욕실에서 걸어 나오는 민도준을 보는 순간 권하윤은 눈앞의 상황이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예전까지만 해도 낯선 환경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민도준이라는 사람이 본인의 생활에 덜컥 나타나 점점 예전의 삶을 흐트러뜨리고 있는 게 뭔가 미묘했다.같은 세상에 속하지 않던 사람이 본인의 세상 속에 점차 비집고 들어와 버린 이 상황에 운명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동이 틀 무렵 불조차 켜지 않은 검은 방안에 희미한 빛이 흘러들어 점차 어둠을 감쌌다.여성용 목욕 타월이라 그런지 민도준에게는 많이 작은 모양이었다. 허리에 대충 두른다고 둘렀지만 그의 허리와 배를 타고 내려가는 근육의 곡선은 그대로 눈앞에 드러났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열기가 권하윤의 몸을 다시 뜨겁게 달궜다.그녀의 시선을 느낀 민도준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더니 허리를 숙여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톡톡 쳤다.“얼른 씻고 나와, 밥 먹으러 가게.”남자의 말을 분명히 들었지만 권하윤은 여전히 침대에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이고 싶지 않았다.“저 배 안 고파요. 졸려요.”금방 관계를 끝낸 그녀는 나른한 모습 속에 야릇함이 묻어 있었다. 그걸 본 민도준의 눈빛은 순간 어두워졌다.그는 이불 속으로 손을 쑥 넣고 이리저리 만져댔다.“어디 봐봐. 뼈가 녹아 없어지기라도 했어? 왜 이렇게 맥을 못 춰? 아니면 게을러진 건가?”“뭐 하는 거예요? 방금…… 했잖아요.”몸을 움직이며 피하는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눈썹을 치켜떴다.“애인 하자며? 그러면 애인답게 굴어야지.”“?”‘민도준한테서 이득을 볼 수 없다는 걸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손해를 봤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자신을 꽁꽁 싸매며 콧방귀를 뀌었다.“저 오늘 파업이에요!”하지만 민도준은 이불을 사이에 두고 권하윤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됐어, 그만하고 일어나.”“민도준 씨, 귀가 안 좋아요? 저 배고프지 않다고요, 졸리다고요. 밥 드
“돈은 이미 준비했어. 이 카드에 있어.”200억이 들어있는 은행 카드가 강민정의 손에 전해지는 순간 그녀는 약간의 감동을 받았다.민승현이 아무리 민씨 집안 다섯째라고 해도 실권이 없었기에 이 돈은 아마 그의 모든 재산을 긁어모은 것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오빠, 정말 고마워. 오빠가 없었으면 나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야.”자기를 숭배의 눈길로 바라봐 주는 강민정의 모습에 민승현은 오후 내내 달아다닌 게 헛수고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강민정의 생각대로 그는 돈이 부족하지는 않지만 매일 집에서 용돈을 받아쓰기에 수중에 큰돈은 없었다.게다가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말하기도 어려운 일인지라 민승훈은 본인이 갖고 있던 물건을 팔고 친구한테 돈을 빌려 가며 겨우 돈을 마련했다.그것도 모자라 돈 때문에 권하윤에게 모욕까지 당했다.‘내 환심을 사기 위해 내 앞에서 옷까지 벗어던지고 유혹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 손길마저 피하는 것도 모자라 발로 차버리기까지 해? 빌어먹을 년…….’“오빠?”한참 동안이나 떠들어댔는데 민승현이 넋이 나간 모습으로 서있자 강민정은 겁에 질린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오빠, 왜 그래? 화났어?”강민정의 말에 정신을 차린 민승현은 곧바로 그녀를 달랬다.“왜 이렇게 불쌍한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너한테 화낼 리가 있어? 넌 너무 단순해서 탈이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남을 믿어? 앞으로 조심해, 알겠지?”“응, 오빠 말이 맞아. 앞으로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며 오빠만 내조할게.”“그래야지, 여자가 무슨 투자야? 집에서 얌전히 있는 게 잘하는 거야. 권하윤처럼 여성미 없게 굴지 마.”민승현이 방금 전 권하윤에게 달려들다가 된통 거절당한 것 때문에 화나있다는 걸 알리 없는 강민정은 그가 단순히 권하윤을 미워한다는 생각에 더욱 애교 부렸다.“내가 새언니도 아니고 오빠랑 싸울 리가 없지. 오빠랑 같이 있는 일분일초가 소중한데 어떻게 오빠한테 화를 내?”“역시 오빠 마음에 들게 행동하는 건 너밖에 없어
‘저 상자…… 한매도를 넣던 그 상자잖아!’길 건너편 사람이 차에 오르려고 하자 강민정은 이미지고 뭐고 생각할 새도 없이 소리 지르며 달려갔다.“잠깐만요! 잠깐만요! 가지 마세요!”상대는 강민정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차에 올라탔고 어느새 뒤쫓아온 강민정은 다급하게 차 문을 두드렸다.“문 열어요!”차에 앉은 털보남은 그제야 강민정을 발견했는지 차창을 내리더니 귀찮은 어조로 투덜거렸다.“뭐예요?”하지만 강민정은 상대의 태도도 무시한 채 조수석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이 안에 있는 거 르테시떼에서 구입한 한매도 맞죠?”“누구시죠?”갑자기 경계하는 상대의 표정에 강민정은 본인의 생각이 맞다고 확신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 그림 저도 엄청 좋아해서 사려고 했던 건데 저한테 팔 수 있어요?”상대는 강민정을 위아래로 훑었다.“얼마 줄 건데요?”“200억이죠. 원래 이 가격이었잖아요.”“본전에 넘겨 달라? 그럼 굳이 그쪽한테 팔 이유 없죠.”