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란 듯한 비명소리가 원혜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그녀는 비틀거리며 민재혁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다리에 꽂힌 칼과 점점 흘러나오는 피를 보는 순간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미, 미쳤어요?”부들거리며 소리치는 원혜정의 말은 가볍게 무시한 채 민도준은 민재혁의 창백한 얼굴을 감상했다.“돌려주는 거야.”예전에 본가에서 벌어졌던 암살을 말하는 것임을 눈치챈 원혜정은 순간 찔렸지만 변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민재혁이 그녀를 향해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 참.”자리에서 몇 걸음 뗀 민도준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최근에 형이 보낸 그 계집애 꽤 재밌더라. 뼈도 어찌나 단단하던지.”이러한 상황에서도 민재혁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태도로 낮게 한숨을 쉬더니 마치 말 안 듣는 동생을 대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도준아, 너 또 뭘 오해했나 보네.”민도준은 그의 설명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그런데 뼈가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쇠보다는 못하더라.”주먹을 꽉 쥔 손이 올라가더니 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행동이 이어졌다.“쾅 하고 때리니 바로 부서지던데.”민재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민도훈을 바라봤다.“그런데 형은 별로 신경 안 쓰지? 형이 기르던 개가 죽은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 아무렇지도 않지?”“도준아, 더 이상 죄짓지 마.”민도준은 그 말에 멈칫하더니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듯 크게 웃었다.그리고 마치 눈물을 훔치는 듯 눈가를 닦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아주 보살님 납셨네. 형이 진짜 보살이 되어 나 교화시키길 바랄게.”미친 듯한 웃음소리는 그의 뒷모습과 함께 남쪽 별채에서 사라지자 정원에는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그 시각.“솨-”권하윤은 싱크대에서 찾주전자를 씻고 있었다.옷소매를 걷어올려 새하얀 팔이 훤히 드러났고 그 위로 물방울이 맺혔다가 흘러내리기를 반복했다.그러던 그때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앉았다.“아!”손에 있던 찻주전자가 손에서 빠져나와 바닥에서 산산조각 나
권하윤과 한참 동안 입을 맞추고도 만족이 되지 않았는지 권하윤 허리에 감고 있던 손은 점차 위로 올라갔다.물기 있는 손이 권하윤의 몸을 타고 올라가며 긴 물 자국을 냈지만 권하윤은 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몸을 버둥댈 뿐이었다.‘여기서 키스하는 것도 이미 간 떨어지는데 더 하려고 한다고?’순간 드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한 권하윤은 남자를 밀어낼 수 없자 아예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습!”그제야 권하윤을 놓아준 민도준의 눈에는 순간 검은 소용돌이가 몰아쳤다.“내가 너무 오냐오냐해줬나 보네? 이제는 사람을 물기까지 해?”“저 정말 차 끓여야 해요. 이렇게 오래 나왔는데 돌아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의심할 거예요.”“그래서 뭐?”잔뜩 긴장해서 겨우 말을 내뱉은 권하윤과 다르게 민도준의 말투는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그 말에 권하윤은 말문이 턱 막혔다.민도준은 뭘 하든 손해 보지 않을 테지만 이 일이 만약 발각되기라도 하면 그녀는 매장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감히 화를 낼 수 없었다.민도준이 어디에서 묻혀왔는지 모를 피를 덕지덕지 묻혀온 것도 있지만 지금 그의 상태는 그녀가 보기에도 많이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겉보기에는 평온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속에는 마치 당장 사람을 공격하려는 듯한 맹수가 숨어 있는 듯 위험해 보였다.이 순간 그의 화를 돋울 수 없기에 권하윤은 할 수 없이 낮고 간질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들키기라도 하면 저 곧바로 민씨 집안에서 쫓겨날 거예요. 잘못하다간 할아버님께서 민씨 가문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저 죽일 수도 있다고요.”권하윤은 고개를 쳐들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제가 죽는 건 괜찮은데 그러면 앞으로 민 사장님 보지 못하잖아요. 앞으로 더 같이 있고 싶은데. 혹시 민 사장님은 제가 죽어도 괜찮아요?”민도준은 자기 품에 안긴 권하윤이 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걸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마치 태생이 남자 마음을 훔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어찌나 입에 발린 말만 골라 하는지 감탄
