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지하실에서 적을 만나면 둘 중에 한 명은 죽기 마련이다.사내는 진한 살기가 진동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봉구안은 야행복이 아닌 궁중예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상태였다.만약 일격에 상대를 죽이지 못한다면 자신이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들통날 것이고 스스로 그날 밤 자객이 자신이라고 자백하는 것과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폭군과는 달리 무고한 자를 죽이는 습관이 없었다.‘어차피 주인 명을 받고 움직이는 자야. 악하다고 볼 수 없어.’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너 누구냐? 왜 여기 있어?”순간 소욱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그는 황후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순간 당황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들은 고작 두 번 만난 게 다였다.신혼밤에는 촛불도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이니 당연히 얼굴을 못봤을 것이고 두 번째 만남에서 그녀는 욕조에 앉아 그를 등지고 있었기에 얼굴을 보지 못했다.그렇게 생각하니 황후가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도 이해가 갔다.하지만 황후가 자신의 비밀을 발견한 이상, 살려둘 수는 없었다.“죽음을 자초하는군.”그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봉구안은 그 자리에 서서 조용히 상대를 관찰했다.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상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상황!소욱은 그녀의 신분을 모르는 척, 공중에 몸을 날려 그녀에게 접근했다.봉구안은 무공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제 자리에 버티고 있었다.사내의 손이 그녀의 목을 비틀던 순간, 그녀는 예민한 관찰력으로 그의 목에 그어져 있는 은빛 띠를 발견했다. 그녀는 곧장 소매에서 은침을 꺼내 그의 뒷목 풍지혈에 꽂았다.순식간에 사내는 힘을 잃은 듯, 손을 내리고 뒤로 물러섰다.그는 침을 제거하려고 뒷목으로 손을 뻗었다. 이때,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그걸 뽑으면 넌 죽는다!”소욱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죽일듯이 노려보았다.봉구안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의학을
봉구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그녀는 더 이상의 해명을 생략했다.천수독은 하루아침에 해독할 수 있는 독이 아니었다. 중독자의 상황에 따라 단계별로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데 한번의 침술로 독을 완전히 제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이 독을 누구한테 당했는지부터 말해 보거라.”하지만 그런 협박은 소욱에게 통하지 않았다.그는 강압적인 말투로 말했다.“일단 독부터 해독하거라.”서로를 믿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오갔다.사내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나더니 말했다.“독을 해독하지 않으면 이곳을 못 나갈 줄 알아.”그녀에게 자신의 비밀을 들켰으니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그 말을 들은 봉구안의 표정도 차게 식었다.‘은혜를 원수로 갚다니!’그녀의 시선이 백옥 침상에 닿았다.그리고 그곳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치를 발견했다.더듬어서 그것을 누르자 아니나 다를까 출구가 생겨났다.그녀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경공을 이용해 밀실을 신속히 벗어났다.소욱은 음침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쫓아갔다.하지만 그녀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유유히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뒤늦게 소리를 들은 호위대가 달려왔다.“자객이다!”잠시 후, 추적에 실패한 호위대는 잔뜩 기가 죽어 소욱에게로 돌아왔다.“폐하, 소인들이 무능하여 또 자객을 놓쳤습니다!”그 많은 호위가 지키고 있었는데 봉구안이 밀실에 들어간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에 그들은 큰 죄책감을 느꼈다.그나마 황제가 무사하여 다행이었다.소욱은 호위가 건넨 망토를 걸치며 차갑게 말했다.“무슨 일이 있어도 산 채로 잡아서 내 앞으로 끌고 와.”“예, 폐하!”영화궁.돌아온 봉구안을 본 연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마마께서 나가고 얼마 안 돼서 계 상궁이 왔다갔습니다.”“태후께서 보석과 장신구들을 보내셨더라고요. 전에 폐하께서 마마의 일년 녹봉을 모두 삭감하시고 외출 금지까지 당하셔서 형편이 많이 어려울 터니 보태 쓰라고 하셨습니다.”“소인은 마마께서 편찮으시어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고
