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윤과 허진 모두 당황한 듯 넋이 나갔다. 곧이어 허진의 눈빛에서 독기가 옅게 느껴졌다.놀란 소윤은 허둥지둥 이불로 몸을 가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여보, 어떻게... 왜 온 거예요?”성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놀란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성의 끈을 놓은 지 오래. 정상적인 사고조차 불가능했다.성휘는 마지막으로 눈을 한 번 더 깜빡이고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쿵!성휘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소윤은 놀라 몸에 힘이 풀렸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허진을 가리켰다.“어떡해? 우리 사이를 알아버렸어. 깨어나면 우린 그대로 쫓겨날 거야.”허진은 바지를 입기 시작하면서 무심하게 안경을 썼다.“윤아, 이 사람 깨어나면 안 돼.”소윤은 그대로 굳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무슨 뜻이야?”“이대로 살려둘 수 없어. 몇 년 동안의 계획이 다 수포로 될 테니까.”소윤은 바닥에 완전히 주저앉았다. 성씨 집안의 것을 원하고 허진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건 할 수 없었다.하지만 허진은 이미 성휘 앞까지 걸어간 상태였다. 그는 발로 성휘를 툭툭 쳤다.성휘와 결혼하기 전, 소윤은 성휘 옆에 있는 잘생긴 비서가 마음에 들었다. 성휘보다 어리고 체력도 좋아 매번 침대에서 만족스러운 밤을 보냈다.반명 재혼인 성휘의 나이는 말할 것도 없고, 회사 일을 하다 허리를 다쳐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남자를 많이 경험해 본 것은 아니지만, 침대에서 소윤을 만족시키지 못한 건 예전의 그 쓰레기를 제외하면 성휘 한 명뿐이었다.하지만 허진이 이 부분을 채워 줬기에 소윤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만날 기회가 많아졌고 눈이 맞게 되었다.하지만 허진이 이런 식으로 입막음하려는 생각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허진은 허리를 굽혀 성휘를 밖으로 끌고 갔다.소윤은 놀란 나머지 그를 껴안았다.“진아, 이건 살인이야. 누가 알기라도 하면 우리 다 잡혀간다고.”마흔 남짓한 허진
새벽 3시.성혜인은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성휘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현재 응급실에 있다는 것이다.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급히 외투를 껴입는 성혜인의 얼굴색이 심상치 않았다.예전에 갔던 병원이고 주치의와 인사도 한 적이 있던 터라 주치의는 독단적인 행동으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홀로 복도에 앉아있는 소윤이 보였다. 하지만 아무 염려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착각일까?그때, 성혜인을 발견한 소윤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쟤가 왜 여기 있어?!’성혜인은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는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제가 서천으로 가기 전에 아빠를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간암인 거 알고 있죠? 병원에서 며칠 쉬게 하라니까 아빠가 왜 집으로 간 거예요?”소윤은 불안함에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허진의 말이 떠올라 당당하게 척추를 세웠다.“지금 날 의심하는 거니? 네 아빠가 그룹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생각 안 해? 반씨 집안에서 갑자기 훼방만 놓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네가 반승제한테 잘했어야지! 회사 문제 때문에 네 아빠가 입원도 못 하고 몰래 집으로 온 거야. 마침 도우미들 모두 휴가를 보내 놓았던 터라 아무도 몰랐어. 내가 발견했을 때는 바닥이 온통 피바다였다고.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어!”소윤은 조소를 띄며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었다.“날 의심하다니, 낯짝 좋네.”성혜인은 대답 없이 의자에 앉았다.몰래 숨긴 소윤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성혜인이 왜 이렇게 빨리 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성휘가 깨어나면 산소 호흡기를 빼버려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그래야 후폭풍이 없을 것이다.‘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해야지!’성혜인은 눈을 감았다. 수술실 문이 어서 열리기를 바랐다.성휘와 다툼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혜인의 친아빠이자 오랜 시간 동안 곁에 있어 준 가족이었다.엄마가 떠난 후, 성혜인은 아빠와 의지하며 살아가