다행히 그 소리는 주위의 소리에 뒤덮여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궁금한 듯 이성호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민시영에게 캐묻기 바빴다.“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이성호 교수님이 옥상에서 투신자살했거든요. 그리고 가족 모두가 가스 폭발 사고로 죽어 시신의 흔적도 찾지 못했대요.”민시영은 아쉬운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교수님 딸이 엄청난 천재라고 하던데 그 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대요.”“이성호라면 나도 연주회를 들으러 많이 갔었는데 왜 자살했대?”민시영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 그녀의 어머니 장현정이 끼어들었다.“그 사람 여학생들과……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게 알려졌대요. 그런 일이 세상에 알려졌으니 얼굴 들고 살 수 없었나 보죠.”분명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뜻을 알아차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때 장현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우리 시영이도 그때 이성호한테 배우려고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그런 일이 나버린 거 있죠.”“어머나. 교수라에 음악가라는 양반이 어떻게 그런 더러운 짓을 저리를 수 있대요.”“그러게 말이에요.”장현정은 공감하는 듯 민시영을 돌아봤다.“그때 시영이가 거기를 안 갔으니 망정이지 만일 그 짐승만도 못한 놈에게 잘못 걸리면 어쩔 뻔했어요.”어머니의 관심 어린 말투에 민시영은 별로 동의하지 않는 듯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이내 다른 화제로 넘어가는 바람에 끼어들 수 없었다.그 과정에 권하윤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본인 가족을 입에 담으며 모욕하고 비방하는 걸 들으면서도 그녀는 그저 테이블 아래에 놓인 손을 꽉 그러쥘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고통을 전해주었다.그 고통 덕분에 그녀는 끝까지 평온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그녀가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기 전까지 사람들은 이성호라는 세 글자를 거론 때마다 그의 음악적 성과를 다룸과 동시에 더러운 죄명을 들먹이게 될 거다.심지어 그의
밤 12시.민시영의 방 창가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굵은 팔이 창턱을 잡으며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하지만 민시영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매니큐어를 바르는 데 열중했다.“늦었네.”“저택의 경비가 너무 삼엄했습니다.”남자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꿇어.”이 시각 민시영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셋째 아가씨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상대를 모욕하는 듯 명령했다.케빈은 그녀의 명령에 아무 주저 없이 무릎을 꿇자 곧이어 그녀의 발이 케빈의 가슴을 밟았다.“예쁘게 발라.”케빈은 민시영 손에 들고 있던 매니큐어를 받아들고 그녀의 발톱을 칠했다.그의 능숙한 솜씨로 보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그 사이 민시영은 몸을 뒤로 젖혀 침대에 누웠다. 마치 치마 아래의 광경이 훤히 드러난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그때 그녀는 천장의 등불을 가는 눈으로 바라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아무리 봐도 권하윤 왠지 낯익단 말이야.”“주의하지 못했습니다.”케빈의 짧은 대답이 불만이었는지 민시영은 옆에 놓여 있던 다른 한쪽 발로 케빈의 가슴을 차버렸다.그 힘은 결코 작지 않았지만 케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탄탄한 가슴 근육은 간단한 운동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실전과 연습을 통해 단련되어 강철 벽과도 같았다.때문에 민시영의 발길질은 그에게 그 어떠한 충격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찼던 민시영의 발만 아플 뿐이었다.이에 화가 난 민시영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케빈의 얼굴을 세게 내리쳤다.“그럼 네가 주의 깊게 본 게 뭔데?”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케빈은 빨갛게 된 민시영의 손바닥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쳐들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아가씨요.”그의 말에 민시영은 멈칫하더니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케빈의 가슴을 밟고 있던 발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다가 멈추더니 힘을 주었다.낮은 신음 소리가 케빈의 입술을 뚫고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는 고통이 섞여 있었지만 약간의 쾌락도 섞여 있었다. 고개를 든 채 뜨
