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신은 심지안을 내려다봤다. 그는 오정연의 체면을 봐주었는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심지안은 얼마나 오래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모두 가고 나서도 그녀는 저려오는 다리를 만지며 계속 꿇고 앉아 있었다.이 층.성수광은 창문으로 아래층에 있는 심지안을 보고는 가슴 아파하며 말했다.“아휴, 빨리 재더러 들어가서 쉬라고 해. 저렇게 오래 꿇고 앉아 있었는데 몸이 얼마나 힘들까.”서백호는 바로 심지안에게로 달려가서 말했다.“심지안 씨, 날도 이미 어두워졌으니 빨리 돌아가세요. 밤이 되면 추워요.”서백호가 자상하게 그녀를 부축하여 일으켜 주려 했으나 심지안은 고집스럽게 말했다.“저는 여기서 할아버지와 좀 더 있을게요.”“이러지 마세요. 아직 볼 날이 많은... 아니, 아니. 내 말은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말이에요. 앞으로 매년 추석에 할아버지를 보러 오면 매우 만족해하실 거예요.”“백호 아저씨 저 그냥 내버려두세요. 저 여기에 조금만 더 있을게요.”그는 심지안의 확고한 모습을 보고는 눈에 기쁨과 위안이 스쳐 지나갔다. 심지안이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할아버지.”슬픈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서백호는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더니 이내 눈빛이 변했다.“여기에 어떻게 들어왔어요?”임시연은 검은색의 긴 치마를 입고 목에는 흰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우아하면서도 차가웠다.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는지 얼굴의 붓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고 찢어진 곳이 빨개져 있는 것을 아직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연신 씨가 들어와도 된다고 했어요.”서백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혐오하는 표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오레오를 데려와요.”뒤에서 따라오던 성연신이 분부하면서 임시연을 보고 말했다.“오레오를 다 보면 정욱이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난 남아서 할아버지 옆을 지키고 싶어.”성연신은 한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여자를 흘겨보며 일부러 부드럽게 말했다.
서백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임시연을 쳐다보다가 심지안을 쳐다봤다.“무슨 일 있었어요?”임시연이 심지안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할아버지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했는데 심지안 씨가 못 보게 하면서 나를 밀었어요... 백호 아저씨, 나는 지안 씨를 탓하지 않아요. 지안 씨가 지금 성연이와 다투어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기에 나는 다 이해해요.”심지안은 심신이 너무 피곤했다. 그녀는 임시연과 말다툼을 할 힘도 없어 묵묵히 화로에 종이돈을 태웠다.그녀는 서백호가 자신을 도와 말을 하기를 바라지 않았다.많은 사람의 눈에 그녀의 뱃속 아이는 성연신의 애가 아니었을 테니까.“틀린 말은 아니네요.”서백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한가지 잘 못 한 게 있어요.”임시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뭘요?”“심지안 씨가 도련님과 다툰 것을 아는 사람이 왜 그들 사이를 방해해요? 이 기회에 둘 사이에 끼어들어 어떻게 해보려고요?”“난...”임시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재빨리 해명하려 하였으나 서백호는 들어주지 않았다.“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런 생각하지도 마세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 전에 유언을 남기셨어요. 그중 하나가 임시연 씨를 성씨 가문에 들이지 않는 거예요. 알아서 하세요.”말을 마친 그는 오레오의 목줄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여기 이 강아지만이 시연 씨와 관계가 있어요. 다 보시고 나면 가세요.”임시연은 화가 났다. ‘늙은 영감 옆에 있는 사람도 영감 못지않게 얄밉네.’그녀는 배를 만지며 나중에 성연신과 결혼하면 서백호를 당장 내쫓으리라 마음먹었다.지금, 이 상황에 아직도 자신의 편에 서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심지안은 감동한 채 서백호를 바라봤다.임시연이 오레오를 보러 왔다는 말은 사실 핑계였다. 그녀는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아 돌아가려고 했다.이때, 이 층에서 연기를 보고 있던 성연신이 임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밥 먹고 가.”안에서는 밖이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방음도 잘 되는 창문이었다
