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 뒤, 녹음기의 내용이 들려왔다.성연신은 심지안을 줄곧 무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은 두근두근 거렸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처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그는 도도한 사람이었지만 몇 년 전에 그녀와 진현수를 오해하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 일로 그녀는 상처가 컸다. 그는 자존심을 굽히고 사과를 해야만 했다.하지만 심지안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무표정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내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죠?"그녀는 주인공이다. 그녀보다 더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성연신에게는 진실이었을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아 했다.성연신은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말하려다가 말을 삼켰다."난...""심지안 씨, 계세요? 일 때문에 지안 씨를 찾아봬야 할 것 같아요."두 사람의 대화를 끊고 장현진이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심지안은 성연신을 보며 가차 없이 그를 내쫓았다."연신 씨가 오늘 여기에 온 이유가 단지 나에게 녹음 파일을 들려주기 위한 거라면 이제 가도 돼요. 저 일해야 해요.""제 말 아직 안 끝났어요.""미안한데 난 연신 씨와 얘기를 나누는 것보다 일해서 돈 버는 걸 더 좋아해요."심지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러 갔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장현진을 사무실 안으로 들였다."어제 찍은 동영상 편집이 끝났어요. 수정할 부분이 있는지 한 번 봐주세요.""이런 일은 현진 씨가 번거롭게 직접 올 필요 없이 아랫사람에게 시켜도 돼요.""전 지안 씨와 일하는 게 너무 즐거워요. 몇 번 더 와야 한다고 해도 좋아요."장현진은 심지안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평소 스크린에서 보여줬던 느낌과는 달리 성숙한 남자의 매력이 있었다.심지안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현진 씨처럼 사리가 밝은 사람을 만나게 되어 저도 기쁘네요."참다못한 성연신이 큰 손으로 책상 위의 서류를
심지안이 웃으며 말했다."이해가 안 되나요?"성연신은 화가 나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온몸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며 말했다."난 지안 씨와 잘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더러 우리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는 게 잘못됐나요?""네. 연신 씨 잘못이에요.""생트집 잡지 말아요. 내가 뭘 잘못했어요?"그가 물었다."내가 연신 씨와 얘기 나누고 싶다고 했나요? 아니면 내가 연신 씨가 가져온 녹음 파일을 듣고 싶다고 했나요? 모두 다 연신 씨가 혼자 한 일이잖아요. 난 다시는 그 끔찍했던 날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날 두 번 죽이는 것과 다름없어요."심지안은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맑았던 두 눈이 붉어졌다. 진짜로 화를 내는 것인지 아니면 연기를 하는 것인지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더욱 불쌍해 보였다.성연신은 그녀가 우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어 이내 투항했다."지안 씨, 울지 말아요. 난 그냥 지안 씨에게 해명하고 싶었어요. 지안 씨에게 다시 상처를 주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연신 씨는 너무 이기적이에요. 내 입장은 생각 안 하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은 거잖아요.""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고칠게요."성연신이 진심으로 말했다.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에 사랑이 가득했다.심지안은 그를 밀어내며 거리를 두었다."늦었어요. 난 지금 고청민의 약혼녀예요."그가 해명하고 싶으면 해명하고 결백을 증명하고 싶으면 증명하고, 몇 마디 말로 다른 사람에게 줬던 상처를 지울 수 있겠는가?성연신의 표정이 굳어졌다. 심지안이 자신을 그리 쉽게 용서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청민의 약혼녀'라는 말이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심지안은 그의 표정 변화를 보고 속에서 기쁨이 밀려왔다.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녀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그에게 물었다."진현수가 정말 죽었나요?"성연신이 그녀를 쳐다봤다."죽었어요. 내가 직접 시신을 수습했어요."심지안은 눈살을 찌푸렸다."연신 씨...""내가
