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놈들의 팔이 깨진 차창으로 들어와 권하윤이 미처 피하지도 못한 사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밖으로 끌었다.유일하게 놈들의 공격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차에서 강제로 끌려 나온 권하윤은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씨발, 나오라면 재깍재깍 나올 것이지.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권하윤은 바닥을 짚고 일어났지만 팔꿈치는 이미 까져 피가 흥건하게 묻어있었다.그녀 앞에 서 있는 남자들은 딱 봐도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맨 앞에 있는 남자가 바로 그녀더러 돌아가라고 하던 그 사람이었다.그는 이미 안전모를 버려 던지고 대머리를 드러냈다.권하윤은 애써 냉정함을 찾으며 그들과 대화를 시도했다.“당신들 얼마나 필요해요? 달라는 대로 다 줄게요.”대머리는 그녀의 말이 우습다는 듯 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권하윤 씨, 지금 우리를 강도 취급하는 거예요?”‘권하윤 씨?’놈의 호칭을 듣자 권하윤은 약간 마음이 놓였다.그녀를 알고 있다면 당분간은 그녀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으니.마음을 진정한 그녀는 상대를 설득하려고 입을 열었다.“저를 알고 있다면 반은 친구라는 건데 원하는 거 있으면 직접 말하지 그래요?”“우리가 그 쪽한테 뭘 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 형님이 뭘 하려는 거야.”“그쪽들 형님이…….”갑자기 어디선가 이름이 나오려고 할 때 그녀가 시간을 일부러 지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누군가가 말을 잘랐다.“묶어!”“잠깐만요. 당신들 형님이 누군데…… 이거 놔…….”그들은 모두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른 사람들이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권하윤을 포박했다.“덕구 형님, 이 여자가 아까 핸드폰을 만지작댔는데 설마 신고한 건 아니겠죠?”“권하윤 씨, 핸드폰 좀 봅시다. 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몸수색 들어갑니다.”예의 따위 이미 오래전 바닥에 처박아 둔 것 같은 몇몇은 몸수색이라는 단어를 듣자 이내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그들을 상대로 권하윤은 감히 불만을 표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곧바로 핸드폰의 위치를 알려줬
칠흑 같은 어둠.눈이 검은 천에 가려지고 입이 테이프로 칭칭 감겨 보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권하윤이 느낄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어둠뿐이었다.그러던 그때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이 갑자기 벗겨졌다. 갑자기 환한 빛이 눈을 찔러오자 권하윤은 눈을 가늘게 뜨며 빛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그녀가 있는 곳은 창고 같았다. 창문이 없었지만 머리 위에 백열등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기태 형님, 사람 데려왔습니다.”전에 그녀를 데려온 대머리가 방 안에 있는 깡마른 남자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권하윤은 자기 생각이 맞다는 걸 확신했다.‘역시나 조 사장 사람이었군.’진기태가 손을 휘휘 젓자 대머리가 옆으로 물러났다.그러자 진기태는 권하윤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오늘 왜 여기 왔는지 알아?”그의 목소리는 텅 빈 창고 안에서 유난히 음산하게 들려왔다.“보스가 당신 때문에 불구가 됐어. 그 치욕을 오늘 당신한테 돌려줘야겠거든!”“읍읍!”권하윤은 애써 소리를 내려 했지만 테이프에 막혀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진기태가 눈빛을 보내자 옆에 있던 똘마니 하나가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입에 붙어있던 테이프를 뜯어냈다.권하윤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입이 자유로워지기 바쁘게 말했다.“조 사장 그렇게 만든 거 민 사장님이지 내가 아니야.”“흥. 당신 민 사장 여자잖아. 당신 때문에 화풀이한 게 아니라면 우리 형님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당신들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 나 민승현 약혼녀야. 민 사장님은 그제 내가 제수씨라서 도와준 것뿐이라고.”“어디서 구라야! 제수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남녀 사이에는 한가지 관계만 존재해. 당신네 재벌 가문이 얼마나 난장판일지 우리가 모를 줄 알아?”그의 말투에서는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설령 민도준이 경성 바닥의 모든 명맥을 잡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그에게 불만이 많았다.만약 민도준이 민씨 가문을 등