‘승제 씨도 오늘 제원으로 오나?’어제 서천에서 반승제의 차를 보기는 했지만 자동차 정비소에 가야 하는 바람에 마주치지 못했다.지금은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곧바로 호텔에 방을 예약했다.해열제도 몇 개 챙겨 나왔다. 당분간은 약 때문에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될 것이다.호텔 로비. 문제가 생겼다. 시스템 착오로 성혜인이 예약한 방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입실한 것이다.“정말 죄송합니다. 보상의 의미를 담아 스위트 룸으로 무료 업그레이드해 드렸습니다.”성혜인은 고개를 숙여 객실 카드에 적혀 있는 번호를 읽었다. 반승제와 같은 층이다.그 층에는 스위트 룸이 두 개뿐이다.성혜인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없이 카드를 집었다.지금은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성혜인은 구석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고, 반승제와 심인우가 모습을 드러냈다.뜻밖의 만남에 반승제는 눈썹을 들썩였다. 심인우의 눈빛도 의미심장했다.두 사람 역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심인우가 방금 전 하던 말을 이어갔다.“단미 아가씨가 탄 비행기가 오후 4시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5시로 레스토랑 예약해 뒀습니다.”익숙한 목소리에 성혜인은 눈을 떴다.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자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엘리베이터 벽을 통해 모든 사람의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반승제는 엘리베이터 앞에 위치했지만 시선은 거울을 향했다.성혜인은 말없이 구석에 서 있었다. 잘 쉬지 못한 탓에 살짝 눈이 감겼다.눈매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성혜인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깨져버린 어여쁜 옥석처럼 외롭고 나약해 보였다.반승제는 문득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서천에서 밖에 서 있던 성혜인을 본 그 장면 말이다.그때 마침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성혜인은 그 햇빛 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지금의 성혜인의 시선은 아래를 향했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고요했다.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반승제는
성혜인의 스위트룸. 이미 잠든 그녀의 눈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잠에서 깨어나니 이미 시곗바늘은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수를 마친 성혜인은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하지만 반승제의 방문 앞을 지날 때, 때마침 방문이 열렸다.순간 엘리베이터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 같았다.‘오후 4시 입국이라고 하지 않았나? 2시인데 벌써 나가시네.’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반승제도 여느 남자들처럼 기다리기 힘든가 보다.“안녕하세요.”충분히 휴식을 취한 성혜인은 이제야 머릿속이 맑아졌다.반승제는 말이 없었다. 성혜인이 이 호텔에, 그것도 같은 층에 왜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다른 꿍꿍이가 없는 거라면 거짓말이지 않을까.무슨 속셈이 있다고 하기에도 이상하다. 그동안 다른 여자들처럼 얇은 옷을 걸치고 그의 방을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두 사람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성혜인은 1층 버튼을 눌렀다.문이 닫히고, 성혜인은 천천히 입을 뗐다.“대표님, 유창목 바닥재는 결국 못 구했어요. 다른 재료로 알아볼게요. 작업은 이미 시작됐고 제가 상황 지켜볼게요. 중간에 다른 아이디어가 생기면 언제든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아주 공적인 이야기였다.‘허,’성혜인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갈 생각이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신이한에게 걸려 온 전화다.살짝 멈칫한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페니 씨, 제가 도와 주기도 했는데 밥 안 사줄 거예요? 그냥 넘어갈 거예요?”임남호의 일을 도와준 건 확실히 큰 빚이긴 하다.하지만 외삼촌과 외숙모가 내린 결론이 떠오르자 마음이 시큰거렸다.“당연히 식사 대접 해야죠. 그런데 일주일 후에 만나도 괜찮을까요? 제가 먼저 연락드릴게요.”같은 시각. 신이한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좋아요. 근데 일주일 후에 먹는 밥이라면, 지금 먹는 것과 다를 거예요.”성혜인은 그 말의 숨은 뜻을 못 알아들은 척하며 냉담하게 답했다.“네. 그럼 그렇게 하죠.”전
