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만약 정말 나갈 수 있다면 목걸이 따위는 대수롭지 않았다. 원진우가 준 건 하나도 갖고 싶은 게 없었다.그리고 진우희에게 약속한 돈을 주며 목걸이는 회수하지 않을 생각이었다.하지만 진우희의 상태를 보아하니 말해봤자 오해만 깊어질 것 같아 아예 입을 다물었다.진우희는 윤아름이 후회할까 봐 두려운지 잽싸게 입을 열었다.“제가 나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윤아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그런 진우희를 보며 물었다.“선생님이 말하는 대로 할게요.”진우희가 말했다.“이따 내가 문을 열면 집사보고 내려오라고 하세요. 그때 소지품 검사만 피하게 해주면 돼요.”“그래요.”진우희가 벨을 누르며 나가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원진우는 나름의 방어선을 두 개나 설치했다. 들어오면서 한번 검사하고 나가면서 한번 검사했다. 주요하게는 윤아름에게 주지 말아야 할 물건을 줄까 봐 막는 것이었다.저번에 부탁한 약재는 아주 작았기에 침구 파우치에 넣으면 발견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목걸이를 들고 나가야 했기에 조심해야 했다. 다만 진우희에게도 플랜B는 있었다.진우희의 브라는 탐지 센서를 막을 수 있는 브라였다. 어떤 탐지기든 브라 안에 숨긴 물건은 탐지해 낼 수 없었다.이 목걸이를 손에 넣기 위해 진작 준비한 속옷이었다. 하지만 저번에 안타깝게 기회를 날려 먹은 뒤로 이 목걸이에 접근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비록 탐지 센서를 막을 수 있는 브라를 입었지만 금속 탐지기를 거치지 않으면 좋은 건 확실했다.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진우희가 예의 바르게 집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진우희는 어떻게 해야 사람의 환심을 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반적이지만 무던한 외모라 사람들이 경계심을 풀기에는 제격이었다.또 바뀐 진우희를 보며 윤아름은 아까 본 진우희가 환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와는 정말 생판 다른 진우희였다. 마치 무언가에 접신한 것처럼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집사도 뭔가 얌전해 보
집으로 돌아온 원진우는 기사가 차에서 내리고 나서도 혼자 차에 남아 잠깐 눈을 감고 휴식했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은 차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원진우가 차에서 내리려는데 차에 올라탄 진우희가 탐욕스러운 웃음을 짓는 걸 보게 되었다. 평소 진우희는 종래로 웃지 않았다. 적어도 원씨 저택에서는 웃는 걸 본 적이 없었고 일관되게 침착한 자세였다.아직 원씨 저택을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헤벌쭉 웃는다는 게 이상했다.원진우는 많은 사람을 만나봤기에 진우희의 미소가 탐욕스럽다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평소 찍소리도 못하던 가정 주치의의 얼굴에 이런 미소가 나타났다는 건 매우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그 차는 시야에서 사라졌다.원진우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지시했다.“진 의사가 탄 차 미행해서 보고해.”하루 종일 밖에서 일 처리하느라 원진우는 기분이 매우 안 좋은 상태였다.게다가 요즘 누군가 의도적으로 외국에 있는 저택에 접근했지만 남아서 순찰을 돌던 경비에게 잡혔다는 소식도 들었다.경비는 취객이 호화로운 별장을 보고는 창문으로 기어들어가 안에서 한잠 자고 가려고 들어갔지만 이렇게 호화로운 별장은 처음이라 안에서 구경하기 시작했다고 했다.경비가 그를 발견했을 때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원진우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든 간에 경찰이 출동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기에 경비는 취객을 한바탕 뚜드려 패고는 강에 버렸다고 전했다.그러면서도 경비는 그 사람이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지 아니면 무심코 접근한 건지는 알수 없다고 했다. 술을 먹은 건 사실이었고 근처 공원에 노숙자가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주변 사람들 말로는 이 취객이 공원에서 노숙하는 걸 본 적이 있다고 했지만 원진우는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술에 취한 취객이 여섯이나 되는 경비의 순찰에도 불구하고 안으로 들어갔고 들어간 것도 모자라 안에서 한참 돌아다니기까지 했다.경비들은 모두 원진우가 훈련한 엘리트였다. 그 취객이 겉보기와 같이 단순한 노숙자인지는
