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지하실에서 적을 만나면 둘 중에 한 명은 죽기 마련이다.사내는 진한 살기가 진동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봉구안은 야행복이 아닌 궁중예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상태였다.만약 일격에 상대를 죽이지 못한다면 자신이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들통날 것이고 스스로 그날 밤 자객이 자신이라고 자백하는 것과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폭군과는 달리 무고한 자를 죽이는 습관이 없었다.‘어차피 주인 명을 받고 움직이는 자야. 악하다고 볼 수 없어.’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너 누구냐? 왜 여기 있어?”순간 소욱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그는 황후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순간 당황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들은 고작 두 번 만난 게 다였다.신혼밤에는 촛불도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이니 당연히 얼굴을 못봤을 것이고 두 번째 만남에서 그녀는 욕조에 앉아 그를 등지고 있었기에 얼굴을 보지 못했다.그렇게 생각하니 황후가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도 이해가 갔다.하지만 황후가 자신의 비밀을 발견한 이상, 살려둘 수는 없었다.“죽음을 자초하는군.”그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봉구안은 그 자리에 서서 조용히 상대를 관찰했다.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상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상황!소욱은 그녀의 신분을 모르는 척, 공중에 몸을 날려 그녀에게 접근했다.봉구안은 무공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제 자리에 버티고 있었다.사내의 손이 그녀의 목을 비틀던 순간, 그녀는 예민한 관찰력으로 그의 목에 그어져 있는 은빛 띠를 발견했다. 그녀는 곧장 소매에서 은침을 꺼내 그의 뒷목 풍지혈에 꽂았다.순식간에 사내는 힘을 잃은 듯, 손을 내리고 뒤로 물러섰다.그는 침을 제거하려고 뒷목으로 손을 뻗었다. 이때,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그걸 뽑으면 넌 죽는다!”소욱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죽일듯이 노려보았다.봉구안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의학을
봉구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그녀는 더 이상의 해명을 생략했다.천수독은 하루아침에 해독할 수 있는 독이 아니었다. 중독자의 상황에 따라 단계별로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데 한번의 침술로 독을 완전히 제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이 독을 누구한테 당했는지부터 말해 보거라.”하지만 그런 협박은 소욱에게 통하지 않았다.그는 강압적인 말투로 말했다.“일단 독부터 해독하거라.”서로를 믿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오갔다.사내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나더니 말했다.“독을 해독하지 않으면 이곳을 못 나갈 줄 알아.”그녀에게 자신의 비밀을 들켰으니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그 말을 들은 봉구안의 표정도 차게 식었다.‘은혜를 원수로 갚다니!’그녀의 시선이 백옥 침상에 닿았다.그리고 그곳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치를 발견했다.더듬어서 그것을 누르자 아니나 다를까 출구가 생겨났다.그녀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경공을 이용해 밀실을 신속히 벗어났다.소욱은 음침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쫓아갔다.하지만 그녀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유유히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뒤늦게 소리를 들은 호위대가 달려왔다.“자객이다!”잠시 후, 추적에 실패한 호위대는 잔뜩 기가 죽어 소욱에게로 돌아왔다.“폐하, 소인들이 무능하여 또 자객을 놓쳤습니다!”그 많은 호위가 지키고 있었는데 봉구안이 밀실에 들어간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에 그들은 큰 죄책감을 느꼈다.그나마 황제가 무사하여 다행이었다.소욱은 호위가 건넨 망토를 걸치며 차갑게 말했다.“무슨 일이 있어도 산 채로 잡아서 내 앞으로 끌고 와.”“예, 폐하!”영화궁.돌아온 봉구안을 본 연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마마께서 나가고 얼마 안 돼서 계 상궁이 왔다갔습니다.”“태후께서 보석과 장신구들을 보내셨더라고요. 전에 폐하께서 마마의 일년 녹봉을 모두 삭감하시고 외출 금지까지 당하셔서 형편이 많이 어려울 터니 보태 쓰라고 하셨습니다.”“소인은 마마께서 편찮으시어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고
