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어둠.눈이 검은 천에 가려지고 입이 테이프로 칭칭 감겨 보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권하윤이 느낄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어둠뿐이었다.그러던 그때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이 갑자기 벗겨졌다. 갑자기 환한 빛이 눈을 찔러오자 권하윤은 눈을 가늘게 뜨며 빛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그녀가 있는 곳은 창고 같았다. 창문이 없었지만 머리 위에 백열등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기태 형님, 사람 데려왔습니다.”전에 그녀를 데려온 대머리가 방 안에 있는 깡마른 남자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권하윤은 자기 생각이 맞다는 걸 확신했다.‘역시나 조 사장 사람이었군.’진기태가 손을 휘휘 젓자 대머리가 옆으로 물러났다.그러자 진기태는 권하윤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오늘 왜 여기 왔는지 알아?”그의 목소리는 텅 빈 창고 안에서 유난히 음산하게 들려왔다.“보스가 당신 때문에 불구가 됐어. 그 치욕을 오늘 당신한테 돌려줘야겠거든!”“읍읍!”권하윤은 애써 소리를 내려 했지만 테이프에 막혀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진기태가 눈빛을 보내자 옆에 있던 똘마니 하나가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입에 붙어있던 테이프를 뜯어냈다.권하윤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입이 자유로워지기 바쁘게 말했다.“조 사장 그렇게 만든 거 민 사장님이지 내가 아니야.”“흥. 당신 민 사장 여자잖아. 당신 때문에 화풀이한 게 아니라면 우리 형님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당신들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 나 민승현 약혼녀야. 민 사장님은 그제 내가 제수씨라서 도와준 것뿐이라고.”“어디서 구라야! 제수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남녀 사이에는 한가지 관계만 존재해. 당신네 재벌 가문이 얼마나 난장판일지 우리가 모를 줄 알아?”그의 말투에서는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설령 민도준이 경성 바닥의 모든 명맥을 잡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그에게 불만이 많았다.만약 민도준이 민씨 가문을 등
“민 사장님, 여기예요.”길을 안내한 여자가 앞에 있는 창고를 가리켰다.“음.”민도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오늘 고마웠어요. 먼저 돌아가 있어요.”“민 사장님.”화영은 그를 불러세웠다.“오늘 여기 들어가면 조 사장 쪽 사람들이 앞으로 그 여자로 민 사장님 계속 협박할 거예요. 그래도 들어갈 건가요?”그 말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틀린 말은 아니에요. 오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밖에 있는 다른 놈들도 같은 수법을 사용하겠죠. 그래서 이 안의 놈들 한 명도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요.”낮게 깔린 목소리에 약간의 흥분이 섞여 있었다.그 말을 들은 화영은 숨이 턱 막혔다.분명 상대가 웃고 있었지만 그녀는 오한이 느껴지기까지 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설마…….”“쯧.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마요. 저 그래도 법은 준수하는 좋은 시민이니까. 그저 저 자식들이 가야할 곳으로 보낸다는 뜻이에요.”그 시각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민혁이 속으로 낮게 중얼거렸다.‘그렇게 무섭게 웃지 않으면 좀 더 설득력 있었을 텐데.’민도준은 창고 안으로 걸어갔다. 석양이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빛을 등진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하지만 한민혁은 그의 뒤를 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제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화영이 눈살을 찌푸렸다.“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조 사장 부하 중 가장 유능한 사람들인데 따라 들어가지 않아요?”그 말에 한민혁은 민도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거렸다.“도준 형과 로건이 있는데 제가 실력 발휘할 공간이 어디 있겠어요? 화영 누나도 얼른 가 봐요. 조 사장이 눈치라도 채면 안 되니까.”“그래요.”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들 조심해요.”-“짝!”남자의 힘 있는 손이 권하윤의 얼굴을 내리쳤다.“이년이 감히 나를 걷어차?”뚱보는 욕설을 퍼부으며 권하윤에게 폭행을 가했다.두툼한 손바닥이 그대로 권하윤의 새하얀 얼굴을 때리자 마치
