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살아계세요. 그런데 이 일을 어떻게 아셨어요?”“네? 인터넷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하던데...”정욱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옆에 있는 컴퓨터를 켜니 검색도 하기 전에 알림 창 헤드라인에 떴다. 그리고 성여광이 꺼내 보였었던 사진도 있었다.기사를 확인한 정욱은 역겨운 마음이 들었다. 성형찬 부자가 흘린 소식임을 쉽사리 알 수 있었다. 분명 성연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널리 알려 성여광이 회사를 이어받게 할 속셈이었다.퉤!“안 죽었다고요?”그제야 깨달은 진유진이 또 물었다.“언론에서 조작한 뉴스죠?”“언론이 아니라 성형찬이 한 짓이에요.”정욱이 미간을 문지르며 대답했다.“성형찬과 성여광 부자가 왜 갑자기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누군가가 그들에게 소식을 흘렸을 거예요. 어쩌면 대표님에게 사고가 생긴 것도 그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죠.”외부인의 입장인 진유진마저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연신 씨가 그놈들에게 당한 것 같군요. 그럼 연신 씨는 지금 어때요? 괜찮아요?”정욱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상황이 안 좋아요. 철수 씨가 찾으러 갔는데 아직 대표님을 못 발견했거든요. 지금은 아마 절벽 아래서 찾고 있을 거예요.”진유진이 입술을 씰룩거렸다.“그런데 지안이는 왜 찾아요?”“지안 씨에게 전할 중요한 소식이 있어요.”“뭔데요?”정욱은 조금 망설이며 대답했다.“정말 중요한 일이에요.”“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저도 도울 수 없어요.”진유진은 쉽게 정욱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심지안은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더 자극받게 하면 안 되었다.정욱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제가 지안 씨를 해칠까 봐 걱정이 돼요?”“아니요, 하지만 저도 무슨 일인지 알아야 도와줄 거 아니에요. 지안이는 저의 가장 친한 친구예요. 친구가 자극받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물어본 건데, 그래도 안 되나요?”“말할게요.”정욱은 그런 진유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잠깐 고민하고는 말을 이어갔다.“두 사람의 아이에 관한 일이에요
“그럼 청민 씨와의 결혼식은 어떻게 해?”“그대로 진행하지.”“청민 씨가 동의할까?”“그게...”심지안에게 있어서 고청민은 언제나 그녀를 사랑으로 품어주는 햇살처럼 따뜻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아이에 관한 문제이니 심지안은 괜히 겁이 났고 감히 그에게 얘기도 꺼내지 못할 것 같았다.망설이고 있는 심지안의 모습을 눈치채고 진유진은 또 한 번 물었다.“청민 씨랑 결혼할 거야? 정말로 그 사람 사랑해? 만약 아이와 청민 씨 두 사람 사이에서 한 사람만 고르라고 하면 누구를 고를 거야?”진유진의 질문 공세에 심지안은 의문스러운 얼굴을 보였다.“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물어보는 거야?”진유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내 말에 대답해.”“나... 나 모르겠어...”심지안은 진유진의 질문을 버거워했다.특히 아이 얘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차갑고 도도한 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지안아, 잘 생각해야 해. 앞으로... 이런 문제에 부딪힐 수도 있잖아.”“하지만 아이는 진작 죽은 게 아니었어?”심지안은 그 일만 떠올리면 가슴이 아팠다.“태어난 날에 큰 불길 속에 파묻혔잖아.”“이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게 존재해. 아이가 죽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그리고 아이가 죽은 걸 네 두 눈으로 직접 봤어?”진유진은 너무 많은 이야기는 할 수 없어 애매모호하게 표현했다.심지안이 입술을 감쳐물더니 결연한 눈빛을 보였다.“청민 씨는 좋은 사람이야. 나를 사랑해 주고 바라는 것 없이 내 곁에 오랫동안 있었어. 그래서 아이 때문에 청민 씨를 버릴 수 없어. 마찬가지로 내가 열 달 품고 낳은 아이를 결혼식 때문에 포기하지 못해. 청민 씨를 열심히 설득할 생각이야.”처음부터 끝까지 심지안은 고청민을 사랑하는지, 진심으로 그와 결혼하고 싶은지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답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다만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항상 어떤 목소리가 속삭이고 있었다. 고청민과 결혼하지 않으면 그녀의 인생은 무의미해질 것이고, 또 할아버지도 그녀에게