봉구안이 알고 있는 건 혼례식 때 어머니가 잠깐 얘기해 준 게 전부였다.채월이 말했다.“아가씨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 계속 구토를 하셨어요. 그런데 보니까 음식물찌꺼기가 아닌 인간의 배설물인 거예요! 놈들은 아가씨에게 오물까지 강제로 먹였던 거예요.”“그리고 뻘겋게 데운 철꼬챙이로 아가씨에게… 의원이 말하기를 아가씨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대요.”남제의 여인에게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인생이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채월은 울먹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더니 끝내는 통곡을 터뜨렸다.봉구안은 입술을 앙다물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창박을 노려보았다.한참이 지난 후, 겨우 안정을 찾은 채월이 봉구안의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소인, 외람되지만 한 마디만 묻겠습니다. 마마, 혹시… 황귀비를 죽일 생각이신가요?”봉구안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채월이 계속해서 말했다.“마마, 아가씨가 잠깐 정신이 돌아오셨을 때 소인께 꼭 전해달라고 한 말이 있어요. 장미 아가씨는 마마께서 자신을 위해 살인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황귀비는 폐하의 무한한 총애를 받고 있으니 분명 그 여인이 머무는 처소도 경비가 삼엄할 테지요. 아무리 마마께서 막강한 무술 실력을 가지셨다고 해도 꼭 성공한다는 법은 없습니다.”“만약에 작전에 실패하거나 어떤 단서라도 남긴다면 마마는 물론이고 봉가 전체가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장미 아가씨는 혼자 죽더라도 마마께서 더 이상 이 일에 엮이는 것은 싫다고 하셨습니다. 아가씨는 마마께서 아가씨를 대신해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어요.”봉구안은 조용히 채월의 이야기를 들으며 장미의 팔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촛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섬뜩하게 일그러져 있었다.‘장미야, 네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나 혼자 좋은 것만 보고 자유를 누릴 수 있겠어!’하지만 동생의 유일한 소원을 거스르기도 난감했다.그녀는
조검은 소인이라 칭하긴 했지만 표정은 아주 기고만장했다.그는 마치 그가 달라고 하면 황후가 당연히 내놓아야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도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또 한참이 지나 영화궁 최 상궁이 밖으로 나왔다.최 상궁의 얼굴은 무척 상해 있었다.모시는 주인이 총애를 받지 못하니 아무리 황후궁 내무를 관장하는 상궁이라도 영소전의 하등 노비보다도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그녀는 조검을 보자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조 태감 어르신, 너무 급해 마세요. 마마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신가 봅니다. 제가 가서 재촉 좀 하겠습니다.”조검은 턱을 빳빳이 치켜들고 명령하듯 말했다.“그럼 어서 다녀오너라!”“예, 얼른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최 상궁이 내전에 들어섰을 때, 황후는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다.최 상궁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마마, 황귀비의 두통이 또 재발했다네요. 이 시기에 약을 내놓으면 폐하께서도 마마의 고마움을 알고 관심을 가져주실 겁니다.”봉구안은 느긋하게 머리를 빗으며 담담히 말했다.“약 이제 없어.”최 상궁의 얼굴은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마마… 한 번만 더 찾아보시면 어디 더 있지 않을까요?”옆에서 듣다못한 연상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최 상궁!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마마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면 될 것이지 지금 마마를 의심하시는 겁니까?”최 상궁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살다 살다 상궁인 자신이 어린 시종에게 한소리 듣는 날이 올 줄이야!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영화궁을 뛰쳐나가 다른 궁으로 가고 싶었다.‘주인이 무능하면 아랫사람도 고생한다더니!’영소전, 황귀비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내전에서 태의가 통증을 완화하는 침술을 시전 중이었다.내전 밖 단나무 의자에 인상을 잔뜩 구긴 황제가 온갖 위험한 분위기를 발산하며 앉아 있었다.“영화궁에 보낸 태감은 아직이더냐!”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전갈을 나갔던 태감이 숨을 헐떡이며
소욱은 입술을 앙다물고 분노를 다스렸다.황후가 준 처방전을 태의원에 연구하도록 하였지만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다. 중요한 약재 몇 가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처음부터 계략에 능한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이걸 또 이렇게 이용할 줄이야!‘요망한 것!’소욱은 싸늘한 얼굴로 계속해서 물었다.“황후가 그러고 또 뭐라고 하였느냐.”조검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황후께서는 폐하께서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황귀비는 고통에 시달릴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약을 빼앗으려 한다면 약을 훼손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드리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그리고… 폐하께서 약속을 번복하실 리는 없지만 성지로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말을 마친 조검은 사지에 힘이 쫙 빠졌다.