심지안은 임시연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보면 욕을 하고 싶었다.“아니에요. 백호 아저씨, 전 배고프지 않아요.”“함께 먹어요. 밤에도 계속 할아버지 옆을 지켜야죠.”성연신이 차갑게 말했다.“연신아, 나도 할아버지 옆을 지키고 싶어. 효도하고 싶어.”임시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그가 동의해 주기를 바랐다.“내가 말했지. 넌 그냥 배속 아기나 잘 돌봐. 다른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이런 일은 지안 씨가 하면 돼.”임시연의 얼굴에 기쁨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며 말했다.“알았어. 그럼 난 네 말 들을게.”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 여자를 쳐다보며 명령했다.“백호 아저씨, 지안 씨를 데리고 올라가세요.”“저 안 먹을래요. 저들의 구역질 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요. 제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어요?”심지안은 고개를 들고 주먹을 꽉 쥐면서 혐오하는 눈빛으로 성연신을 쳐다봤다.‘구역질 나는 얼굴이라고?’성연신은 비웃으며 몸을 숙여 그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지안 씨가 무슨 자격으로 날 더러워하죠? 지안 씨야말로 더러운 사람이에요. 음탕하게 바람이나 피는 여자 주제에!”심지안은 멍하니 눈앞의 잘생긴 남자를 쳐다봤다. 문득 그 남자가 낯설게 느껴졌다.이렇게 막무가내인 적이 몇 번이나 되었다.그녀는 그가 고칠 거라고 믿고 있었고 자신을 믿어 주길 바랐다.하지만 그녀가 틀렸다.‘내가 그를 잘 못 본 건가? 최근 나에게 부드럽게 대하며 고개를 숙인 것도 다 아이 때문인 건가? 그래서 나와 헤어지려 했던 사람이 다시 나를 붙잡은 건가?’성연신은 그런 그녀의 눈빛이 못마땅했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왜 나를 쳐다봐요?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사실... 사실이라?”심지안은 너무 괴롭고 웃겼다. 그녀의 하얀 얼굴에 실망이 감돌았다.그녀와 진현수는 따로 만난 적도 몇 번밖에 없었다. 연락도 몇 번밖에 주고받지 않았다. 연락을 제일 많이 주고받았을 때는 부용 그룹
“이제 가. 정욱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난 너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어.”“그럴 필요 없어.”임시연은 이를 꽉 깨물며 성연신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불러온 배에 올려놓았다.성연신은 무의식중에 재빨리 손을 빼내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쫓았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리고 정욱은 네 운전기사가 아니야. 널 기다려 줄 시간 없어.”임시연이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난 그냥 너와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게 하고 싶어서 그랬어. 화내지 마. 난 그럼 가볼게.”그녀가 가고 성연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다가 커튼을 열었다. 아래층에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그는 슬리퍼를 신고 창문에 서서 1층에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그녀는 꿇고 있는 게 힘들었는지 의자를 가져와 앉아 있었다.밤이 깊어 날씨도 쌀쌀해졌다. 그녀는 걸상에 앉은 채 관을 쳐다보며 말을 하고 있었다.그녀의 빨갛고 윤기 나던 입술이 지금은 말라서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추위를 막기에는 부족해 보였다.성연신의 굳은 얼굴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 아파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젠장.”성수광도 이 장면을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백호가 심지안에게 담요와 작은 난로를 가져다줬다.담요와 난로가 있으니 심지안의 몸은 어느새 온기를 되찾았다.기나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성연신은 심지안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그녀의 출입을 금지했다.어제 신현아가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제지하지 않아서인지 오늘 그녀를 지키는 사람은 낯선 사람이었다.“성연신 씨 저에게 낙태를 강요하는 것은 제가 연신 씨 옆에 남길 바라서인가요?”심지안은 남자가 병실을 나서기 직전에 물음을 던졌다.성연신은 멈칫하더니 가볍게 웃었다.“얼굴이 정말 두껍네요.”“그럼 왜 저에게 낙태를 강요하죠?”“난 그냥 애새끼가 태어나는 게 싫어요. 무슨 문제 있어요?”심지안은