“당연히 사실이지. 성씨 집안에서 흘러나온 사진이라는데 설마 가짜겠어?”“아깝네. 성연신 대표님의 얼굴이 엄청 내 스타일이었는데.”“꿈 깨. 언제 네 차례가 되겠어?”“그나저나 지안 팀장님 내일 대표님이랑 결혼하시지 않아? 전남편이 오늘 죽었으니 어떤 심정일지 몰라.”“누가 알겠...”말하던 직원은 갑자기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심지안을 발견하고는 입만 뻐끔거렸다.“무슨 얘기 해요?”심지안은 손을 닦는 것마저 잊어버린 듯 물방울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하는 얘기예요.”직원이 어색하게 설명하면서 웃음을 쥐어짰다.“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인터넷 기사는 대부분 거짓이잖아요.”심지안은 지금 고청민과 똑같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세움 주얼리의 핵심 관리자였다.말 한마디면 직원의 운명을 결정할 만큼의 권력을 쥐고 있으니 그녀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이 대단했다.“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물었어요.”갑자기 높아진 심지안의 목소리에 직원은 깜짝 놀랐다.“그냥 인터넷에서 뜬 기사를 봤는데요. 거기에서... 성연신 대표님이 죽었다고 했어요.”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심지안은 눈만 깜빡였다.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죽었다고요?”“인터넷에서는 그렇다고 했어요. 저도 자세한 상황은 모르죠.”성연신 같이 비즈니스계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풍기는 아우라가 대단했기에 언론이나 매체에서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려는 마음이 있지 않은 이상 함부로 성연신에 관한 기사를 쓰지 않을 것이다.심지안은 어떻게 사무실로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그녀는 멍하니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어두워진 스크린에 창백하고 투명에 가까운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자세히 보면 눈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손을 들어 얼굴을 쓱 닦자 어느샌가 손끝이 젖어 있었다.언제부터 눈물이 흘렀지?그녀는 허둥지둥 휴지를 찾아 닦으려고 했지만 눈물을 주체
심지안은 창밖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점점 더 타들어 갔다. 성연신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으니 말이다.‘나쁜 놈, 설마 그렇게 재수 없이 죽겠어?’“지안 씨,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방매향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알아요. 병원에 갈 거예요.”심지안은 결연하게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녀는 병원에 가야 했다. 몸 상태가 이렇게도 좋지 않으니 분명 병이 난 것이 틀림없다. 지난번에 갔던 개인 병원은 실력이 부족해 진단을 잘못 내렸었다.게다가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성연신과 관한 일이었으니 주의를 돌려야 했다.“나도 같이 갈게요.”서류를 테이블 위에 놓은 후 방매향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아들이라도 있었으면 심지안을 잘 챙겨줬을 텐데 말이다.심지안은 방매향을 힐끔 쳐다볼 뿐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자신이 또 의식을 잃을 수도 있으니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방매향과 함께 병원에 도착한 심지안은 접수한 후 뇌CT 검사를 받았다.의사가 검사 결과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문제없어요. 일찍 쉬고 밤을 새우지 말고, 또 식사를 담백하게 드시면 됩니다.”심지안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정말 문제없는 거 맞아요? 하지만 저 요즘 두통이 심하고 잦아요. 한 번 아플 때면 진짜 머리가 깨질 것만 같거든요.”“그럼 정신과로 가보세요.”의사가 제안했다.우울증이나 조울증은 모두 두통을 유발할 수 있고, 사람마다 증상이 다르다.심지안은 입만 뻐끔거리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또 물었다.“선생님도 제게 정신 질환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다른 병원에 가보셨어요?”진료 기록을 펼쳐보던 의사가 사뭇 엄숙한 얼굴로 물었다.“그럼 정신 질환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제가 정신과에 전화해서 접수할 수 있는지 물어봐 드릴게요.”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심지안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아니요! 제가 정신병이 있다니요!”의사가 대답을 하기도