‘나 죽는 건 아니겠지?’조검의 말을 들은 소욱의 얼굴은 섬뜩하게 일그러졌다.영소전 내부에 삭막한 정적이 감돌았다.영화궁 쪽도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최 상궁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약이 없다고 했다가 갑자기 약을 내놓으며 황제에게 조건을 제시한 건 자칫 잘못하면 군주를 기만한 죄를 물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그는 황제가 얼마나 화가 나 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과거에 재상이 황제에게 총애를 골고루 줘야 한다고 간언했다가 그날 바로 참수를 당했던 일이 떠올랐다.참다못한 최 상궁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마마, 아무리 폐하의 총해를 원하셔도 이건 안 될 일이죠! 평생 두통약으로 폐하를 협박하여 합방을 강요하실 건 아니잖아요!”사실 연상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물론 봉구안이 확신이 없는 싸움을 벌이지 않았을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사람들은 황후가 황제의 총애를 위해 이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겠지만 황후가 요구한 것은 후궁을 골고루 살펴달라는 정당한 요구였다.소식을 접한 후궁 비빈들 사이에서도 난리가 났다.“들었어? 황후께서 두통약을 빌미로 페하를 협박하셨대!”“황후마마는 정말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 같아
황제가 떠난 후, 황귀비의 측근 춘화(春禾)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서 말했다.“마마, 황후가 만약 폐하의 승은을 입고 회임이라도 한다면 이 궁에서 마마의 독보적인 지위는 사라질 거예요.”쾅!침대머리에 놓였던 화분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춘화는 다급히 주변을 정리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마마, 고정하세요!”황귀비는 음침한 얼굴을 하고 침대에 누워 치를 떨었다.“폐하께서는 그 여인과 합방할 리가 없어!”입궁하기 전에 이미 더럽혀진 여자이고 뻔뻔하게도 총애를 달라고 황제를 강요한 여자였다.그 시각, 다른 비빈들은 한 자리에 모였다.황제의 승은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그들이었기에 황귀비보다 타격이 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역시 황후의 수완이 대단하네요. 폐하께서 그런 요구를 받아들여 주시다니.”황귀비 쪽 사람인 비빈 강씨가 비꼬듯이 말했다.“그게 무슨 수완이야? 그냥 협박이지! 난 조건이 주어져도 그렇게 비열한 짓은 안 해! 두고 봐! 분명 폐하의 노여움을 사고 내쳐질 거니까!”성난 비빈들이 있는 반면, 현비는 여느 때처럼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다.“입궁하면 다 같은 식구고 황후마마를 축복해 드려야 하는 게 맞아.”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갑자기 찾아온 변화에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지 않은 비빈들은 질투와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자녕궁.태후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뭐라고? 황상이 타협했다고?”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황제처럼 강압적인 사람이 여자의 협박에 타협하다니.계 상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마마, 이게 다 황귀비를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황귀비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정말 몰랐네요. 황후께서는 운이 좋아서 얻어걸린 겁니다.”태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운이 좋았던 게 아니야. 오히려 황후는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영리한 아이였던 거지. 어쩌면 황귀비를 대적하는데는 고상한 사람보다 주변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 황후 같은 사람
소욱은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로 눈앞의 여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비빈 강씨가 얇은 잠옷바람으로 침대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첫날밤이라 긴장한 것인지, 아니면 황제의 노여움이 두려웠던 것인지, 그녀는 고개만 푹 숙이고 온몸을 떨고 있었다.“신첩… 비빈 강씨,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전에 황귀비마마의 궁에서… 폐하를 한번 뵌 적이 있어요.”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황제의 질문에 대답했다.지옥 사자를 닮은 황제의 싸늘한 표정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소욱은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황후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주변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고 강씨는 두려움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폐하, 황후께서 신첩을… 여기로 보냈사옵니다.”