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성혜인은 반승제를 무시한 채 단지 한서진을 바라볼 뿐이었다.한서진의 뒤에는 도송애의 경호원 두 명이 서 있었는데, 만약 그가 지금 성혜인의 제안에 수락하지 않는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곧이어 그는 가볍게 웃으며 콧등에 걸쳐진 골드 빛 안경을 씩 올렸다.“좋습니다. 그 제안 받아들이도록 하죠.”이로써 성혜인은 목표를 달성했다. 그때 도송애가 입을 열었다.“위약금은 800억입니다. 성혜인 씨, 정말 내주실 거예요?”한서진이 아무리 잘나가고 뛰어난 능력을 갖춘 매니저라고 해도, 그가 성혜인의 회사를 위해 800억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누가 봐도 손해 보는 장사인데, 성혜인이 이걸 한다고? 한서진한테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고?’“반 대표님, 한 매니저는 올해 32살이세요. 확실히 성숙한 남자의 매력이 있습니다.”이건 도송애의 명백한 이간질이었지만, 반승제는 그 말에 속아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되레 무관심한 척, 차갑게 도송애를 바라보며 물었다.“혜인이가 낸다고 했으니, 이만 돌아가 보셔도 되는 거 아닌가요?”그러자 도송애의 안색이 삽시에 어두워졌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멋쩍은 듯 웃었다.“네, 그럼 반 대표님께 더 폐 끼치지 않겠습니다.”뒤이어 그녀는 조강우에게 함께 떠나자는 눈짓을 보냈다.그러나 반승제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도 대표님, 저는 그저 도 대표님만 먼저 가시라고 말씀드린 겁니다.”이 말을 들은 조강우는 깜짝 놀라 순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제가 눈만 있었지, 태산을 못 알아봤습니다! 정말 이 여성분이 반 대표님의 애인분일 줄 몰랐어요!”놀란 그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반승제는 비록 젊지만 수단이 악랄하고 엄해서, 쉬이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도송애도 감히 조강우를 위해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TJ 엔터의 임원이다.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자 입술마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먼저 한 걸음 물러서 떠났다.그러나 모퉁이를 돌 때, 결국 참지 못한 반승제는 성혜인을 힐끗 쳐다보았다.성혜인은 그를 쫓아오지 않았고, 그저 고개를 들어 한서진에게 무언가를 말하다가 “이쪽으로 모신다”라는 손짓을 할 뿐이었다.한서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다른 쪽을 향해 떠났다.반승제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 두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그는 입술을 굳게 오므렸다....성혜인과 한서진은 스카이웨어를 떠나 얘기를 나누기 위해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한서진은 손끝으로 티스푼을 움켜잡고 있었고, 성혜인은 그에게 S.M을 한 번 소개해 주었다.“어때요? 저희와 계약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제 손에 여자 연예인 한 명이 더 있습니다. 하지만 TJ 엔터 소속이에요. 적어도 그 애 자신은 계약을 해지하려고 들지 않을 겁니다. 능력 있는 좋은 애인데...”그 말인즉슨 성혜인에게 그 여자 연예인을 쟁취하라는 뜻이다.한서진의 손에는 그가 무명 시절 때부터 키워 일류 스타로 만든 연예인이 아주 많았다. 때문에 그가 능력 있고 좋은 사람이라고 설명한 이 여자 연예인은 장래에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것이다.성혜인이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인재이다.“네, 그 여자 연예인 이름이 뭔가요?”“송아현이요.”한서진과 협력에 관한 이야기를 한 후, 성혜인은 곧바로 장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으나 여전히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걱정되었던 성혜인은 서둘러 차를 몰아 장하리가 사는 곳으로 향했다.집 문은 곧게 닫혀있지 않았다. 그리고 작게 생긴 틈 사이로 장하리와 방우찬의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네 상사가 한 말 몇 마디 때문에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야?”옆에 있는 방우찬의 어머니, 김정순도 그를 거들었다.“정말 내 아들이 너한테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면 헤어져! 우리 집이 무슨 네가 없으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방우찬 씨가 장 비서한테 얘기 안 한 거예요?”“오빠는 아이가 저한테 짐이 될까 봐 걱정했어요. 어머님도 그렇고요. 그래서 아이는 줄곧 다른 친척네 집에서 커왔습니다.”