갑작스러운 고요함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특히 방금 권하윤을 때리기까지 한 뚱보는 이미 주눅 들어 점점 뒤로 숨어들었다.“하.”그때 민도준의 웃음소리가 정적을 깼다.“이미 손댔어?”“아니요!”뒤에서 민도준을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진기태는 민도준 앞에서 대놓고 시비를 걸 배짱은 없었기에 얼른 변명했다.“아까 우리 애 중에 멋 모르는 애가 글쎄 권하윤 씨가 누군지 모르고 소란을 피웠는데 알아본 뒤로 손끝도 안 댔어요.”진기태는 권하윤을 힐끗거리며 말을 이었다.“믿기지 않으면 물어봐요.”위험에서 벗어난 권하윤이 그제야 안정을 되찾고 버둥대자 진기태 부하들이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녀는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민도준 옆에 다가가 그의 팔을 꼭 잡았다.그렇게 해야만 그녀는 안전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개를 들고 민도준을 쳐다본 그녀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갈라 터진 입술이 당겨져 말없이 고통을 삼켰다.하지만 애써 냉정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럴 새가 없었던 거지 그러지 않은 게 아니에요!”“이게!”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진기태는 민도준의 눈빛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입술을 깨물며 애써 눈물을 참는 권하윤의 모습을 본 민도준은 자기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밖에서 기다려.”하지만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외투를 품에 안은 권하윤은 고개를 저었다.“저도 볼래요.”그 말에 민도준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재밌다는 듯 피식 웃으며 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꾹 눌렀다.“뒤로 물러나 있어.”권하윤은 그의 외투를 품에 안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물러났다.진기태는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고 이내 방어 태세를 취했지만 민도준이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들을 대놓고 적대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조심스레 찔러봤다.“민 사장님, 지금 뭐 하시려는 겁니까?”그의 말에 민도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당연히 친해지려고 그러지.”“로건.”짤막한 명령에 로건은 손의 힘을 풀었고 지금껏
권하윤은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에둘러 민도준 곁으로 다가갔다.그러던 중 지나쳐 온 사람 중 팔이 괴이한 모습으로 꺾여 있는 뚱보가 눈에 들어왔다.그 모습을 보자 권하윤은 순간 쾌감이 밀려왔지만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도 함께 덮쳐왔다.두 사람이 약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있을 때 민도준이 갑자기 권하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그녀를 껴안은 채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왜 이렇게 늦어? 다리에 힘이 풀렸나?”민도준이 매번 크게 싸우고 나면 왠지 모를 화와 피가 들끓는 것 같은 흥분이 그의 정신을 지배하곤 한다.지금도 마찬가지로 들끓는 피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당장이라도 권하윤의 허리를 부러트릴 듯 힘을 주체하지 못했다.권하윤은 이럴 때 그를 거절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거리낌 없이 행동하다가 소문이라도 새어나갈까 봐 작게 버둥거렸다.“사람 있어요.”민도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살짝 쓸었다. 그 덕에 손에 묻은 피가 새하얗게 질린 권하윤의 얼굴에 묻어 약간의 색을 더했다.“이 사람들은 다 죽었다 생각하면 돼.”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민도준의 모습에 권하윤은 순간 멍해졌다.주위에서 들리던 울부짖음도 그 소리에 더욱 날카로워졌다.겁 많은 똘마니들은 민도준이 저들을 정말 죽이기라도 할까 봐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조금 배짱이 있는 놈들은 오히려 민도준을 협박했다.하지만 그저 자신들의 보스가 예전에 얼마나 잘나갔는지 자랑해 대며 자기들을 죽이면 보스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협박이었다.민도준은 그들의 분노와 애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마치 정말로 죽은 사람 대하듯 그들을 대했다.그러더니 갑자기 권하윤이 걸치고 있는 커다란 외투를 잡아 당겨 그녀를 자기 앞에 끌어오더니 피 묻은 칼을 그녀의 손에 건네주었다.“아까 하윤 씨 만진 놈한테 복수 해.”권하윤은 그 칼을 손에 받아 들었지만 마치 뜨거운 감자라도 쥔 것처럼 오히려 불안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거면 충분해요.”“이게 어떻게 충분해.”민도준은 그녀의 몸을
