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다빈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터져 나오는 억울함을 꾹꾹 눌러 담으며 눈살을 찌푸렸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살살할게요.”그러나 성연신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재무 경리는 머리를 한껏 움츠리고는 존재감을 최대한 낮추기 위해 노력했고 연다빈을 위해 나서주지도 않았다.똑똑한 사람은 절대 그녀를 돕지 않을 것이고 도울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물론 연다빈이 철이 없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성연신의 본처가 엄연히 자리에 있는데 연다빈이 도련님의 비위를 맞추려고 멋대로 나섰으니 총명하고 영리한 도련님이 먼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연다빈의 체면을 살려주지 않았던 모양이다.심지안은 차에서 잠자리에 들었고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그들의 차는 이미 제경 시내에 도착했고 30분도 안 되어 집에 도착했다.그리고 연다빈과 재무 경리는 일찍이 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이윽고 운전기사가 차를 길가에 천천히 세우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이곳은 택시 잡기 쉽고 사람이 많으니 여자들에게 더 안전한 곳입니다. 그리고 택시를 타는 것을 잊지 마세요.”어차피 회사에서 정산하니까 돈을 아끼기 위해 불법 차를 타는 것은 가치가 없다.재무 경리는 차에서 내려 짐을 들고 매우 공손한 태도로 심지안에게 인사를 건넸다.“그럼 성 대표님, 그리고 사모님, 안녕히 계십시오.”“안녕히 계세요.”연다빈도 따라서 한마디 했고 심지안도 인사치레로 대충 대응했다.밖에 나가면 그녀의 행동은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세움 주얼리, 성원 그룹, 그리고 보광 그룹을 대표하고 있다.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 정도는 매우 쉬운 일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데 왜 기꺼이 하지 않겠는가?누가 빙그레 웃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겠는가?그런데 차에서 내리려던 연다빈은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아이고” 하는 소리와 함께 한편으로는 고개를 숙이고 가방에서 물건을 뒤적이며 한편으로 입을 열었다.“방금 성
심지안은 아침 식탁에 앉아 잠이 덜 깬 듯 중얼거렸다.“이틀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네요.”그렇다면 이틀만 더 놀아주도록 하지.“토스트에 잼 바를 건데 딸기가 좋아요, 아니면 블루베리가 좋아요?”감색 실내복을 입은 성연신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지라 아직 머리가 축축하게 젖어있어 나른한 이완 감이 감돌았고 온몸을 맴돌던 싸늘한 기운도 한결 부드러워 이웃집 오빠처럼 다정했다.심지안은 폭신폭신하고 따뜻한 토스트를 보며 답했다.“딸기요.”새콤달콤한 딸기가 식욕을 돋우어준다.“알겠어요.”성연신이 딸기잼을 천천히, 구석구석 듬뿍 발라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주자 심지안이 작은 입을 벌려 빵조각을 깨물었다.딸기의 새콤달콤함이 입안을 가득 채우며 행복감이 폭발하는 기분이었다.행복해하는 심지안의 모습에 성연신은 접시에 담긴 식빵 조각을 전부 딸기잼으로 발라 버렸고 한편, 딸기잼을 싫어하는 성우주는 어이가 없었다.그는 이리 고르고 저리 고르다 결국 아무도 마시지 않는 좁쌀 죽 한 그릇을 골라 묵묵히 마실 수밖에 없었다.비록 아침을 잘 먹지는 못했지만 엄마 아빠의 애틋한 모습을 보니 마음은 매우 즐거웠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먼저 성우주를 학교로 데려다주었다. 성우주는 두 사람과 작별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교실로 돌아갔다.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손을 뻗어 책상에서 책을 집어 들었는데 문득 두꺼운 사진첩에 손이 닿았다.성우주는 잠깐 멍해 있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바로 창밖을 내다보았다.그러나 밖에 성연신의 차는 이미 멀리 떠났고 성우주는 다시 사진첩을 내려다보며 그냥 저녁에 돌아가서 엄마에게 말하리라 다짐했다.성연신이 심지안을 세움 주얼리로 데려다주는 길에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 웬 낡은 옷을 입은 소녀가 엿으로 만든 막대사탕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언니, 아저씨, 사탕 사실래요? 엄청나게 달고 맛있어요.”그 순간 말 속의 포인트를 잡아낸 성연신이 미간을 찌푸렸다.언니, 아저씨?왜 심지안은 언니라고 부르고 그는 아저씨라