집사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네, 가주님.”‘생강차?’원진우의 입꼬리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윤아름은 입맛이 까다로웠기에 생수를 마셔도 고산에서 비행기로 운송한 물만 마셨다.원진우도 윤아름의 입맛에 맞춰 한 번도 빠짐 없이 그렇게 해줬다. 지금 윤아름이 아무렇게나 따라 마시는 물도 다 비행기로 운송한 물이었다. 그러니 기억을 잃었어도 물맛은 절대 잊을 리가 없었다.그런 윤아름이 오늘 생강차를 먹겠다고 한 건 절대 고산수가 질려서가 아니라 생강차를 만들려면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시간을 벌려고 한 것 같았다.집사는 원진우의 얼굴에 걸린 서늘한 미소에 마음이 불안해져 조심스럽게 물었다.“가주님, 혹시 틀린 구석이라도 있나요?”“아니요.”원진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손에 들었던 와인을 원샷하더니 와인잔을 거칠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집사님, 가정 주치의 좀 새로 찾아야겠어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가주님, 혹시 진 의사님이 뭘 잘못했나요...”집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자 원진우가 서서히 눈꺼풀을 들더니 집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집사는 하려던 말을 되레 삼키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입을 잘못 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얌전한 인상을 가진 진우희를 좋게 보고 있었다. 게다가 진우희는 직접 만든 비누와 향초를 종종 가져다주곤 했다. 비싼 물건은 아니었기에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중요한 건 그 물건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향초는 한약 성분이 들어가 매일 사용하면 수면에 좋다고 했다. 사용해 보니 확실히 잠은 잘 왔다.집사는 불면증으로 몇 년을 고생하고 있었다. 나쁜 일을 하도 많이 해서 밤만 되면 억울한 원귀들이 꿈에 나타났다.그렇게 집사는 향초에 점점 빠져들었고 진우희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하지만 집사는 이런 물건을 받았다고 해서 진우희에 대한 검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원진우가 뽑은 사람이었기에 하는 바 업무를 착실히 완성하는 걸 철칙으로
원진우는 윤아름의 방으로 향했다. 윤아름은 창가에 앉아 창문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지금 이 계절은 해당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었다. 오렌지색, 빨간색, 핑크색, 하얀색이 섞여 있어 참으로 아름다웠다.지하실은 위와는 달리 꽃을 키워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꽃을 유독 좋아하는 윤아름을 생각해 원진우는 많은 꽃을 심어줬다. 그중 해당이 피어있는 시간이 제일 길었고 일 년 사시절 꽃을 볼 수 있었다.그리고 겨울이 될수록 더 흐드러지게 피었다.하지만 해당은 손이 많이 가는 꽃이었다. 햇볕을 너무 오래 쬐어도, 너무 짧게 쬐어도 안 될뿐더러 흙이 너무 말라도, 너무 젖어도 안 되었다. 지하에 키우려면 빛을 일정하게 조사하면서 환기해 줘야 했다.원진우는 큰 심혈을 기울여 전문적인 인원들을 불러서 가꾼 끝에 이렇게 예쁜 해당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저택을 옮겨도 계속 사람을 불러 꽃만큼은 계속 피어날 수 있게 특별히 신경 썼다.원진우는 몇몇 저택 지하실을 메꾸면서 파괴된 생화가 떠올랐다. 가꿀 때는 참 어려웠는데 망치려니 한순간이었다.꽃이나 여자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귀한 아가씨라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아주 쉽게 망칠 수 있었다.하지만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서 가꿨는데 지금 망가트리면 너무 아까울 것 같았다.“뭘 그렇게 봐?”원진우가 물었다.윤아름은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원진우가 창가로 다가가 밖에 핀 해당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윤아름을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예쁘다.”밖에 핀 해당이 예쁘다는 건지 아니면 윤아름이 예쁘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윤아름은 대꾸하지 않았다. 여전히 흥미가 별로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윤아름은 원진우 앞에서 늘 이런 표정이었다.우울할 때가 기쁠 때보다 많았다.“아름아, 어디 아파?”원진우가 윤아름에게 물었다.“집사가 그러던데. 생강차 끓여달라고 했다고.”윤아름은 원진우가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다. 원진우가 묻는 말이면 다 조심해야 했다.
