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우는 윤아름의 방으로 향했다. 윤아름은 창가에 앉아 창문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지금 이 계절은 해당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었다. 오렌지색, 빨간색, 핑크색, 하얀색이 섞여 있어 참으로 아름다웠다.지하실은 위와는 달리 꽃을 키워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꽃을 유독 좋아하는 윤아름을 생각해 원진우는 많은 꽃을 심어줬다. 그중 해당이 피어있는 시간이 제일 길었고 일 년 사시절 꽃을 볼 수 있었다.그리고 겨울이 될수록 더 흐드러지게 피었다.하지만 해당은 손이 많이 가는 꽃이었다. 햇볕을 너무 오래 쬐어도, 너무 짧게 쬐어도 안 될뿐더러 흙이 너무 말라도, 너무 젖어도 안 되었다. 지하에 키우려면 빛을 일정하게 조사하면서 환기해 줘야 했다.원진우는 큰 심혈을 기울여 전문적인 인원들을 불러서 가꾼 끝에 이렇게 예쁜 해당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저택을 옮겨도 계속 사람을 불러 꽃만큼은 계속 피어날 수 있게 특별히 신경 썼다.원진우는 몇몇 저택 지하실을 메꾸면서 파괴된 생화가 떠올랐다. 가꿀 때는 참 어려웠는데 망치려니 한순간이었다.꽃이나 여자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귀한 아가씨라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아주 쉽게 망칠 수 있었다.하지만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서 가꿨는데 지금 망가트리면 너무 아까울 것 같았다.“뭘 그렇게 봐?”원진우가 물었다.윤아름은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원진우가 창가로 다가가 밖에 핀 해당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윤아름을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예쁘다.”밖에 핀 해당이 예쁘다는 건지 아니면 윤아름이 예쁘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윤아름은 대꾸하지 않았다. 여전히 흥미가 별로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윤아름은 원진우 앞에서 늘 이런 표정이었다.우울할 때가 기쁠 때보다 많았다.“아름아, 어디 아파?”원진우가 윤아름에게 물었다.“집사가 그러던데. 생강차 끓여달라고 했다고.”윤아름은 원진우가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다. 원진우가 묻는 말이면 다 조심해야 했다.
그때 가서 손해를 보는 건 결국 그녀다.이 생각이 떠오르자 윤아름은 속이 울렁거렸다.‘마흔이 넘은 남자가 어쩜 이런 일에 이렇게 정력이 넘칠 수 있지?’온갖 방법을 동원해가며 원진우는 질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윤아름은 일부러 투정을 부리며 말했다.“진우 씨는 말한 거 안 지키잖아. 괜히 나 걱정하는 척하지 말라고.”그러자 원진우는 앉아서 그녀를 살짝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내가 언제 말한 걸 안 지켰어?”“나 데리고 나가서 놀아주겠다고 했잖아.”윤아름은 순진한 소녀처럼 말했지만 그 연기는 정말 진짜 같았다.사실 그녀의 마음도 여느 소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인생의 절반을 이 남자에게 휘둘리고 갇힌 채로 살아왔으니 세상과 사람을 제대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성장하거나 성숙해질 기회도 없었다.윤아름의 마음속 깊은 곳은 여전히 순진했고 자기가 원진우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원진우는 그녀의 허릿살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그런 일로 나한테 화난 거야?”윤아름은 불편한 듯 몸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손대지 마요. 난 화낼 자격도 없으니까 굳이 상기시킬 필요는 없잖아요, 가주님.”그녀는 원진우를 비꼬았다.하지만 원진우는 화를 내지 않았고 되레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내일.”“뭐라고?”“내일 너 데리고 나가 줄게.”원진우가 다시 한번 확인해 보이자 윤아름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드디어 나갈 수 있게 됐어!’밖에 나갈 수만 있다면 기회를 잡아야 한다.그녀는 진우희에게서 전달받는 과정에 실수가 있을까 두려웠다.그래서 더 안전하게 직접 바깥에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소원이 이루어졌으니 나를 좀 기쁘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원진우의 눈빛에서 비쳐오는 그 의도는 뚜렷했다.“...”윤아름은 원하지 않았지만 이 시점에서 그를 화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그래서 그가 다가와 키스했을 때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반항하지 않았다.하지만 남자는 그저 윤아름의 입술을 깨물고 잠시 빨다가 숨이 가빠진 그