심지안은 눈썹을 추켜올리고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지만 낯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상속인이 된 후에도 그녀의 사무실은 줄곧 변동이 없었다.영업 부서는 인력이 가장 많은 부서로 이동성이 높고 대인 관계가 복잡하며 말 많은 사람이 있어 사건·사고가 잦았다.현재로서는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고 심지안은 성큼성큼 사무실로 들어갔다.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고청민의 모습이 불쑥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그는 순백색 셔츠에 은백발을 하고 있었는데 햇빛을 받아 얼굴의 가는 솜털마저 촘촘히 보였다. 게다가 고청민은 마치 천사 소년처럼 밝은 미소를 머금고 맑은 갈색 눈동자에 반짝반짝 빛나는 빛깔을 띠고 있었다.심지안을 발견한 고청민의 웃음기가 더 짙어졌다. 마치 그들은 결코 한 번도 서로 얼굴을 붉힌 적이 없는 듯 말이다.“드디어 왔군요.”말없이 살짝 틀어진 미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심지안은 이내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할아버지께서 저에게 회사 상황을 좀 보라고 하셔서요.”고청민은 턱을 치켜들고 앞에 산더미 같이 쌓인 서류뭉치를 보며 무고한 눈을 구부렸다. 그러고는 마치 선생님이 아이를 칭찬하듯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역시나 당신은 제가 예상했던 대로 아주 훌륭합니다. 세움 주얼리를 맡아줄 수 있겠어요.”“정말 단순히 제 일을 시찰하러 온 겁니까?”심지안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그러자 고청민은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그래요. 지안 씨가 감시당하는 기분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제 선에서 여러 번 밀어냈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할아버지 성격이 워낙 당신처럼 고집이 세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왔죠.”그러나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갑작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세움으로 돌아오고 싶으면 직접 말하세요. 원래 당신의 몫이 절반 있으니까요.”솔직히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것이 맞다.결론적으로 세움 그룹은 성동철과 고청민의 할아버지가 함께 창립한 것이
심지안은 한눈에 성우주의 품에 안겨있는 사진첩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너무 익숙한 사진첩이었다. 고청민과 해외에 있는 5년 동안 그들의 삶의 모든 것들이 이 앨범에 보관되어 있으니까.고청민이 나중에 늙으면 함께 꺼내 보자고 했던 사진첩.청춘은 지나가도 흘러간 청춘은 여전히 곁에 남아있을 거라고도 했었다.당시 심지안은 계속하여 자신을 가두고 천천히 치료하고 있었기에 사실 고청민에게 친구 이상의 사랑을 느꼈지만 그녀는 결국 도망을 선택했다.지금 돌이켜보면 사실 고청민의 태도는 매우 분명했었다.마음이 조금 피곤해진 심지안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엄마, 왜 그래요?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성우주는 작은 머리를 쳐들고 열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심지안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다독여주었다.“괜찮아. 그냥 일이 너무 피곤해서 그래.”“그럼 많이 쉬세요. 아니면 그냥 일하지 마세요. 저는 돈이 있으니 충분히 엄마를 먹여 살릴 수 있어요.”심지안은 손을 뻗어 아이 이마의 잔머리를 다듬어주며 농담조로 입을 열었다.“그래? 그런데 너한테 돈이 얼마나 있다고 그래. 나 먹여 살리는 게 상당히 비쌀 텐데.”그러자 성우주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음... 충분히 될 거예요. 이지호가 난 앞으로 여자 열 명을 먹여 살려도 문제없다고 했으니까.”증조할아버지는 그에게 성원 그룹의 주식 10%를, 아버지는 그에게 보광 그룹의 주식 20%를 주었다. 게다가 증조할아버지는 그에게 매년 수천억을 저축해주고 있다.그는 주식의 구체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수천억이라면 평소에 가방 좀 사고, 여행하고, 사업만 하지 않는다면 이번 생은 엄마가 쓰기에 충분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성우주의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의 눈에는 경악이 번져나갔다.그녀는 마침내 인생은 출발점부터 갈린다는 말의 뜻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도련님, 도련님은 정말 부자이시군요. 혹시 일손이 부족하진 않으신가요? 제가 일해드릴게요.”멀지