성혜인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문득 대담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아직 아무런 증거가 없어 지금 장하리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장비서, 지금 집에 가서 그 아이 머리카락과 방우찬 씨 머리카락 한 가닥씩만 가지고 와요.”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누구든 성혜인이 뭘 하려는 것인지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그때, 장하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그럴 리가 없습니다, 사장님. 이런 일로 농담하시면 안 돼요.”성혜인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장비서는 아직 방우찬 씨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리 씨는 아직 외부인인 거죠. 장비서는 정말 방우찬 씨 어머니가 외부인을 위해 자신의 친아들을 밖에서 키웠을 거로 생각해요? 그 아이는 방우찬 씨 본인의 아이일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예전에는 하리 씨가 방우찬 씨에게 가장 좋은 선택권이었으니 그의 어머니도 이 사실이 들킬까 두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더 좋은 선택권이 생겼어요. 그러니 그의 어머니도 더 이상 하리 씨에게 들킬까 두려워하지 않는 거죠. 장비서 일에서는 아주 냉정하고 영리하잖아요, 근데 감정 앞에서는 왜 이렇게 흐리멍덩해요?”말을 끝마치고 나서, 성혜인은 장하리를 끌어 편의점에서 나왔다.“지금 당장 가서 머리카락 두 가닥 가져와요. 장 비서한테 이거 어려운 일 아니잖아요. 우리 같이 가서 친자 확인해 봅시다.”장하리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입을 벌려보았지만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사장님, 우찬 오빠는 그런 일 안 했을 거예요...”“장하리 씨!”성혜인은 어느새 조금 화가 난 상태였다.“정신 좀 차려요. 지금은 그저 추측만 할 뿐이에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 가장 좋은 거죠.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증거를 찾아야 한다.”감
방우찬은 원래 장하리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그 생각을 버렸다.그는 홍규연을 끌어안고 곧장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홍규연 자신도 방우찬이 이렇게 주동적일 줄은 몰랐다. 전에 그를 꼬실 때, 방우찬은 늘 머뭇머뭇 머뭇거렸으니 말이다.‘이제 완벽히 마음을 굳힌 건가?’“오빠, 드디어 그 여자랑 헤어지기로 결심한 거야?”방우찬은 그녀에게 키스하면서 천천히 옷을 풀어 헤쳤다.“조금만 더 시간을 줘.”그러자 홍규연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곧이어 두 사람은 함께 뒤엉키기 시작했다.“좋아, 하지만 오늘 밤 오빠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으면, 나 화낼 거야, 알았지?”방우찬이 피식 웃었다.“만족 시켜주겠다고 약속할게, 우리 공주님.”홍규연도 순간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뒤이어 방 안에서는 야릇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자의 목소리는 특히 높았고, 남자는 가끔 낮은 고함을 질러댔다.홍규연이 남자 친구를 찾는 기준은 꼭 침대에서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녀 역시 방우찬이 이렇게 괜찮을 줄 생각지 못했었는데, 그의 솜씨는 홍규연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게다가 그녀는 방우찬을 매우 좋아했다. 학력도 높고 얼굴도 괜찮으니 말이다.그렇게 두 사람은 새벽 4~5시까지 계속 실랑이를 벌이며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방우찬은 자신이 마치 옛날 공주를 모시던 어린 태감들처럼 홍규연을 만족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오빠, 장하리랑은 자봤어?”그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예 만지지도 못하게 하던데.”방우찬의 말에 그녀는 조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진짜? 두 사람 약혼도 한 사이인데?”“하려고 하면 몸을 떠는 건 물론이고 토하기까지 하더라고. 그 바람에 한껏 오른 흥도 다 깨지고 말았지.”그러자 홍규연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그럼 그 여자에 대해 더 얘기하지 말자, 재수 없어.”재수 없다는 말에, 방우찬은 또 장하리에게 미안함을 느꼈다.하지만 홍규연은 돈도 많고, 얼굴도 예쁘