그때 가서 손해를 보는 건 결국 그녀다.이 생각이 떠오르자 윤아름은 속이 울렁거렸다.‘마흔이 넘은 남자가 어쩜 이런 일에 이렇게 정력이 넘칠 수 있지?’온갖 방법을 동원해가며 원진우는 질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윤아름은 일부러 투정을 부리며 말했다.“진우 씨는 말한 거 안 지키잖아. 괜히 나 걱정하는 척하지 말라고.”그러자 원진우는 앉아서 그녀를 살짝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내가 언제 말한 걸 안 지켰어?”“나 데리고 나가서 놀아주겠다고 했잖아.”윤아름은 순진한 소녀처럼 말했지만 그 연기는 정말 진짜 같았다.사실 그녀의 마음도 여느 소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인생의 절반을 이 남자에게 휘둘리고 갇힌 채로 살아왔으니 세상과 사람을 제대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성장하거나 성숙해질 기회도 없었다.윤아름의 마음속 깊은 곳은 여전히 순진했고 자기가 원진우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원진우는 그녀의 허릿살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그런 일로 나한테 화난 거야?”윤아름은 불편한 듯 몸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손대지 마요. 난 화낼 자격도 없으니까 굳이 상기시킬 필요는 없잖아요, 가주님.”그녀는 원진우를 비꼬았다.하지만 원진우는 화를 내지 않았고 되레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내일.”“뭐라고?”“내일 너 데리고 나가 줄게.”원진우가 다시 한번 확인해 보이자 윤아름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드디어 나갈 수 있게 됐어!’밖에 나갈 수만 있다면 기회를 잡아야 한다.그녀는 진우희에게서 전달받는 과정에 실수가 있을까 두려웠다.그래서 더 안전하게 직접 바깥에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소원이 이루어졌으니 나를 좀 기쁘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원진우의 눈빛에서 비쳐오는 그 의도는 뚜렷했다.“...”윤아름은 원하지 않았지만 이 시점에서 그를 화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그래서 그가 다가와 키스했을 때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반항하지 않았다.하지만 남자는 그저 윤아름의 입술을 깨물고 잠시 빨다가 숨이 가빠진 그
곧 원진우는 일어나서 양복을 정리하며 말했다.“좀 일이 있어서. 밤에 일찍 자. 굳이 나 기다릴 필요 없어.”그렇게 윤아름이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순간, 원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일 나갈 때, 그 블루하트 목걸이 꼭 하고 나가.”윤아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뭘 알아챘나?’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오르는 듯했다.하지만 원진우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너 그 목걸이 하면 정말 예쁘더라. 난 그게 참 마음에 들어.”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잠시도 멈추지 않고 그는 뒤돌아 문밖으로 나갔다.윤아름은 그가 사라지자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려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방금 정말 아찔했어...’내일 목걸이를 하지 않고 나갈 핑계는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전에 반드시 진우희에게 바로 떠나라는 연락을 해야 했다.하지만 다음번에도 속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그녀는 곁길로 돌아서 집사에게 접근해 진우희의 소식을 조금 캐물어 볼까 고민했다.진우희는 그녀가 생각한 것만큼 순수하고 착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영리했다.집사가 뭔가 귀띔하면 진우희는 즉시 경계할 테고 그때 곧바로 떠날 것이다.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지금은 오히려 진우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원진우 같은 미친 남자 밑에서도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원진우는 대문을 나서더니 차에 올라탔다.곧이어 조수석에 있던 비서가 수놓인 천을 건넸다. 그 천은 다소 거칠어 보였다.비서는 보고하듯 말했다.“진우희 씨께서 이건 보내고 싶지 않아 그냥 아무 쓰레기통에나 버린 것 같습니다.”원진우는 그 거친 자수를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불거진 그의 핏줄이 분노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흥...”그는 냉소를 흘렸다.정말이지 모든 게 계산된 행동이었다....한편 진우희는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고 자수가 수놓인 손수건은 버린 상태였다.처음부터 윤아름의 일을 도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원하는 건 이미
“똑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급하지 않고 되레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진우희는 가족 중 누군가 찾아온 줄 알고 대충 외투를 걸쳤다.드레스와 목걸이는 그대로 둔 채, 외투로만 대충 가리고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점잖고 품격 있는 얼굴이 있었다.그 얼굴을 보고 혼이 나갈 정도로 놀란 진우희는 몇 초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곧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미소는 어딘가 불길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날 안으로 들이지 않을 건가?”진우희는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가, 가주님...”원진우는 그녀의 옆을 스치며 자연스럽게 들어와 유일한 소파에 앉았다.그러고는 문 앞에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진우희를 바라보며 그는 명령했다.“문 닫고 이리 와.”