봉구안이 알고 있는 건 혼례식 때 어머니가 잠깐 얘기해 준 게 전부였다.채월이 말했다.“아가씨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 계속 구토를 하셨어요. 그런데 보니까 음식물찌꺼기가 아닌 인간의 배설물인 거예요! 놈들은 아가씨에게 오물까지 강제로 먹였던 거예요.”“그리고 뻘겋게 데운 철꼬챙이로 아가씨에게… 의원이 말하기를 아가씨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대요.”남제의 여인에게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인생이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채월은 울먹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더니 끝내는 통곡을 터뜨렸다.봉구안은 입술을 앙다물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창박을 노려보았다.한참이 지난 후, 겨우 안정을 찾은 채월이 봉구안의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소인, 외람되지만 한 마디만 묻겠습니다. 마마, 혹시… 황귀비를 죽일 생각이신가요?”봉구안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채월이 계속해서 말했다.“마마, 아가씨가 잠깐 정신이 돌아오셨을 때 소인께 꼭 전해달라고 한 말이 있어요. 장미 아가씨는 마마께서 자신을 위해 살인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황귀비는 폐하의 무한한 총애를 받고 있으니 분명 그 여인이 머무는 처소도 경비가 삼엄할 테지요. 아무리 마마께서 막강한 무술 실력을 가지셨다고 해도 꼭 성공한다는 법은 없습니다.”“만약에 작전에 실패하거나 어떤 단서라도 남긴다면 마마는 물론이고 봉가 전체가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장미 아가씨는 혼자 죽더라도 마마께서 더 이상 이 일에 엮이는 것은 싫다고 하셨습니다. 아가씨는 마마께서 아가씨를 대신해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어요.”봉구안은 조용히 채월의 이야기를 들으며 장미의 팔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촛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섬뜩하게 일그러져 있었다.‘장미야, 네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나 혼자 좋은 것만 보고 자유를 누릴 수 있겠어!’하지만 동생의 유일한 소원을 거스르기도 난감했다.그녀는
조검은 소인이라 칭하긴 했지만 표정은 아주 기고만장했다.그는 마치 그가 달라고 하면 황후가 당연히 내놓아야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도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또 한참이 지나 영화궁 최 상궁이 밖으로 나왔다.최 상궁의 얼굴은 무척 상해 있었다.모시는 주인이 총애를 받지 못하니 아무리 황후궁 내무를 관장하는 상궁이라도 영소전의 하등 노비보다도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그녀는 조검을 보자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조 태감 어르신, 너무 급해 마세요. 마마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신가 봅니다. 제가 가서 재촉 좀 하겠습니다.”조검은 턱을 빳빳이 치켜들고 명령하듯 말했다.“그럼 어서 다녀오너라!”“예, 얼른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최 상궁이 내전에 들어섰을 때, 황후는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다.최 상궁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마마, 황귀비의 두통이 또 재발했다네요. 이 시기에 약을 내놓으면 폐하께서도 마마의 고마움을 알고 관심을 가져주실 겁니다.”봉구안은 느긋하게 머리를 빗으며 담담히 말했다.“약 이제 없어.”최 상궁의 얼굴은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마마… 한 번만 더 찾아보시면 어디 더 있지 않을까요?”옆에서 듣다못한 연상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최 상궁!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마마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면 될 것이지 지금 마마를 의심하시는 겁니까?”최 상궁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살다 살다 상궁인 자신이 어린 시종에게 한소리 듣는 날이 올 줄이야!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영화궁을 뛰쳐나가 다른 궁으로 가고 싶었다.‘주인이 무능하면 아랫사람도 고생한다더니!’영소전, 황귀비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내전에서 태의가 통증을 완화하는 침술을 시전 중이었다.내전 밖 단나무 의자에 인상을 잔뜩 구긴 황제가 온갖 위험한 분위기를 발산하며 앉아 있었다.“영화궁에 보낸 태감은 아직이더냐!”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전갈을 나갔던 태감이 숨을 헐떡이며