성혜인은 장하리에게 있어 아주 좋은 상사이자 친구였다.그녀는 머리카락 두 가닥을 넣은 물건을 성혜인에게 건네주었다.곧이어 성혜인은 그것을 받아들고 병원으로 들어가 진세운에게 건네주며 짧게 인사를 나눴다.“되도록 빨리 결과를 받고 싶어요.”그러자 진세운이 눈썹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알겠어요, 지금 동료한테 검사해 보라고 할게요.”진세운은 그동안 줄곧 병원에서 수술을 하느라 바빴다. 그가 왔다는 소식에 많은 환자가 이곳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소문에 대해서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진세운의 부탁 때문이었는지, 결과는 2시간 만에 나오게 되었다.종이 위의 글자를 보고, 장하리는 마치 벼락에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생물학적으로 친자관계임을 확인함.」방우찬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그것도 7년 전에 이미 말이다!하지만 7년 전의 그는 겨우 18살이었다.성혜인은 굳이 결과를 확인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장하리의 표정에서 이미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친자확인서가 장하리의 손가락 사이로 하늘하늘 떨어졌고, 그녀는 다리가 풀려 하마터면 땅에 무릎을 꿇을 뻔했다.“장비서!”성혜인은 서둘러 장하리를 부축했고, 옆에 있던 진세운도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현재 장하리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완전히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그렇게 그녀는 부축을 받으며 병실로 들어갔다. 뒤이어 입에 무언가 달달한 것이 들어왔고, 눈앞에는 온통 형형색색의 사물이 흔들렸다.“일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데다 저혈당까지 온 것 같습니다. 푹 쉬면 될 거예요.”의사가 말했다.성혜인은 병실 침대 옆에 서서 약간 안쓰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7년을 함께한 감정이 결국 온갖 속임수로 가득 찬 것이었다니...누구도 이 충격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그 상대는 다름 아닌 평생을 함께하기로 결정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장비서,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침대에 누워있던 장하리는 그
성혜인은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그의 말이 도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네.”라고 짧게 대답했다.순간 반승제는 기분이 많이 좋아진 듯싶었다. 뒤이어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전화는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그 후로 반승제는 줄곧 서류를 정리하며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했다.10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는 성혜인을 떠볼 겸 문자를 보냈다.오직 하나의 물음표를 말이다.「?」하지만 여전히 메시지가 수신되지 못했다는 문구만 나올 뿐이었다.반승제는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의 핸드폰에 적힌 시간을 한 번 보았다.‘내가 10분 전에 전화하지 않았었나?’그 시각, 성혜인은 한서진과의 계약 건으로 하여 바빴다. 때문에 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반승제에 관해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었다.계약서 정리가 끝나자 누군가가 한서진을 데리고 나갔다.이 다음 성혜인은 또 현재 한서진의 손에 있는 그 여자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송아현을 말이다.그녀는 현재 단 한 편의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했었는데, 확실히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정규적인 연기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처음 출연한 드라마에서 이렇게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는 건, 그녀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성혜인은 어쩐지 한서진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재능 있는 여자 연예인이라면서, 왜 스스로 데려오지 않는 거지?’그는 이미 TJ 엔터의 수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만약 이렇게 유망한 여자 연예인을 그곳에 남겨둔다면, 반드시 그 재능은 썩게 될 것이다.30분 후.한서진은 자신의 SNS에 S.M과 계약 소식을 전했다.그러자 네티즌들은 다시 들끓었다. 한서진은 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매니저이니 말이다.“한서진은 얼마 전 금방 TJ엔터와 계약을 해지하지 않았나? 이렇게 빨리 S.M과 계약을 맺는다고? TJ는 이렇게 쉽게 그를 놓아주고?”성혜인도 앞서 자신의 SNS 계정을 만들었었는데, TJ엔터와의 일로 개설하자마자 20만 명의 팔로워가 생겼다.곧이어 그