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온 유사양은 강씨의 말을 듣고 경악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황후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걸까!사실 갑작스럽기는 비빈 강씨도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자신에게 황제의 시중을 들 기회가 돌아오리라 전혀 생각지 못했다.낮에 황제가 황후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들었을 때도 엄청 불편함을 드러냈던 그녀였다.그런데 저녁이 되어 황후에게서 이런 전갈을 받을 줄은 몰랐다.그녀는 기대 되기도 하고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빼앗길까 봐 이 일을 황귀비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자진궁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녀는 기대와 흥분에 가슴이 설렜다.입궁한지 몇 년이나 되는데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하지만 황제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보더니 죽일 듯이 노려보며 누구냐고 따져물었다.그녀는 자신이 그렇게나 존재감이 없었는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강씨가 눈물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폐하…”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황제의 눈빛은 더 싸늘하게 식을 뿐이었다.소욱은 짜증스럽게 등을 돌리더니 유사양에게 분부했다.“돌려보내거라!”그 말을 들은 비빈 강씨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했다.“그럴 순 없어요, 폐하! 신첩은 황후마마의 지시를 받고 시중을 들러 온 거예요. 신첩이 먼저 오
황제가 영화궁으로 온다는 소식에 연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폐하께서 여긴 왜 오신다는 걸까요?”최 상궁은 마치 이종족을 보는 눈으로 연상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몰라서 물어? 우리 마마께서 대낮에 폐하께 대놓고 총애를 요구하셨잖아. 그런데 밤중이 되어 강빈을 침전으로 보냈으니 폐하를 농락한 거랑 뭐가 달라!”“고귀하신 폐하께서 이런 수모를 어떻게 참겠어?”“마마, 얼른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저희들 목숨이 마마께 달렸습니다.”봉구안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내가 언제 내가 시중을 들고 싶다고 했지?”최 상궁은 더 어안이 벙벙했다.‘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하지만 오해한 사람은 최 상궁뿐이 아니었다.황궁에서 황제의 총애를 갈구하지 않는 후궁은 없었다. 그러니 어렵게 잡은 합방의 기회를 다른 비빈에게 양보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잠들지 못한 비빈들은 자진궁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뭐? 오늘 시중을 드는 사람이 황후마마가 아니었다고? 그럼 누군데?”“비빈 강씨? 강씨가 왜? 걔가 시중을 든대? 아니, 왜?”“그런데 폐하께 쫓겨났다지 뭐야? 강씨는 아마 며칠동안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생겼어.”“그것뿐이겠어? 아마 황귀비도 걔 가만히 안 둘걸?”녕비는 급급히 현비의 궁을 찾았다.두 사람은 평소에도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다.“언니는 그거 들었어요? 오늘 황후께서 비빈 강씨를 폐하의 침전으로 보냈대요.”현비는 두꺼운 망토를 두르고 기침하며 말했다.“수완아, 솔직히 나도 황후께서 이렇게 하실 줄은 몰랐어.”“마마께서는 진심으로 후궁의 안녕을 걱정하셨던 거야.”“언니, 황후를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우리 고모께서 그러시는데 황궁에서 총애를 갈구하지 않는 여인은 없다고 하셨어요.”“황후가 정말 우리를 위해 그랬을까요? 어렵게 얻은 합방의 기회를 다른 비빈에게 양보하면서까지요?”“황후는 고단수예요. 폐하의 승은은 받고 싶은데 용기
봉구안은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이야말로 원래 유씨 가문의 장녀, 유녕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저의 추측일 뿐, 완벽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그녀의 가설은 ‘압명’이라는 미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서여국 황제는 확신하고 있었다.이제야 나이가 맞지 않다는 문제도 해결된 것이다.황제는 봉 부인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전과 달리 한층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너야말로 내 여동생이다. 유씨 부부는 너를 ‘대신 희생될 아이’로 삼아 유녕의 신분을 대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끊어진 비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매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단서다.”봉 부인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말했다.“남제로 돌아가면, 저는 이 사실을 더욱 철저히 조사할 것입니다.”