소욱은 입술을 앙다물고 분노를 다스렸다.황후가 준 처방전을 태의원에 연구하도록 하였지만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다. 중요한 약재 몇 가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처음부터 계략에 능한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이걸 또 이렇게 이용할 줄이야!‘요망한 것!’소욱은 싸늘한 얼굴로 계속해서 물었다.“황후가 그러고 또 뭐라고 하였느냐.”조검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황후께서는 폐하께서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황귀비는 고통에 시달릴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약을 빼앗으려 한다면 약을 훼손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드리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그리고… 폐하께서 약속을 번복하실 리는 없지만 성지로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말을 마친 조검은 사지에 힘이 쫙 빠졌다.‘나 죽는 건 아니겠지?’조검의 말을 들은 소욱의 얼굴은 섬뜩하게 일그러졌다.영소전 내부에 삭막한 정적이 감돌았다.영화궁 쪽도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최 상궁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약이 없다고 했다가 갑자기 약을 내놓으며 황제에게 조건을 제시한 건 자칫 잘못하면 군주를 기만한 죄를 물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그는 황제가 얼마나 화가 나 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과거에 재상이 황제에게 총애를 골고루 줘야 한다고 간언했다가 그날 바로 참수를 당했던 일이 떠올랐다.참다못한 최 상궁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마마, 아무리 폐하의 총해를 원하셔도 이건 안 될 일이죠! 평생 두통약으로 폐하를 협박하여 합방을 강요하실 건 아니잖아요!”사실 연상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물론 봉구안이 확신이 없는 싸움을 벌이지 않았을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사람들은 황후가 황제의 총애를 위해 이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겠지만 황후가 요구한 것은 후궁을 골고루 살펴달라는 정당한 요구였다.소식을 접한 후궁 비빈들 사이에서도 난리가 났다.“들었어? 황후께서 두통약을 빌미로 페하를 협박하셨대!”“황후마마는 정말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 같아
황제가 떠난 후, 황귀비의 측근 춘화(春禾)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서 말했다.“마마, 황후가 만약 폐하의 승은을 입고 회임이라도 한다면 이 궁에서 마마의 독보적인 지위는 사라질 거예요.”쾅!침대머리에 놓였던 화분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춘화는 다급히 주변을 정리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마마, 고정하세요!”황귀비는 음침한 얼굴을 하고 침대에 누워 치를 떨었다.“폐하께서는 그 여인과 합방할 리가 없어!”입궁하기 전에 이미 더럽혀진 여자이고 뻔뻔하게도 총애를 달라고 황제를 강요한 여자였다.그 시각, 다른 비빈들은 한 자리에 모였다.황제의 승은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그들이었기에 황귀비보다 타격이 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역시 황후의 수완이 대단하네요. 폐하께서 그런 요구를 받아들여 주시다니.”황귀비 쪽 사람인 비빈 강씨가 비꼬듯이 말했다.“그게 무슨 수완이야? 그냥 협박이지! 난 조건이 주어져도 그렇게 비열한 짓은 안 해! 두고 봐! 분명 폐하의 노여움을 사고 내쳐질 거니까!”성난 비빈들이 있는 반면, 현비는 여느 때처럼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다.“입궁하면 다 같은 식구고 황후마마를 축복해 드려야 하는 게 맞아.”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갑자기 찾아온 변화에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지 않은 비빈들은 질투와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자녕궁.태후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뭐라고? 황상이 타협했다고?”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황제처럼 강압적인 사람이 여자의 협박에 타협하다니.계 상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마마, 이게 다 황귀비를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황귀비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정말 몰랐네요. 황후께서는 운이 좋아서 얻어걸린 겁니다.”태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운이 좋았던 게 아니야. 오히려 황후는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영리한 아이였던 거지. 어쩌면 황귀비를 대적하는데는 고상한 사람보다 주변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 황후 같은 사람
