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네, 가주님.”‘생강차?’원진우의 입꼬리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윤아름은 입맛이 까다로웠기에 생수를 마셔도 고산에서 비행기로 운송한 물만 마셨다.원진우도 윤아름의 입맛에 맞춰 한 번도 빠짐 없이 그렇게 해줬다. 지금 윤아름이 아무렇게나 따라 마시는 물도 다 비행기로 운송한 물이었다. 그러니 기억을 잃었어도 물맛은 절대 잊을 리가 없었다.그런 윤아름이 오늘 생강차를 먹겠다고 한 건 절대 고산수가 질려서가 아니라 생강차를 만들려면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시간을 벌려고 한 것 같았다.집사는 원진우의 얼굴에 걸린 서늘한 미소에 마음이 불안해져 조심스럽게 물었다.“가주님, 혹시 틀린 구석이라도 있나요?”“아니요.”원진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손에 들었던 와인을 원샷하더니 와인잔을 거칠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집사님, 가정 주치의 좀 새로 찾아야겠어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가주님, 혹시 진 의사님이 뭘 잘못했나요...”집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자 원진우가 서서히 눈꺼풀을 들더니 집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집사는 하려던 말을 되레 삼키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입을 잘못 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얌전한 인상을 가진 진우희를 좋게 보고 있었다. 게다가 진우희는 직접 만든 비누와 향초를 종종 가져다주곤 했다. 비싼 물건은 아니었기에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중요한 건 그 물건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향초는 한약 성분이 들어가 매일 사용하면 수면에 좋다고 했다. 사용해 보니 확실히 잠은 잘 왔다.집사는 불면증으로 몇 년을 고생하고 있었다. 나쁜 일을 하도 많이 해서 밤만 되면 억울한 원귀들이 꿈에 나타났다.그렇게 집사는 향초에 점점 빠져들었고 진우희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하지만 집사는 이런 물건을 받았다고 해서 진우희에 대한 검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원진우가 뽑은 사람이었기에 하는 바 업무를 착실히 완성하는 걸 철칙으로
원진우는 윤아름의 방으로 향했다. 윤아름은 창가에 앉아 창문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지금 이 계절은 해당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었다. 오렌지색, 빨간색, 핑크색, 하얀색이 섞여 있어 참으로 아름다웠다.지하실은 위와는 달리 꽃을 키워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꽃을 유독 좋아하는 윤아름을 생각해 원진우는 많은 꽃을 심어줬다. 그중 해당이 피어있는 시간이 제일 길었고 일 년 사시절 꽃을 볼 수 있었다.그리고 겨울이 될수록 더 흐드러지게 피었다.하지만 해당은 손이 많이 가는 꽃이었다. 햇볕을 너무 오래 쬐어도, 너무 짧게 쬐어도 안 될뿐더러 흙이 너무 말라도, 너무 젖어도 안 되었다. 지하에 키우려면 빛을 일정하게 조사하면서 환기해 줘야 했다.원진우는 큰 심혈을 기울여 전문적인 인원들을 불러서 가꾼 끝에 이렇게 예쁜 해당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저택을 옮겨도 계속 사람을 불러 꽃만큼은 계속 피어날 수 있게 특별히 신경 썼다.원진우는 몇몇 저택 지하실을 메꾸면서 파괴된 생화가 떠올랐다. 가꿀 때는 참 어려웠는데 망치려니 한순간이었다.꽃이나 여자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귀한 아가씨라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아주 쉽게 망칠 수 있었다.하지만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서 가꿨는데 지금 망가트리면 너무 아까울 것 같았다.“뭘 그렇게 봐?”원진우가 물었다.윤아름은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원진우가 창가로 다가가 밖에 핀 해당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윤아름을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예쁘다.”밖에 핀 해당이 예쁘다는 건지 아니면 윤아름이 예쁘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윤아름은 대꾸하지 않았다. 여전히 흥미가 별로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윤아름은 원진우 앞에서 늘 이런 표정이었다.우울할 때가 기쁠 때보다 많았다.“아름아, 어디 아파?”원진우가 윤아름에게 물었다.“집사가 그러던데. 생강차 끓여달라고 했다고.”윤아름은 원진우가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다. 원진우가 묻는 말이면 다 조심해야 했다.
