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심지안은 잠시 조용히 있었다.“저는 아직 비밀 조직 못 이겨요.”그 사람들은 너무 위험해서 그 사람들의 목적을 알아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제가 있잖아요.”성연신은 잠깐 멈칫하고는 말했다.“홍지윤이 살아있어요.”머릿속에서 여우 가면을 쓴 화면이 떠올라서 심지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덜미의 솜털이 바짝 섰다.“무슨 뜻이에요?”성연신은 그때 홍지윤을 잡아서 송석훈과 거래한 일을 짧게 말해줬다.심지안은 그 여자가 몇 년동안이나 성연신에게 갇혀 있을 줄 몰랐고 송씨 가문이 홍지윤을 버렸을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지도 못했다.송씨 가문은 정말 악독한 사람들이다.“뭘 할 필요는 없어요. 이미 계획이 있거든요. 예전에 진 빚, 어떻게든 갚게 만들어야죠.”성연신은 씁쓸한 시선으로 얘기했다. 심지안은 그의 평온한 말투에서 깊은 원한을 들어냈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홍지윤, 쓸 데가 많아요?”“네. 비밀 조직의 비밀을 대부분 알고 있으니까요.”“그럼, 말하게 해야죠.”“송석훈이 그 사람한테 장기간 만성 독약을 써서 지금 위독해서 혼수상태일 때가 많아요. 치료하려면 무조건 외국에 있는 Z의사를 모셔와야 해요.”하지만 Z의사는 한 국가만을 위해서 힘을 쓰지 않아서 행방이 묘연했다. 극소수의 사람만 그의 진짜 신분을 알았고 모셔 오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Z의사?”심지안의 눈이 반짝였다.“제가 치료해달라고 부탁드려 볼게요.”그녀는 쭉 아이의 죽음이 미심쩍었다. 분명히 평안하게 태어났는데 갑자기 죽어버려서 비밀 조직이 손을 썼는지 알 수가 없었다.성연신은 눈썹을 올리면서 경악한 눈길로 물었다.“당신이 Z의사를 알아요?”“알긴 알아요. 모셔 올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해요. 대신 미리 말하는데 홍지윤을 한 번 봐야겠어요.”심지안은 단번에 승낙하지 않았다. 속으로 이 일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죽 쒀서 개 주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성연신은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만은 다정했다.“좋아요. 내일 오후 세 시
변석환이 말했다.“혜영아. 아빠도 나 이해 못 해주시는데 너도 내 편 안 들어주는 거야?”“오빠는 왜 기어코 소문 시끄러운 여자랑 결혼 하겠다는 거야?”일반적인 사람들도 재혼은 꺼린다. 게다가 딴따라이기까지 하니 좀 예쁜 것만 빼면 다른 우점은 없었다.비슷한 수준끼리 엮여야지, 임시연은 어디 내놓기 창피한 사람이었다.“소문이 시끄러운 건 사람들이 질투해서야. 시연 씨가 대단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떠들겠어?”변석환은 쓰게 타일렀다.“넌 아직 어려서 이런 거 몰라.”변혜영은 원래는 아빠 때문에 화가 났는데 지금은 오빠 때문에 화나는거로 바뀌었다. 그녀는 바보를 보는 눈길로 변석환을 바라봤다.“여자에 눈이 멀다니. 생각도 못 했어.”“... 혜영아. 어느 동생이 오빠를 이렇게 말하니. 네가 연애 할 때 나는 다른 말 안 했다.”송준을 싫어하기는 했지만, 동생을 반대하지는 않았다.근데 왜 아무도 그를 이해해 주지 않는단 말인가.변혜영은 조리 정연하게 분석했다.“나는 그냥 송준이 좀 괜찮게 생겨서 데이트 하는거 동의한 거야. 그냥 시간 때우기 좋으니까. 진짜 결혼할 사람은 아니라고.”왕실의 남자들은 너무 정직하고 고리타분해서 재미가 없었다.송준은 말도 잘하고 잘생긴데다가 여자를 잘 달래기까지 하니 갖고 놀기 딱 좋았다.변석환은 진지하게 말했다.“혜영아. 다른 사람 감정 갖고 장난 치지 마. 그건 몹쓸 짓이야.”“쳇. 오빠랑 말 안할래. 오빠랑 내연녀가 만나는 게 틀린 거야. 난 쇼핑하러 갈 거니까 상관하지 마.”변혜영은 듣기도 귀찮아서 안전띠를 풀고 힘껏 차 문을 박차고 멀지 않은 쇼핑몰로 향했다.변석환은 멀어지는 변혜영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임시연의 전화가 걸려 왔다.“바빠요? 집에 전등이 고장나서 그러는데, 혹시 와서 고쳐줄 수 있어요?”...고청민은 한참을 고생하고 나서야 하객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이미 밤 11시였다.하객을 상대하는 일은 상상보다 더 힘들었지만 기분은 좋았