진우희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닫고 소파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지만 감히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얼굴엔 온통 공포의 기색이 가득해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진우희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무서워?”원진우는 상냥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나?”진우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원진우가 다른 일로 자신을 찾았기를 바랐지만 그 순간 그녀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온몸이 떨리며 그녀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가주님, 제발 저를 용서해 주세요.”진우희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며 말했다.“저, 저도 사모님께 강요당한 거예요...”“응?”원진우는 목소리를 높이며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 사람이 어떻게 너한테 강요했는데?”그는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편안한 자세로 물었다.“자세히 말해봐.”그러자 진우희는 외투를 꽉 움켜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사모님께서 저에게 외부로 신호를 보내라고 하셨어요. 만약 제가 거절하면 이유를 만들어 가주님께 제가 잘못했다고 말해서 저를 죽이실 거라고 하셨어요. 너무 무서워서 거부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도와드린 거예요...”“무슨 일을 도왔나?”원진우는 변함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가주님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서요...”말을 하면서 몰래 원진우의 표정을 살피던 진우희는 그의 얼굴에 여전히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을 보고는 점점 더 여유를 찾았다.그녀는 능숙하게 말을 이어갔다.“가주님께서 저에게 너무 잘해 주셨잖아요. 저는 은혜를 알고 보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전 사모님의 명을 어길 수 없습니다. 감히 그럴 처지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앞에서는 직접 거절하지 못하더라도 뒤에서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가주님, 저는 절대로 가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언제든지요.”진우희는 충성을 맹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이 말은 미끼였다. 그녀는 원진우의 반응을 시험하고 있었다.원진우는 이미 마흔이 넘었지만 꾸준한 운동 덕분에 서른 살 초반의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하여 얼굴 역시 삼십 대 남성의 매력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어느 면에서 봐도 그는 마흔이 넘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진정한 부자는 미용 시술 따위가 필요 없다. 그들의 젊음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길고 더 오래 지속되는 것 같았다.이 모든 것은 자신감 있는 태도와 절제된 생활 리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처음에 진우희는 원진우를 두려워했지만 그가 윤아름에게만 한없이 헌신적인 모습을 보고 나서는 마음속에 미묘한 감정이 일기 시작했다.그녀는 윤아름이 원진우의 사랑을 받는 것이 부러웠다.되레 윤아름이 이토록 뛰어난 남자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도망치려 하는 것 같았다.‘세상에 과연 사모님을 이렇게 사랑하는, 원진우 가주님만큼 훌륭한 남자가 또 있을까? 이런 남자의 사랑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일이 아닐까?’진우희는 윤아름이 이걸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도망치려는 생각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진우희는 그녀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를 억누르며 그 감정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다.그러나 그 마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원진우 같은 남자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그의 품격, 외모, 능력, 힘.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모두 완벽했다. 천 명 중 한 명이 아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
연기가 제법인 황진수는 진짜로 배가 아픈 척했고 심지어 자신의 혀를 깨물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이마에 땀까지 흘렸다.순간 멍해진 소원이 한마디 물었다.“왜 그래요? 의사를 부를까요?”황진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요. 화장실 갔다 오면 될 것 같아요. 이것 좀...”그는 손에 들고 있던 죽을 높이 들었다. 혹시라도 소원이 받지 않을까 봐 일부러 그녀의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소원 씨, 이것 좀 부탁드릴게요. 육 대표님에게 전해주세요. 의사가 염증이 생길 수 있으니 지금 차가운 걸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황진수는 말을 마친 뒤 재빨리 사라졌다.죽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던 소원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육경한이 있는 VIP층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한 소원은 죽을 경호원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육경한 병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사실 조금 전 황진수는 그녀와 육 대표를 만나게 하기 위해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바로 철수하라고 했다.