고청민은 실눈을 뜬 채 아무런 내색도 없이 눈앞에 있는 장현진을 살펴봤다."알려줘서 고마워요.""아니에요."고청민은 장현진을 보낸 뒤, 아래층 프런트 데스크를 찾아가 물었다. 성연신이 진짜로 왔다는 사실을 듣고 그는 경비원에게 심지안의 사무실로 가서 낯선 사람을 내보내라고 통지했다."그만 말해요. 난 고청민 씨를 믿어요. 그가 진짜로 비밀 조직과 연락을 했다고 하더라도 난 그를 용서할 수 있어요."심지안의 사무실 앞에 도착한 고청민은 안에서 흘러나오는 심지안의 확고한 말을 들었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들어 문을 열었다.사무실 안에는 이곳을 찾은 경비원이 일제히 구석에 서서 머리를 움츠리고 등을 굽힌 채 혼이 난 상태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청민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성연신 씨,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했어요. 성연신 씨와 지안 씨는 이미 끝난 사이에요. 왜 자신에게 마지막 체면까지 남기지 않는 거죠?"성연신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나와 지안 씨가 어떻게 헤어졌는지 고청민 씨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고청민 씨가 했던 일들을 내가 모조리 파헤칠 거예요. 급해 마요."고청민은 틀림없이 한 가지 일에만 참여하지 않았을 거다. 마지막 카드는 남겨뒀다가 맨 마지막에 오픈해야 한다.홍지윤은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웠다. 그녀가 알려준 사실은 너무 약했다.하지만 성연신은 그녀의 입을 열 방법이 있었다.책상 위에 놓여 있는 녹음기를 본 고청민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내가 들어봐도 돼요?"심지안이 멈칫하다가 대답했다."네."녹음기 안의 내용을 다 들은 고청민은 마음이 놓였다.아이에 관한 일이 아니라면 그는 웬만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하지만 심지안은 그보다 한발 빨랐다."예전 일은 다 지나간 일들이니 진짜든 가짜든 난 청민 씨에게 화를 내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나에게 숨기는 일이 없으면 돼요."그녀는 온화하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너그러운 누나처럼 마치 마음에
제경의 한 고급 양로원.고청민과 심지안은 책임자를 찾아갔다."안녕하세요. 전화로 연락드린 사람입니다.""고청민 씨 맞으시죠? 이쪽으로 오세요."담당자는 바로 그가 이곳에 온 의도를 깨닫고 두 사람을 양로원의 공공 휴게소로 데리고 갔다.책임자는 멀지 않은 곳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갈색 재킷을 입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 찾는 사람입니다."심지안은 그 노인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대략 6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거의 온 머리가 백발이었다. 그는 활력이 넘치고 상냥하며 자상해 보였지만 눈에는 총명함이 숨어있었다.고청민은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저분은 예전에 황실을 위해 일했던 사람이었어요.""지금은요?""몇 년 동안 나타나지 않은 거로 보아 지금은 아마 퇴직한 것 같아요.""얘기 나눠볼 수 있을까요?""그럼요."고청민이 책임자에게 말했다."저분을 불러줄 수 있을까요? 조용한 곳이 필요해요."바둑실.박만호가 책임자를 따라 들어왔다. 고청민과 심지안을 보는 그의 눈빛에 의심이 스쳐 지나갔다."그럼 얘기 나누세요. 전 이만 나가볼게요."책임자가 떠나가 박만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두 분은 누구시죠?""안녕하세요. 박만호 씨, 우린 세움 주얼리의 사람입니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사실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고청민은 얼굴에 옅은 웃음을 띠며 친절하게 한 손을 내밀었지만, 박만호는 그를 흘겨보며 의자에 앉아 계속 그들을 경계했다."익숙한 분이 아니라서."심지안과 고청민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그의 태도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바로 어머니가 남긴 시계를 꺼내 바둑판에 올려놓았다."박만호 씨가 구매하신 시계가 맞나요?"시계를 본 박만호의 동공이 작아졌다. 그는 이내 고개를 들어 심지안을 쳐다봤다."당신 누구예요?"심지안이 차갑게 말했다."난 성민하의 딸이에요. 이 시계를 당신이 우리 어머니에게 준 게 맞나요?""아니요."박만호는 무의식적으로 부정했다. 그는 멈칫하더니 빠르게 말했다."잠깐만요