“아니에요…”심지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연신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갔다.심지안은 코끝이 시큰거렸다. 억울함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어제는 하마터면 양아치들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했고 또 아이도 잃을 뻔했다.그녀는 다쳤고 임신 기간에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성연신은 그녀에게 상처만 줬다.심지안은 가볍게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아가, 우린 아빠 필요 없어. 괜찮지? …”진유진은 심지안이 건네준 쪽지에 적힌 대로 고청민을 찾으러 세움 그룹으로 갔다.“유진 씨 말은 지안 씨는 낙태 수술을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건가요?”“네.”진유진은 그가 도와주려 하지 않을까 봐 불쌍한척하며 울며불며 말했다.“성연신 그 X신 같은 놈이 지안이를 병원에 가뒀어요. 밖에 돌아다니지도 못해요. 지안이에게도 잘해주지 않아요.”“알았어요.”고청민은 커피를 마시며 평온하게 대답했다.그의 대답에 진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알았다고? 도대체 도와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심지안 씨에게 말해요. 내가 방법을 생각해 그녀를 외국으로 데려갈게요. 국내에서는 성연신의 세력이 너무 커서 제가 자신이 없어요.”그녀는 흥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외국도 괜찮아요. 성연신 그 나쁜 놈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외국이 아니라 달나라라도 괜찮아요.”3일째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러 병원에 가지 않았다.클럽 안. 손남영과 장학수는 서로 눈빛을 마주치며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난 연신이가 처음으로 취하는 모습을 봤어.”“나도.”“얼굴이 다 빨개졌네.”“그러니까. 결혼사진만 몇 시간째 들여다보고 있어.”“그러게 말이야. 결혼사진이 정말 제때 배달됐네.”오후에 클럽에 금방 들어왔을 때 사진관 사장님이 보내오셨다.성연신은 원래 결혼사진을 구석에 놓고 쳐다보지도 않았었는데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결혼사진을 들고 와서 책상 가운데에 올려놨다.“휴, 야, 지안 씨가 대체 왜 그랬을까? 성연이를 놔두고 왜 진현수와 바람이 났을까?”“내가
성연신이 술에 취해서도 마음속으로 심지안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임시연은 생각지도 못했다.질투의 불꽃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자라났다. 그녀는 악독한 생각이 떠올랐다.그녀는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서 사에서 내리기 전에 임시연은 뒷좌석에 있는 결혼사진을 보았다.그녀는 옆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고는 조용히 결혼사진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재빨리 결혼사진을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심지안은 이미 자고 있었다. 그녀를 지키는 사람도 문밖에 간의 침대를 펴고 그녀에게서 한시도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임시연이 성연신을 부축하며 병원으로 들어왔다.문밖에서 지키던 여자는 차에서 내리는 그들을 발견하고는 얼른 일어나서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성연신 씨...”“연신이가 많이 마셨어요. 간호사에게 말해서 남아 있는 병실 하나 내어 주세요.”“아, 네. 알겠습니다.”임시연은 눈을 굴리더니 이내 손으로 병실을 가리켰다.“옆방이 좋겠네요. 가까우면 좋잖아요. 무슨 일 있으면 부르기도 편하고.”“네. 알겠습니다.”문밖에서 지키던 여자는 얼른 옆 방의 문을 열고 두 사람을 병실 안으로 들여보냈다.성연신은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에서 소독수 냄새를 맡고는 심지안 옆으로 간 줄 알았다. 마음속에서 전에 없는 애틋함이 솟구쳤다.그는 마음을 내려놓고 잠에 빠져들었다.병실 안에 있던 심지안은 어렴풋이 임시연의 목소리를 들었다.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는 일어나서 자세히 들었다.임시연의 목소리가 맞았다.‘저 여자기 이 밤중에 여긴 왜 왔지?’심지안은 무슨 일인지 문을 열고 쳐다보려 했으나 문 앞에서 지키던 사람이 때마침 돌아왔다.“심지안 씨, 어디 가시게요?”심지안은 담담하게 말했다.“화장실에 가려고요.”“네. 제가 함께 가드릴게요.”옆 방을 지날 때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심지안은 임시연과 성연신이 한 침대에서 자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각도에 봤을 때 임시연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바로 보였다.심지안은 머