그때 가서 손해를 보는 건 결국 그녀다.이 생각이 떠오르자 윤아름은 속이 울렁거렸다.‘마흔이 넘은 남자가 어쩜 이런 일에 이렇게 정력이 넘칠 수 있지?’온갖 방법을 동원해가며 원진우는 질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윤아름은 일부러 투정을 부리며 말했다.“진우 씨는 말한 거 안 지키잖아. 괜히 나 걱정하는 척하지 말라고.”그러자 원진우는 앉아서 그녀를 살짝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내가 언제 말한 걸 안 지켰어?”“나 데리고 나가서 놀아주겠다고 했잖아.”윤아름은 순진한 소녀처럼 말했지만 그 연기는 정말 진짜 같았다.사실 그녀의 마음도 여느 소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인생의 절반을 이 남자에게 휘둘리고 갇힌 채로 살아왔으니 세상과 사람을 제대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성장하거나 성숙해질 기회도 없었다.윤아름의 마음속 깊은 곳은 여전히 순진했고 자기가 원진우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원진우는 그녀의 허릿살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그런 일로 나한테 화난 거야?”윤아름은 불편한 듯 몸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손대지 마요. 난 화낼 자격도 없으니까 굳이 상기시킬 필요는 없잖아요, 가주님.”그녀는 원진우를 비꼬았다.하지만 원진우는 화를 내지 않았고 되레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내일.”“뭐라고?”“내일 너 데리고 나가 줄게.”원진우가 다시 한번 확인해 보이자 윤아름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드디어 나갈 수 있게 됐어!’밖에 나갈 수만 있다면 기회를 잡아야 한다.그녀는 진우희에게서 전달받는 과정에 실수가 있을까 두려웠다.그래서 더 안전하게 직접 바깥에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소원이 이루어졌으니 나를 좀 기쁘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원진우의 눈빛에서 비쳐오는 그 의도는 뚜렷했다.“...”윤아름은 원하지 않았지만 이 시점에서 그를 화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그래서 그가 다가와 키스했을 때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반항하지 않았다.하지만 남자는 그저 윤아름의 입술을 깨물고 잠시 빨다가 숨이 가빠진 그
곧 원진우는 일어나서 양복을 정리하며 말했다.“좀 일이 있어서. 밤에 일찍 자. 굳이 나 기다릴 필요 없어.”그렇게 윤아름이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순간, 원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일 나갈 때, 그 블루하트 목걸이 꼭 하고 나가.”윤아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뭘 알아챘나?’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오르는 듯했다.하지만 원진우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너 그 목걸이 하면 정말 예쁘더라. 난 그게 참 마음에 들어.”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잠시도 멈추지 않고 그는 뒤돌아 문밖으로 나갔다.윤아름은 그가 사라지자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려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방금 정말 아찔했어...’내일 목걸이를 하지 않고 나갈 핑계는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전에 반드시 진우희에게 바로 떠나라는 연락을 해야 했다.하지만 다음번에도 속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그녀는 곁길로 돌아서 집사에게 접근해 진우희의 소식을 조금 캐물어 볼까 고민했다.진우희는 그녀가 생각한 것만큼 순수하고 착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영리했다.집사가 뭔가 귀띔하면 진우희는 즉시 경계할 테고 그때 곧바로 떠날 것이다.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지금은 오히려 진우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원진우 같은 미친 남자 밑에서도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원진우는 대문을 나서더니 차에 올라탔다.곧이어 조수석에 있던 비서가 수놓인 천을 건넸다. 그 천은 다소 거칠어 보였다.비서는 보고하듯 말했다.“진우희 씨께서 이건 보내고 싶지 않아 그냥 아무 쓰레기통에나 버린 것 같습니다.”원진우는 그 거친 자수를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불거진 그의 핏줄이 분노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흥...”그는 냉소를 흘렸다.정말이지 모든 게 계산된 행동이었다....한편 진우희는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고 자수가 수놓인 손수건은 버린 상태였다.처음부터 윤아름의 일을 도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원하는 건 이미
“똑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급하지 않고 되레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진우희는 가족 중 누군가 찾아온 줄 알고 대충 외투를 걸쳤다.드레스와 목걸이는 그대로 둔 채, 외투로만 대충 가리고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점잖고 품격 있는 얼굴이 있었다.그 얼굴을 보고 혼이 나갈 정도로 놀란 진우희는 몇 초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곧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미소는 어딘가 불길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날 안으로 들이지 않을 건가?”진우희는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가, 가주님...”원진우는 그녀의 옆을 스치며 자연스럽게 들어와 유일한 소파에 앉았다.그러고는 문 앞에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진우희를 바라보며 그는 명령했다.“문 닫고 이리 와.”진우희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닫고 소파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지만 감히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얼굴엔 온통 공포의 기색이 가득해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진우희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무서워?”