고개를 끄덕이던 안철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심지안을 향해 다가갔다.“저... 지안 씨, 오늘 저 봤다는 얘기는 대표님한테 하지 말아 주세요. 비밀로 해주세요.”“비밀 지켜달라는 뜻이에요?”“네!”“그럼 저는 뭐가 좋은데요?”눈을 깜빡이며 묻는 심지안에 안철수는 잠시 벙쪄있다가 입을 열었다.“뭘 바라시는데요?”“장난이에요, 연신 씨가 안 물어보면 나도 아무 말 안 할게요.”제 남편을 굳이 속이고 싶진 않았던 심지안이 묻지 않는다면 말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고마워요, 지안 씨.”“근데 민채린 씨랑은 어떻게 됐어요?”연애 좀 해봤다 하는 절세미녀 민채린과 지고지순한 안철수가 만나는 것도 꽤 흥미로울 것 같아 심지안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심지안의 질문에 안철수는 머리를 만지며 바보처럼 웃어 보였다.“좀 더 만나보기로 했어요. 그리고 전에 제가 말실수 한 거에 대해서도 사과했어요. 채린 씨도 제가 제대로 된 고백을 하면 만나주겠다 했고요.”안철수의 말에 심지안은 잠시 멈칫했다. 이렇게 되는 게 맞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다.“소민정 씨는 이렇게 빨리 잊은 거예요?”소민정을 언급하는 심지안에 안철수는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소민정 씨한테는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그냥 동생 챙겨주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소민정이 죽고 난 뒤 안철수는 며칠 동안 그 무덤 앞을 지키며 술로 정신을 마비시켰다.소민정을 말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임시연의 그 헛소리에 넘어가게 내버려 뒀다는 죄책감에 안철수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제가 잡아만 줬어도 이런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어떻게 죽을 때까지도 성 대표님만 구하다 죽나, 어떻게 그 정도 바보 같을 수 있나 싶었다.안철수는 소민정의 마음에는 어릴 때부터 줄곧 성연신뿐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거에 대해 안철수는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질투를 해본 적이 없었다.보통의 남자라면 제가 좋아하는 여자
고청민은 옅은 미소를 띠며 담담히 말했다.“그냥 추억할 만한 사진들 좀 넣어서 줬어요. 지안 씨도 지난 5년간 우주랑 같이 시간 보내고 싶었을 것 같아서 지안 씨 해외에 있을 때 사진 우주한테 선물해 준 거에요.”성우주도 큰 눈을 반짝이며 환하게 웃고는 말했다.“형이 준 앨범 엄청 맘에 들어요.”성우주는 고청민 사진은 없고 전부 심지안뿐인 앨범이라 고청민이 엄마 아빠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일부러 준 게 아니라 정말 추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했다.성우주를 데리러 갈 때 심지안도 앨범을 본 적은 있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아 안에 몇 장의 사진이 들어있고 사진 속에 저는 뭘 하는지 어떤 배경으로 찍힌 건지는 굳이 보지 않았다.고청민의 빛이 사라진 눈을 보던 심지안 제가 너무 속 좁은 짓을 했나 싶었다.그때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성동철이 성우주를 부르며 말했다.“우리 손자, 할아버지한테도 사진 좀 보여줄래?”“네, 할아버지.”성우주가 예쁘게 대답하며 앨범을 성동철의 손에 넘겨주자 그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에 안에 어떤 사진이 있는지 궁금했던 심지안도 사진이 보일만 한 거리까지 가까이 다가갔다.첫 번째는 심지안이 금방 해외에 가서 혼자 창가에 앉아 외로워할 때의 사진이었고 두 번째 장은 고청민과 기분전환 하려고 간 쇼핑몰에서 고청민이 심지안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여주는 사진이었다.그리고 세 번째 장에는 심지안이 컴퓨터 앞에 앉아 시장 동향을 살피며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담겨있었고 네 번째 장은 밤에 일을 다 끝내고 같이 야시장에서 밥을 먹으며 심지안이 꼬치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사진 속의 심지안은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한 손엔 꼬치를 들고 얼굴에는 기름을 잔뜩 묻힌 채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생생하고 아름다워 보였다.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사진들을 볼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성우주도 한 장씩 넘겨보며 흥미로운 사진이 있으면 손가락으로 짚어가
