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진은 화가 나서 성을 내다가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보고 갑자기 멍청하게 웃기 시작했다.“네가 패션을 알기나 해? 이거 요새 나온 리미티드 에디션이라고, 하나 구하기도 어려워.”“스케줄 간다고? 그거 오후 시작 아니야?”매니저가 비몽사몽하게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의아해서 물었다.“데이트 갈거야.”“누구랑?”“세움 그룹의 심지안 씨.”장현진은 악랄하게 웃었다.“고청민에 대해서 물어봐야할 것같아.”그말을 들은 매니저는 얼굴을 찌푸리고 소파에서 일어나 물었다.“진짜?”지난 번만 해도 그 사람이 손을 쓴 바람에 아티스트 한 달 일정이 다 밀렸는데 또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러 간다니.연예계 생활을 더는 하기 싫은 건가?장현진은 머리를 정리하면서 말했다.“그럼. 힘들게 진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은 데다가 지안 씨가 먼저 약속 잡은 건데 내가 거절하겠어?”“말 절대 함부로 하면 안 돼. 심지안 씨랑 고청민 씨 관계 이간질할 생각도 말고. 한창 잘 나가고 있는데 자기 무덤 파지 말아.”매니저는 노파심에 거듭 강조했다. 자칫하면 장현진뿐만 아니라 본인 직장도 없어질 노릇이었다.장현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그러면 돌아가서 아빠랑 같이 소, 돼지 키우면 되겠다. 마침 목장 이어받을 사람도 없는데.”“...”금수저가 대단하긴 하다. 짜증 나게!...카페.심지안이 도착했을 때 장현진은 이미 카페에서 메뉴를 시키고 잔뜩 흥분한 채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온 걸 보고는 삽시에 얼굴에 웃음꽃이 피면서 활기차게 옆의 의자를 빼냈다.“심지안 씨, 앉으세요.”“급하게 약속 잡아서 실례가 많네요.”“괜찮아요. 어차피 한가해서 나와서 바람 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장현진은 커피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뭐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신제품 있길래 시켜봤어요. 코코넛 라떼예요. 한번 드셔보세요.”“고마워요.”심지안은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들고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맛있네요.”장현진은 심지안과 눈이 마주
심지안은 장현진과 헤어지고 한참 동안 혼자 있었다.그녀에게 있어서 스캔들 사건 자체는 사실 그렇게 큰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자신을 속인 거라면 달라진다.거기다 성연신이 매번 모든 걸 다 안다는 듯한 눈길로 하던 경고들이... 불편했다.그녀는 장현진이 준 명함을 꽉 쥐고 있다가 잠깐 멈칫하고는 일어서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다른 사람 입에서 고청민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진실을 알아내고 싶었다.회사 계좌와 고청민 개인 계좌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지만 고청민은 심지안에게 숨기는 게 아예 없었기에 그의 계좌를 보는 건 쉬웠다.심지안은 차에 앉아서 노트북을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손끝으로 키보드를 몇 번 누르자 쉽게 로그인됐다.고청민의 계좌 기록은 간단하고 적어서 찾아보기도 쉬웠다.그리고 심지안은 지난달 기록에서 고청민이 거액의 돈을 언론 회사에 보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현진이 말한 게 사실이었다. 더럽고 지독해 보이는 스캔들을 사주한 것이 고청민이었다. 심지안은 스크린을 한참동안 노려보면서 얼굴을 점점 찡그렸다. 잠깐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하지만 컴퓨터의 숫자가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모든 게 사실이었다. 고청민은 장현진이 말하는 ‘비열한 자식’이었다.앉아서 진정하려고 노력한 심지안은 겨우 이성을 되찾고 바로 세움으로 돌아갔다. ...“지안 씨?”고청민은 프로젝트 보고서를 살펴보다가 인기척을 듣고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눈으로 심지안을 쳐다봤다. “오늘 쉬는 날 아니에요?”“지난달에 왜 언론 회사에 송금했어요?”심지안은 진지하게 바로 핵심을 말했다.고청민은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지만 금방 자연스럽게 표정을 고치고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부드럽게 물었다.“누가 무슨 말을 했어요?”“먼저 대답해요. 그런 일이 있는지 없는지 대답해요.”그녀는 눈빛이 반짝였지만 평온하게 대답했다.“있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심지안은 말문이 막혀서 믿기 힘들다는 눈길로 쳐다봤다.자칫하면 한 사람