그러자 황제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녀는 봉 부인이 남제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불안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때, 봉구안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어머니께서 선택하셔야 합니다. 저와 함께 남제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서여국에 남으시겠습니까?”봉 부인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갈등했다.지금까지 그녀는 남제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원했다.하지만 봉구안이 말한 모든 이야기가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렸다.만약 정말 자신이 숙연이라면?그렇다면 서여국 황제는 그녀의 친언니였다.지금 황제는 위독한 상태였다.그녀가 떠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만약 이후에 신원이 확실하게 밝혀진다면?그때 후회해도 이미 늦을 터였다.황제는 묵묵히 봉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은 조용하지만 간절했다.그녀에게 있어 봉 부인은 이미 숙연이었다.이 순간만으로도 평생을 기다려온 동생을 만난 것 같았다
봉 부인은 충격에 휩싸였다.자신이 서여국 황제의 여동생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분명 그녀는 부모님의 친딸이었다.마을의 이웃과 친척들, 모두가 증언할 수 있을 터였다.그들은 그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켜보지 않았던가.그러나 봉구안은 차분히 한 장의 그림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유씨 가문의 가족 초상이었다.“이 그림을 보면, 어머니께서는 외조부모님과 닮지 않았습니다.”봉 부인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만약 내가 친딸이 아니라면, 부모님은 왜 나를 키운 것일까? 그리고 그 끊어진 비녀… 그것은 분명 유영의 것이 아니었던가?’혼란스러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그때, 봉구안이 황제를 한번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유씨 부부는 첫째 딸을 낳고 그 아이를 ‘유녕’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유녕은 태어나자마자 몸이 허약했고, 밤마다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악귀에 씌였다’며, 원혼에 의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고 합니다.”봉 부인은 이 이야기에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이야기는 들었어. 부모님께서도 내게 말씀하신 적 있지. 나는 마을의 산파에게 받아졌고, 부모님의 친딸이라고 했어. 어릴 적 병을 고치기 위해 여러 의원들을 찾아다녔다고도 들었지.”봉구안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맞습니다. 유씨 부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의원들은 손을 쓰지 못했죠. 그러던 중, 마을의 한 무당이 아이의 병은 평범한 약으로는 낫지 않는다고 했다 합니다. 다른 생명을 바쳐 아이의 명을 대신해야 한다고요…”봉 부인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그런 미신을 믿었다는 거니?”“네. 당시 조부모님께서는 절박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유녕’이라는 이름을 새겼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어요. 그때 조부모님께서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외조부께서 과거 시험에 합격하며, 새로운 벼
침전 안.황제는 용포를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그때 정희가 방으로 들어서며 눈을 반짝였다.“이모님, 어디 가시려고요?”황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지방의 수로를 점검하러 가는 길이다.”정희는 황제의 팔을 붙잡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이모님은 정말 백성을 위해 헌신하시네요!”“세상에 이모님처럼 성실한 군주가 또 있을까요? 그런데요, 아까 남제 황후를 봤어요. 그 자가 왜 여기에 온 거죠?”황제는 흔들림 없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남제 황후는 황제와 함께 변장하고 각지를 돌며 민심을 살피고 있다. 서여국에도 방문해 두 나라의 동맹을 논의하기 위해 온 것이다.”“아, 그렇군요.”정희의 눈이 반짝였다.“그럼… 황제 폐하도 같이 온 건가요?”그녀는 이모의 건강보다는 남제 황제의 행방에 더 관심을 보였다.그러나 정희는 알아채지 못했다.황제의 입술은 더욱 창백해지고 있었다.그때 모신 상궁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황제 폐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황제는 정희의 손을 가볍게 떼어내며 떠나기 전 당부했다.“너와 네 어머니는 궁에서 잘 머물며, 내일 남제로 출발할 준비를 하거라.”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뒷모습을 배웅했지만, 속으로는 짜증이 났다.‘이모님은 황제가 왔는지 안 왔는지 말도 안 해 주고 그냥 가버리시다니!’그녀는 곧장 어머니에게 달려가 방금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남제 황후가 서여국에 왔다는 말을 듣자, 유영의 얼굴이 굳어졌다.“그 여자가 여길 왜 왔지? 혹시 언니를 찾으러 온 건가?”정희는 어머니의 팔을 꼭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어머니, 그들 모녀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모님께서 우리에게 내일 출사 준비를 하라고 하셨어요. 이번 사절단 파견은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제 혼인은 물론이고, 어머니가 서여국의 황실 상인이 되어 각국의 교역로를 장악할 기회이기도 하잖아요. 지금은 다른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에요.”딸이 드물게 현실적인 판단을 하자, 유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맞아. 지금 그런 작은