넥타이를 매고 있던 변요석은 누군가 급히 위층으로 뛰어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내밀어 바라보았다."변요석 씨, 급한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급하게 왔어요? 개한테 물렸어요?""진짜 개한테 물렸으면 좋겠네요."박만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부인분은 아직 집에 계시나요?""없으니까 할 말 있으면 하세요."변요석이 말했다. 줄곧 시원시원했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알 수 없었다."오늘 나를 찾아온 사람이 나에게 이걸 줬어요."박만호는 시계를 변요석에게 보여줬다."내가 잘 살펴보았는데 분명히 요석 씨가 그때 구매했던 그 시계예요."구매 당시 변요석이 나타나지 않아 박만호가 자신의 이름을 등록해 시계를 구매했었다. 그래서 지금 심지안을 오해하게 했다.그러나 이것도 괜찮았다. 그는 한평생 독신으로 살아왔기에 두려운 것이 없었지만 변요석은 달랐다. 그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도 지금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었다.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것이었다.변요석은 박만호의 손에 들려있는 시계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그녀의 딸이 맞아?""십중팔구예요.""걔한테는 뭐라고 말했어요?"박만호를 코를 만지작거렸다."요석 씨를 속이려 할 수 있다고 판단해 걔한테는 이 시계의 주인이 바로 나라고 말했어요.""그랬더니 무슨 반응이었어요?""흥분하면서 어떠한 보상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성민하 씨가 몇 년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면서 생전에 잘 지내지 못하셨다고 했어요."변요석은 어두운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어요.""변요석 씨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계략에 빠진 거잖아요. 변요석 씨는 그녀를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그녀가 거절했었죠.""성민하의 딸아이의 자료를 내게 줘요."박만호는 뭔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변요석 씨 설마 그 생각을...""내가 그녀에게 빚진 거예요."
햇빛이 변요석의 얼굴을 비췄다. 성연신은 변요석의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물었다."다른 것을 발견했나요?""아니에요. 저희 집안일이에요.""송준이 당신 딸과 만나기 시작했어요?""모르겠어요. 내가 요즘 다른 일로 좀 바빠요. 하지만 그녀에게 잘 알아듣게 말을 해뒀어요."변요석은 지금 바로 핸드폰 안의 자료를 열어보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성연신의 어깨를 두드렸다."전처를 포기하고 내 딸과 만나보는 게 어때요?"'비록 두 번째 결혼이지만, 이 녀석은 각 방면에서 모두 우수해.'두 사람이 진짜로 만난다고 해도 그의 딸도 손해 볼 게 없었다.성연신은 멈칫하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요석 삼촌도 아시다시피 내 마음속에는 그녀밖에 없어요."그의 말을 들은 변요석은 굳은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에 성연신은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열어보니 핸드폰 화면에 짧지만, 감격스러운 말이 보였다.「성 대표님, 할아버지께서 깨어날 기미가 보입니다. 늦어도 내일이면 깨어날 것 같습니다.」리조트 주주들에게는 단톡방이 있었다. 다음날 다른 몇 명의 소액 주주들이 잇달아 그룹에서 탈퇴했다는 소식을 발견하고 그는 수상해하며 전화를 걸어 물었다."고 대표님, 죄송해요. 우리 주식을 성 대표님께 팔았어요. 그가 10배의 가격으로 인수를 한다고 해서 유혹을 거절할 수 없었어요. 청민 씨도 작게 장사를 해서 먹고사는 우리를 이해해 주길 바라요."고청민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여러 차례 찾아와서 나에게 애걸복걸하기에 주식을 팔았는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팔았다고요? 진짜 이익만 추구하는 장사꾼들이네요.""고 대표님 이렇게 안 좋게 말하지 마세요. 고 대표님은 자산도 많고 먹고 마시는 걱정이 없겠지만 우리는 달라요.""알겠어요. 당신들이 주동적으로 협력을 끝낸 이상 앞으로 성씨 가문과 관련된 어떤 일도 협력할 필요가 없겠어요."말을 마친 그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끊었다.심지안도 옆에서 대충 내용을 들었다.