원진우는 상냥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나?”진우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원진우가 다른 일로 자신을 찾았기를 바랐지만 그 순간 그녀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온몸이 떨리며 그녀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가주님, 제발 저를 용서해 주세요.”진우희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며 말했다.“저, 저도 사모님께 강요당한 거예요...”“응?”원진우는 목소리를 높이며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 사람이 어떻게 너한테 강요했는데?”그는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편안한 자세로 물었다.“자세히 말해봐.”그러자 진우희는 외투를 꽉 움켜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사모님께서 저에게 외부로 신호를 보내라고 하셨어요. 만약 제가 거절하면 이유를 만들어 가주님께 제가 잘못했다고 말해서 저를 죽이실 거라고 하셨어요. 너무 무서워서 거부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도와드린 거예요...”“무슨 일을 도왔나?”원진우는 변함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가주님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서요...”말을 하면서 몰래 원진우의 표정을 살피던 진우희는 그의 얼굴에 여전히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을 보고는 점점 더 여유를 찾았다.그녀는 능숙하게 말을 이어갔다.“가주님께서 저에게 너무 잘해 주셨잖아요. 저는 은혜를 알고 보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전 사모님의 명을 어길 수 없습니다. 감히 그럴 처지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앞에서는 직접 거절하지 못하더라도 뒤에서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가주님, 저는 절대로 가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언제든지요.”진우희는 충성을 맹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이 말은 미끼였다. 그녀는 원진우의 반응을 시험하고 있었다.원진우는 이미 마흔이 넘었지만 꾸준한 운동 덕분에 서른 살 초반의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하여 얼굴 역시 삼십 대 남성의 매력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어느 면에서 봐도 그는 마흔이 넘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진정한 부자는 미용 시술 따위가 필요 없다. 그들의 젊음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길고 더 오래 지속되는 것 같았다.이 모든 것은 자신감 있는 태도와 절제된 생활 리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처음에 진우희는 원진우를 두려워했지만 그가 윤아름에게만 한없이 헌신적인 모습을 보고 나서는 마음속에 미묘한 감정이 일기 시작했다.그녀는 윤아름이 원진우의 사랑을 받는 것이 부러웠다.되레 윤아름이 이토록 뛰어난 남자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도망치려 하는 것 같았다.‘세상에 과연 사모님을 이렇게 사랑하는, 원진우 가주님만큼 훌륭한 남자가 또 있을까? 이런 남자의 사랑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일이 아닐까?’진우희는 윤아름이 이걸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도망치려는 생각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진우희는 그녀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를 억누르며 그 감정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다.그러나 그 마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원진우 같은 남자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그의 품격, 외모, 능력, 힘.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모두 완벽했다. 천 명 중 한 명이 아
특히 원진우에 대해서 윤아름은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그를 언급하는 순간,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원진우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하지만 진우희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스스로 똑똑하다 생각하고 있었다.그녀는 원진우와 윤아름의 관계를 추측하며 윤아름이 원진우를 몹시 미워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원진우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들이 윤아름의 입에서 나오는 게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가주님, 목걸이 돌려드릴게요.”진우희는 목에 걸린 블루하트를 풀며 원진우에게 돌려주려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었다.‘건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돌려줘야 한다니... 너무 아쉽네.’원진우는 그녀의 느릿느릿한 동작을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마음에 들면 그냥 가져.”이 말에 진우희는 온몸이 얼어붙었다.“그 말씀은... 제게 준다는 말씀이십니까?”“응.”원진우는 짧게 대답했다.입술을 달싹였지만 진우희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기쁨으로 가득했다.‘내가 제대로 맞췄놔 봐! 가주님께선 분명 나한테 마음이 약간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값비싼 목걸이도 주지!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바람 안 피는 남자는 없잖아?’북안도는 원래 관습이 개방적인 나라였는데 남자들은 천민이 아닌 이상 많은 아내를 둘 수 있었다.‘가주님께서 아무리 사모님을 좋아한다 해도 가끔은 색다른 게 끌릴 때도 있을 거야. 외모에서는 내가 사모님께 뒤처질지 몰라도... 나한테도 분명한 장점은 있어.’그것은 바로 젊음이었다!젊음은 그녀의 가장 큰 무기였다.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윤아름은 이미 마흔이 넘은 여성이었다. 그 나이에 이르면 아무리 관리해도 어떤 부분은 더 이상 탄탄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진우희는 달랐다.그녀는 젊었고 사적인 부분도 철저하게 관리해왔다.부유한 남자를 사로잡기 위해 준비해 온 것이다. 탄탄함은 남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이