고청민은 잠깐 웃고는 조금 쉰 목소리로 얘기했다.“고작 그 사람을 위해서 저를 탓하는 거예요? 만약에 성연신이었다면 저랑 약혼 깨려고 했겠네요?”심지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누구인지랑은 상관없어요. 일을 따지는 거지, 사람을 따지는 게 아니에요. 이미 당신이랑 결혼하기로 했으니, 앞으로 성연신 말은 하지 마요.”“그러면, 몰래 찾아가려고요?”심지안은 놀라서 고개를 들고 고청민을 바라봤다. 마침 화를 참지 못하고 있는 그의 눈을 마주했다.고청민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진유진 씨랑 같이 있다고 했으면서 사실은 성연신이랑 밤을 보냈죠. 그래도 당신을 용서했어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처럼 넘어갔다고요. 하지만 성연신에 대해서 고작 몇 마디 했다고 당신은 지금 저를 뭐라고 하네요? 지안 씨. 당신 눈에는 제가 잘해주는 건 하나도 안 보이나 봐요? 누가 누구한테 따져야 하는데요?”심지안은 마음속에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날 밤 일을 알았군요...”고청민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잘생긴 얼굴에 약간의 원한이 서렸다. 동시에 자조적인 웃음이 걸렸다.“온 밤. 성씨 가문 저택 문밖에서 당신을 기다렸어요. 순진하게 당신이 그곳에서 나오지 않길 바라면서, 당신이 여기 있지 않을 거라고, 전 당신이 저를 속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마음속으로 그렇게 많은 준비를 했지만, 그녀는 그 모든 걸 짓밟았다.고청민은 진작에 그녀가 진유진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걸 알면서도 할아버지 앞에서 뭐라 하지 않고 조용히 참았다.“그날 밤, 정말 들어가서 당신을 데리고 나오고 싶었어요. 근데 내가 보면 안 되는 장면을 볼까 봐,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무서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서 그냥 그렇게 차에서 온 밤 동안 앉아있었어요. 근데 이튿날 아침, 지안 씨가 그 집에서 나오는 걸 두 눈으로 봐버렸어요.”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았고 차가웠다. 시선도 죽일 듯이 무서워졌다.이렇게 며칠 동안 참고
고청민은 눈이 붉어져서는 미친듯이 웃었다.“아뇨. 우리야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 당신과 성연신은 그냥 실수고요.”실수는 지워야한다.심지안은 눈이 떨리고 마음이 복잡해졌다.“피곤해요. 가서 자요.”고청민은 다시 냉정을 되찾고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앞으로는 성연신이랑 만나지 말아요. 알겠죠? 아무도 우리 사이를 방해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아직 안 돼요.”심지안이 진지하게 말했다.“홍지윤이 아직 살아있어요. 제 아이가 살아있을 수도 있고요. 비밀 조직에서 빼돌렸을 수 있잖아요.”사실 그 가능성은 미미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얼마나 무수한 밤을 자책으로 울다 잠에서 깼는가. 차라리 아이가 아닌 본인에게 사고가 났으면 했다. 고청민은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성연신이 당신을 속인 거예요. 홍지윤은 비밀 조직에 핵심 인원이에요. 만약 정말 성연신 손에 있다고 해도 비밀 조직은 홍지윤의 입을 막을 방법이 많아요.”“뭐가 어쨌든 다 시도해 보고 싶어요. 당신 Z의사 알죠? 저 도와서 홍지윤 치료 도와줄 수 있어요?”“싫어요.”고청민은 무의식적으로 거절하고는 심지안의 의아한 눈길을 보고 멈칫해서 말했다.“홍지윤을 만나 봤어요?”“아뇨. 성연신이 내일 저 데리고 간댔어요.”그는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마음이 안 놓여서 당신이랑 같이 가야겠어요.”심지안은 망설이다가 말했다.“그래요. 대신 먼저 약속해요. 성연신이랑 싸우지 않겠다고.”고청민이 그녀를 도와 Z의사를 모셔 오기 위해서는 먼저 홍지윤이 살아있는지 확인해야 했다.그 밤은 한없이 고요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잠들지 못했다.심지안은 온종일 뒤척이면서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었다.고청민은 오랜만에 밤에 업무를 처리했다. 그는 임시연에게 연락하려고 시도했지만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눈빛이 어두워진 고청민은 핸드폰을 땅에 내쳤다....이른 아침, 심지안은 일어나서 씻고 팩을 붙인 채로 아침 먹으러 내려왔다.고용인이 한복을 한 벌