소원이 문을 두드리자 방안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와.”소원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고서를 보고 있는 육경한은 소원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황진수인 줄 알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그냥 거기에 둬.”테이블 위에 놓여진 손도 대지 않은 음식과 손에 든 죽을 번갈아 본 소원은 육경한이 갑자기 죽을 먹고 싶어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다.다만 이 죽 가게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제 샀던 죽 가게와 이름이 비슷한 것 같았다.하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손에 든 죽을 놓은 소원은 육경한이 여전히 그녀를 알아채지 못하자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육경한이 고개를 들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소원?”소원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황 비서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나더러 대신 갖다 주라고 했어.”육경한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나를 보러 온 줄 알았네.”약간 서운함이 담긴 말투에 소원은 이왕 온 김에 몇 마디 안부는 주고받아야
사생아가 많은 방현수는 여자아이인 방민아 하나쯤은 포기할 수 있었다.그리고 방민기는 이미 판결이 났고 방씨 가문이 아무리 인맥이 넓다고 해도 여론이 너무 떠들썩했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그 일 이후, 방현수의 정신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가장 기대하던 두 아이가 동시에 문제를 일으켰으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방민아는 아마도 방현수의 비밀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방현수가 돈과 힘을 들여 그녀를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자신의 추측을 말한 황진수가 한마디 보탰다.“방민아 씨가 역시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방현수의 마음도 바꾸고요.”육경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방민아가 나오면 소원은 그녀의 첫 번째 타겟이 될 것이다. 여자들 사이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욱경한은 잘 알고 있었다.육경한이 황진수에게 말했다.“방씨 가문의 움직임을 주시해 봐. 그리고 방민아가 나오면 반드시 24시간 내내 감시하여 소원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황진수가 말했다.“알겠습니다.”육경한이 또 물었다.“진아연 쪽은 어때, 소식이 있어?”진아연이 또 도망쳤다. 지난번 병원에서 목숨을 건진 후 몸이 나아지자 간호사가 한눈을 판 사이 몰래 빠져나갔다.아마도 육경한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그래서 육경한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걱정되어 기회를 잡아 도망친 것이다.하지만 소원의 아버지 일도 그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육경한은 그녀에게 확실히 물어봐야 했다.이때 황진수가 말했다.“아직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 출입국 사무소에 다 물어봤지만 아직 다른 데로 갔다는 소식은 없습니다.”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긴장을 놓치면 안 돼. 진아연이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야.”황진수가 알겠다고 하자 육경한도 조금 지쳤는지 한마디 했다.“이만 나가 봐.”황진수는 집사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를 육경한이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보고 한마디 말했다.“육 대표님, 입에 맞지 않아서 안
병실 밖에 있던 황진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감정적 가치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이지애는 가스라이팅에 정말 능숙했다.육경한에게서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그녀가 과연 육경한을 걱정하는 척하며 그런 감정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었을까?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탐욕스러워지다니...솔직히 말해서 먼 친척이 가까운 이웃만 못 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황진수가 소리 지르는 이지애를 끌어내어 경호원들에게 넘기자 이지애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감히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내가 육경한의 누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오늘 나를 무례하게 대한 일, 나중에 분명 후회할 때가 있을 거야.”황진수는 냉정하게 말했다.“여사님, 더 이상 자신을 육 대표의 누나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저 사촌 누나일 뿐인데 왜 항상 ‘사촌’이라는 말을 잊으시는 건가요? 밖에서 본인을 육 대표의 친누나라고 말하며 사기를 치다 보니 입에 붙어서 못 고치는 건가요?”황진수는 이지애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육경한의 누나라는 명목으로 많은 회사 대표들에게서 이익을 취했다. 또 육경한과도 자주 만났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진짜로 육 대표의 누나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이지애는 결국 자업자득의 꼴이 되었다.이지애가 분노하며 말했다.