병원 중환자실에 도착한 성혜인. 소윤은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미처 성혜인을 발견하지 못한 소윤은 의사에게 끊임없이 물었다.“저희 남편 언제 깨어나요? 들어가서 볼 수 없을까요? 최선을 다 해주셔야 해요.”그녀의 주위에는 두 간호사가 붙어있었다. 소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이미 몇 번이고 대답해 드렸어요. 3일 정도는 상태가 어떤지 천천히 지켜봐야 해요. 조급해 마시고 일단 앉으세요.”“안에 들어가고 싶어요.”“죄송해요. 지금은 들어갈 수 없어요. 나중에 면회시켜 드릴게요.”소윤은 마음이 놓였다. 들어가는 순간 호흡기 먼저 뽑아버릴 생각이었다. 절대로 성휘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후회의 여지는 없다.시야에 성혜인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곧바로 얼어붙은 소윤은 황급히 간호사의 손을 뿌리쳤다.성혜인은 복도 의사에 앉아 조용히 의사의 소견을 기다렸다.소윤은 좌불안석이었다. 손에는 이미 땀이 맺혀 있었다. 혹여 성혜인에게 꼬리라도 밟힐까 차마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그때,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혜원이었다.성혜인을 발견한 성혜원의 동공이 빠르게 수축했다. 하지만 금방 연약하고 불쌍한 목소리를 장착했다.“엄마, 아빠는 어떻대요?”성혜원이 오자, 소윤은 그제야 불안한 감정을 떨칠 수 있었다.“나도 몰라. 혜원아, 엄마가 너무 경황이 없네.”만약 성휘가 깨어난다면 경찰서에 신고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들은 끝장이다.성혜원은 소윤이 성휘를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SY그룹의 지분도 아직 완전히 그들의 손에 넘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괜찮을 거니까 걱정 마요. 하늘이 도와줄 거예요.”말을 마친 성혜원은 무표정으로 앉아있는 성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언니.”지난번에 그렇게 난리를 쳐 놓고, 마치 기억상실증이 걸린 듯 행동했다.뻔뻔한 건지, 대담한 건지.성혜인은 아무런 반응 없이 중환자실만 응시했다.“언니, 아빠가 큰 사고를 당했는데, 승제 씨는 와 보지도 않아?”역시
반승제가 막 차에 오르던 그때, 윤단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승제야, 나 벌써 20분째 기다리고 있어. 어디야?”반승제는 손목시계를 쳐다봤다.“이제 막 회의 끝났어. 20분 후에 도착해.”“넌 여전히 일이 먼저구나. 어떻게 날 이곳에 세워 둘 수가 있어!”“어디 들어가서 앉아 있어.”윤단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시울이 붉어질 뿐이었다.“너 변했어. 예전에는 안 이랬잖아.”반승제는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손으로 문지르며 무덤덤하게 답했다.“곧 도착해. 레스토랑 예약해 뒀어.”그제야 윤단미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알았어, 기다릴게.”전화를 끊은 후, 반승제는 눈의 초점이 흐려졌다.앞좌석에 앉은 심인우는 사이드미러로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조용히 운전대를 돌렸다.20분 후, 차가 공항에 멈춰 섰다.윤단미는 진작 밖에 나와 있었다. 반승제의 차를 발견하는 순간 눈을 반짝이며 달려와 차 문을 열었다.“승제야!”애교 섞인 목소리로 소리치며 반승제를 껴안았다.“정말 보고 싶었어.”반승제는 그대로 굳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윤단미는 잠시 안겨 있다가 씩 웃었다.“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심 비서, 빨리요. 저 배고파요.”그녀는 반승제를 감고 있던 팔을 풀고 옆자리에 앉았다.반승제는 손을 뻗어 윤단미의 캐리어를 발밑으로 밀어 넣었다.윤단미는 아주 작은 캐리어만 하나 챙겨와 굳이 차 트렁크를 열 필요가 없었다.그의 행동에 윤단미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반승제는 여전히 멋졌다. 여자를 대하는 모습까지 품위가 느껴졌다.윤단미는 발그레한 얼굴로 입꼬리를 귀엽게 올렸다.“아까 변했다고 한 거 미안해. 하나도 안 변했네. 여전히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데 말이야.”반승제는 아무 말 없이 캐리어를 정리하고 뒤로 몸을 기댔다.“외국 생활 어땠어?”“이제야 물어보면 뭐 해, 전화도 안 해주고. 내가 먼저 연락 안 했으면 나랑 평생 연락 안 할 생각이었던 거 아니야?”윤단미는 속상했다.윤씨 집안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윤단미는
