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신이 비싼 차에서 내려 차 열쇠를 심지안 손에 쥐어주었다.“시도해 봐요.”심지안은 검은 눈을 반짝이며 차를 쳐다보았다. 은백색의 차는 꽤 예쁘게 생겼는데 여자들이 좋아할 스타일이었다.차량 번호판을 보니 조금 기억이 있었다. 아마 억 단위의 번호일 것이다.하지만 그런 돈은 성연신에게 먼지와도 같았다. 입꼬리를 말아 올린 심지안이 새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면서 웃었다.“연신 씨, 고마워요,”성연신은 심지안 뒤의 벽을 손으로 짚었다. 그러자 커다란 그림자가 심지안을 덮었다. 성연신은 부족하다는 듯 물었다.“입으로만요?”심지안은 심장이 펑펑 뛰었다. 커다란 기운에 눌린 기분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다가 결국 성연신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를 했다.성연신의 차갑던 눈에 온기가 돌았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성연신이 얘기했다.“오늘은 내 운전기사를 해요. 내가 조수석에 앉을게요.”심지안은 입을 딱 벌렸다.“이렇게 주얼리 전시회를 간다고요? 가는 데만 반 시간이 걸려요. 목숨이 장난은 아니잖아요. 정말 나를 그렇게 믿어요?”성연신은 이미 조수석에 앉아 시트를 뒤로 약간 젖혔다.“난 지안 씨 거니까, 내 목숨도 지안 씨 거죠.”“손남영 씨가 알려준 거죠?”“어떻게 알았어요?”“항상 독설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달콤한 말을 하니까요.”성연신은 어두운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달콤한 말이 뭐.”성연신은 손남영보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 손남영이 배운 것을 성연신은 더욱 쉽게 마스터 할 수 있다.하지만 예전에는 그런 말들이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었다....심지안은 성연신의 지도하에 거북이 같은 속도로 무사히 전시회에 도착했다.들어서자마자 성연신은 아는 얼굴을 만났다.심지안은 성연신이 자기 일을 볼 수 있도록 놔두고 백스테이지로 가서 메이크업을 받았다. 성연신이 고개를 끄덕였다.“일이 끝나면 전화해요.”“네.”두 사람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걸어가던 심지안은 초
성연신의 시선은 한 번도 심지안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가느다랗게 뜬 눈에는 소유욕이 잔뜩 묻어났다.성연신은 심지안인 예쁘게 생긴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관객의 눈을 다 파버리고 싶었다.심지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에 있는 고청민을 보고 있었다.왜 자신을 초청한 것일까. 심지안의 잘난 모습을 보라고?고청민은 그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임시연을 보고 입꼬리를 작게 올리더니 백스테이지로 걸어갔다.그리고 임시연은 낯선 번호의 메시지를 받았다.“따라와요.”몇 초간 멈칫거린 임시연이 고청민의 뒤를 따라갔다.복도에서.고청민은 김민수의 핸드폰을 꺼내 웃으며 물었다.“익숙하지 않아요?”임시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리하게 질렸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김민수의 핸드폰이 왜 여기에...!”“주웠으니까요.”임시연은 그 말을 믿지 않고 경계심을 세우고 물었다.“뭘 하고 싶은 거예요?”“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시연 씨가 한 거죠?”“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네요!”“지안 씨와 성연신을 갈라놓으려고 하는 건 상관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지안 씨를 다치게 하면 안 되죠.”임시연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고청민의 말뜻을 알아차렸다.“심지안을 좋아해요?”“그런 건 알 필요 없어요.”“그럼 제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죠?”고청민이 시선을 들어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김민수의 핸드폰을 열어 녹음을 들려주었다.“시연아, 나 너무 추워. 너랑 우리 아기도 빨리 와서 나랑 같이 있자... 시연아...”김민수가 말끝을 늘리자 마치 저승길 동무를 찾는 귀신 같았다. 그 목소리가 텅 빈 복도에서 울려 퍼지니 더욱 무서웠다.파리하게 질린 임시연이 입술을 떨면서 말했다.“날 속일 생각 하지 말아요. 김민수는 진작 죽었어요.”“글쎄요. 사람은 죽었지만 남길 수 있는 것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당신 배 속의 아이라거나.”임시연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그녀는 밖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적이 적었다. 하지만 고청민을 만난 두 번, 모두 다
