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세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냉철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얼굴에 점잖은 명품을 입고 있었는데 목에 건 마노 비취는 한눈에 봐도 쉬이 구할 수 없는 진귀한 보석이었다.단번에 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신분을 알아챈 심연아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는 연예계 가장 큰 자본을 움켜쥐고 있는 거장이었는데 그의 아래에 몇 개나 되는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현재 사랑을 받고 있는 수많은 인기스타들은 모두 그가 발굴하고 데뷔시킨 사람들이었다.저런 대단한 사람이 대체 왜 이런 누추한 곳에 나타났단 말인가.남진영은 심연아를 본 순간 실망감에 휩싸였다.성유진의 딸인데 왜 그녀의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지 못했단 말인가.하지만 눈앞의 이 사람에게 성유진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그의 차갑던 눈동자에 자애로움이 자리 잡았다.“이름이 뭐예요?”“조금 전엔 제가 잘못했어요. 차 수리 비용은 제가 꼭 드리겠습니다.”심연아는 덜컥 겁이 나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괜찮아요. 아가씨한테 돈을 받으려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제가 아는 분이랑 너무 닮아서요.”“제 이름은 심연아입니다...”남진영의 얼굴에 환희가 스쳐 지나갔다. 눈앞의 이 여자아이는 틀림없이 성유진의 딸이다. 당시 성유진은 심씨 가문 망나니 놈에게 시집을 갔으니 말이다.그는 성유진이 살아있을 때 그녀를 보살필 기회를 저버렸으니, 남은 반평생 동안엔 반드시 성유진을 대신해 그녀의 딸을 지켜줄 거라고 다짐했다.남진영은 첫 만남에 하기엔 황당한 말이라는 걸 알지만 자꾸만 피어오르는 성유진에 대한 애틋함 때문에 결국 입 밖으로 내뱉었다.“연아 씨, 내가 보기엔 우리 두 사람은 인연인 것 같아요. 내 양딸이 되어줄래요?”...심지안은 어젯밤 크게 놀란 데다 성연신과 냉전까지 벌인 탓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해 오후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그 모습을 본 경은은 승전이라도 거둔 듯 득의양양한 얼굴로 심
설사 성연신에게 혼나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경은이 노력도 없이 이득을 보게 할 수는 없다!심지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단호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경은은 그녀를 막는 척 쫓아나갔지만, 가만히 서서 엘리베이터가 위층으로 올라가 멈춰 서는 것을 지켜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계획팀으로 돌아왔다.동료 몇 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경은 씨, 지안 씨는 정말 대표님을 뵈러 올라갔어요?”“네. 맞아요. 막지 못하겠더라고요. 절반을 나눠주겠다고까지 했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400만 원 모두 독차지하려나 봐요.”“하... 욕심이 너무 많네요...”...심지안은 성연신의 사무실 앞에 도착한 뒤 문을 두드렸다. 몇 분이 지나도 응답이 없자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성연신에게 업무 보고를 하던 임원들이 그 소리에 모두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심지안은 등등하던 기세가 한풀 꺾여버렸다. 그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쭈뼛거리며 말했다.“계속하세요. 전 밖에서 줄 서 있다가 잠시 뒤에 다시 들어올게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쿵’ 소리와 함께 굳게 문을 닫았다.임원들이 난처한 듯 서로 눈을 마주치다가 고개를 돌려 몰래 성연신의 표정을 살폈다.남자는 몸에 맞춰 재단한 깔끔한 화이트 셔츠와 긴 다리를 돋보이게 해주는 맞춤 정장 바지를 입고 넓은 가죽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그 모습은 웬만한 의류 모델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 아무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자극법이 통한 것이다.몇 분 뒤.임원들이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다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심지안에게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냈다.심지안은 최대한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 뒤에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가슴을 쭉 내민 채 성연신의 앞으로 걸어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경은 씨가 제출한 프로젝트는 제가 작성한 거예요.”성연신이 나른한