고청민의 눈빛이 그의 의아함을 대변해주고 있었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네.”둘만 남은 바둑실이라 지나치게 조용했지만 고청민은 무슨 일인지 바로 묻지 않고 테이블에 기대어 가만히 기다렸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심지안이 차분한 말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민채린 씨가 고청민 씨 줄 거라고 나한테 약을 줬어요. 가정부한테 줬으니까 잘 챙겨 먹어요.”의외의 말에 고청민은 당황했지만 그래도 초등학생처럼 고분고분하게 머리를 끄덕였다.“네, 그럴게요.”“그리고 세움 그룹으로 돌아와요. 주식은 내가 넘겨줄게요.”심지안은 고청민의 눈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고청민이 잘못한 것도 맞고 아주 큰 피해를 입힌 것도 맞지만 그 주식의 액수가 너무 컸고 할아버지도 고청민의 복귀를 바라실 것 같아 심지안은 고청민을 불러들이기로 했다.성씨 가문이 제경에서 한 자리 차지하며 귀족 중의 귀족이 될 수 있었던 건 다 할아버지가 젊을 때부터 세움 주얼리를 경영하며 하나하나 쌓아 올린 것들이었다.할아버지 세대의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자식들도 물론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고청민은 그 세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움과 함께 커왔으니 세움 주얼리의 번창에 공이 하나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힘든 시간을 함께하는 게 그 성과를 함께 누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임을 알기에 심지안은 혼자 모든 걸 차지하고 만끽할 수 없었다.심지안의 말에 고청민은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아... 아니에요. 나는 지안 씨를 세움에서 쫓아내고 싶은 게 아니에요. 세움 주얼리는 성씨 가문과 저의 공동 자산이죠.”“괜찮아요. 해외에서 고청민 씨가 나 도와줘서 창업도 했잖아요. 돈 있어요. 그리고 나도 조건 있어요.”“고청민 씨와 할아버지가 나한테 사업 자금을 주는 게 조건이에요. 제경에서 창업할 만한 돈이면 되요.”심지안은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라는 듯 차분하게 말했다. 양보를 할 순 있어도 너무 많이 잃을 순 없었다.고청민은 심지안이 충동적이라고 생각
심지안은 애써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네”라는 짤막한 대답을 남기고 식사를 하러 내려가려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멀어지는 심지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고청민의 눈에 섬뜩한 소유욕이 비치는 듯했다.심지안이 문을 열려고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문 너머에서 강한 힘이 전해져오며 문이 안으로 밀렸다.다행히 순발력 강한 심지안이었기에 코만 살짝 스치고 별문제 없었지만 정말 큰 사고가 날 뻔했기에 심지안은 짜증 난 듯 문을 연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누구야! 문 열기 전에 노크하는 법도 몰라요?!”“지안 씨, 나예요.”그때 성연신이 문 뒤에서 걸어 나오며 걱정스레 물었다.“괜찮아요? 그렇게 갑자기 문을 열줄 몰랐어요.”심지안은 갑자기 등장한 성연신이 의아했지만 아직 재결합 전이기에 남자친구로서 예의를 갖춰야 한다 생각해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문 열기 전에 노크해야겠다는 생각은 못 했어요?”“미안해요. 많이 아파요? 병원 갈까요?”성연신은 심지안을 살피며 이것저것 물어왔는데 뒤에 서 있는 고청민을 정말 못 본 건지 아니면 못 본 척을 하는 건지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이렇게 큰 사람이 뒤에 서 있는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들어오자마자 봤을 텐데.심지안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저 성연신을 한번 흘기고는 말했다.“그 정도는 아니고요. 밥 먹으러 가요. 나 배고파요.”“그래요.”심지안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내려가려 하던 성연신이 그제야 뒤에 있던 고청민의 존재를 인지한 건지 그를 보며 물었다.“같이 밥 먹어요.”고청민을 손님 취급하는 그 말에 고청민의 눈에 살짝 언짢음이 감돌았지만 그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금은 배가 안 고파서요. 나중에 배고프면 주방에 말하면 돼요.”이 집의 주인은 본인이라는 걸 어필하는 듯한 말에 성연신은 더는 말하지 않고 냉소를 흘리며 방을 나갔다.---밥을 다 먹은 성연신이 심지안의 방에 드러누워 일어날 생각을 않자 심지안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성연신 씨, 오늘 여기서 자고 갈 생각은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