원진우는 손을 거두고 다시 냉정한 자세로 돌아갔지만 눈 속에 깃든 흥분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이 블루하트 목걸이가 그렇게 좋다면 차라리 이걸 먹어서 너랑 하나가 되게 하는 게 낫지 않겠어?”진우희는 원진우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저 농담으로 치부하고 있었다.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가주님, 농담하지 마세요. 이렇게 비싼 목걸이를 제가 먹을 수는 없죠.”사실 속에는 불만이 가득했다.‘이렇게 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삼키는 건 금을 삼키는 거랑 뭐가 달라? 아마 목에 삼키기도 전에 숨이 끊어질 거야.’그녀는 원진우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 용기를 내어 뻔뻔한 얼굴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기쁘게 해주려 했다.“가주님, 저 정말 잘할 수 있어요. 한 번만 믿어 보세요...”얼굴은 붉어졌고 진우희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원진우는 나쁜 남자의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그 치명적인 매력에 진우희는 흠뻑 빠져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남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갑자기 원진우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잡았다.“툭!”얇게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몇백 억대의 가치를 자랑하는 블루하트 목걸이가 남자의 손에 의해 그대로 끊어지고 만 것이다.“아...”진우희는 비명을 질렀다.목걸이의 다이아몬드 연결부가 그대로 끊어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쉬움을 느꼈다.이건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목걸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끊어지니 정말 아깝기 짝이 없었다.더구나 이 목걸이의 공예는 한 번에 완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수리도 어려울 것이며 수리 후에도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다.결국 그 가치도 크게 떨어질 것이었다.“가주님, 이건...”뒤이어 진우희가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남자는 힘을 주어 그녀의 턱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결국 입이 강제로 벌어진 상태에서 진우희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읍... 읍읍...”진우희는 남자의 또 다른 인격이 드러난 듯한 잔인한 모습에 두려워하며
“소원, 우리 혼인신고 했어.”육경한이 짧고 간결하게 설명했다.소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표님 미친 거 아니야? 혼인신고를 했다고?’한참 후, 소종은 겨우 입을 열었는데 말 속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형님,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그 여자가 형님을 해치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옆에 두시겠다고요?”소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됐다.육경한의 머리를 한번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병원에 가서 뇌 CT라도 찍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그저 황당하고 답답할 뿐이었다.“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육경한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나마 소종은 평생을 함께하며 고난을 헤쳐온 동료였기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 자체를 꺼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형님...”소종은 어렵게 입을 뗐다.그가 육경한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건 솔직한 진심을 말할 때뿐이었다.그 호칭은 그들이 한때 얼마나 험난한 늪에서 기어 나왔는지를 상기시켜주는 이름이었다.지금의 안정된 삶을 소중히 여겨야 했다.그런데 왜 굳이 육경한이 스스로 곁에 시한폭탄을 들여놓으려 하는지, 그것도 머리맡에까지 두는지 소종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만.”육경한이 그의 말을 끊었다.“이제부터 소원은 내 아내야. 미우 그룹의 모든 자원은 소원을 위해 조건 없이 제공될 거다. 그리고 누구든 내 아내를 괴롭히는 걸 나는 보고 싶지 않아. 알겠어?”“...”소종은 말문이 막혔다.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 차갑고 무정한 여자가 대체 뭐가 좋아서 대표님은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육경한이 한 말은 지켜야 했다.지켜야 하는 동시에 그의 안전도 보장해야 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알겠습니다.”소종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봐.”육경한이 말했다.사무실에서 나간 뒤에도 소종은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하여 그는 바로 게으름을 피우는 직원들을 닭 잡듯이 몰아
“대표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얼굴이 정말 밝아 보이네요.”“대표님 결혼하신다면서요? 아마 방민아 씨와 관련된 일이겠죠.”“방민아 씨랑 늘 사이가 좋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기분 좋아 보인 적은 없었는데... 꼭 방민아 씨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그럼 누구 때문인데요?”직원들이 소곤소곤 수군거리는 소리에 갑자기 낮고 냉랭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다들 그렇게 한가해요?”직원들이 고개를 돌리자 소종이 마치 지옥에서 온 사신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소 비서님...”소종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일 안 하고 대표님 뒷얘기나 하다니. 다음번에 근무 시간에 이런 소리를 들으면 월간 개근 수당 전부 삭감할 테니까 알아서들 해요.”직원들은 몸을 움츠리며 황급히 흩어졌지만 모퉁이를 돌아가면서도 계속 속삭였다.“소 비서님, 왜 이렇게 분노하신 거예요? 뭔가 이상한 냄새 나는데.”