“민 사장님, 여기예요.”길을 안내한 여자가 앞에 있는 창고를 가리켰다.“음.”민도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오늘 고마웠어요. 먼저 돌아가 있어요.”“민 사장님.”화영은 그를 불러세웠다.“오늘 여기 들어가면 조 사장 쪽 사람들이 앞으로 그 여자로 민 사장님 계속 협박할 거예요. 그래도 들어갈 건가요?”그 말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틀린 말은 아니에요. 오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밖에 있는 다른 놈들도 같은 수법을 사용하겠죠. 그래서 이 안의 놈들 한 명도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요.”낮게 깔린 목소리에 약간의 흥분이 섞여 있었다.그 말을 들은 화영은 숨이 턱 막혔다.분명 상대가 웃고 있었지만 그녀는 오한이 느껴지기까지 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설마…….”“쯧.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마요. 저 그래도 법은 준수하는 좋은 시민이니까. 그저 저 자식들이 가야할 곳으로 보낸다는 뜻이에요.”그 시각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민혁이 속으로 낮게 중얼거렸다.‘그렇게 무섭게 웃지 않으면 좀 더 설득력 있었을 텐데.’민도준은 창고 안으로 걸어갔다. 석양이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빛을 등진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하지만 한민혁은 그의 뒤를 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제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화영이 눈살을 찌푸렸다.“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조 사장 부하 중 가장 유능한 사람들인데 따라 들어가지 않아요?”그 말에 한민혁은 민도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거렸다.“도준 형과 로건이 있는데 제가 실력 발휘할 공간이 어디 있겠어요? 화영 누나도 얼른 가 봐요. 조 사장이 눈치라도 채면 안 되니까.”“그래요.”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들 조심해요.”-“짝!”남자의 힘 있는 손이 권하윤의 얼굴을 내리쳤다.“이년이 감히 나를 걷어차?”뚱보는 욕설을 퍼부으며 권하윤에게 폭행을 가했다.두툼한 손바닥이 그대로 권하윤의 새하얀 얼굴을 때리자 마치
갑작스러운 고요함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특히 방금 권하윤을 때리기까지 한 뚱보는 이미 주눅 들어 점점 뒤로 숨어들었다.“하.”그때 민도준의 웃음소리가 정적을 깼다.“이미 손댔어?”“아니요!”뒤에서 민도준을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진기태는 민도준 앞에서 대놓고 시비를 걸 배짱은 없었기에 얼른 변명했다.“아까 우리 애 중에 멋 모르는 애가 글쎄 권하윤 씨가 누군지 모르고 소란을 피웠는데 알아본 뒤로 손끝도 안 댔어요.”진기태는 권하윤을 힐끗거리며 말을 이었다.“믿기지 않으면 물어봐요.”위험에서 벗어난 권하윤이 그제야 안정을 되찾고 버둥대자 진기태 부하들이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녀는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민도준 옆에 다가가 그의 팔을 꼭 잡았다.그렇게 해야만 그녀는 안전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개를 들고 민도준을 쳐다본 그녀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갈라 터진 입술이 당겨져 말없이 고통을 삼켰다.하지만 애써 냉정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럴 새가 없었던 거지 그러지 않은 게 아니에요!”“이게!”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진기태는 민도준의 눈빛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입술을 깨물며 애써 눈물을 참는 권하윤의 모습을 본 민도준은 자기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밖에서 기다려.”하지만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외투를 품에 안은 권하윤은 고개를 저었다.“저도 볼래요.”그 말에 민도준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재밌다는 듯 피식 웃으며 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꾹 눌렀다.“뒤로 물러나 있어.”권하윤은 그의 외투를 품에 안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물러났다.진기태는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고 이내 방어 태세를 취했지만 민도준이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들을 대놓고 적대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조심스레 찔러봤다.“민 사장님, 지금 뭐 하시려는 겁니까?”그의 말에 민도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당연히 친해지려고 그러지.”“로건.”짤막한 명령에 로건은 손의 힘을 풀었고 지금껏