“너 같은 놈은 평생 이 꼴로 살 거야. 개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해. 잘 들어, 경한이는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나를 누나로 생각할 거야. 그때면 널 첫 번째로 해고할 테니 두고 봐!”“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황진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정말!”이제 육경한이 그녀의 뒤를 봐주지 않으니 황진수도 당당하게 억지를 부리는 이지애를 무시하며 바로 경호원들에게 말했다.“데려가세요. 앞으로 육 대표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세요.”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지애는 욕을 하면서 문을 잡고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찾아와 이지애를 보더니 통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
“경한아, 누나가 예전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잊은 것은 아니지? 그때 너에게 돈을 준 것 때문에 네 형부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너는 몰라. 그 자식이 죽을 때까지도 내가 친정에 돈을 준 일을 잊지 않고 있었어...”이지애가 끊임없이 과거의 일들을 들먹였지만 육경한은 그런 그녀가 단지 시끄럽다고 느껴졌다.원래부터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지애가 그때 돈을 준 이유는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육경한이 냉정하게 말했다.“누나, 그동안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그때 나에게 몇십만 원을 준 이유가 우리 엄마에게서 4억원을 빌렸기 때문에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후 누나는 나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와서 차용증을 찾아내 파기했잖아요.”육경한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이지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마음속은 아주 불안했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급히 부인하며 말했다.“경한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네 엄마의 돈을 빌렸다고 그래? 네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비록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야!”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육경한이 침묵하자 이지애는 육경한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 웃으며 말했다.“경한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보아하니 일부러 우리 사촌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사람이 말한 것인가 본데 나는 너희 집 돈을 빌리고 안 갚은 적이 없어.”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육경한은 이지애에 대한 좋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얼마 전, 집안 하인이 청소를 하면서 다이어리를 하나 발견했다. 펼쳐보니 그 안에 육경한의 엄마가 쓴 채무 리스트가 있었고 그중에 이지애가 육씨 가문에서 4억원을 빌린 내역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육경한의 엄마가 겨우 모은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그리고 날짜도 기록되어 있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이지애가 미용원에 투자하여 금방 개
이 말은 육경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차라리 묻지 말걸... 주석훈은 대체 무슨 친구란 말인가? 단지 몇 번 만난 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새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육경한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황진수는 급히 말했다.“병원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소원 씨가 병문안을 잠깐 왔다가 저녁에 바로 갔대요.”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육경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황진수도 더 이상 이것과 관련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업무 보고를 계속했다. 그런데 보고를 하던 중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왔다.육경한의 사촌 누나 이지애가 병문안을 온 것이다.“경한아, 우리 연주 좀 살려줘!”이지애는 육경한과 다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울부짖었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지애는 육경한에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울부짖었다.“경한아, 오늘 아침에 연주를 보러 갔는데 애가 살이 쏙 빠졌어. 얼굴도 초췌해지고 말이야. 안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몸에는 상처투성이야.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한 애인데 또 그런 곳에 들어갔으니 버틸 수 있겠니...”이지애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딸에 대한 애틋함에서 나온 눈물은 진심인 것 같았다.이번에는 육연주의 잘못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육연주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만 말하며 육경한의 동정을 얻으려고 했다.이 일로 육경한도 다쳤기 때문에 오늘 아침 이지애는 육연주를 욕하기도 했다. 건드려야 할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삼촌을 건드려 병원 신세 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가족에게 폐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다.실제 피해자가 육경한이라면 육경한이 합의서를 써주면 육연주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육연주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소원의 진술 때문에 육연주는 고의 상해죄로 기소되었다.이 죄는 아주 무거운 죄로 변호사와 상담 후 최소 감옥에 몇 년은 있어야 하며 길면 5년에서 10년까지도 있을 수 있