자료 속의 여자아이는 어깨까지 오는 짧은 머리에 이목구비가 뚜렷했으며 늘씬한 몸매에 맑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안나는 사진 속의 여자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남편이 젊었을 때 함께 했던 여자가 얼마나 예뻤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몇 살이에요? 시집은 갔어요?"변요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어떻게 성연신의 전처일 수가 있지? 심지안이 성민하의 딸이라니.'"여보?"안나가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변요석은 마치 목구멍에 메마른 솜이 걸린 것처럼 매우 괴로웠다."난 이 아이를 알고 있어요."안나가 멈칫하며 물었다."어떻게 알게 됐어요?"변요석은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내가 천천히 말해줄게요."성씨 가문의 대저택.성우주는 혼수상태에 빠져 침대에 누워 있는 성수광을 뚫어지게 바라봤다."아빠, 증조할아버지는 대체 언제 깨어날까요?"그는 증조할아버지가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했다.성연신은 사람에게 사무용 책상을 방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업무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늦어도 내일 깨어나신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잖아.""내일에 깨어나요? 너무 늦어요..."성우주가 시무룩해하며 말했다."넌 내일 학교 가야지. 일찍 가서 자. 내일 학교 끝나고 돌아오며 할아버지께서 아마 깨어나 계실 거야."성우주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아빠 또 까먹으셨어요? 저 내일 학교 안 가잖아요. 선생님께서 내일 가정 방문 올 거예요."성연신이 하려던 일을 멈추고 말했다."잘됐네. 나도 낼 시간 있어.""하지만 선생님께서 가정 방문할 때 부모님 두 분 모두 계셔야 한다고 했어요."그는 머리를 들고 성우주를 쳐다봤다."우리 집은 특수한 상황이니 선생님보고 이해하시라고 해."임시연은 최근 나타나지 않았다. 성우주를 찾아오지도 않았기에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내일 가정
성연신이 나왔을 때 심지안은 마침 차를 주차했다.서로 눈이 마주쳤고 남자는 봉황처럼 생긴 눈동자로 심지안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두 사람은 머리 한 개 정도의 키 차이가 났다. 심지안도 5년 동안 갈고 닦은 게 있어서인지 기세 면에서 성연신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그는 성연신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할아버지 보러 왔어요. 그리고 리조트에 관해서도 물어볼 말이 있어요."그녀의 대답은 성연신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매혹적으로 웃었다. 마치 목적을 달성한 여우 같았다."네, 안으로 들어와요."심지안은 거들먹거리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서백호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성우주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까만 눈동자에 빛이 가득했다."아빠, 고모는 내가 불러서 왔어요.""알고 있어. 어떤 보상을 원하지?"그는 진지하게 생각했다."난 나를 사랑하는 엄마를 갖고 싶어요."그는 용돈, 장난감 자동차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일하게 부족한 게 부드러운 엄마가 없는 거였다.성연신은 입술을 오므리고 큰 손으로 성우주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있을 거야. 너를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노력할게."심지안은 성수광의 침대 옆에서 30분가량 있었지만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성연신과 먼저 얘기를 나누려고 서재로 향했다. 그때 성우주가 방에서 뛰어나와 심지안의 앞을 가로막고는 불쌍하게 말했다."고모, 나 배고파요.""배고프면 가서 밥 먹어. 집에 도우미들도 많잖아.""전 고모가 해준 밥을 먹고 싶어요. 아빠가 그러는 데, 고모가 하는 음식이 정말 맛있다고 했어요. 5성급 호텔 셰프보다 더 맛있게 한다고 하셨어요."성우주가 작은 얼굴로 솔직하게 칭찬했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심지안이 눈썹을 높이 치켜세웠다."그래? 그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닐 텐데.""입으로 말하지 않는 건 마음에 모두 담아 두었기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