성연신은 두 사람한테 눈길을 돌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갑게 웃었다.“쟤는 심지안의 ‘약혼남’이에요.”“네?”안철수는 한참 동안 반응하지 못하다가 동정 어린 눈빛으로 성연신을 쳐다보았다.“형님,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에 반이 여자인데, 보란 듯이 더 좋은 사람 만나면 되죠!”“입 다물어요!”“...”쯧, 차여서 화났나 보네.그렇긴 하지, 성연신은 자존심이 센 사람이다. 심지안이 면전에 새 남자를 데리고 오면 보통 사람도 불편할 텐데 성연신 같은 사람은 오죽하겠어.안철수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라 성연신과 안전거리를 5미터 유지하며 떨어졌다.누가 알았을까, 심지안이 이유를 설명하자, 성연신은 표정 변화 없이 고청민을 받아들였다. 그는 웃을락 말락 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온 김에 같이 가죠.”심지안은 눈을 깜빡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싸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고청민도 생각보다 평온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심지안의 손을 잡았다.“우릴 데리고 홍지윤을 만나게 해주세요. 밖이 추워서 지안 씨가 감기에 걸릴까 걱정돼요.”낯선 촉감에 심지안은 얼어붙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성연신은 두 사람의 깍지 낀 손을 쳐다보고 얇은 입술을 말고 비웃었다.“이렇게 얇게 입었으니 당연히 춥죠.”“웃어른이 정해주신 거라 거절하기 어려웠어요. 제가 외투를 가지고 나온다는 걸 깜빡해서요.”고청민은 인내심 있게 담담히 해명했다.심지안은 할 말이 없었다. ‘나 안 춥거든?’그리고 이 두 남정네가 옷을 왜 신경 쓰는지도 이해가 안 됐다.홍지윤의 방은 가장 안쪽에 있었다. 심지안은 이번에 처음으로 여기에 온 것이었다. 그녀는 안에 적지 않은 사람이 있고 다 성연신을 각별히 공손히 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성연신이 악랄한 자본가의 신분 말고 다른 신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녀는 이것이 대략 비밀조직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했다.이와 동시에 고청민도 주
민채린은 ‘어머’하고 놀랐다가 웃으며 물었다.“네가 전에 데리고 다니던 그 여자애?”고청민은 옆에 있는 심지안을 돌아보고 다정하게 대답했다.“맞아.”“제법이네, 너도 이제 원하는 바를 다 이뤘구나. 결혼식은 갈게.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만나봐야 해. 자료 메일로 보내줘, 내가 일단 봐 볼게.”“알았어.”심지안은 대화 내용을 듣지 못했다. 그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어떻게 됐어요? Z가 동의했어요?”“거의 확답입니다.”“정말 고마워요. 당신이 Z의사를 알지 못했으면 홍지윤이라는 실마리가 끊길 뻔했어요. 홍지윤은 죽을 수밖에 없었겠죠.”고청민의 눈썹이 치켜 올려졌다. 한줄기의 차가운 빛이 눈에 서렸다.하수구에서만 살던 쥐가 어떻게 빛을 보겠는가? 그렇게 많은 비밀을 숨겼으니, 홍지윤한테는 죽음만이 답이다.힘겹게 연명하면서 동아줄을 찾다니.그것이, 썩은 동아줄인지도 모르고....오후의 햇빛이 유리창을 넘어 침대 위의 두 사람을 비췄다.변석환은 품속에서 자고 있는 나체의 여인을 보며 뜨거운 어젯밤을 회상했다. 어젯밤 그와 시연이는...변석환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후회하고 자책했다.그는 아직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는데, 참지 못하고 그녀를 안았다.전등을 고치러 온 것뿐이었는데, 색마에 씐 것처럼...그렇게 해서는 안 됐었다.변석환은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설득해 임시연을 받아들여 그들 사이의 진도를 빨리 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이불을 걷고 휘청휘청 걸어가 핸드폰을 끄려 했다.“음, 누가 건거예요?”거의 다 도착했을 때, 임시연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나른하게 물었다.변석환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이불 아래의 섹시한 몸매에 눈이 가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불타올랐다.“제가 봐 볼게요. 이름 대신 영어로 MS라고 되어있어요.”임시연은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빼앗았다.임시연이 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에 변석환은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래