윤단미는 대단한 스캔들이라도 들은 것처럼 토끼 눈을 했다. 하지만 금방 기분 나빠졌다.‘여기저기 꼬리 치고 다니는 여자네.’반승제와 이혼하기도 전에 벌써 다음 남자를 찾아놨다니.하지만 눈이 너무 낮았다. 신이한 역시 꽤 괜찮은 집안 출신이지만 반승제와 반씨 집안에 비하면 터무니없었다.어쩌면 신이한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걸지도.윤단미는 마음속으로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벌써 그분이랑 만나 본 거예요? 마음에 들어요?”신이한은 계속 웃었다. 의미심장한 미소였다.“물론이죠. 제가 많이 좋아해요.”반승제의 몸은 더 차가워졌다. 눈동자도 블랙홀처럼 검게 변했다. 그는 일말의 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좋아하면 양보해 드리죠.”무미건조한 말투였다. 서류상으로 아내인 그 여자를 전혀 마음에 품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심지어 그 여자를 언급하는 순간 미간 사이에서 느껴지던 냉기가 더 강해졌다.“너무 좋네요. 대표님, 후회하지 마요.”반승제는 미간을 좁혔다. 의심쩍은 말이었다.‘취향이 이렇게 독특했나?’냉기를 머금은 눈빛을 거두고 반승제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그 뒤를 따르던 윤단미는 몸을 돌려 신이한을 보며 씩 웃었다.“걱정 마요. 승제는 후회 안 해요. 할아버지가 승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올린 결혼식이니까. 그것도 생판 모르는 여자랑요.”윤단미의 눈빛은 득의양양해 보였다. 최대한 숨기려 했지만 신이한의 눈에는 다 보였다.입구에 서있던 신이한도 그들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그 역시 이곳에 식사하러 왔다.그가 예약한 위치는 반승제의 테이블과 멀지 않았다. 그러기에 반승제가 윤단미에게 메뉴판을 건네자, 윤단미가 빙긋 웃으며 그에게 하는 말이 다 들렸다.일 키우는 걸 좋아하는 신이한은 그 장면을 찍었다. 게다가 반승제와 윤단미가 따뜻한 시선으로 눈을 마주치는 것처럼 각도를 잡았다.그 사진을 성혜인에게 보내며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남편에게 곧 여자친구가 생기겠네요.」성혜인과 반승제 사이에
위층에 올라온 소윤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걸 벽면을 짚고 겨우 버텼다.이 고통을 견딜 수가 없던 소윤은 곧바로 성한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이를 듣고 화가 난 성한이 말했다.“어머니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허진이 좋으면 옆에 두기만 하면 되잖아요. 걔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어떡해요!”소윤도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한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바람피우는 걸 성휘 씨가 봐 버렸어. 깨어나면 아마 우리 일가족 모두 쫓겨날 거야.”성한도 조급했지만, 허진이 잘못한 게 없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이미 이 지경까지 된 거 절대로 성휘가 깨어나면 안 된다.하지만 그래도 화가 났다. 소윤은 외도할 때마다 성씨 저택 별장에 데려갔고, 심지어 저번에는 별장에 돌아가던 성혜인과 하마터면 마주칠 뻔했었다. 그래서 이제는 정신 차리고 조심할 줄 알았는데 또 똑같은 짓을 한 것이다.“저는 도대체 걔가 어머니를 어떻게 홀렸는지 모르겠네요!”성한은 허진이 분명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아 표정이 일그러졌다.만약 성휘가 정말 죽는다고 해도 성씨 집안의 주식 지분을 남인 허진에게 절대로 줄 수 없다.“한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줘. 성혜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성휘 씨 옆에 있어서 내가 기회를 만들 수가 없어. 만약 성휘 씨가 깨어나면...”하소연할 사람이 생긴 소윤은 냉정을 많이 되찾았다.“어머니, 제가 방법을 어떻게 알겠어요. 요즘 성씨 집안 쪽도 난리예요. 사업이 전부 가로막히고 임원들도 아수라장인데, 어머니는 정말 일 벌이시는데 뭐 있어요. 정말 창피합니다!”아들한테 이런 말을 들으니, 소윤은 참기 힘들었지만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소윤은 만약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로 허진 때문에 도우미를 내쫓지도 않을 거고 허진과 별장에서 불륜을 저질러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지 않을 것이다.성한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신다 하더라도 말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