심지안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심지안은 어쩔 수 없이 그 남자를 따라 나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꿇어앉았다.밖은 정말 아수라장이었다.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때를 틈타 도망쳤고 일부분 사람들은 강도들에 의해 제압되었는데 그중에는 고청민과 신현아도 있었다.신현아는 유일하게 다친 사람이었다. 그녀는 얼굴에도 멍이 들었고 다리에 총상까지 있었다. 아마도 이들과 싸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기도 없는 그녀가 총을 든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제압당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경찰은 협상을 제의할 수밖에 없었다.“지금 당장 차를 준비해. 3분 준다. 1분이 넘어갈 때마다 한 명씩 죽어 나갈 줄 알아!”우두머리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는 총을 심지안의 이마에 대고 으스대며 얘기했다.“성연신에게 얘기해. 현금 100억을 준비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 여자의 머리통이 날아가게 될 거야.”오지석은 그들의 말을 들어주며 일단 차를 준비시키라고 했다.고청민은 억지로 끌려가는 심지안을 보며 갑자기 일어섰다.“그 사람을 놓아줘요. 내가 인질이 될게요. 난 세움의 후계자여서 그 사람보다 더욱 몸값이 비싸요.”심지안은 복잡한 심경으로 고청민을 바라보며 굳어버렸다.이게 무슨 일인가.성연신과 함께 달려온 성동철은 그 말을 듣고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고청민에게 입을 열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옆에서 염라대왕처럼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는 성연신을 보고 말을 할 수 없었다.오지석은 성연신이 충동적으로 행동할까 봐 목소리를 낮추고 얘기했다.“차에 위치추적기를 달 거야. 일단 이 상황부터 모면해야지.”성연신은 대답을 하지않고 심지안만 노려보았다. 담담해 보이는 그였지만 사실 옷이 흠뻑 젖을 만큼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손가락은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남자는 이상한 시선으로 고청민을 쳐다보았다.“너 이 새끼, 죽는 게 안 무서워? 인질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고청민은 몸에 들고 다니는 비수를 만져보고 얘기했다.“무섭지만 다른 사람이 죽
심지안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우두머리는 남자에게 칼을 던져주며 얘기했다.“총알이 바닥났어. 이걸로 처리해.”남자는 칼을 들고 심지안을 향해 걸어갔다.심지안은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대문이 잠겨있으니 도망갈 곳은 없었다.그녀는 큰 소리로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고 했다.“살려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그만 소리 질러. 여기는 사는 사람이 없는 폐가야. 우리 빼고는 사람이 없어.”심지안은 얼음물에 빠진 것 같았다. 아무리 살려달라고 빌어봐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자 눈에는 절망이 가득했다.남자는 예쁘장하게 생긴 심지안을 보며 조금 동정심을 가졌다.“말 좀 들어. 반항하지 말고. 내가 빠르게 단칼에 죽여줄게. 아프지 않을 거야.”심지안은 구석에 놓인 벽돌을 보고 한번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승산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죽기만을 기다릴 수 없었다. 심지안은 남자의 시선 속에서 젖은 눈으로 바닥에 놓인 맥주를 바라보았다.“저기요, 저 맥주라도 마실 수 있게 해주면 안 돼요? 술에 취하면 덜 무서울 것 같아요.”남자는 살짝 멈칫하더니 웃으면서 우두머리를 쳐다보았다.“형님 술에 눈독을 들이는데요?”우두머리는 맥주를 던져주며 얘기했다.“아가씨, 우리를 탓하지는 마. 이게 다 아가씨 운명인 거야. 이것만 다 마시면 죽여줄게.”심지안은 맥주를 가지고 구석으로 갔다.그리고 맥주를 마시는 척하면서 벽돌을 발아래에 깔았다. 그녀는 긴 코트를 입고 발을 가렸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을 보아내지 못했다.맥주를 반병 마신 후, 그녀는 술에 취한 것처럼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남자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앞으로 걸어갔다.심지안은 그와 눈을 마주쳤다. 공포심 뒤로 강렬한 생존 욕구가 일었다.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 그녀의 아기는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느다란 목을 향해 대동맥을 바로 찌르려고 비수를 들었다. 칼이 심지안의 목을 찌르려던 찰