반응이 없자 임시연은 어금니를 깨물면서 또 말을 이어갔다.“뉴스를 봤어요? 연신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은 것 같더라고요.”심지안의 눈빛에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임시연을 응시하며 말했다.“할 얘기 있으면 해요, 이상하게 말 돌리지 말고.”“딱히 할 얘기는 없고요. 그냥 우리 두 사람 모두 성연신과 결혼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임시연 씨는 결혼은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잖아요.”임시연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그냥 사람 일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그렇게 날을 세울 필요 있나요?”“뭐가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임시연 씨는 과부가 될 자격도 없잖아요.”“누가 과부 따위를 앞다투어 하나요?”임시연이 피식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녀가 성연신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건 사실이었다. 실력이면 실력, 얼굴이면 얼굴, 분위기면 분위기, 그보다 더 훌륭한 남자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다만 성연신은 안목도 없지, 임시연도 아니고 하필 심지안을 좋아했다.만약 성연신이 임시연과 결혼했더라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밀 조직에서도 이렇게 빨리 그를 죽이려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임시연은 남은 평생을 함께하는 남자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우쭐거렸다. 그리고 허리를 곧게 펴고는 오만한 눈빛으로 심지안을 바라봤다.“널리고도 널렸죠. 연신 씨가 가진 전 재산은 어쩌면 왕실보다도 더 많을 거예요. 작년에 보광 그룹에서 왕실에 투자한 프로젝트만 20조가 넘는데요.”심지안은 임시연의 말에 더 대꾸하기 싫었지만 임시연이 머리를 쥐어짜면서까지 불을 지폈으니 그녀도 더는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마침 답답한 마음을 분출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었는데 말이다.임시연은 화내기는커녕 입꼬리를 올렸다.“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걸 누릴 운명은 아닌가 보죠. 지안 씨는 청민 씨와, 나는 석환 씨와 결혼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잘된 일이에요. 인생 그렇게 집착하면서 살 필요 있어요? 순리에 따라야 하지.”
“지안 이모, 엉엉, 혹시 저 데리러 오실 수 있나요?”전화기 너머로 성우주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흐느끼며 말하는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마음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심지안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어디야? 누가 괴롭혔어?”“저도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혹시 위치 보내드려도 될까요?”“그래.”위치를 확인한 후 심지안은 곧바로 성우주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방매향은 정체가 탄로 날까 봐 더 따라가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폐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성연신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니 말이다.방매향은 떠나기 전에 또 심지안에게 성형찬과 성여광이 회사로 찾아온 얘기를 알렸다. 두 사람은 분명 꿍꿍이가 있을 테니 심지안더러 조심하라며 신신당부했다....목적지로 도착한 심지안은 눈앞에 펼쳐진 적막하고 쓸쓸한 공원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몸을 웅크려 앉고는 성우주를 보며 물었다.“여기는 왜 왔어?”“둘째 할아버지가 데리고 오셨어요. 이곳에 아빠가 있다고 하셨어요.”성우주는 귀족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진한 네이비 색은 고귀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책가방을 멘 그는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더니 걱정스럽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심지안은 입만 뻐끔거리다가 한참 동안 고민하고는 물었다.“기사 봤어?”“네.”성우주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우리 아빠, 정말 죽었어요?”“아니.”“그럼 살아계세요?”심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또래보다 똑똑하다고 하지만 성우주는 여전히 어린 아이였다.인터넷에서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씩씩한 아이였다. 그리고 성형찬은 희망을 놓지 않은 아이의 마음을 이용해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성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심지안을 보더니 검은 눈동자에 점점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아이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심지안은 그런 성우주를 보며 너무나도 속상했다.“성형찬 할아버지가 널