심지안이 난처한 얼굴로 정욱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괜찮아요. 난 서서 보면 돼요.”그 말은 즉 이곳은 사무실이고 보는 눈도 있으니 자제하라는 뜻이었다.성연신이 정욱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자 정욱은 곧바로 그 뜻을 알아차렸다.“전 이만 나가볼게요.”“...”심지안은 어이가 없었다.‘됐어. 그냥 앉지 뭐. 어차피 처음도 아니잖아. 무료로 제공되는 푹신한 의자라 생각하면 되지.”그녀는 성연신의 다리에 자리 잡고 앉자마자 돌연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이번엔 벨트로 날 괴롭히지 말아요.”성연신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입 다물어요.”심지안이 입을 삐죽거렸다. 불리하기만 하면 다짜고짜 입을 다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그가 마우스를 누르자 화면에 어젯밤 계획팀 외부를 찍은 CCTV 화면이 나타났다.10시 쯤, 경은은 몰래 계획팀 밖으로 나가 자신이 갖고 온 자물쇠로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경비원들이 순찰을 나간 사이 회사의 모든 전원을 끊어버렸다.어둠 속에서 그녀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핸드폰으로 음악을 재생시켰다. 이어 겁에 질려 소리치는 심지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소한 듯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 모든 과정을 확인한 심지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어젯밤 문밖에 사람이 있다고 느껴졌던 이유가 바로 저것이었다.두 사람은 그저 옅은 경쟁 관계일 뿐, 어떠한 원한도 없다. 심지안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경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성연신이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난 지안 씨를 믿었어요.”이 어리석은 여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른 사람에게 당한다. 자신은 종래로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면서 말이다.난 지안 씨를 믿었어요...심지안은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 가슴 속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파동이 일었다.누군가가 믿어준다는 건 참 뿌듯한 일이다.이렇게 때로는 예쁜 말도 할 줄 안다니까.“이제 경은 씨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에요?”귀신
“네? 무슨 얘기인데요?”“임시연 씨의 존재 때문에 대표님과 반목하지 마세요. 대표님과 임시연 씨는 이미 끝난 사이니까요. 요즘 대표님의 마음속엔 심지안 씨 한 명뿐이에요. 어제 지안 씨와 다툰 것 때문에 오늘 오전 내내 저기압이셨어요. 조금 전 지안 씨가 오고 나서야 다시 기분이 풀렸고요.”그 때문에 정욱도 반나절 동안 자신에게 불똥이라도 튈까 봐 두려워 전전긍긍했다.심지안이 그를 쳐다보았다.정욱은 준수한 오관에 약간 검은 빛이 도는 피부를 갖고 있었는데 사람에게 신뢰를 심어줄 수 있는 외모였다.심지안은 그가 좋은 마음으로 해준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덤덤히 고개를 저었다.“우리는 가짜 결혼을 했다는 거 알잖아요.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우린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쟁취해볼 생각 없어요?”“제가 어떻게요?”“대표님은 지안 씨한테 잘해주잖아요. 기회가 있을 수도 있어요.”심지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사람은 단 한 번도 날 좋아한다고 인정한 적이 없어요. 저도 예전엔 연신 씨의 마음을 얻으려 했었죠. 하지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더라고요.”그녀는 무슨 일이든 명백히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특히 감정적인 부분에선 애매모호한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지안 씨도 대표님은 겉으론 차갑지만 내면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거 알잖아요. 대표님은 지안 씨를 남다르게 생각하고 있어요.”“남다르다는 거.. 그냥 신선함 아닐까요?’정욱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혀버렸다.신선함이 생기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신선함이 사라진 뒤에 어떻게 하느냐이지 않겠는가.정욱이 말을 하지 않자 심지안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임시연 씨가 나타나기 전엔 저도 정욱 씨와 같은 천진난만한 생각을 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깨달았어요. 저의 위치를 바로잡기도 했고요.”성연신이 그녀에게 조금의 흥미를 갖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특별한 사람으로까지 생각한다고는 자신할 수 없었다.신선함은 사랑이 아니