말을 마친 남자는 운전대를 다시 잡았고 그 모습을 본 강민정은 다급하게 상대를 막았다.“그러면 얼마 원해요?”“적어도 40억은 더 줘야죠.”“40억이요? 그쪽도 이 그림 200억에 샀는데 왜 제가 그쪽한테 40억이나 더 줘야 하는데요?”“이봐요 아가씨. 이 바닥 룰 좀 지킵시다. 물건이 손을 떠나면 이전 사람과는 상관없죠. 전에 사람이 얼마 불렀는지가 뭐가 중요해요? 지금 그림은 제 것이니 제가 얼마에 팔고 싶으면 얼마에 파는 거죠.”“아니!”털보남은 다시 한번 강민정을 훑어봤다.“그쪽이 여자이기도 하고 진심으로 이 그림을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20억만 더 받을게요. 싫으면 말고.”“20억…….”강민정은 차 옆에서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 시각, 르네시떼.권하윤은 망원경으로 마침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때 아침을 다 먹은 최수인이 입을 닦으며 말했다.“아유, 그만 봐요. 털보가 사람 속이는 것 하난 기가 막혀요. 그러니 걱정 마요. 저 여자
돈을 받은 권하윤은 곧바로 문태훈과 약속을 잡았다.“돈은 계좌로 보냈어요.”그 말에 문태훈은 곧바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하지만 계좌에 182억만 들어왔다는 걸 확인한 순간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왜 이것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요?”“지금은 그것밖에 없어요.”권하윤은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만약 그녀가 200억을 바로 내놓으면 문태훈은 그녀에게 돈이 더 있는 줄 알고 계속 뜯어내려고 할 게 틀림 없다.그렇다고 또 너무 많이 차이 나면 욕심 많은 문태훈이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다. 때문에 182억은 딱 적당한 금액이었다.역시나 돈을 받은 문태훈은 권하윤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나머지는 천천히 줘요. 어쨌든 권하윤 씨가 지금 민 사장님이랑 붙어먹었으니 신분을 들키지 않는 이상 좋은 일만 있을 거잖아요. 안 그래요?”문태훈의 말을 들어보니 앞으로도 이 일을 빌미로 그녀에게서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여기서 매듭을 짓지 않은다면 그녀는 영원히 문태훈이 하라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이에 권하윤은 심호흡을 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오늘 문태훈 씨를 불러낸 건 저한테 돈이 이것뿐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었어요.”그 말에 문태훈의 미소는 얼굴에 굳어버렸다.“무슨 뜻이에요?”“무슨 뜻이긴요. 앞으로 일전 한 푼도 그쪽한테 더 줄 수 없다는 뜻이죠.”권하윤의 말에 잠시 멍해있던 문태훈은 곧바로 냉소를 지었다.“뭔가 잊었나 본데, 권하윤 씨 진짜 권씨 집안 넷째 아가씨가 아니잖아요, 게다가…….”“문태훈 씨도 잊었나 보죠?”권하윤은 문태훈의 말을 가로챘다.“애초에 저 해원에서 빼돌려 준 거 문태훈 씨잖아요. 만약 문태훈 씨가 제 신분 공씨 가문 가주한테 알려주면 문태훈 씨 본인도 좋은 꼴 못 볼 거예요.”“그게 무슨 헛소리예요! 권하윤 씨가 해원에서 도망친 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상관없나요?”권하윤은 테이블 위에 사진 몇 장을 올려놨다.“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제가 그 돈을 문태
‘설마 그림이 가짜라는 걸 알아차렸나?’‘아닐 거야. 최수인 씨도 그 털보가 이 바닥에서는 알아줄 정도라고 했잖아. 게다가 구별하기도 힘들 테고. 아무리 발견한다 해도 이렇게 빨리 발견하지는 않았을 거야.’‘아닌가? 강민정이 사람을 찾아 감별해 봤나?’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 하던 권하윤은 그나마 담담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너 어디야!”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자 권하윤은 핸드폰을 귀에 멀리 가져갔다.“무슨 일로 전화했는지나 말해.”권하윤에게 사과할 기회를 주기 위해 전화를 한 거였는데 상대의 냉담한 태도에 민승현은 울컥해서 버럭 화를 냈다.“누군 뭐 너한테 전화하고 싶어서 한 줄 알아? 셋째 누나가 돌아왔어. 할아버지가 본가에 모이라니까 너도 빨리 와!”민씨 집안 셋째 민시영에 관한 얘기는 권하윤도 들은 적이 있었다. 모든 사람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란 부잣집 아가씨.민씨 집안 어르신부터 숙부, 숙모, 언니, 동생 할 것 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그렇게 사랑을 받고자란 민씨 가문 아가씨라면 도도하고 싸가지 없을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잘해주는 그녀의 성격 때문에 메이드들조차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는 소문도 자자하다.게다가 민시영은 민씨 가문에서 민도준과 가까이 지내는 유일한 가족이다.-민씨 저택권하윤이 저택 본관 거실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얌전한 규수의 웃음소리가 아니라 가족들과 화목하게 앉아 있을 때 나오는 거침없는 웃음소리였다.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권하윤마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권하윤이 도착했을 때 거실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중 맨 가운데 자리에 민시영이 앉아있었다.권하윤이 도착한 것을 보자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민시영이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를 안았다.“승현의 약혼녀 권하윤 씨 맞죠? 드디어 만났네요. 전에는 제가 해외에 있는 바람에 두 사람 약혼식 축하주도 못 마셔