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이전까지 유진은 이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몇 달 더 있다가 유진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소원이 동화책을 내려놓고 물었다.“유진아, 엄마가 임신한 거 누가 말해줬어?”유진이 말했다.“아줌마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임신했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아줌마가 그랬어요.”유진이 또 물었다.“임신했다는 것은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겼다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긴 거야.”“너무 좋아요.”그녀의 임신을 바로 받아들인 유진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소원은 유진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엄마는 3개월이 지난 후 너에게 말하려고 했어. 임신한 지 세 달이 되어야 말할 수 있다는 옛날 어르신들의 풍습이 있거든. 그래야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어.”유진이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아기는 분명히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소원이 미소를 지었다.“좋아?”“당연히 좋죠. 항상 같이 놀고 싶은 동생이 필요했는데... 동생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엄마는 너만 행복하면 돼.”소원이 유진을 꼭 안아주자 유진이 말했다.“엄마,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어요. 엄마가 낳은 아기라면 다 좋아요. 나중에 내가 없어도 동생이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까 그러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요.”너무나 순수한 유진의 말에 마음이 아픈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유진아, 네가 왜 없어? 너는 항상 건강하게 있을 거야. 엄마 옆에서 이 아기를 지켜줘야지.”유진이 어른스럽게 말했다.“알겠어요. 엄마, 아기를 꼭 잘 돌볼게요.”유진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소원은 녀석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옆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유진에게 약을 먹일 수 있지만 서현재의 연구 결과로 보면 그 약이 유진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유진에게 약을
“네.”주석훈은 전화를 끊고 직원증의 사진을 꺼내 그 위에 있는 예쁜 여자를 깊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사진을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수정아, 봤지? 하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나를 돕는 거야?”사진 속의 여자를 보는 주석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이때 주석훈의 가방 안에 있던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한 주석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제트 님, 제발 도와주세요...”주석훈이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저... 외국으로 보내 주세요.”“하하...”주석훈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사악해졌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저... 저는 제트 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트 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잡히면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거예요.”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석훈이 한마디 했다..“많이 똑똑해졌네?”“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트 님, 돈만 주시면 멀리 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주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면 되는데?”“5천만 원이요.”전화기 너머로 금액을 말한 여자는 혹시라도 주석훈이 화낼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적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외국에서 살 수 있어요.”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동안은 시간이 없어. 모레 밤에 항구에서 보자.”“아니요, 제트 님!”상대방은 경계하며 말했다.“우린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트 님이 돈을 그곳에 두시면 제가 가서 가져갈게요.”주석훈이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알았어. 항구에 둘게, 시간은 다시 알려주지.”“지금은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매우 급한 듯했다.“나와 흥정할 생각하지 마!”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알겠어요...”전화가 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