갑자기 최루탄이 남자의 발밑에 떨어졌고 번쩍 빛을 내면서 잠깐 시력을 잃게 만들었다.심지안의 동공이 흔들렸다. 급하게 외투를 벗어 공기를 마시지 않으려고 애쓰며 구조를 기다렸다.쿵.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차가운 손이 그녀를 잡았다.“눈 뜨지 마요. 코와 입은 다 막고 나랑 나가요.”그들은 이미 한 시간 전부터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었다.경거망동할 수 없어서 잠복해 있으면서 적당한 시기를 찾고 있었다.심지안은 놀라면서도 기뻤다. 성연신이 왔다.심지안은 울먹임을 겨우 참으며 얘기했다.“네.”“젠장, 잡아!”우두머리는 심지안의 팔을 꽉 잡았다. 힘이 어찌나 센지, 심지안을 찢어버릴 것만 같았다.심지안을 놓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성연신은 차가운 눈으로 우두머리의 가슴을 발로 차서 멀리 날아가게 만들었다.최루탄 앞에서 강도들은 전투력을 잃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재채기를 멈추지 못했다.방독면을 쓴 경찰들이 들어왔고 강도들을 제압했다. 성연신은 심지안이 이곳에서 너무 많은 가스를 들이킬까 봐 그녀를 안아 차 안으로 데려왔다.“어때요? 어디 불편한 곳 있어요?”고작 네 시간 만에, 심지안은 생사를 오갔다.심지안은 성연신을 보면서 눈물을 터뜨렸다.작은 소리로 울먹이는 것이 아닌, 정말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하는 느낌이었다.심지안은 정말 무서웠다. 다시는 성연신을 만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긴장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오후 내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뜨거운 눈물이 성연신의 팔에 떨어졌고 성연신의 마음 또한 매우 아팠다.한편으로는 심지안이 최루탄 가스를 마신 것이 걱정되었다.“조금만 참아요. 바로 병원부터 가요.”병원이라는 얘기를 들은 심지안은 바로 울음을 멈췄다. 그리고 눈물바다가 된 얼굴로 얘기했다.“싫어요, 병원은 안 갈래요.”병원에 가면 임신한 일이 드러나지 않는가.“꼭 가야 해요. 한번 전체적인 검사를 받아요. 최루탄은 위력이 어마어마하니까...”“가스를 마시지 않았어요.
심지안은 비몽사몽으로 일어났다. 시간을 보니 오후 두 시였다.성연신은 이미 깨나서 옷을 바꿔입었다. 그는 여유롭게 단추를 잠그며 얘기했다.“세수부터 해요. 화장은 하지 않아도 돼요. 아래에서 꽤 오래 기다리셨어요.”“네.”물로 세수를 간단히 한 심지안은 피곤함을 던지고 정신을 차렸다.거울을 보니 눈가가 조금 붉었다.아마도 어제 너무 울어서 그런 것 같았다.정원의 다실.고청민은 간단하게 흰 티에 청바지를 입었다. 어제 올렸던 머리는 또 그의 이마를 덮고 있었다. 마치 잘못한 것이 있는 아이 같았다.윗층에서 내려온 성연신은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코웃음을 쳤다.불쌍한 척은.“지안아, 너 괜찮은 거냐?”성수광이 먼저 입을 열고 물었다.경찰 측에서는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 일단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 성동철이 오늘 찾아오지 않았다면 성수광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를 것이었다.“다행히 경찰이랑 연신 씨가 제때 와줘서 아무 일도 없었어요.”심지안이 말을 마치고 성동철에게 인사를 했다.“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네요.”성동철은 손을 저으며 숙연하게 얘기했다.“어제는 세움의 보안이 철저하지 못한 탓이야. 많은 사람들이 이 때문에 피해를 보았으니 오늘 내가 청민이를 데리고 사죄하러 온 거다.”성동철은 사람의 목숨을 두고 자존심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자존심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목숨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고청민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의 눈에는 죄책감이 가득 엿보였다. 90도로 허리를 숙이고 무거운 말투로 진지하게 얘기했다.“성연신 씨, 지안 씨, 죄송합니다.”심지안은 고청민을 부축하고 싶었지만 성연신은 그런 심지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앞을 막아 나서며 웃을락 말락 하며 얘기했다.“괜찮습니다. 이런 돌발상황은 피할 수 없죠. 그저 어제 왜 인질을 바꾸려고 했는지 궁금하네요.”성수광의 눈이 반짝였다. 이런 일도 있다니?“아직 어려서 일 처리가 성숙하지 못한 탓이다. 내가 이미 타일러 놓았어.”성동