권하윤은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에둘러 민도준 곁으로 다가갔다.그러던 중 지나쳐 온 사람 중 팔이 괴이한 모습으로 꺾여 있는 뚱보가 눈에 들어왔다.그 모습을 보자 권하윤은 순간 쾌감이 밀려왔지만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도 함께 덮쳐왔다.두 사람이 약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있을 때 민도준이 갑자기 권하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그녀를 껴안은 채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왜 이렇게 늦어? 다리에 힘이 풀렸나?”민도준이 매번 크게 싸우고 나면 왠지 모를 화와 피가 들끓는 것 같은 흥분이 그의 정신을 지배하곤 한다.지금도 마찬가지로 들끓는 피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당장이라도 권하윤의 허리를 부러트릴 듯 힘을 주체하지 못했다.권하윤은 이럴 때 그를 거절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거리낌 없이 행동하다가 소문이라도 새어나갈까 봐 작게 버둥거렸다.“사람 있어요.”민도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살짝 쓸었다. 그 덕에 손에 묻은 피가 새하얗게 질린 권하윤의 얼굴에 묻어 약간의 색을 더했다.“이 사람들은 다 죽었다 생각하면 돼.”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민도준의 모습에 권하윤은 순간 멍해졌다.주위에서 들리던 울부짖음도 그 소리에 더욱 날카로워졌다.겁 많은 똘마니들은 민도준이 저들을 정말 죽이기라도 할까 봐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조금 배짱이 있는 놈들은 오히려 민도준을 협박했다.하지만 그저 자신들의 보스가 예전에 얼마나 잘나갔는지 자랑해 대며 자기들을 죽이면 보스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협박이었다.민도준은 그들의 분노와 애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마치 정말로 죽은 사람 대하듯 그들을 대했다.그러더니 갑자기 권하윤이 걸치고 있는 커다란 외투를 잡아 당겨 그녀를 자기 앞에 끌어오더니 피 묻은 칼을 그녀의 손에 건네주었다.“아까 하윤 씨 만진 놈한테 복수 해.”권하윤은 그 칼을 손에 받아 들었지만 마치 뜨거운 감자라도 쥔 것처럼 오히려 불안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거면 충분해요.”“이게 어떻게 충분해.”민도준은 그녀의 몸을
차 안.권하윤은 시선에서 점차 멀어지는 창고를 힐끗거리더니 자기와 함께 뒷좌석에 앉은 민도준을 바라봤다.“우리…… 로건 씨 안 기다려요?”민도준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그녀를 흘겨봤다.“사람도 찔렀으면서 멍청하게 굴지 말지.”권하윤은 그의 말에 곧장 입을 닫았다.마치 깊은 원한이라도 있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자 민도준은 이내 피식 웃었다.“창고 안 놈들 모두 처리하려면 5분 정도는 소요 돼. 왜? 설마 저들이 불쌍하기라도 해? 그럴 거면 차라리 나를 생각해 주는 게 어때?”“어디 다쳤어요?”권하윤은 잔뜩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었다.본인은 이미 얼룩 고양이처럼 되었으면서 도리어 자신을 걱정하는 권하윤을 보자 민도준은 순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윽고 담배를 입에 물며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여기 앉아. 보여줄 테니까.”그의 말에 운전석에 앉아 있던 한민혁은 묵묵히 이어폰을 끼더니 볼륨을 최대치로 높였다.하지만 정작 권하윤은 부끄러운 듯 말을 얼버무렸다.“저 옷 더러운데 움직이면 차 안이 더러워…… 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권하윤을 자기 무릎 위로 끌어온 민도준은 그녀의 귀를 잘근잘근 씹으며 놀려댔다.“내가 언제 하윤 씨 더러워했어?’그 말을 들은 권하윤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한참이 지나서야 제 목소리를 되찾았다.“그런 뜻 아니에요.”“응? 내가 무슨 뜻으로 말한 줄 알고 아니래?”상대의 함정에 빠졌다는 걸 인지한 권하윤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그녀의 그런 모습에 민도준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 바람에 다리가 휘청거렸다.“내가 먼 데서부터 달려왔는데 은인을 대하는 태도가 이래서야 되겠어?”민도준에게 놀림을 당한 권하윤은 부끄러워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대체 다친 거예요? 아니에요?”그녀는 본인이 무섭게 화를 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민도준의 품에 안긴 채 긴장해서 몸을 움츠린 모습으로 소리 지르는 모습은 화를 낸다기보다는 애교 수준에 가까웠다.민도준은 그런 그녀를 마치 애완동물 만지듯