곧 원진우는 일어나서 양복을 정리하며 말했다.“좀 일이 있어서. 밤에 일찍 자. 굳이 나 기다릴 필요 없어.”그렇게 윤아름이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순간, 원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일 나갈 때, 그 블루하트 목걸이 꼭 하고 나가.”윤아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뭘 알아챘나?’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오르는 듯했다.하지만 원진우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너 그 목걸이 하면 정말 예쁘더라. 난 그게 참 마음에 들어.”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잠시도 멈추지 않고 그는 뒤돌아 문밖으로 나갔다.윤아름은 그가 사라지자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려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방금 정말 아찔했어...’내일 목걸이를 하지 않고 나갈 핑계는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전에 반드시 진우희에게 바로 떠나라는 연락을 해야 했다.하지만 다음번에도 속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그녀는 곁길로 돌아서 집사에게 접근해 진우희의 소식을 조금 캐물어 볼까 고민했다.진우희는 그녀가 생각한 것만큼 순수하고 착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영리했다.집사가 뭔가 귀띔하면 진우희는 즉시 경계할 테고 그때 곧바로 떠날 것이다.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지금은 오히려 진우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원진우 같은 미친 남자 밑에서도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원진우는 대문을 나서더니 차에 올라탔다.곧이어 조수석에 있던 비서가 수놓인 천을 건넸다. 그 천은 다소 거칠어 보였다.비서는 보고하듯 말했다.“진우희 씨께서 이건 보내고 싶지 않아 그냥 아무 쓰레기통에나 버린 것 같습니다.”원진우는 그 거친 자수를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불거진 그의 핏줄이 분노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흥...”그는 냉소를 흘렸다.정말이지 모든 게 계산된 행동이었다....한편 진우희는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고 자수가 수놓인 손수건은 버린 상태였다.처음부터 윤아름의 일을 도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원하는 건 이미
“똑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급하지 않고 되레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진우희는 가족 중 누군가 찾아온 줄 알고 대충 외투를 걸쳤다.드레스와 목걸이는 그대로 둔 채, 외투로만 대충 가리고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점잖고 품격 있는 얼굴이 있었다.그 얼굴을 보고 혼이 나갈 정도로 놀란 진우희는 몇 초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곧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미소는 어딘가 불길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날 안으로 들이지 않을 건가?”진우희는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가, 가주님...”원진우는 그녀의 옆을 스치며 자연스럽게 들어와 유일한 소파에 앉았다.그러고는 문 앞에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진우희를 바라보며 그는 명령했다.“문 닫고 이리 와.”진우희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닫고 소파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지만 감히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얼굴엔 온통 공포의 기색이 가득해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진우희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무서워?”원진우는 상냥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나?”진우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원진우가 다른 일로 자신을 찾았기를 바랐지만 그 순간 그녀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온몸이 떨리며 그녀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가주님, 제발 저를 용서해 주세요.”진우희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며 말했다.“저, 저도 사모님께 강요당한 거예요...”“응?”원진우는 목소리를 높이며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 사람이 어떻게 너한테 강요했는데?”그는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편안한 자세로 물었다.“자세히 말해봐.”그러자 진우희는 외투를 꽉 움켜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사모님께서 저에게 외부로 신호를 보내라고 하셨어요. 만약 제가 거절하면 이유를 만들어 가주님께 제가 잘못했다고 말해서 저를 죽이실 거라고 하셨어요. 너무 무서워서 거부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도와드린 거예요...”“무슨 일을 도왔나?”원진우는 변함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가주님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서요...”