고청민은 침묵을 지키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눈을 빠르게 굴렸다. 그러고는 슬픈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저 안 믿으세요?”심지안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아니고요. 그냥 너무 공교로운 거 같아서요.”양쪽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평소였다면 생각도 하지 않고 고청민을 선택할 것이다.장현진은 그녀에게 있어서 그저 지나가는 엑스트라 같은 존재지만 고청민은 아니었다. 고청민은 처음부터 그녀 곁에 있던 사람이고 그녀를 살려준 사람이었다.고청민이 없었다면 그녀는 지난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하지만 함께 겪은 게 너무 많았고 불우했던 가정에서 자라온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분위기는 건드리면 깨질 살얼음 같았다.“지안 씨.”고청민은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고청민의 맑은 두 눈은 눈물을 꾹 참는 것처럼 보였다.“사람 말이 무섭죠. 저희가 이렇게나 오래 알고 지냈는데 아직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세요?”심지안은 그의 눈길을 보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한때 그녀도 성연신에게 믿음을 받지 못했었다.그 순간 그녀도 마음이 힘들어서 눈을 내리깔았다.“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당신을 믿어요.”그래, 고청민을 제외하고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성연신? 아니면 장현진?전자는 당연히 아니다. 원래 행복으로 가득했던 가정을 산산조각 낸 사람이었다. 후자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었고 아주 조금의 인연만 있는 사이였다.“우리는 서로만 믿으면 돼요. 다른 사람 영향받지 마요.”고청민은 낮은 소리로 위로했다.“언론의 사람을 몇 명 알아요. 만약 당신이 장현진 씨를 돕고 싶다면 제가 한번 연락해볼게요.”“됐어요. 당신이랑은 상관 없어요.”심지안은 거절 했다.고청민을 믿기로 했으면 다신 장현진과 연락할 일이 없었다.고청민 눈에 있던 슬픔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는 손끝의 만년필을 갖고 놀면서 생각에 잠겼다.장현진?감히 심지안에게 고자질하다니, 용기가 가상
마침 변혜영의 눈길이 심지안에게 향했다.눈길이 마주치자 변혜영은 당당하게 위아래로 심지안을 훑어봤다.심지안은 그녀의 눈길을 무시하고 드레스 자락을 들고 사람들 속으로 걸어갔다.변석환은 그제야 심지안을 발견했다. 다정하고 총애 가득하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심지안이 미친 짓을 할가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변혜영을 뒤로 감쌌다.심지안은 곁눈질로 그 장면을 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임시연이 또 변석환 앞에서 불쌍한 척을 한 모양이었다.고청민은 잔을 권하던 중에 심지안이 온 것을 보고 금방 컵을 내려놓고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애정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준비 오래 했네요. 배고프죠? 앉아서 뭐 좀 먹어요.”“배도 고프고 피곤해요.”거울 앞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메이크업 받고 헤어까지 하는데 세 시간이나 썼다. 그전에 옷 갈아입는 시간은 더하지도 않았다.“금방 끝날 거예요. 조금 이따 우리 둘이 올라가서 말 몇 마디만 하면 되요.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요.”말을 마치자 성동철은 고용인의 도움으로 무대에 올라섰다. 그는 얼굴이 조금 붉긴 했지만 혈색이 좋아 보였고 며칠 동안 기분이 좋아서 웃는 일도 많았다. 눈 주위에 주름이 몇 가닥 더 많아지기는 했지만, 한층 더 자상해 보였다.이어서 심지안과 고청민 차례가 되었지만 성동철이 더 많이 말하고 있었다.심지안은 하객들을 보면서 결혼하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화롭고 조용했지만, 기쁨이 부족한 것 같았다.눈길을 돌리다가 심지안은 한 남자의 실루엣을 발견했다.성연신?저 사람이 왜 왔지?심지안은 뒷좌석의 사람을 노려보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성동철이 성연신을 초대 했을 리도 없고 고청민이 그랬을 리는 더더욱 없는데, 그러면 어떻게 들어왔단 말인가?“뭐 봐요?”고청민은 몸을 돌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고청민의 가벼운 호흡이 심지안의 얼굴을 스쳤다.심지안은 뒤로 한걸음 물러서서 다시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성연신은 이미 사라졌지고 없었다. 마치 환각을 본 것 같았