”쌤통 아니에요? 그렇게 멋있는 남편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잘못이지 다른 사람 욕할 게 뭐 있겠어요.”“근데 결혼사진 엄청 예쁘대요. 선남선녀래요. 아주 비싸 보였는데 아깝죠. 뭐.”“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을 아쉬워하지 마세요.”“네. 그만 말해요. 성 대표님이 여자가 아쉬운 사람도 아니고. 어제도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왔더라고요...”간호사들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안은 괜찮은 줄 알았지만, 심장이 마비된 것처럼 아파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베개는 흠뻑 젖어버렸다.서서히 날이 밝아왔다.성연신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인지 일어나니 머리가 심하게 아팠다.“꿀물 마셔. 숙취 해소에 좋대.”임시연이 꿀물을 그에게 건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성연신은 꿀물을 마시지 않고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여기 왜 있어?”“어젯밤에 널 보러 갔었어. 네가 많이 취한 것 같았어. 결혼사진을 들고 비틀거리면서 병원으로 심지안 찾으러 간다고 했어.”임시연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래서 네가 술에 취했는데 운전을 하게 놔둘 순 없어서 내가 널 여기 데려왔어. 병원에 오자마자 넌 잠들었고.”성연신은 후회하며 머리를 쳤다.‘빌어먹을. 멍청한 여자가 도대체 내게 뭘 먹였기에 내가 술에 취해서 필름 끊긴 상태에서도 그녀를 잊지 않았을까.’“너도 온 밤 여기에 있었어?”“응...”임시연은 손으로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난 여기 앉아 있었어. 침대에는 올라가지 않았어.”성연신은 미간을 만지작거렸다.“빨리 가서 잠 좀 자.”“그래... 연신아 너 심지안 씨와 찍은 결혼사진 가지고 올라온 거야?”임시연이 그를 시험하며 물었다.“결혼사진?”그는 머리를 흔들었다.성연신은 결혼사진을 클럽에서 한쪽에 두었다가 나중에 가지고 와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임시연이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어젯밤에 네가 결혼사진을 버렸어... 병원에 있는 주차장 쓰레기통에 버렸어. 내가 말려봤지만, 소용이 없었어. 내 잘못이야.
“저를요? 전 잘못 한 게 없는데요?”진유진이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절친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는 목의 핏줄을 세우며 반박했다.성연신은 무심하게 그녀에게 죄명을 씌웠다.“공공장소의 질서를 어지럽히면 안 되죠.”“제가요?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에요. 그렇게 아무 말이나 막 하시면 안 되죠.”그는 거만하게 입술을 치켜세웠다.“기다려보죠.”십 분 뒤.경찰복을 입은 남자들이 병원으로 들어왔다. 심지안은 한눈에 걸어오는 사람이 오지석인 것을 알아봤다.“빨리 가. 저기 오는 경찰이 연신 씨 친척이야.”진유진은 당황했지만 달아나지 않았다. 심지안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자신이 아무것도 안 하면 더 힘들어질 게 아닌가.오지석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다.진유진이 경찰을 보고는 고발했다.“성연신이 제 친구를 감금했어요.”대충 상황을 눈치챈 오지석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는 옆에 있는 신입 동료를 툭 치며 말했다.“처음 나왔으니 주동권을 드릴게요.”멈칫거리다가 그는 동료 귀에 대고 말했다.“난처하게 만들지 말고 데리고 나가세요.”말을 마친 오지석은 성연신과 대화를 나눴다.갓 입사한 젊은 신입은 그와 성연신이 아는 사이인 것을 보고는 오지석의 말을 반대로 들었다.체면을 생각해서 바로 말하지 않고 돌려 말한다고 생각했다. 난처하게 만들지 말란 말을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란 말로 오해했다.오지석은 임시연이 들을 수 없게 성연신을 한쪽으로 끌고 갔다.“오늘 출근해서 전화 한 통을 받았어. 송준이 곧 풀려난대.”지난번에 매복해 있던 오지석이 나타나자 송준이 그를 발로 걷어찼고 나머지 사람들이 즉시 달려 나와 그를 잡아가서 법에 따라 감옥에 처넣었었다.성연신은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그에게 교훈을 주는 거로 됐어.”한 번에 송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그리고 앞으로 나를 출동시키지 않으면 안 돼? 우리는 친척이라서 공공장소에서는 피해야 한다고.”오지석이 불평하며 말했다. 자기 집안일을 처리하는 것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