“아는 사람이에요?”“심지안은 예전 우리 부용에서 일한 적 있어요. 그때도 한번 맛보고 싶었는데...”경은은 깜짝 놀랐다. 이 간악한 여자가 부용까지 갔었을 줄이야.한수군이 심지안에게 꽤 큰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빠른 시일 내에 심지안을 만나요. 그 여자한테 뭘 하든 상관없어요. 내가 필요한 건 사진 몇 장뿐이니까.”“심지안은 날 경계하고 있어요. 만나기 쉽지는 않을 거예요.”“내가 돕길 원해요?”“돕다니요. 우린 한배를 탔는걸요.”경은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온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심지안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가 되면 심지안은 더는 그녀와 경쟁하지 못할 것이다.“그렇게 해요. 대신 돈은 더 추가하죠.”...임시연은 그날 보광 중신에 나타난 이후 4,5일이 지났음에도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심씨 집안은 평온했고 질서정연한 일상이 돌아가고 있었다.하지만 심지안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임시연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아무 이유 없이 성연신의 삶에서 사라져버렸을 리도 없다.이렇게 쉽게 포기할 거라면 애초에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다.또한 심씨 집안도 한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목구멍까지 넘어간 열매를 두 번이나 눈앞에서 심지안에게 빼앗겨버렸음에도 말이다.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와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거라면 얼마나 좋겠는가.하지만 교활하기 짝이 없는 심연아는 절대 이렇게 손해를 본 채로 일을 마무리 짓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귀빈석에 앉은 성연신이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번에 심지안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 듯했다.오늘은 보광 중신 새 프로젝트 발표회를 여는 날이다.은은한 바람이 그녀의 얼굴에 불어오자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공중에서 흩날렸다.옅은
정욱이 심지안의 눈앞까지 걸어가 남자 동료에게 말했다.“재무부에 가서 이번 달 월급을 받은 뒤 회사에서 나가세요.”남자는 처음엔 그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오늘은 월급을 받는 날이 아닌데요?”반면 단번에 알아차린 심지안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물었다.“이분 해고당했나요...?”정욱이 말했다.“비슷해요.”말을 마친 그는 일부러 그녀의 핸드폰에 떠 있는 카톡 어플을 쳐다보았다.그제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게 된 심지안은 재빨리 성연신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우린 연락처만 주고받았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동료 사이에 카톡을 좀 추가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나요.”심지안이 그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해고하지 않으면 안 돼요?”그 사람이 해고당한다면 이 죄책감을 어찌한단 말인가.남자 동료는 심지안과 비슷한 나이인 듯했는데 아마 공개채용 시기 천신만고 끝에 면접과 시험을 통과해 입사했을 것이다.성연신의 입꼬리가 음산하게 위로 올라갔다.“지금 내 앞에서 다른 남자의 편을 드는 거예요?”“아니에요. 난 그냥 단순히 그 사람은 잘못이 없다는 걸 말하려는 것뿐이에요. 지금 당장 연락처를 삭제하면 되잖아요.”“봐요. 삭제했어요. 그러니까 해고하지 말아요. 연신 씨가 이토록 멋있고 잘생겼는데 다른 남자가 어떻게 제 눈에 들어올 수가 있겠어요.”성연신은 애써 아부를 떠는 심지안을 바라보니 더러웠던 기분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 같았다.“그건 지안 씨의 눈이 정확하기 때문이죠.”“맞아요. 연신 씨의 말이 맞아요. 날 의심해도 내 눈은 의심하면 안 돼요.”심지안은 환히 웃으며 그의 팔을 품 안에 껴안은 채 몸을 배배 꼬았다.“해고하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앞으론 같은 부서 사람이 아니면 말도 섞지 않을게요.”그녀의 애교스러운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에 자리 잡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졌다.성연신이 큰손을 휙 저었다.“정욱.”정욱이 힘겨운 얼굴로 말했다.“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심지안은 멀어져가는 정욱의