차 안.권하윤은 시선에서 점차 멀어지는 창고를 힐끗거리더니 자기와 함께 뒷좌석에 앉은 민도준을 바라봤다.“우리…… 로건 씨 안 기다려요?”민도준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그녀를 흘겨봤다.“사람도 찔렀으면서 멍청하게 굴지 말지.”권하윤은 그의 말에 곧장 입을 닫았다.마치 깊은 원한이라도 있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자 민도준은 이내 피식 웃었다.“창고 안 놈들 모두 처리하려면 5분 정도는 소요 돼. 왜? 설마 저들이 불쌍하기라도 해? 그럴 거면 차라리 나를 생각해 주는 게 어때?”“어디 다쳤어요?”권하윤은 잔뜩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었다.본인은 이미 얼룩 고양이처럼 되었으면서 도리어 자신을 걱정하는 권하윤을 보자 민도준은 순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윽고 담배를 입에 물며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여기 앉아. 보여줄 테니까.”그의 말에 운전석에 앉아 있던 한민혁은 묵묵히 이어폰을 끼더니 볼륨을 최대치로 높였다.하지만 정작 권하윤은 부끄러운 듯 말을 얼버무렸다.“저 옷 더러운데 움직이면 차 안이 더러워…… 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권하윤을 자기 무릎 위로 끌어온 민도준은 그녀의 귀를 잘근잘근 씹으며 놀려댔다.“내가 언제 하윤 씨 더러워했어?’그 말을 들은 권하윤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한참이 지나서야 제 목소리를 되찾았다.“그런 뜻 아니에요.”“응? 내가 무슨 뜻으로 말한 줄 알고 아니래?”상대의 함정에 빠졌다는 걸 인지한 권하윤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그녀의 그런 모습에 민도준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 바람에 다리가 휘청거렸다.“내가 먼 데서부터 달려왔는데 은인을 대하는 태도가 이래서야 되겠어?”민도준에게 놀림을 당한 권하윤은 부끄러워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대체 다친 거예요? 아니에요?”그녀는 본인이 무섭게 화를 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민도준의 품에 안긴 채 긴장해서 몸을 움츠린 모습으로 소리 지르는 모습은 화를 낸다기보다는 애교 수준에 가까웠다.민도준은 그런 그녀를 마치 애완동물 만지듯
오늘따라 민도준은 유난히 집요했다.방 안이 조용해질 때쯤, 권하윤은 반쯤 혼이 나간 채 멍한 눈으로 누워있었다.담배를 피우고 난 민도준은 고개를 돌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더니 웃음을 머금은 채 희롱했다.“방금 똑똑히 봤어? 내가 다쳤는지 안 다쳤는지?”권하윤은 그런 그를 상대하기도 귀찮았다.‘다치긴 무슨!’죽으면 오히려 손뼉 치며 쾌재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녀는 민도준을 노려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눈에는 아직 물기가 촉촉하고 야릇했기에 민도준을 위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욕구를 불러일으켰다.그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이내 권하윤은 끌어안았다.“괜찮아?”권하윤은 온 힘을 다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하지만 민도준은 포기하지 못하고 손을 이불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정말 안 돼?”“아껴 쓰는 게 어때요? 그래야 저도 민도준 씨 오래 모실 수 있지 않겠어요?”권하윤이 어렵사리 꺼낸 말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손을 뒤로 뺐다.“그래, 그럼 킵해두자고. 다음에 갚아.”권하윤은 더 이상 그와 실랑이를 벌일 힘이 없어 피곤한 눈을 스르르 감았다.잠시 눈만 붙이려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완전히 잠들어버렸다.어두운 밤.아까 급하게 들어온 나머지 커튼을 닫지 않은 탓에 불빛과 달빛이 한데 어우러진 채 그녀의 얼굴에 드리웠다. 그 때문인지 빨간 손자국이 난 얼굴이 더욱 불쌍하게 느껴졌다.민도준은 그런 그녀를 보며 눈썹을 치켜떴다.엊그제만 해도 거짓말만 늘어놓으며 여우처럼 굴던 그녀가 다친 모습을 보니 마치 상처 입은 어린 동물처럼 느껴져 보호 욕구를 자극했다.권하윤은 매번 이렇게 그의 흥미가 사라지려고 할 때쯤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그렇다면 나도 거절할 이유가 없지. 우리 천천히 놀자고.’-병원.“지금 거신 번호는 전원이 꺼져있어 삐 소리 이후…….”약 9통의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는 전화에 조 사장은 진기태에게 무슨 일이 났다는 걸 직감했다.그때 마침 사람을 찾으러 나갔던