말을 하면서 몰래 원진우의 표정을 살피던 진우희는 그의 얼굴에 여전히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을 보고는 점점 더 여유를 찾았다.그녀는 능숙하게 말을 이어갔다.“가주님께서 저에게 너무 잘해 주셨잖아요. 저는 은혜를 알고 보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전 사모님의 명을 어길 수 없습니다. 감히 그럴 처지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앞에서는 직접 거절하지 못하더라도 뒤에서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가주님, 저는 절대로 가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언제든지요.”진우희는 충성을 맹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이 말은 미끼였다. 그녀는 원진우의 반응을 시험하고 있었다.원진우는 이미 마흔이 넘었지만 꾸준한 운동 덕분에 서른 살 초반의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하여 얼굴 역시 삼십 대 남성의 매력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어느 면에서 봐도 그는 마흔이 넘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진정한 부자는 미용 시술 따위가 필요 없다. 그들의 젊음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길고 더 오래 지속되는 것 같았다.이 모든 것은 자신감 있는 태도와 절제된 생활 리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처음에 진우희는 원진우를 두려워했지만 그가 윤아름에게만 한없이 헌신적인 모습을 보고 나서는 마음속에 미묘한 감정이 일기 시작했다.그녀는 윤아름이 원진우의 사랑을 받는 것이 부러웠다.되레 윤아름이 이토록 뛰어난 남자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도망치려 하는 것 같았다.‘세상에 과연 사모님을 이렇게 사랑하는, 원진우 가주님만큼 훌륭한 남자가 또 있을까? 이런 남자의 사랑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일이 아닐까?’진우희는 윤아름이 이걸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도망치려는 생각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진우희는 그녀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를 억누르며 그 감정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다.그러나 그 마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원진우 같은 남자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그의 품격, 외모, 능력, 힘.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모두 완벽했다. 천 명 중 한 명이 아
특히 원진우에 대해서 윤아름은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그를 언급하는 순간,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원진우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하지만 진우희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스스로 똑똑하다 생각하고 있었다.그녀는 원진우와 윤아름의 관계를 추측하며 윤아름이 원진우를 몹시 미워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원진우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들이 윤아름의 입에서 나오는 게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가주님, 목걸이 돌려드릴게요.”진우희는 목에 걸린 블루하트를 풀며 원진우에게 돌려주려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었다.‘건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돌려줘야 한다니... 너무 아쉽네.’원진우는 그녀의 느릿느릿한 동작을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마음에 들면 그냥 가져.”이 말에 진우희는 온몸이 얼어붙었다.“그 말씀은... 제게 준다는 말씀이십니까?”“응.”원진우는 짧게 대답했다.입술을 달싹였지만 진우희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기쁨으로 가득했다.‘내가 제대로 맞췄놔 봐! 가주님께선 분명 나한테 마음이 약간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값비싼 목걸이도 주지!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바람 안 피는 남자는 없잖아?’북안도는 원래 관습이 개방적인 나라였는데 남자들은 천민이 아닌 이상 많은 아내를 둘 수 있었다.‘가주님께서 아무리 사모님을 좋아한다 해도 가끔은 색다른 게 끌릴 때도 있을 거야. 외모에서는 내가 사모님께 뒤처질지 몰라도... 나한테도 분명한 장점은 있어.’그것은 바로 젊음이었다!젊음은 그녀의 가장 큰 무기였다.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윤아름은 이미 마흔이 넘은 여성이었다. 그 나이에 이르면 아무리 관리해도 어떤 부분은 더 이상 탄탄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진우희는 달랐다.그녀는 젊었고 사적인 부분도 철저하게 관리해왔다.부유한 남자를 사로잡기 위해 준비해 온 것이다. 탄탄함은 남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이