서여국 황제의 침전 “다들 물러가거라.” 황제는 신하들에게 명령한 뒤, 모신 상궁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봉구안을 들여라.” 잠시 후, 봉구안이 침전으로 들어섰다. 몸에 꼭 맞는 청색 협소포를 걸친 그녀는 냉정한 기운이 감도는 단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황제는 손짓으로 궁녀들과 내관들을 물리쳤다. 모신 상궁만이 남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봉구안은 곧장 침상에 누운 황제를 향해 직설적으로 물었다. “제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황제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서 이야기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봉구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침상 위 황제를 꿰뚫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황제의 병세는 더욱 깊어졌고,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봉구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황제께서 숙연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제 어머니가 그분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황제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 어머니는 내 부친과 많이 닮…콜록”그러나 그녀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갑작스러운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모신 상궁이 급히 앞으로 나서 황제의 등을 받쳐 주었다. 황제는 손수건을 입에 가져다 댔고,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황제는 겨우 숨을 가다듬고 봉구안을 바라보았다. “황후… 이리 와 보거라.” 그러나 봉구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신 상궁이 다급히 그녀를 보며 말했다. “황후 마마, 황제 폐하는 마마의 이모님이십니다!” 그 말에 봉구안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머니가 숙연이라는 것은 그녀도 의심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기에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황제는 확신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미 무언가를 알아낸 것일까? 황제는 힘겹게 손을 들며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할 말이 있다.” 봉구안은 짧은 침묵 끝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
봉 부인은 절망에 빠졌다.모신 상궁이 봉 부인이 의자에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봉 부인, 괜찮으십니까?”유영 또한 놀란 척하며 다가왔다.“모신, 어서 어의를 불러! 갑자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시잖아!”얼마 지나지 않아 어의가 도착했다.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봉 부인의 상태는 점차 나아졌다.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공허했다.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깊은 혼란과 허무함이 서려 있었다.한편, 정희는 어머니 곁에서 봉 부인을 노려보았다.그녀의 눈빛 속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감히 입이라도 놀려 봐!’하지만, 설령 황제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 해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결국 자신과 어머니야말로 황제의 진짜 혈육이었다.이 늙은 여자는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봉 부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이만 저는 남제로 돌아가겠습니다.”모신 상궁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황제 폐하께 여쭙고 오겠습니다.”유영은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었다.‘황제께서 왜 모신을 직접 보냈을까?’그녀는 황제가 봉 부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곧 그녀의 의심은 사라졌다.황제는 봉 부인의 부탁을 쉽게 허락했다.봉 부인의 출궁 날.유영은 그녀를 직접 배웅했다.이별의 순간, 유영은 애써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가시는 길 안전하시길 바랍니다. 방금 전 편전에서, 제가 한 말이 너무 심했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한평생을 함께한 자매 아닌가요?”그러나 봉 부인은 더 이상 속지 않았다.“유영아, 스스로를 잘 돌보고, 이 곳에서도 잘 지내렴.”그녀는 단 한마디만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유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녀의 눈빛은 서늘했다.‘잘 돌보아야 하는 건 네 쪽이겠지.’서여국 황제의 침전.황제는 병상에 누워 있었고, 오양련이 그녀 곁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 폐하, 틀림없습니다. 봉