오늘따라 민도준은 유난히 집요했다.방 안이 조용해질 때쯤, 권하윤은 반쯤 혼이 나간 채 멍한 눈으로 누워있었다.담배를 피우고 난 민도준은 고개를 돌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더니 웃음을 머금은 채 희롱했다.“방금 똑똑히 봤어? 내가 다쳤는지 안 다쳤는지?”권하윤은 그런 그를 상대하기도 귀찮았다.‘다치긴 무슨!’죽으면 오히려 손뼉 치며 쾌재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녀는 민도준을 노려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눈에는 아직 물기가 촉촉하고 야릇했기에 민도준을 위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욕구를 불러일으켰다.그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이내 권하윤은 끌어안았다.“괜찮아?”권하윤은 온 힘을 다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하지만 민도준은 포기하지 못하고 손을 이불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정말 안 돼?”“아껴 쓰는 게 어때요? 그래야 저도 민도준 씨 오래 모실 수 있지 않겠어요?”권하윤이 어렵사리 꺼낸 말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손을 뒤로 뺐다.“그래, 그럼 킵해두자고. 다음에 갚아.”권하윤은 더 이상 그와 실랑이를 벌일 힘이 없어 피곤한 눈을 스르르 감았다.잠시 눈만 붙이려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완전히 잠들어버렸다.어두운 밤.아까 급하게 들어온 나머지 커튼을 닫지 않은 탓에 불빛과 달빛이 한데 어우러진 채 그녀의 얼굴에 드리웠다. 그 때문인지 빨간 손자국이 난 얼굴이 더욱 불쌍하게 느껴졌다.민도준은 그런 그녀를 보며 눈썹을 치켜떴다.엊그제만 해도 거짓말만 늘어놓으며 여우처럼 굴던 그녀가 다친 모습을 보니 마치 상처 입은 어린 동물처럼 느껴져 보호 욕구를 자극했다.권하윤은 매번 이렇게 그의 흥미가 사라지려고 할 때쯤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그렇다면 나도 거절할 이유가 없지. 우리 천천히 놀자고.’-병원.“지금 거신 번호는 전원이 꺼져있어 삐 소리 이후…….”약 9통의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는 전화에 조 사장은 진기태에게 무슨 일이 났다는 걸 직감했다.그때 마침 사람을 찾으러 나갔던
그 후 며칠 동안 권하윤은 줄곧 민도준을 보지 못했다.하지만 며칠 전 차갑게 대하던 그의 태도는 조금 변했다. 그는 가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가 하면 늦은 밤 그녀에게 전화해 야릇한 말들로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도록 유도했다.권하윤은 그가 자기를 보러 올 시간마저 없을 정도로 바쁘다는 걸 대충 알고 있었다.하지만 요즘은 왠지 그녀가 뭔가를 물을 때마다 민도준은 화제를 전환해 결국은 야릇한 농담으로 끝을 맺곤 했다.그렇게 지체하다가 끝내 민상철의 생일연회 날이 다가왔다.권하윤은 민씨 집안 예비 며느리로서 아침 일찍 민씨 가문 본가에 가 이것저것 거들었다.민상철의 생일만 되면 아침마다 먼저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는 가풍이 있다.물론 집안 메이드들이 해도 충분하지만 효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도와줄 수밖에 없다.아침 6시부터 8시까지 제사상 준비는 끝마쳤다.오늘은 올 사람이 유난히 많았기에 제사상은 야외 응접실에 차렸다.그리고 8시반 쯤 되자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민승현의 집안은 다섯째이기에 위치가 맨 끝자리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권하윤이 자리에 앉기 바쁘게 따가운 시선이 그녀를 쏘아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민승현이었다. 지난번에 싸우고 난 뒤 그는 한 번도 집에 돌아온 적이 없었다.그는 사실 일부러 권하윤을 방치해 그녀가 혼자 마음고생하게 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더욱 화사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씨발 이년 설마 또 그 자식 만나러 간 거 아니야? 걸레 같은 년! 제사 끝나고 따져 물어야겠네!’9시가 되자 민상철이 민시영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하지만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주위를 빙 둘러봤다.“도준이 얘는 또 어디 갔어?”그의 말에 민시영이 싱긋 웃었다.“아마 할아버지를 위해 큰 선물 준비하나 보죠. 곧 올 거예요.”“흥. 걔가 무슨 큰 선물을 준비하겠어? 내 화만 돋우지 않는다면 효도지.”그러던 그때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할아버지가 제 선물 받고 싶지 않다면 다시 가져갑니다.”모든 사람이 소리가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