원진우는 손을 거두고 다시 냉정한 자세로 돌아갔지만 눈 속에 깃든 흥분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이 블루하트 목걸이가 그렇게 좋다면 차라리 이걸 먹어서 너랑 하나가 되게 하는 게 낫지 않겠어?”진우희는 원진우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저 농담으로 치부하고 있었다.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가주님, 농담하지 마세요. 이렇게 비싼 목걸이를 제가 먹을 수는 없죠.”사실 속에는 불만이 가득했다.‘이렇게 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삼키는 건 금을 삼키는 거랑 뭐가 달라? 아마 목에 삼키기도 전에 숨이 끊어질 거야.’그녀는 원진우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 용기를 내어 뻔뻔한 얼굴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기쁘게 해주려 했다.“가주님, 저 정말 잘할 수 있어요. 한 번만 믿어 보세요...”얼굴은 붉어졌고 진우희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원진우는 나쁜 남자의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그 치명적인 매력에 진우희는 흠뻑 빠져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남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갑자기 원진우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잡았다.“툭!”얇게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몇백 억대의 가치를 자랑하는 블루하트 목걸이가 남자의 손에 의해 그대로 끊어지고 만 것이다.“아...”진우희는 비명을 질렀다.목걸이의 다이아몬드 연결부가 그대로 끊어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쉬움을 느꼈다.이건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목걸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끊어지니 정말 아깝기 짝이 없었다.더구나 이 목걸이의 공예는 한 번에 완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수리도 어려울 것이며 수리 후에도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다.결국 그 가치도 크게 떨어질 것이었다.“가주님, 이건...”뒤이어 진우희가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남자는 힘을 주어 그녀의 턱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결국 입이 강제로 벌어진 상태에서 진우희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읍... 읍읍...”진우희는 남자의 또 다른 인격이 드러난 듯한 잔인한 모습에 두려워하며
그 아파트 문을 나서자마자 비서는 소독용 물티슈를 건넸다.원진우는 이미 손을 씻었지만 그곳의 물조차 더럽게 느껴졌다.손을 닦은 후, 별다른 지시가 없어도 비서는 두 명의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 현장을 처리했다.원진우는 차 안에 앉아 시가를 하나 피웠다.한 대를 다 피우기도 전에 비서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왔고 그 집은 완전히 정리된 상태였다.북안도에는 또 하나의 국외 도피자가 생겼다.하지만 진우희 같은 천민 출신의 사람은 실종된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설령 가족이 신고하러 간다고 해도 그저 국외 도피로 처리될 뿐이었다.북안도에서는 주민이 국외로 떠나려면 상당한 금액의 이탈 비용을 납부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모두 도망자로 취급되었다.이 비용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천문학적인 액수에 가깝다.이러한 조치는 북안도의 인구 유출을 막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북안도의 형편없는 정치 상황 때문에 평민과 천민 모두 도망쳤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권력자들을 돌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어떤 사람들은 태어나서 세대를 거쳐도 이 돈을 모으지 못해 죽을 때까지 북안도를 떠날 수 없었다.비서는 원진우의 허락을 받은 후, 커다란 가방을 실은 밀폐된 트럭을 몰고 자리를 떠났다.그때쯤 시가도 다 타버리자 원진우는 손을 흔들어 운전 기사에게 차를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렇게 차가 막 출발하려던 순간, 그는 공원 앞에 조용히 주차된 검은색 고급 차량을 발견했다.조수석에 있던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둘러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윤이 나는 검은 가죽 구두 한 쌍이 땅에 닿았다.곧 뒷좌석에 앉은 남자의 옆모습이 드러났고 원진우는 그 모습을 정확히 알아차렸다. 그 남자는 곽경천이었다.원진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윤아름의 가짜 아들치고는 꽤 유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결국 진우희의 행적을 이렇게까지 추적해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 역시 5분 정도 늦었을 뿐이었다. 진우희의 성격상,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게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