그는 핸드폰을 꺼내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반태승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반태승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반승제는 깊게 숨을 들이쉰 다음, 30초 동안 침묵한 후에야 심인우에게 말했다.“반씨 고택에 오늘 저녁 제가 식사하러 가겠다고 전화해 줘요.”심인우는 곧장 그의 본부대로 행동했다.저녁 7시. 반승제는 제시간에 반씨 고택에 도착했다.반태승은 혼자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바둑판 위에 이미 많은 바둑알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아하니 곧 승패가 갈릴 것 같았다.그는 반태승이 바둑돌을 거두어 다시 자리를 찾아 놓으려 하는 것을 보고, 얼른 새 바둑돌 하나를 집어 판에 놓았다.“바둑은 한번 두면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그러자 반태승이 고개를 돌려 반승제를 쳐다보았다.“암, 그렇고 말고, 후회하면 안 되지.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뭐 하러 왔느냐?”나이를 많이 먹을수록 노련해진다고, 반태승은 단번에 오늘 그가 고택에 찾아온 이유를 알아챘다.‘혜인이가 내 말을 잘 들으니, 나한테 도움을 청하러 온게군.’뒤이어 반승제는 시선을 푹 늘어뜨리고 자신이 가져온 선물을 차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할아버지, 이건 할아버지가 가장 원하시던 그림이에요. 제가 외국 경매에서 비싸게 가져온 것입니다.”반태승은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이내 그림을 열어보았다.이 그림은 줄곧 외국의 한 수집가에 의해 세상밖에 나오지 못했다. 그 수집가가 이 그림을 내놓으려 하지 않아 반승제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또한, 이것은 해외에도 그의 자산이 있다는 것을 더욱 증명한다. 심지어 반태승조차도 그의 자산이 얼마나 되는지 잘 알지 못한다.마음에 드는 그림을 내려놓았으나 반태승은 성혜인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고 그저 허허 웃으며 집사에게 음식을 내놓으라 할 뿐이었다.“모처럼 저녁에 이 할애비랑 함께 식사를 다 하려 들고, 마음 좀 썼구나.”자신의 손자가 왜 고택에 왔는지 알면서도, 그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애초에 이 두 사람을 맺어주기 위해 반태승은 일찍이 외국에서 돌
그 말을 듣자 반태승이 피식 냉소했다.“그런 체면 없는 일 나는 못 한다. 내가 그때 혜인이한테 내 손자가 정말 좋은 남자라며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었는데, 결과가 어떻게 됐냐? 혜인이는 너한테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어.”또 한 번 “칼”에 맞자, 반승제는 굳게 입꼬리를 오므렸다.“할아버지도 손주며느리가 혜인이었으면 싶어 하시잖아요.”그러자 반태승이 또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나는 혜인이한테 억지로 시키지 않을 거야. 너 자신한테 재결합할 방법이 없다면 그냥 이쯤에서 나가거라, 내 식사 방해하지 말고.”반태승은 가차 없이 거절하자, 곧이어 반승제는 진짜로 자리에서 일어섰다.떠날 때는 심지어 기껏 가져온 그 그림을 도로 가져갈 준비를 하며 말이다.“야, 이 개자식아!”화가 난 반태승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반승제는 그제야 그림을 내려놓았다.차로 돌아와, 그는 바깥 경치를 한참 바라보더니 결국 심인우에게 말했다.“네이처 빌리지로 가줘요.”‘이 일은 아무래도 천천히 해야겠군.’...한편, 어느 한 술집.반승혜는 술이 떡이 되도록 취해있었다. 반승제가 페니의 신분을 알고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꾸짖은 다음에는 누구도 그 일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다.반태승이 그녀에게 정신과 의사를 한 명 불러 주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현재 반승혜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반승제와 성혜인이 함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극도로 불안한 나머지 매일 잠을 잘 수도 없어, 지금의 그녀는 알코올을 이용해야만 잠시나마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정신이 온전할 때에는, 자신이 납치범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의 굴욕과 납치범이 자신에게 덤벼들었을 때의 그 역겨움이 매일 떠올랐다.휘청휘청 몸을 겨우 일으키며 반승혜는 그곳을 떠나려 했다. 그때, 뜻밖에도 한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자신을 꽁꽁 싸맨 남자는 술집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반승혜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취했지만, 남자가 어설픈 표준어로 묻는 것을 들었다.“성혜인을 아십니까?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