잠시 후.권하윤은 조수석을 바라봤다.“그러니까 나더러 네 형의 주의를 돌리라고? 네가 서류 훔칠 수 있게?”“훔치다니! 나 민씨 집안 다섯째야. 그런 내가 뭘 훔치는 그런 일을 할 것 같아?”버럭 화를 내던 민승현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할아버지가 형이 적절한 파트너를 선택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셔. 이건 형을 관심해 주는 거라고.”할아버지 앞에서 어필할 기회가 많지 않은 민승현에게는 이번이 절호의 기회였다. 게다가 이건 할아버지가 그에게 내려준 임무였기에 그는 반드시 멋지게 완수할 생각이었다.문제는 1차 입찰 명단은 민도준의 금고에 있기 때문에 그는 사람을 시켜 민도준의 주의를 돌리고 그 사이 훔쳐볼 계획을 세운 거다.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권하윤이 된 거고.권하윤은 그의 계획을 들은 순간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자신만만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말문이 막혔다.“네 형이 무슨 내가 손가락 까닥거리면 나한테 올 줄 알아?”“당연히 아니지. 그러니까 할 말 있다고 불러내거나……”민승현은 스스로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면, 음, 아! 아니면 형한테 물이라도 뿌려.”그 말을 들은 순간 권하윤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민승현, 너 정말 경영학과 졸업한 거 맞아?”그녀의 비아냥거림에 민승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왜 나만 이런 거에 신경 써야 하는데? 너도 생각 좀 하면 안 돼? 남들은 아내가 있으면 내조해 준다는데 내가 이제 너하고 결혼하면 뭔 소용 있겠나 싶다!”권하윤은 더 이상 민승현과 말도 섞기 싫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하지만…….‘민도준이 물론 민승현의 이 유치한 속임수에 넘어갈 리 없겠지만 내가 옆에서 도왔다는 걸 안다면…….’여기까지 생각한 권하윤은 바로 핸드폰을 찾았다. 이 상황은 반드시 민도준한테 미리 말해야 했다. 적어도 강요당한 거라는 말이라도.민승현을 배신한 건 솔직히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다.첫째는 이 일 자체가 원래 민승현이
권하윤은 살아생전 자기가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두 남자의 지켜보는 가운데 권하윤은 할 수 없이 뻣뻣한 자세로 정수기 옆으로 걸어갔다.하지만 허리를 숙이는 순간 그중 한 줄기 시선이 뜨거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멎자 권하윤은 물을 받은 컵을 들고 조심스럽게 민도준의 앞으로 다가갔다.“물드세요.”하지만 민도준은 의자에 느긋하게 기댄 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권하윤은 할 수 없이 허리를 숙여 물을 그의 앞까지 대령했다.민승현의 시선은 권하윤에게 가려져 두 사람의 상황을 볼 수 없어 그저 초조해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머릿속에는 온통 권하윤이 넘어졌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하지만 권하윤은 그를 도울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때문에 컵을 받쳐 들고 물이 쏟아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그녀의 몸이 민도준 위에 엎드릴 정도로 숙여졌을 때에야 민도준은 손을 뻗었다. 하지만 물컵에 거의 닿으려던 순간 손을 다시 뒤로 뺐다.“아!”권하윤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놀라 몸을 흠칫 떨었고 그 바람에 컵이 기울더니 민도준 몸에 물이 쏟아졌다.남자의 가슴팍을 흥건히 적신 물자국을 보자 권하윤은 순간 얼어붙었다.엄연히 말하면 이 상황은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다. 만약 민도준이 갑자기 손을 뒤로 빼지만 않았다면 그녀가 놀라 물을 쏟는 일도 없었으니까.하지만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민승현은 기뻐서 하마터면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그는 다급히 앞으로 달려가 권하윤에게 화내는 듯 그녀를 꾸짖었다.“권하윤! 넌 어쩜 할 줄 아는 게 없어? 형 옷 다 젖었잖아. 얼른 화장실 가서 건조기로 말려 줘.”그는 마침 전에 미리 연습이라도 해놓은 듯 자연스럽게 대사를 쳤다.민도준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재밌는 듯 상황을 지켜봤다.그리고 권하윤이 속으로 민도준이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확신하던 그때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입을 열었다.“뭐, 그러면 부탁해 제수씨.”민도준의 승낙을 받자 민승현은 흥분을 주체할 수