민시영은 정면으로 민도준을 향해 달려갔지만 그녀를 보기 바쁘게 바로 몸을 피하는 민도준 때문에 허공을 안았다.열정적으로 달려갔는데 무시를 당하자 민시영은 손으로 허리를 잡으며 소리쳤다.“오빠! 또 이럴래?”“내가 어쨌는데?”민도준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왜 나 반겨주지 않아?”“더워.”귀찮은 듯 짤막하게 대답한 그가 긴 다리를 내디디며 앞으로 가는 바람에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 민시영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녀가 뭔가 말하려고 하던 그때, 민도준 뒤에서 따라 들어오던 민지훈이 그녀의 어깨를 안으며 안으로 끌고 갔다.“자자, 누나, 내가 환영해.”“저리 비켜!”그 시각, 민도준이 점점 자기한테로 다가오자 권하윤의 머리는 몇 초간 동작을 멈췄다.특히 민도준이 그녀를 희롱하는 듯 입꼬리를 씩 올리며 “제수씨”라는 호칭을 부를 때는 그대로 넋이 나갔다.‘여기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데 설마 엉뚱한 말은 하지 않겠지?’권하윤은 걱정되는 마음에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민도준에게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녀의 표정을 본 체 만 체 하더니 상대가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자 그제야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좀 비켜주지?”권하윤은 그제야 자기가 길을 막고 있다는 걸 발견했고 적잖이 당황했는지 고개를 떨구며 비켜났다.“죄송해요.”민도준이 나타나자 편안하던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졌다.차를 마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만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찻잔은 이내 바닥을 보였고 방안에서는 오직 민시영과 민도준의 목소리만 가끔씩 울려 퍼졌다. 하지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민시영이 7,8 마디를 하면 민도준은 그저 한 마디 대답 정도 하는 게 다였다.다행히 민지훈이 아예 대놓고 전화를 받고 있었던 덕에 분위기는 너무 어색하지 않았다.그런 분위기가 한참 동안 이어졌을 때 민지훈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 동작에 사람들은 핸드폰을
“아!”놀란 듯한 비명소리가 원혜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그녀는 비틀거리며 민재혁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다리에 꽂힌 칼과 점점 흘러나오는 피를 보는 순간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미, 미쳤어요?”부들거리며 소리치는 원혜정의 말은 가볍게 무시한 채 민도준은 민재혁의 창백한 얼굴을 감상했다.“돌려주는 거야.”예전에 본가에서 벌어졌던 암살을 말하는 것임을 눈치챈 원혜정은 순간 찔렸지만 변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민재혁이 그녀를 향해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 참.”자리에서 몇 걸음 뗀 민도준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최근에 형이 보낸 그 계집애 꽤 재밌더라. 뼈도 어찌나 단단하던지.”이러한 상황에서도 민재혁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태도로 낮게 한숨을 쉬더니 마치 말 안 듣는 동생을 대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도준아, 너 또 뭘 오해했나 보네.”민도준은 그의 설명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그런데 뼈가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쇠보다는 못하더라.”주먹을 꽉 쥔 손이 올라가더니 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행동이 이어졌다.“쾅 하고 때리니 바로 부서지던데.”민재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민도훈을 바라봤다.“그런데 형은 별로 신경 안 쓰지? 형이 기르던 개가 죽은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 아무렇지도 않지?”“도준아, 더 이상 죄짓지 마.”민도준은 그 말에 멈칫하더니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듯 크게 웃었다.그리고 마치 눈물을 훔치는 듯 눈가를 닦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아주 보살님 납셨네. 형이 진짜 보살이 되어 나 교화시키길 바랄게.”미친 듯한 웃음소리는 그의 뒷모습과 함께 남쪽 별채에서 사라지자 정원에는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그 시각.“솨-”권하윤은 싱크대에서 찾주전자를 씻고 있었다.옷소매를 걷어올려 새하얀 팔이 훤히 드러났고 그 위로 물방울이 맺혔다가 흘러내리기를 반복했다.그러던 그때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앉았다.“아!”손에 있던 찻주전자가 손에서 빠져나와 바닥에서 산산조각 나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