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박태준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린 상태였었기에 퉁명하게 물었다.“너 때문에?”“나 때문이라고? 내가 무슨 수로? 그리고 누가 감히 그녀의 괴팍한 성격을 알면서도 윽박지르겠어!”정민아는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성격이라, 요 몇 년 동안 그녀에게 맞은 사람만 해도 열 손가락으로 다 세지 못할 정도였다.박태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자기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신은지의 다리를 조심스레 옮기면서 말했다.“사람은 기계가 아니야, 아무리 비싼 기계라도 오래 작동하면 고장 나기 일쑤인데 사람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당연히 심리상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 그리고 민아한테 맞은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맞은 건 아니잖아.”“평소 조금이라도 심한 말을 들으면 눈이 빨개지는 채연 씨의 한쪽 다리를 부러뜨렸고, 조기찬은 지금 병에 걸려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고, 최민영은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하마터면 죄까지 뒤집어쓸 뻔했고, 마예은은 마씨 가문이 파산되고 그 충격으로 아빠까지 돌아가신 후, 남은 빚을 어떻게든 갚아보겠다 늙은 남자를 만나고 있어. 이 모든 일에 정민아가 연루되어 있잖아!”사람들은 정민아가 불미스러운 일들에 연루되어 있다고 확신했지만, 정작 그걸 입증할 정확한 증거를 찾지 못해서 뒤에서 수군댈 뿐이었다.“그럼, 그냥 이혼해, 너도 전부터 이혼하고 싶었잖아! 민아가 먼저 이혼하겠다는데 뭘 망설여? 그냥 다 끝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고연우도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네가 말한 사람들은 전부 최민영의 친구지만 너와는 깊은 친분이 없잖아, 그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네 미래를 망치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그리고 만약 네가 최민영 때문에 정민아를 원망한다면, 지금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외국에 가서 최민영을 직접 데려오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정민아에게 고연우의 아내라는 신분이 사라진다면, 그녀의 오만방자한 성격을 싫어하면서도 이때까지 울며 겨자 먹기로 비위를 맞춰주던 사람들이 뒤돌
정민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은혁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위선적이고, 교활하고, 이기적이고, 겉과 속이 다르고, 권세에 빌붙어...”그녀의 말에 당사자인 서은혁뿐만 아니라, 가게 구석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사연희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망했어! 이렇게 된 이상 새로운 가게를 찾을 수밖에 없겠네...’서은혁은 망설임 없이 단어들을 내뱉는 정민아에게 다시 물었다.“부모님께서 당신한테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이 정도로의 적대감을 품게 된 거죠?”“궁금하면 직접 당신 부모님한테 찾아가서 물어봐요. 당...”정민아가 서은혁을 가게에서 쫓아내려다가 사연희의 뜨거운 시선에 하려던 말을 집어삼켰다.“가게 월세에 대해서는 우리 사장과 얘기해요.”사연희는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자기가 나서야겠다는 생각에 서은혁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서은혁 씨라고 했죠? 저쪽에 차랑 커피를 준비해 놨는데 자리를 이동해서 저랑 얘기하면 어떨까요? 민아랑 더 얘기를 나눠봐도 기분만 더 나빠질 뿐이에요. 차라리 궁금한 걸 저한테 물으면, 제가 숨김없이 다 얘기해 줄게요.”정민아가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자, 좀 전까지 어지러웠던 곳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고 방 안에 책걸상, 컴퓨터와 책장밖에 없어서 썰렁하기 그지없었다.30분 후, 사연희는 서은혁을 가게 앞까지 배웅하고는 정민아에게 와서 말했다.“서은혁 씨가 널 좋아하지? 이 가게를 사려면 돈이 많이 들겠는데 씀씀이가 아주 큰가 보네. 난 이번 생에 저렇게 멋진 남자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정민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술을 오므리더니 손에 든 디자인 원고를 내려놨다.“너 언제부터 연애에 관심이 커졌지?”그녀는 서은혁이 자기의 앞에 나타난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닌 불순한 목적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사연희는 정민아의 반응이 재미없다는 듯 뾰로퉁한 표정을 지었다.“넌 정말...”때마침 정민아의 휴대폰이 울렸고 주소월이 본가에 저녁을 먹으러 오라는 거였다.그러나 그녀는 짧은