“대표님 기분은 좋아 보이던데 소 비서님은 왜 이렇게 안 좋아 보이죠?”“그만해요. 또 걸리면 진짜 큰일 나요. 빨리 일이나 하자고요...”소종의 얼굴이 어두웠던 이유는 방금 홍보 부서에서 나온 직후였기 때문이다.30분 전, 육경한은 그에게 방씨 가문과의 결혼 취소에 대한 공식 발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이 발표는 회사 안팎으로 큰 충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단순히 대표의 개인사가 아니라 방씨 가문과 여전히 협력 관계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터진 폭탄 같은 소식이었기 때문이다.‘만약 방민아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면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와 명성이 추락할 수밖에 없겠지.’소종은 속으로 기도했다.‘제발 방민아가 입 다물고 조용히 넘어가 줬으면. 괜히 일 키우지 말라고.’그러나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그는 방민아를 조금은 비웃고 있었다.‘사모님 자리를 꿰찰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패배하다니. 쓸모없네.’그렇게 소종은 대표 사무실에 도착했다.육경한은 책상 앞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프로젝트 제안서를 수정하고 있었
소원은 밤새 이어진 피곤함에 결국 다음 날 오후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눈을 뜨자마자 보니 침대에 남아 있어야 할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몸 아래 깔린 침대 시트도 전날의 짙은 색에서 은은한 미색으로 바뀌어 있었다.소원은 희미하게 기억났다.‘침대 시트를 갈아야 했던 건... 너무 젖어서 못 잘 지경이었으니까.’이런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남자의 지나친 무절제함에 화가 치밀었다.‘도대체 이 거래는 누구한테 유리한 거야? 완전 오랫동안 굶주린 늑대처럼 굴었잖아.’처음의 분위기조차 그저 식전 음식 같은 것에 불과했다니 정말 어이없을 정도였다.소원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방 문이 살며시 두드려졌다.“사모님, 깨어나셨습니까?”그 말에 잠시 멍해 있던 소원은 곧 대답했다.“네, 깼어요.”“아침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드릴까요?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 말을 듣고 소원은 잠시 침묵했다.‘우리가 어제 얼마나 늦게까지 했는지 다들 아는 걸까...’창피함이 몰려왔지만 굳이 내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다.“10분 뒤에 가져와 주세요.”침대에서 내려오려던 그녀는 한쪽 다리가 휘청이며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속으로 육경한을 욕한 뒤 이를 악물며 욕실로 가 재빠르게 씻었다.방으로 올라온 아침 식사를 보니 준비된 음식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정갈했다.죽, 깔끔한 반찬, 그리고 속을 편하게 해주는 보양식 위주의 메뉴였다.소원은 생각보다 배가 고팠는지라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그녀의 속이 가벼워진 건 단순히 음식을 먹어서만이 아니었다.유진이와 아주머니의 상황이 조금씩 안정되면서 마음속 큰 짐이 내려간 덕이었다.‘아주머니는 그동안 유진이를 위해 거의 모든 걸 바치셨어. 내가 아주머니를 포기할 순 없어. 반드시 좋은 치료를 받게 해야 해.’그녀는 어제 전문가들이 한 말을 떠올렸다.제대로 치료만 한다면 아주머니의 몸 상태가 70% 정도는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였다.특히 소원
게다가 남자는 온갖 수를 다 써서 소원을 자극했다.소원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속으로 외쳤다.‘대체 이런 것들은 어디서 배운 거지? 이런 건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그의 과감한 행동과 적재적소에서의 신경 자극은 소원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이건 육경한의 평소 이미지와 너무 달라. 마치 전혀 다른 사람 같아.’그는 그녀의 입술 대신 다른 곳에 입맞춤을 했다.그 덕분에 상황이 더 격렬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육경한은 손목을 고정하던 손을 천천히 놓고는 소원의 목을 지그시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그리고 다른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 수건 아래로 들어갔다.소원이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그의 힘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그는 소원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인해 붉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 속에는 그녀가 불편하게 여기는 생생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는지라 눈을 질끈 감았다.‘이 모든 게 거짓이야. 단지 각자 필요한 걸 얻기 위해 몸을 거래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소원은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였지만 육경한은 결코 그녀에게 그런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듯 행동했다.그는 그녀의 방어선과 수치심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듯 무릎을 굽히며 가까이 다가왔다.그리고 혼란 속에서 수건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소원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렸다.유리에 닿아 있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곧게 펴졌다.‘이 사람이 미쳤나? 어떻게 이런 일을...’그녀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욕실 벽면의 반사된 모습을 향했고 흐릿한 증기 속에서도 두 사람의 실루엣이 뚜렷하게 보였다.그는 마치 새로운 경험을 주는 듯 그녀의 모든 감각을 흔들었다.소원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머릿속이 하얘지며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한 마디로 분노를 터뜨렸다.“육경한, 진짜 정신 나갔어?”하지만 그는 소원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를 단숨에 들어 올려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그리고 소원의 입술을 강하게 붙잡고 깊은