“화내기 전에 꺼져요. 당신 아빠 쪽팔리게 하지 말고요.”심지안은 차가운 얼굴로 말투도 거침없었다.변혜영은 입을 가리고 깔깔 웃더니 도발했다.“정말 순진하네요. 저야말로 아빠가 이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딸인데, 당연히 제 편을 들지 당신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해요?”심지안은 이를 악물고 바로 테이블 위에 있던 와인을 그녀에게 쏟았다.변혜영은 잠깐 멈칫하고는 고개를 숙여 값비싼 치마를 보고 그녀를 노려봤다.“감히 나한테 와인을 부어?”모두 집 밖의 평민들은 그들 앞에서 설설 긴다고 하지 않았는가?왜 이 여자는 이렇게 당당한 거지?아빠가 뒤에서 편을 들어준 걸까?“그럼요? 참아줘야 하나요?”심지안은 비굴해하지 않고 마른 몸으로 꼿꼿하게 서서 굽히지 않고 얘기했다.“제 약혼식에서 난동을 피우는 게 당신들의 품격인가요?”그 말에 변혜영은 순간 말문이 막혀서 반박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당신 엄마가 먼저 불륜 저질렀는데 이제 와서 저를 탓해요?”약혼식은 일생에 단 한 번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변혜영은 이런 말까지 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 사람은 내연녀의 딸인 심지안이었다. “아마 제가 그쪽보다 두 살 많을걸요? 당신 아빠가 우리 엄마를 알았을 때 그쪽은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당신 엄마야말로 내연녀일 수도 있죠.”“헛소리 마요. 우리 엄마는 고귀한 귀족이라고요. 그딴 짓을 했을 리가!”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심지안은 악독한 말만 골라서 했다.“사실이 이런데 뭐라 말해도 소용없어요. 서열로는 저한테 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요.”변혜영은 완전히 무너져서 엉엉 울었다. 마치 심지안을 언니라고 부르는 게 엄청난 모욕인 듯이 더 이상 비웃지도 않았고 더 비아냥거리지도 못했다.심지안의 말이 더 일리가 있었다.“무슨 일이야. 심지안 당신 설마 내 동생 괴롭혔어?”소리를 들은 변요석과 변석환이 급하게 변혜영한테 걸어오더니 변혜영의 옷에 묻은 와인 자국을 발견했다. 변요석의 표정이 약간 변했지만 뭐라 말하지
화면에는 홍지윤 혼자만 있었다. 그녀는 며칠 전보다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행동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지만, 도우미에게 의지해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는 있었다.몸 상태는 좋아 보였다. 눈빛이 더 이상 허공에서 응시하지 않았다.심지안은 책상 모서리에 방매향이 놓고 간 바나나를 집어 먹으며 관찰했다.도우미가 홍지윤에게 점심을 먹인 후에 그녀는 침대에 누워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 오늘은 다락방에 가지 않았나 하고 생각이 들 때 수척하고 긴 그림자가 갑자기 화면에 나타났다.심지안은 바나나 껍질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해 화면을 쳐다봤다.홍지윤은 고청민이 오는 것을 보고는 눈을 크게 뜨며 침대에 웅크린 채 죽어라 그를 노려보았다."왜 이렇게 긴장해요? 성연신에게 평생 갇혀 지내야 했을 홍지윤 씨를 내가 데리고 나왔잖아요. 홍지윤 씨는 나에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 고청민."홍지윤은 몇 번 반복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마치 눈앞의 사람이 무슨 맹수인 것처럼 홍지윤은 계속 웅크린 상태로 뒤로 물러났다.고청민은 웃으며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요?""너너너..."홍지윤은 어렵게 발음하며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성대가 상한 그녀는 억양도 분명하지 않았다.하지만 눈치 빠른 사람은 그녀가 매우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성연신과 고청민 둘 다 진실을 알고 싶어 했다.둘 중에서 그녀는 한 사람만 선택할 수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틀림없이 그녀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고청민은 머리를 기웃거리며 순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말을 똑똑히 할 수 없다?"'민채린 속도가 좀 느린데.'홍지윤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두 손을 모으다가 이내 손을 흔들며 애원하는 듯했다.마치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을 잘 듣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청민은 음산한 웃음을 지었다."내가 지윤 씨를 믿는다고 생각해요? 성연신이 지윤 씨를 구해 줬는데 지윤 씨가 그에게 아