고연우가 있으니 정민아는 정선아를 칼로 해칠 수 없다. 그녀는 식탁 앞에 서자마자 손을 억제당했다. 고연우는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다.“정민아...”비록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주소월이 바라던 자매간의 깊은 우애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주소월은 차갑게 빛나는 칼날을 보며 눈동자가 떨렸다. “민아야...”정민아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들을 냉정하고 조롱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제가 오만한가요? 아니면 악독한가요?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시죠? 그럼 당신들은 이기적이지 않나요? 당신들이 바라는 겉만 번지르르한 화목을 위해 저와 정선아의 불화를 모른 척하셨죠.”“정선아가 저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정선아가 지난번에 나에 대해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 들통났기 때문이었죠. 네가 혹시...”“언니...”정선아는 언성을 높이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정선아가 이전에 했던 일들을 말할까 봐 두려워서였다. 예전에는 엄마가 믿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지난번 사건 이후로 엄마는 정민아에 대한 죄책감이 한없이 커져 있었다.그녀는 정민아를 바라보며 긴장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민아는 그런 정선아의 모습을 보며 어이없는 듯 코웃음을 쳤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제 시작일 뿐이야. 앞으로 남은 시간이 아주 많아.”정민아는 겪었던 불공평과 당했던 모욕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선아의 가면을 하나씩 벗겨내어 그녀의 악독한 본성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했다.정민아는 고개를 살짝 돌려 주소월을 바라보았다. 이 연이은 공격을 주소월이 견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아버지를 화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했는데 이어 어머니마저 병원에 보내는 불효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손에 힘을 풀고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자 아주 쨍한 소리가 났다.“다들 천천히 드세요.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고연우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남겨져 있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고연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내 생각엔 네가 날 어떻게 죽일지 고민 중인 것 같아.”“응. 사실 나도...쓰읍...”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에서 갑작스럽게 느껴진 통증에 무방비 상태였던 정민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바로 고연우가 손을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있고 때문이었다.손가락이 피부에 닿자 따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아마도 아까 채연에게 긁힌 상처 때문인 듯했다.고연우는 손을 거두어들이며 자기 손가락 끝에 묻은 피를 보여주었다. “다치지 않았는데도 물어대더니 이젠 사람이라도 잡아먹을 기세구나.”정민아가 말했다.“...그렇다면 연우씨는 밤에 잠잘 때 절대 눈을 감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발병이라도 하면 가장 먼저 당신을 물어버릴 테니까.”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눈송이가 차 앞 유리에 떨어져 곧바로 물로 변했지만 점점 더 많은 눈이 쌓이면서 얇은 얼음층이 이루어졌다.정씨 가문에서 신림동까지는 꽤 멀었고 눈 오는 날씨에 길이 미끄러워 차를 천천히 몰다 보니 한참을 몰았는데도 조금 밖에 가지 못했다.두 사람은 원래부터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차 안에는 음악도 켜지 않아 눈송이가 차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요했다.정민아는 앞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고 고연우는 지루했는지 갑자기 물었다.“너의 친부모님은 너를 잘 대해주는 거야?”“?”정민아는 잠시 멍해졌다가 고연우가 묻는 것이 그녀의 양부모에 대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정씨 가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철진과 주소월이 자신의 친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그 두 사람을 친부모로 생각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그녀는 눈을 살짝 감으며 마치 별것 아닌 일을 이야기하듯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는 시골에서 자란 아이들이라 너희 같은 부잣집 도련님과 아가씨들과는 다르게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좋고 나쁠 것도 없어.”고연우는 침묵했다.“...”고연우는 사실 정민아가 잘 지내는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송씨 아주머니는 할 말을 잃었다.“?”이게 남편으로서 할 소리는 아니다. 송씨 아주머니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정민아와 소파에서 다리를 꼬고 냉정하게 앉아 있는 고연우를 번갈아 보았다. 이혼을 권하는 말을 몇 번이나 하려고 했지만 이혼을 말린다는 것과 말리지 않는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며 결국 참아냈다.침대 위에서 정민아는 낮은 목소리로 앓는 소리를 내며 추운 듯 몸을 더 움츠렸다.