소원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몸 앞의 수건을 꽉 움켜쥐었다.그 행동에 육경한은 비웃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뭘 감추는 거야? 내가 못 본 데라도 있나?”그의 말투는 낮게 깔리면서도 약간 장난스러워 듣는 이를 무안하게 만들었다.소원은 그의 말을 듣고 더욱 수건을 꽉 붙들며 단호하게 말했다.“누가 당신더러 들어오라 했어?”육경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섞어 말했다.“내 집에 내가 들어오는 데 허락이 필요한가?”그의 말이 얄밉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소원은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침착하게 말했다.“나가줘. 옷 입어야 하니까.”그러자 육경한은 침대 위에 놓인 갈아입을 옷을 집어 들고는 대충 소원에게 던졌다.“그냥 이거 입어. 어차피 내가 못 본 것도 없잖아.”“...”더 이상 말다툼을 할 기운도 없었는지라 소원은 옷을 품에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하지만 욕실에서 옷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육경한이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 했다는 걸 깨달았다.그가 던진 것은 옷이 아니라 얇고 거의 투명한 속옷 같은 옷이었다. 꼭 가릴 곳만 어렴풋이 가려진 도저히 입고 나갈 수 없는 옷이었다.과거에도 이런 옷을 입어본 적 없는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이 인간이 정말...!’분노가 치밀어 오른 소원은 소리쳤다.“육경한! 이게 뭐야!”그 순간, 욕실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육경한이 문턱에 느긋하게 기댔다.“나 불렀어?”소원은 수건을 꼭 붙들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부른 거 아니야, 나가!”육경한은 그녀의 표정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분명 내 이름을 불렀잖아?”소원은 그의 태도에 답답함과 불쾌감을 느끼며 말했다.“그건 당신더러 들어오라는 뜻이 아니야!”그러나 육경한의 깊은 눈빛이 소원을 강하게 응시하자 그녀는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꼈다.그와 결혼을 결정했던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며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그렇다고 완전히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와 가족의 안전을 위해 그녀는 선
“유진아, 네가 한 일들이 정말 많고 대단했어. 알아?”소원이 유진이를 다독였다.하지만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해본 적이 많지 않은 소원은 혹여나 말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말이 유진이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됐다.다행히 유진이는 매우 똑똑했는지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 알아요. 제가 틀린 건 없었고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소원은 아들의 영리함이 대견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안전을 지키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잡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유진이는 말을 이었다.“엄마, 다음에 외할머니 뵈러 갈 때는 우리 같이 가요.”소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외할머니 뵈러 갔었니?”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러나 두 글자를 말한 후, 유진이는 소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고쳤다.“그...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 아저씨가 여기가 엄마의 엄마, 제 외할머니라고 알려줬어요.”소원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는 기분이 밀려왔다.육경한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니 뜻밖이었다.소원이 전미영을 찾아갔을 때마다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피해서 간 모양이었다.‘참 계산적이네.’유진이가 말했다.“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시지만 저한테 웃어주셨어요. 제가 외할머니한테 말도 많이 걸었는데 계속 웃으면서 들어주셨거든요.”소원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응. 우리 유진이 정말 기특하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구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잠시 후, 유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저 언제 삼촌 볼 수 있어요? 저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서현재는 유진이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하며 큰 위안과 즐거움을 준 사람이었다.유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못 본
시선을 축 늘어트린 육경한의 눈동자에 소원의 목에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입고 온 옷이 얇았는데 병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이다.소원은 아주머니가 너무 걱정되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줘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줬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전문가 회진은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토론으로 얻은 방안은 투석, 즉 피를 바꾸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아주머니가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였고 치료한다 해도 아주머니의 몸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생활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순간 방민아에 대한 원망도 극에 달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방민아만 생각하면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육경한에게 말했다.“난 아주머니 이렇게 만든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게.”