그 말을 들은 심지안은 잠시 조용히 있었다.“저는 아직 비밀 조직 못 이겨요.”그 사람들은 너무 위험해서 그 사람들의 목적을 알아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제가 있잖아요.”성연신은 잠깐 멈칫하고는 말했다.“홍지윤이 살아있어요.”머릿속에서 여우 가면을 쓴 화면이 떠올라서 심지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덜미의 솜털이 바짝 섰다.“무슨 뜻이에요?”성연신은 그때 홍지윤을 잡아서 송석훈과 거래한 일을 짧게 말해줬다.심지안은 그 여자가 몇 년동안이나 성연신에게 갇혀 있을 줄 몰랐고 송씨 가문이 홍지윤을 버렸을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지도 못했다.송씨 가문은 정말 악독한 사람들이다.“뭘 할 필요는 없어요. 이미 계획이 있거든요. 예전에 진 빚, 어떻게든 갚게 만들어야죠.”성연신은 씁쓸한 시선으로 얘기했다. 심지안은 그의 평온한 말투에서 깊은 원한을 들어냈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홍지윤, 쓸 데가 많아요?”“네. 비밀 조직의 비밀을 대부분 알고 있으니까요.”“그럼, 말하게 해야죠.”“송석훈이 그 사람한테 장기간 만성 독약을 써서 지금 위독해서 혼수상태일 때가 많아요. 치료하려면 무조건 외국에 있는 Z의사를 모셔와야 해요.”하지만 Z의사는 한 국가만을 위해서 힘을 쓰지 않아서 행방이 묘연했다. 극소수의 사람만 그의 진짜 신분을 알았고 모셔 오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Z의사?”심지안의 눈이 반짝였다.“제가 치료해달라고 부탁드려 볼게요.”그녀는 쭉 아이의 죽음이 미심쩍었다. 분명히 평안하게 태어났는데 갑자기 죽어버려서 비밀 조직이 손을 썼는지 알 수가 없었다.성연신은 눈썹을 올리면서 경악한 눈길로 물었다.“당신이 Z의사를 알아요?”“알긴 알아요. 모셔 올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해요. 대신 미리 말하는데 홍지윤을 한 번 봐야겠어요.”심지안은 단번에 승낙하지 않았다. 속으로 이 일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죽 쒀서 개 주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성연신은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만은 다정했다.“좋아요. 내일 오후 세 시
변석환이 말했다.“혜영아. 아빠도 나 이해 못 해주시는데 너도 내 편 안 들어주는 거야?”“오빠는 왜 기어코 소문 시끄러운 여자랑 결혼 하겠다는 거야?”일반적인 사람들도 재혼은 꺼린다. 게다가 딴따라이기까지 하니 좀 예쁜 것만 빼면 다른 우점은 없었다.비슷한 수준끼리 엮여야지, 임시연은 어디 내놓기 창피한 사람이었다.“소문이 시끄러운 건 사람들이 질투해서야. 시연 씨가 대단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떠들겠어?”변석환은 쓰게 타일렀다.“넌 아직 어려서 이런 거 몰라.”변혜영은 원래는 아빠 때문에 화가 났는데 지금은 오빠 때문에 화나는거로 바뀌었다. 그녀는 바보를 보는 눈길로 변석환을 바라봤다.“여자에 눈이 멀다니. 생각도 못 했어.”“... 혜영아. 어느 동생이 오빠를 이렇게 말하니. 네가 연애 할 때 나는 다른 말 안 했다.”송준을 싫어하기는 했지만, 동생을 반대하지는 않았다.근데 왜 아무도 그를 이해해 주지 않는단 말인가.변혜영은 조리 정연하게 분석했다.“나는 그냥 송준이 좀 괜찮게 생겨서 데이트 하는거 동의한 거야. 그냥 시간 때우기 좋으니까. 진짜 결혼할 사람은 아니라고.”왕실의 남자들은 너무 정직하고 고리타분해서 재미가 없었다.송준은 말도 잘하고 잘생긴데다가 여자를 잘 달래기까지 하니 갖고 놀기 딱 좋았다.변석환은 진지하게 말했다.“혜영아. 다른 사람 감정 갖고 장난 치지 마. 그건 몹쓸 짓이야.”“쳇. 오빠랑 말 안할래. 오빠랑 내연녀가 만나는 게 틀린 거야. 난 쇼핑하러 갈 거니까 상관하지 마.”변혜영은 듣기도 귀찮아서 안전띠를 풀고 힘껏 차 문을 박차고 멀지 않은 쇼핑몰로 향했다.변석환은 멀어지는 변혜영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임시연의 전화가 걸려 왔다.“바빠요? 집에 전등이 고장나서 그러는데, 혹시 와서 고쳐줄 수 있어요?”...고청민은 한참을 고생하고 나서야 하객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이미 밤 11시였다.하객을 상대하는 일은 상상보다 더 힘들었지만 기분은 좋았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