심지안이 냉정한 눈빛으로 심연아를 쳐다보았다.“난 괜찮아. 이렇게 더운 날에 밍크를 입다니, 땀 냄새 나겠어.”“촌스럽네요. 패션에 계절은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뭘 알아요.”심연아의 차 안에 앉아있던 남자가 그녀의 편에 서서 심지안과 맞섰다.가까이에서 보니 남자는 짙은 메이크업에 빨간 립스틱까지 바르고 있었다. 조금 전 멀리서 힐끗 봤을 땐 잘생긴 듯했는데 자세히 보니 남자도 여자도 아닌 요괴 같은 오싹한 모습이었다.심지안은 그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말해. 여긴 왜 온 거야. 나한테 자랑을 하러 온 거라면 돌아가. 미안하지만 난 관심 없어.”심연아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명함 하나를 꺼냈다.“난 지금 흥월 엔터의 이사야. 난 널 우리 회사 연예인으로 영입하고 싶어. 내가 돈 많은 사람도 소개해 줄게. 네가 남은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게 말이야.”그동안 그녀는 연예계 상황에 대해 많이 알아보았다. 심지안 정도의 미모라면 분명 그 가치가 대단할 것이다.심지안이 늙은 남자에게 기대고 싶다고 하면 소개해 주면 된다. 어쨌든 결국 돈은 심연아의 카드에 흘러들어올 테니 말이다.또한 심지안은 그녀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물론 이건 모두 심연아의 아름다운 환상일 뿐이다. 현실에서 그녀의 눈에 돌아온 건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몸을 돌려 반대로 걸어가고 있는 심지안의 모습뿐이었다.“야,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너 지금 내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알아? 업계 수많은 엘리트들이 나만 보면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려. 이런 기분 느껴보고 싶지 않아? 너희 보광 중신 대표도 내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달려와 물을 따라줄거야.”“아. 시끄러워.”그 짧은 한마디와 함께 주위 공기가 영하로 급하강했다.심지안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성연신이 햇살 아래 옷소매를 거둔 채 건장한 몸매를 뽐내며 서 있었다. 그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심연아를 노려보고 있었다.심연아는 그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특히 그 얼굴은
심연아는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한 그의 기세에 겁을 먹고 화장남도 관여하지 않은 채 줄행랑을 쳤다.혼자 버려졌다는 사실을 인지한 화장남의 얼굴에 분노와 원한이 서렸다.심지안 역시 크게 놀랐다.그녀는 이마를 찌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구급차를 부를까요? 몸을 많이 다쳤으면 어떻게 해요.”“배짱하고는.”성연신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연신 씨가 걱정돼 이러는 거잖아요. 사람을 때리는 건 위법행위예요. 난 당신이 일에 휘말려 잡혀가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요.”그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읽을 수 없는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지안 씨 자신이나 잘 지켜요.”또 괴롭힘을 당하다니,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심지안은 조금 전 심연아를 혼내던 성연신의 모습을 떠올리니 크나큰 안정감이 들었다. 성연신만 옆에 있다면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았다.그 순간 처음 느끼는 따뜻함이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뜨자 화장남은 애써 기어 일어나 핸드폰으로 상처 사진을 찍은 다음 인터넷에 올렸다. 다만 누가 때렸는지는 밝히지 않았다.그는 꽤 이름있는 배우였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수많은 팬들이 화장남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폭행을 한 사람을 잡아 감옥에 넣어야 한다고 아우성을 질렀다.이후 그는 정욱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을 했다. 돈을 주면 조용히 넘어갈 것이고 거부한다면 일을 더 크게 만들 거라는 협박이기도 했다.“젠장.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을까요!”심지안은 어이가 없었다. 끼리끼리 논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은 듯했다.정욱이 웃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요. 일을 벌이면 회사 법무팀에서 처리할 거예요.”심지안은 인터넷 여론이나 악플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진정으로 걱정되는 건 돌연 기획사 이사로 둔갑해 나타난 심연아의 배후에 그녀를 돕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그녀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마음을 가다듬은 뒤 창가에 서서 우아하게 커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