봉 부인은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정희가 황제를 탐내고, 황후의 자리를 넘보며 황족의 씨를 이으려 했다니? 이러니 구안이가 저 두 사람을 내쫓을 수밖에 없었구나.’봉 부인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유영, 이 일을 너도 알고 있었니?”더 이상 미안한 감정은 없었다.대신, 단호하고 날카로운 추궁이 자리했다.유영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말했다.“언니, 저희는 한 가족 아닌가요? 정희가 낳은 아이는 황후의 친조카가 될 텐데, 다른 비빈들이 황제를 차지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유영, 너 미쳤구나.”봉 부인은 단호하게 내리쳤다.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자신이 알던 유영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는 더욱 강한 어조로 질책했다.“너희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꾸미는 거니! 구안이는 강직한 아이야. 그 아이 눈앞에서 황제를 유혹하다니, 분노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어?”그 순간, 정희는 더 이상 가식을 유지하지 않았다.비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유혹이라뇨? 웃기지 마세요! 언니의 딸이 무능한 거죠! 황후 자리를 차지하고도 무슨 소용이에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황제는 다른 여인을 찾게 될 텐데, 그때 가서 후회하는 건 바로 언니 딸일걸요?”유영도 나름대로 설득을 시도했다.“언니, 저는 비록 서여국 사람이지만, 우리는 거의 평생을 가족으로 지내왔어요. 제 마음속에서 언니는 여전히 제 친언니나 다름없어요. 정희가 하는 말이 거칠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황후는 아이를 낳지 못하잖아요. 그러니 정희가 대신 낳아주는 게 가장 합리적이지 않겠어요? 결국 다 믿을 수 있는 ‘자기 사람’인데 말입니다.”봉 부인은 이 말에서 그녀들의 진짜 속셈을 알아챘다.‘자기 사람? 가족이라면서 황후의 남편을 탐내?’그녀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유영, 네가 봉 대인과의 혼사에서 상처받았던 건 내 잘못이야. 그래서 나는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따지지 않으마.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네 딸이 내 딸과 황제의 자리를 두고
봉 부인은 유영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지금 당장 섣불리 입을 열 수는 없었다.유영과 서여국 황제가 혈육이라는 증거는 분명히 존재했다.게다가, 설령 유영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닮았다 해도, 그것만으로 반드시 어머니의 친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어쩌면, 유영이 정말 서여국 황제의 여동생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혼란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봉 부인은 한동안 침묵했다.그 모습을 서여국 황제는 깊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그때, 자리에서 오양련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봉 부인, 그동안 숙연을 보살펴 주신 거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갑작스럽게 모신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뿐이니, 부디 서여국에서 며칠 더 머무르시는 게 어떠신지요?”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안심하십시오. 황제께서 이미 남제로 서신을 보내, 부인께서 이곳에 계심을 알렸습니다.”봉 부인은 순간 눈동자를 번뜩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유영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직접 만나야겠습니다.”다소 거친 태도였지만, 서여국 황제는 개의치 않았다.오히려 한층 관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모신 상궁에게 명을 내렸다.“봉 부인을 편전으로 모셔라.”“예, 폐하.”그렇게 봉 부인은 편전으로 향했다.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봉 부인은 그 길이 유난히 길고 험난하게 느껴졌다.마음이 복잡했다.머릿속엔 온통 유영에 대한 생각뿐이었다.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이, 전부 거짓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편전 내부.유영과 그녀의 어머니 정희는 속삭이며 무엇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그러다 갑자기 문이 열리며 봉 부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얼굴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복잡한 감정이 섞인 눈빛이 공중에서 얽혔다.“아, 언니… 언니가 여긴 어쩐 일로…”유영은 감격한 듯 일부러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서둘러 앞으로 다가왔다.