소욱은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로 눈앞의 여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비빈 강씨가 얇은 잠옷바람으로 침대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첫날밤이라 긴장한 것인지, 아니면 황제의 노여움이 두려웠던 것인지, 그녀는 고개만 푹 숙이고 온몸을 떨고 있었다.“신첩… 비빈 강씨,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전에 황귀비마마의 궁에서… 폐하를 한번 뵌 적이 있어요.”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황제의 질문에 대답했다.지옥 사자를 닮은 황제의 싸늘한 표정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소욱은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황후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주변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고 강씨는 두려움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폐하, 황후께서 신첩을… 여기로 보냈사옵니다.”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온 유사양은 강씨의 말을 듣고 경악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황후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걸까!사실 갑작스럽기는 비빈 강씨도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자신에게 황제의 시중을 들 기회가 돌아오리라 전혀 생각지 못했다.낮에 황제가 황후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들었을 때도 엄청 불편함을 드러냈던 그녀였다.그런데 저녁이 되어 황후에게서 이런 전갈을 받을 줄은 몰랐다.그녀는 기대 되기도 하고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빼앗길까 봐 이 일을 황귀비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자진궁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녀는 기대와 흥분에 가슴이 설렜다.입궁한지 몇 년이나 되는데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하지만 황제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보더니 죽일 듯이 노려보며 누구냐고 따져물었다.그녀는 자신이 그렇게나 존재감이 없었는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강씨가 눈물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폐하…”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황제의 눈빛은 더 싸늘하게 식을 뿐이었다.소욱은 짜증스럽게 등을 돌리더니 유사양에게 분부했다.“돌려보내거라!”그 말을 들은 비빈 강씨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했다.“그럴 순 없어요, 폐하! 신첩은 황후마마의 지시를 받고 시중을 들러 온 거예요. 신첩이 먼저 오
황제가 영화궁으로 온다는 소식에 연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폐하께서 여긴 왜 오신다는 걸까요?”최 상궁은 마치 이종족을 보는 눈으로 연상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몰라서 물어? 우리 마마께서 대낮에 폐하께 대놓고 총애를 요구하셨잖아. 그런데 밤중이 되어 강빈을 침전으로 보냈으니 폐하를 농락한 거랑 뭐가 달라!”“고귀하신 폐하께서 이런 수모를 어떻게 참겠어?”“마마, 얼른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저희들 목숨이 마마께 달렸습니다.”봉구안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내가 언제 내가 시중을 들고 싶다고 했지?”최 상궁은 더 어안이 벙벙했다.‘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하지만 오해한 사람은 최 상궁뿐이 아니었다.황궁에서 황제의 총애를 갈구하지 않는 후궁은 없었다. 그러니 어렵게 잡은 합방의 기회를 다른 비빈에게 양보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잠들지 못한 비빈들은 자진궁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뭐? 오늘 시중을 드는 사람이 황후마마가 아니었다고? 그럼 누군데?”“비빈 강씨? 강씨가 왜? 걔가 시중을 든대? 아니, 왜?”“그런데 폐하께 쫓겨났다지 뭐야? 강씨는 아마 며칠동안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생겼어.”“그것뿐이겠어? 아마 황귀비도 걔 가만히 안 둘걸?”녕비는 급급히 현비의 궁을 찾았다.두 사람은 평소에도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다.“언니는 그거 들었어요? 오늘 황후께서 비빈 강씨를 폐하의 침전으로 보냈대요.”현비는 두꺼운 망토를 두르고 기침하며 말했다.“수완아, 솔직히 나도 황후께서 이렇게 하실 줄은 몰랐어.”“마마께서는 진심으로 후궁의 안녕을 걱정하셨던 거야.”“언니, 황후를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우리 고모께서 그러시는데 황궁에서 총애를 갈구하지 않는 여인은 없다고 하셨어요.”“황후가 정말 우리를 위해 그랬을까요? 어렵게 얻은 합방의 기회를 다른 비빈에게 양보하면서까지요?”“황후는 고단수예요. 폐하의 승은은 받고 싶은데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