온기가 느껴지는 민도준의 옷을 받아 든 권하윤은 상반신을 노출한 그를 보는 순간 분위기가 점차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었다.갑자기 분위기가 닳아 오르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민도준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내내 고개를 숙인 채 건조기로 그의 옷을 말렸다.“웅웅”거리는 바람 소리는 마침 그녀를 도와 어느 정도 민도준을 속일 수 있었다.현학적인 설이 있는데 사람은 제3의 눈이 있어 시각적으로 감지할 수 없는 자기장 같은 걸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미치 지금처럼. 권하윤은 분명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여전히 등 뒤의 남자가 자기한테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등 뒤에 전해지더니 천천히 그녀를 감싸안았다.권하윤은 살짝 버둥거리며 낮게 경고했다.“그만해요. 저 옷 말리고 있잖아요.”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은 더욱 힘 있어졌고 웅웅 거리는 건조기 소리를 뚫고 남자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정확히 그녀의 귀에 꽂혔다.“말릴 거 계속 말려. 나는 내가 할 거 할 테니까.”“…….”그 시각, 화장실 밖.민승현은 부들부들 떨며 금고의 문을 햔해 손을 뻗었다.전에 민도준이 금고를 열 때 훔쳐본 적 있어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너무 김장한 탓인지 여러 번 실패 후 겨우 정확한 숫자를 입력했다.민승현은 문을 열면서도 계속 화장실 방향을 주시했다.블랙썬의 화장실은 방음이 너무 잘되어 안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저 계속 들려오는 건조기 바람 소리로 두 사람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걸 판단했다.손을 뻗어 입찰서를 가지려는 순간 그의 손은 이미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입찰서가 더러워져 민도준이 나중에 발견하기라도 할까 봐 그는 바지에 손을 몇 번 문지른 후에야 서류에 손을 댔다.하지만 안에 놓인 입찰서는 고작 하나뿐이었다.그 사실이 민승현은 믿기지 않았다. 입찰을 한 번만 진행하는데 고작 입찰서가 한 장 장뿐이라니 말이 안 됐다.보통 소규모 프로젝트도 약 2, 3 차 심사
권하윤의 눈동자는 심하게 움츠러들더니 민도준을 마치 미친놈 보듯 바라봤다.역시나 말이 너무 지나쳤는지 민승현도 이상한 낌새를 차렸다.그는 권하윤과 민도준을 번갈아 보면서 의심을 키웠고 그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권하윤은 바로 눈치챘다.하지만 이런 상황을 뭐라 설명할 수도 없었다. 설명할수록 오히려 사실이 되어 버리니까.권하윤은 오히려 담담한 태도로 여상스럽게 말했다.“고마워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그리고 자연스럽게 민승현의 팔짱을 꼈다.민승현도 그제야 지금 떠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녀와 함께 민도준에게 작별을 고했다.하지만 블랙썬을 나오는 순간 그는 권하윤의 손을 뿌리쳤다.“씨발, 너 아까 형이랑 화장실에서 뭐 했어?”“네가 계획한 일이잖아. 그런데 그걸 나한테 물어?”권하윤은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되물었다.그 말에 순간 말문이 막힌 민승현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난 너더러 형 시선을 딴 데로 돌리게 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그 안에서 형이랑 무슨 짓을 했는지 누가 알아! 그런 적 없다고 하지 마! 그런 짓 안 했으면 형이 왜 그런 말 했겠어!”“응?”권하윤의 맑은 두 눈은 서늘함을 띠고 있었다.“네 말은 지금 내가 너를 도와 도둑질을 도운 것도 모자라 네 형 꼬시기까지 했다는 거야? 내가 뭐 죽고 싶어 환장한 줄 알아?”“어…….”민승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어불성설이었다.민도준의 눈에 뵈는 게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를 꼬시려고 한다면 절벽에서 줄타기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민승현의 화는 곧바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 권하윤에게 따져 물었다.“정말 아니야?”“네 형한테 물 쏟고 일부러 시간 끄느라 나 이미 충분히 힘들어. 더 이상 성명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네 마음대로 생각해.”권하윤은 민승현에게 의심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는 속으로 안도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