변석환은 영문도 모른 채 그를 상대하지 않고 차를 타고 떠났다.5분 후, 임시연은 잠옷을 입고 나왔다. 그는 자기 딸은 보지도 않은 채 김민수한테 화를 크게 냈다.“전화를 왜 그렇게 쳐대는 거야? 바쁜 일 끝나면 받겠지, 재촉하지 마!”“남자랑 자느라 바빠?”김민수는 굳은 표정이었다. 눈에는 생기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 여자한테 실망할 대로 실망했다.임시연은 살풋이 웃었다.“너랑은 안 자. 질투하지 마.”“홍지윤이 살아있어.”김민수는 그녀와 말을 더 섞고 싶지 않았다. 말을 섞기만 해도 기분이 더러웠다.“무슨 헛소리야?”“돌아가서 비밀조직 사람한테 말해. 고청민도 성연신 어머니의 행방을 알고 있어.”이 말을 내뱉은 후, 김민수는 딸을 안고 성큼성큼 떠났다.임시연은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송석훈을 찾아갔다....세움 그룹, 기획부.“와, 그날 지안 씨 정말 예뻤어요. 피부는 어찌나 하얀지, 동화 속의 공주님 같았어요.”“저도 봤어요, 진짜 아름답더라고요!”“저는 계속 먹기만 해서 못 봤네요. 역시 고급 레스토랑이라 그런지 맛이 예술이더군요!”“어? 방매향 언니는 그날 왜 안 왔어요?”방매향은 고개를 숙이고 고객 자료를 펼쳐보고 있었다. 그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일이 있어 못 갔어요.”“참 아쉽네요.”심지안이 걸어 나와 농담을 던졌다.“방매향 언니는 프로젝트 때문에 고객 만나느라 바빴겠죠. 수석이 그렇게 쉽게 되나요?”방매향은 멈칫하고 그녀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고객 만나러 간 게 아니라 집에 일이 있었어요. 가족이 제일 중요하죠. 일은 2순위고요.”심지안은 공감하고 일어나 사무실로 갔다.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심지안은 집과 회사만 오가며 바쁘게 지냈다.3일 후, 민채린의 답장이 왔다. 오늘 저녁 비행기로 동남아에서 돌아오는데, 옷을 들고 오지 않아 고청민더러 두꺼운 외투를 가져오라고 하는 메일
심지안은 팔짱을 끼고 가죽 재킷을 보며 직원에게 눈짓했다.직원은 바로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재킷을 가져다주었다.“잠깐만요.”임시연이 갑자기 입을 열고 직원을 멈춰 세웠다.“이 옷을 산 사람이 있어요?”직원은 머뭇거렸다.“아직이요. 하지만...”“그럼 제가 살게요. 카드로요.”“그...”직원은 어찌해야할지 몰랐다.심지안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물었다.“제가 고른 걸 꼭 빼앗아야겠어요?”“웃기지도 않네요. 제가 마침 이 옷이 마음에 들어서요. 게다가 심지안 씨는 이 옷이 안 어울릴 것 같네요.”임시연이 허리를 곧게 펴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됐어요. 그럼 가져가요. 내가 주는 거라고 생각해요.”심지안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임시연을 깔보면서 나른한 어투로 얘기했다. 임시연은 표정이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아현은 큰 소리로 싸우기 시작했다.“무슨 소리예요? 임시연 씨는 곧 우리 왕실로 시집올 사람이에요. 당신은 시연 씨와 싸울 자격도 없어요!”“누구시죠?”정아현은 턱을 치켜들고 소리쳤다.“전 왕실의 사람입니다. 변석환 왕자님이 임시연 씨를 보호하라고 보낸 사람입니다. 그러니 임시연 씨를 괴롭힐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마세요.”심지안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아... 왕실의 고용인이군요?”“이... 이...”정아현은 화가 나서 심지안을 노려보며 소리쳤다.“고용인 따위가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는 왕자님의 운전기사로 10여 년을 일했어요. 거의 가족이라고요.”“쯧, 그저 시녀라고 하면 되잖아요.”심지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김슬비보다도 못한 사람이었다.임시연은 쇼핑몰 입구를 훑어보더니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시간을 맞춰 심지안에게 얘기했다.“지안 씨. 그런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지 말아요. 지금 사회에는 계급의 비천이 없으니까요.”정아현은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임시연 씨, 저를 위해 나서주다니 감사합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어울리지 말아요. 얼른 직원에게 얘기해 가죽 재킷을 달라고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