고청민은 성연신의 눈을 마주 보았다. 형용하기 어려운 눈빛이었다.그리고 고청민은 또 심지안에게 사과했다.심지안은 괜찮았다. 고청민의 행동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심지안은 아무것도 없는 일반인이다. 성씨 가문의 얼굴을 봐서 심지안을 구해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성수광은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며 얘기했다.“됐어, 이 일이 청민이의 탓도 아니고, 이번 전시회의 손해도 만만치 않을 거야. 세움의 명예도 추실 되었고.”고청민은 말로는 성씨 가문이 세움을 보살펴 주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성원 그룹은 이미 몇 년간 손해를 보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 도울 여유가 없었다.그저 성동철 네 성씨 가문이 그들을 받들어 주고 있을 뿐이다.성동철과 고청민의 성의를 보고 그들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성수광은 고청민과 성동철에게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두 노인네는 올라가서 장기를 두기로 했고 남은 사람들은 거실에서 얘기를 나눴다.성연신은 어찌 된 일인지, 손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심지안에게 포도를 먹여달라, 물을 먹여달라 하면서 고청민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고청민은 다른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냥 앉아있는 게 온순한 양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연이 귀부인들을 데리고 들어왔다.아마도 오지석한테서 소식을 듣고 심지안을 보러 온 모양이었다.다른 사람도 비슷한 목적으로 손에 선물을 들고 왔다.사람이 많아지니 말도 많아졌다.거실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고청민은 웃으면서 성연신에게 얘기했다.“우리도 올라가서 장기나 둘까요?”성연신은 의미심장하게 고청민을 보더니 얘기했다.“그래요.”백연은 성연신이 장기를 두러 들어가는 것을 보고 온화한 표정을 지우고 심지안에게 얘기했다.“요즘 너무 나대는 것 같네요. 좀 숨죽이고 살아요. 무슨 전시회에 참가하고...”“그래요, 할 일이 없으면 집에서 내조나 잘해요. 남편 내조를 잘하는 게 여자의 의무에요.”“아가씨, 우리가 뭐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백연은 벌컥 화를 냈다. “몇 마디 한 것 가지고 지금 날 이리 모욕하는 거예요?”“모욕한 적 없어요. 그냥 숙모님의 말에 따라 해본 소리였는데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건지?”심지안은 눈빛이 차갑게 변하였다. “그래요. 두 사람이 아직 재결합도 하기 전인데 이리 날 무시하는 걸 보면 앞으로 심지안 씨는 아버님조차 안중에 두지 않을 것 같군요.”“그럼요. 안중에 두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두는 거죠. 마음속 깊이 존중할 거예요.”심지안의 말에 백연은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이 심지안의 말싸움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안 백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임시연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겠어. 눈앞의 이 여자는 자격이 없어.’저녁 식단은 풍성했다. 심지안은 배부르게 먹고 나니 졸음이 막 몰려왔다. 그 모습을 본 성수광은 그녀에게 일찍 위층으로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곧 잠이 들려고 할 때,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성연신일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는 못 들은 척하고 계속해서 잠을 청하였다.그러나 성연신은 신발을 벗고 침대에 올라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좋은 향기가 코끝을 감쌌고 심지안은 따뜻하고 안정감을 주는 그의 가슴을 애틋하게 파고들었다.그는 그녀의 볼에 몇 번이나 뽀뽀하고는 더는 인기척이 없었다. 심지안은 여전히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정신이 조금 든 것 같았다. 아무리 잠을 청해봐도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을 떠보니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에는 절제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멍해 있던 그녀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요?”갑자기 그가 그녀의 허리에 있던 손을 천천히 그녀의 가슴으로 가져가더니 이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 보여요.”심지안은 고개를 숙였다. 잠옷의 네크라인이 너무 큰 데다 옆으로 누워있는 바람에 가슴이 훤히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장면은 너무 야해 보였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심지안은 그의 손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