그러나 정희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은육은 봉구안에게 밀서를 건넸다.봉구안은 급히 서신을 뜯었다.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서여국 황제의 친필이었다.[자네 어머니가 숙연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기에, 특별히 서여국으로 초청하고자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사히 돌려보낼 것을 약속하겠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무슨 일이냐?”소욱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봉구안은 서신을 접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서여국의 소행입니다.”소욱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그들이 부인을 납치한 이유는 무엇이지?”봉구안은 입술을 조금 열었다가 닫았다.곧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어머니를 숙연이라 의심하는 것 같습니다.”그녀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서여국 황제 또한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을 터.하지만, 직접 사람을 데려갈 줄은 몰랐다.그렇다면, 이 일의 목적은 봉 부인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만약 황제가 어머니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것이라면 당장 목숨이 위험할 가능성은 낮았다.그러나 진짜 숙연은 누구인가?이것이 그녀가 더욱 신경 쓰이는 문제였다.봉구안은 곧 은육에게 명령을 내렸다.“참장부에 어머니께서는 무사하시니,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전하라.”“예!”소욱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내가 사람을 보내 서여국으로 가도록 하겠다. 봉 부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봉구안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부탁드립니다.”소욱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너와 나는 부부인데, 이렇게 예를 갖출 필요가 있겠느냐?”그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에 봉구안은 잠시 긴장을 풀었다.소욱은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말했다.“바람이 차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예, 폐하.”보름 후.봉 부인은 공포와 당혹감 속에 서여국에 도착했다.대체 이들이 자신을 잡아온 이유는 무엇일까?그녀가 궁에 도착하자, 곧바로 황제의 침전으로 안내되었다.그리고 그곳에서, 봉 부인은 한 여인을 마주했다.화려한 금빛 장식을 두른 서여국 황제였다.그녀
10월 중순.무애산의 바람은 점점 더 매서워졌다.겨울이 다가오며 산속의 기운도 한층 더 차가워졌다.그러나 봉구안은 단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날이 아무리 춥더라도, 그녀는 매일 새벽 검을 들었다.그날도 그녀는 평소처럼 홀로 훈련을 하려 했지만, 우연히 현릉풍과 마주쳤다.그는 연못가에 단출한 옷차림으로 앉아 있었다.날카로운 찬바람이 옷깃을 휘날렸지만, 그는 마치 신선이 인간 세상에 내려온 듯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봉구안은 별 신경 쓰지 않으려 했으나, 그 순간 현릉풍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이것이 운명이라면, 피할 수 없습니다.”봉구안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운명이라니?그가 말하는 운명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걸까?혹시…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운명이라는 뜻인가?그녀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더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소욱이 그녀를 찾아왔다.그는 아침부터 도성에서 온 밀서를 확인하느라 늦어진 상태였다.봉구안이 차가운 바람 속에서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본 그는 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무슨 일이라도 있느냐?”봉구안은 차가운 바람을 등지고 그를 바라보았다.눈빛 속에는 한층 더 깊은 결심이 담겨 있었다.“폐하, 돌아가면 후궁을 공평하게 대하시옵소서.”소욱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이냐?”그의 눈에는 불꽃이 스쳤다.그러나 이내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혹시 약이 너무 쓴 것이냐? 그렇다면 이제 그만 마시자.”“나도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을 테니, 그냥 돌아가자.”그는 한숨을 내쉬며, 애써 그녀를 위로하려 했다.하지만 봉구안은 한층 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폐하, 현릉풍 선생께서도 장담하지 못하셨습니다. 설령 치료가 가능하다 해도, 그 결과가 언제 나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황실의 대를 잇는 것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해서, 폐하께서 양자를 들이시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