그 후 며칠 동안 권하윤은 줄곧 민도준을 보지 못했다.하지만 며칠 전 차갑게 대하던 그의 태도는 조금 변했다. 그는 가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가 하면 늦은 밤 그녀에게 전화해 야릇한 말들로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도록 유도했다.권하윤은 그가 자기를 보러 올 시간마저 없을 정도로 바쁘다는 걸 대충 알고 있었다.하지만 요즘은 왠지 그녀가 뭔가를 물을 때마다 민도준은 화제를 전환해 결국은 야릇한 농담으로 끝을 맺곤 했다.그렇게 지체하다가 끝내 민상철의 생일연회 날이 다가왔다.권하윤은 민씨 집안 예비 며느리로서 아침 일찍 민씨 가문 본가에 가 이것저것 거들었다.민상철의 생일만 되면 아침마다 먼저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는 가풍이 있다.물론 집안 메이드들이 해도 충분하지만 효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도와줄 수밖에 없다.아침 6시부터 8시까지 제사상 준비는 끝마쳤다.오늘은 올 사람이 유난히 많았기에 제사상은 야외 응접실에 차렸다.그리고 8시반 쯤 되자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민승현의 집안은 다섯째이기에 위치가 맨 끝자리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권하윤이 자리에 앉기 바쁘게 따가운 시선이 그녀를 쏘아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민승현이었다. 지난번에 싸우고 난 뒤 그는 한 번도 집에 돌아온 적이 없었다.그는 사실 일부러 권하윤을 방치해 그녀가 혼자 마음고생하게 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더욱 화사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씨발 이년 설마 또 그 자식 만나러 간 거 아니야? 걸레 같은 년! 제사 끝나고 따져 물어야겠네!’9시가 되자 민상철이 민시영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하지만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주위를 빙 둘러봤다.“도준이 얘는 또 어디 갔어?”그의 말에 민시영이 싱긋 웃었다.“아마 할아버지를 위해 큰 선물 준비하나 보죠. 곧 올 거예요.”“흥. 걔가 무슨 큰 선물을 준비하겠어? 내 화만 돋우지 않는다면 효도지.”그러던 그때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할아버지가 제 선물 받고 싶지 않다면 다시 가져갑니다.”모든 사람이 소리가
권하윤은 점점 멀어져 가는 민도준이 떠나는 뒷모습에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그녀는 사실 민도준에게 잘 보여 그가 오늘 하루만 자기를 건드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행동을 한 거였는데 그게 오히려 역효과가 날 줄이야.하지만 그녀가 한참을 생각하고 있을 때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미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다.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리자 민승현이 눈을 보릅뜬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거기 서서 뭐 해? 쪽팔리지도 않아?”권하윤은 치맛자락을 털며 허리를 세웠다.“약혼녀가 여기에서 아주 대자로 넘어지는 게 네 체면이 선다면 더 힘껏 밀지 그래?”“너!”목소리를 조절하지 못해 주위의 이목을 끌게 되자 그는 할 수 없이 입을 다물었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자 권하윤은 이내 그의 팔짱을 끼면서 밖으로 나갔다.안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밖에서는 잘 지내는 척 연기해야 했다.하지만 팔짱을 낀 권하윤 때문에 민승현은 오히려 불편했다. 그의 각도에서 고개를 숙여 보자 마침 권하윤의 목덜미가 보였고 희고 가는 목덜미 위에 부드러운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붙어 있어 그녀의 여성미를 더해주었다.하지만 권하윤이 다른 놈과 붙어먹었다는 생각을 하자 순간 가슴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에 그는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낮게 경고했다.“너 요즘 또 그 자식과 붙어먹었지? 내가 말해두는데, 너 만약 또다시 그 자식과 붙어먹으면 나 너랑 바로 파혼이야!”“걱정 마, 나 절대 한민혁 씨랑 붙어먹는 일 없을 테니까.”‘네 둘째 형하고 붙어먹으면 모를까.’너무 진정성 있는 태도와 말투에 민승현은 그녀가 이미 충분히 반성했다고 생각했는지 몇 마디 더 경고한 뒤에 입을 다물었다.본채 거실.제사를 지르는 동안 생일상은 이미 준비되었으며 요리들은 저마다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식구들 대부분이 모두 자리에 앉고 나서야 민상철이 천천히 등장했고 그 뒤는 민도준이 건들거리며 뒤따랐다.방금 제사가 끝난 뒤 민상철은 민도준을 서재에 불러들여 대화를 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