“약속 못 지킬까 봐 그러지.”적어도 지금은 육경한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원은 말을 가려서 했다. 유진을 지키려면, 서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려면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서진태는 소원이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악독한 사람이었기에 서현재도 잘 지낼 리가 없었다.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밖에 없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진이 내 아들이기도 해.”소원이 대꾸했다.“알면 됐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니 소원도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방민아의 상황은 절대 좋아질 수 없었다.간호조무사가 일단 두 사람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단 여독을 말끔히 배출하고 투석을 시작해야 했기에 두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육경한이 소원을 위해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영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방민아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절대 소원과 유진을 건드리지 않고 몸을 사렸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행복하게 육경한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방민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지금 당장 이혼해요. 이혼만 해준다면 돈은 원하는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아이랑 떠날 수 있게 해줄게요. 어때요?”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방민아 씨, 진심이에요? 설마...”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원하는 걸 얻고 나서 우리가 다시 눈엣가시라고 생각해 우리를 다시 찾아내거나 함정을 팔 수도 있잖아요.”방민아는 그녀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소원이 너무 싫었다. 소원과 유진은 정말 방민아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거슬리는 눈엣가와도 같아 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육경한의 마음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에 방민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약속한 거니까 변하지 않아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승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요. 내가 방민아 씨를 믿을 일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 돈도 많고 신분도 있는 방민아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나올지 모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아악. 내가 당신 죽여버릴 거야.”방민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젊은 경찰이 방민아를 제압하더니 날카롭게 경고했다.“방민아 씨, 난동 그만 부리고 업무에 협조해 주세요. 첫 번째 경고에요.”무슨 일이 있으면 방씨 가문에서 대신 해결해 줬기에 방민아는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단
소원은 출동한 경찰이 나이가 젊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얇은 걸 봐서는 여자였다. 그래도 방민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경찰 번호는 3210921, 아가씨,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으니 협조 바랍니다.”방민아가 코웃음 쳤다.“적법하면 체포영장 내놔요. 신고한다고 다 잡아가지 말고.”“그건 조사에 협조하면 다 밝혀질 일이에요.”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방민아의 손을 뜯어내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방민아가 막무가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요. 집행하는 척하면서 성추행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젊은 경찰은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출동하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에 불응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도 했고 경찰이 서비스 업종도 아니었기에 범죄자의 체면을 봐주거나 범죄자가 하자는 대로 해줄 리가 없었다.젊은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아줌마, 자중하세요. 이 장면은 보디캠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게다가 전 여자고요.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방민아 씨입니다. 전 그저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을 뿐이고요.”아줌마라는 호칭에 방민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살아온 방민아를 보는 사람마다 아가씨로 존칭했는데 이 경찰은 난동 좀 부린 거 가지고 바로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는 방민아 같은 나이에 쓰일만한 호칭이 아니라 40에서 50대는 되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데 말이다.“아줌마라니. 예의라는 게 없어요? 죽고 싶어요?”방민아가 발악하자 젊은 경찰은 구겨진 제복을 툭툭 털며 말했다.“내 말 틀렸나요? 방민아 씨 말대로라며 나도 아줌마한테 성추행당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약이 잔뜩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방민아를 보며 소원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방민아 씨, 경찰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방씨 가문 도우미인 줄 알아요?”방민아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원을 보며 걷잡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