심지안은 깜짝 놀라며 손을 꼭 움켜쥐고 말했다.“누가 말했어?”성우주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는 풀이 죽어서 말했다.“사실 저도 제가 집안의 재앙인 것 같아요.”어려서부터 어머니도 없고 증조할아버지는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겨우 깨어났는데 이제 아버지까지 일이 터지다니.그는 태어난 지 5년이 지났지만, 아직 집에 행운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명실상부한 재앙이었다.“아니, 예전에도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야. 그리고 앞으로는 더더욱 아닐 거야.”심지안은 결연한 눈빛으로 성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팥죽을 먹은 듯 따뜻했다.“모든 아이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야, 선물을 가진 사람은 가장 행운스러운 사람이야. 그들은 너희들이 있어서 삶이 더 다채로워졌고 너희들 덕분에 진정한 가정을 이룰수 있었어.”성우주의 눈이 보석마냥 반짝였다. 그는 아이만이 가질수 있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진짜예요? 제가 진짜 재앙이 아니라 하늘이 주신 선물이에요?”“당연하지. 가끔은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성연신은 안전하게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어.” 심지안은 웃으며 성우주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성우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위로해 줘서 고마워요, 고모.”그를 잘 대해 주는 건 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외에 고모밖에 없었다.어떡하지, 방금 고모와 아버지의 재결합을 반대한다고 했는데 이제 좀 후회스러웠다.“위로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거야.”심지안이 참을성 있게 물었다.“누가 너한테 재앙이라고 했는지 말해 줄 수 있어?”“둘째 할아버지요.”성우주는 모두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간을 찌푸린 그녀의 눈가에는 차가움이 스쳐 지나갔다.“날이 어두워졌으니 집에 데려다줄게.”그녀와 같이 가는 건 안전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보호할수 없기 때문이다.더욱이 내일이 바로 결혼식이라서 적합하지 않았다.“네, 고마워요, 고모.”이때, 성우주의 정서가 안정되어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
“그럼 여광이는요? 여광이도 성씨 집안 사람이잖아요. 만약 여광이한테 자리를 물려 주신다면 저는 의견 없어요.”“쳇, 너희 둘 지금 날 압박하는 거냐? 너 이놈 네 주제를 알아. 내가 참가한 전쟁터만 해도 네 놈이 먹은 소금보다 많은데 감히 누구 앞에서 수작을 부리는 거야. 지금 내가 반쯤 땅에 묻혀있다 해도 여전히 제경에서 인연을 끊고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할 수 있어.”성수광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욕을 퍼부었지만, 사실 그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성형찬은 몇 년간 옥살이했지만 성씨 가문 덕분에 감옥에서 큰 고난을 겪지는 않았다.진짜 주인을 건드렸으니 성형찬은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성형찬은 가슴속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감히 표현은 못 하고 태사의에 드러누워 버렸다.“아잇, 몰라요. 솔직히 말할게요. 주인 자리는 저 아니면 여광이한테만 주셔야 해요. 다른 사람은 생각도 하지 마세요.”성여광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성수광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할아버지, 저와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짐을 줄여드리려는 거예요. 성씨 집안에 주인이 없지만 회사 일은 누군가 해야 하잖아요. 할아버지는 이제 나이가 많으시니 힘드시잖아요. 다섯 살짜리 조카는 너무 비현실적이고요.”“그래서 너희들은 네 형이 생사가 오가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든 그 자리에 오르려는거야?”성수광은 오래 전부터 담배를 피웠었지만, 건강을 위해 몇 년 전부터 금연 중이었다.하지만 어제 성연신과 연락이 끊기면서 답답한 마음에 몇 대 피웠다.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채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주름이 가득한 무표정한 얼굴은 아주 섬뜩했다.성여광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는 성형찬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성여광은 인내심을 잃고 험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버지 그 고집을 제가 꺽을 수는 없지만 그 어린놈한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안되면 시간을 끌면 될 일이었다. 성연신도 없는 마당에 어린애 하나 어떻게 하지 못할까?성수광은 무언가 눈치챈 듯 손뼉을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