고연우는 침대에서 고열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깊은 잠에 빠진 정민아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거만하고 오만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정민아가 이렇게 초라하고 가엾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보며 고연우는 왠지 안쓰럽다고 느꼈다.고연우는 언잖은 듯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이며 말했다.“부인의 잠옷을 가져다주세요.”“네.”송씨 아주머니가 옷을 가져오면서 욕실에서 따뜻한 물을 떠 왔다. “아가씨는 깔끔한 것을 좋아해요. 땀에 젖은 채로 잠자리에 들지 않으세요. 몸을 닦아주면 열도 좀 내릴 겁니다.”고연우는 마음속의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그냥 이대로 누워 있게 두세요.”그는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결국 정민아의 이불을 걷어내며 말했다.“일어나서 옷 갈아입어.”송씨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방을 나갔다.방 안은 히터가 켜져 있어 적당히 따뜻했지만 이불을 걷어내자 정민아는 추워서 몸을 떨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이불을 더듬었지만 고연우가 어디에 던져놨는지 찾을 수 없었다.“고열로 바보가 되기 싫으면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어.”정민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손으로 더듬거리며 고연우의 말을 무시했다.“...”고연우는 몇 초 동안 참고 기다렸다. 그러나 정민아가 여전히 이불을 더듬고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고 엄숙해졌다.“정민아.”정민아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고연우는 깊은숨을 몇 번 내쉰 뒤에 결국 화를 참으며 몸을 숙여 그녀의 옷
고연우는 마음속에 아침부터 쌓였던 분노가 이 순간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 좋지 않았다.“정민아가 죽고 싶어서 그런 거면 조용한 곳에 가서 혼자 해결하라고 하세요. 다른 사람까지 피해 주지 말고요.”그는 항상 정민아에 관한 일만 생기면 매우 폭력적이었고 성격도 나빠지면서 인내심도 없었다. 그리고 쉽게 화를 냈다.송씨 아주머니는 정민아가 이 말을 들으면 상처받을까 봐 급하게 전화를 끊었지만 정민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송씨 아주머니는 좋은 의도로 한 일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했기에 마음이 불편해졌고 초조해하며 불렀다.“아가씨...”정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위로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핸드폰에 알림이 울렸다. 앱에서 송금 알림이 왔는데 2천만 원이 입금되었다.“...”처음에는 백아영이 가게 공금을 보낸 것으로 생각해서 옷을 갈아입고 나서 확인하려고 했다. 그런데 두 번째 4천만 원 세 번째 6천만 원 점점 더 많은 송금 알림이 울리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정민아는 핸드폰을 꺼내 송금 기록을 확인해 보니 예상대로 고연우가 보낸 것이었다.메모 1: 내가 너를 굶기기라도 했어? 아프면서까지 일하러 가야 해야 해?메모 2: 아프면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어.메모 3: 병이 더 악화하면 또 누가 널 돌보라는 거야?그 뒤로는 더 이상의 메모는 없었다. 왜냐하면 송금 기록이 수십 건이 넘었기 때문이다. 고연우는 일일이 메모를 남길 인내심이 없었다.정민아는 이 메모들조차 고연우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공민찬이 대신 입력한 것으로 의심했다.송씨 아주머니는 누가 송금했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연이어 울리는 알림 소리를 듣고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정민아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바라보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그녀가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처럼 돈에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아가씨와 대표님은 부부이고 그의 돈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절대 스스로를 억울하게 하지 마세요. 밖에 여우 같은 여자들에게 좋은 일을 시키
정민아는 동영상을 넘기기만 하면 그동안 있었던 모든 앙금은 깨끗하게 지워 주겠다고 메시지를 보냈었다.채연이 말했다.“내가 넘긴 거라는 사실을 비밀로 해줄 거지?”세력이 막강한 최민영을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정민아는 미친 사람 같은 이 여자와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 무리의 결말을 떠올리면 채연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으스스 떨렸다. 어젯밤 내내 생각했지만 채연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배경도 없고 시골에서 온 여자가 그들을 이렇게까지 몰락시켰는지 말이다. 심지어 민형 언니와 연우 도련님같이 대단한 사람들도 피할 수 없었다. 한 명은 해외로 떠났고 한 명은 강제로 정민이와 결혼했다.마치 독심술을 하는 것처럼 그들의 모든 행동을 예측한 것 같았다.“응.”정민아는 웃으며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동영상은 정선아가 줬다고 해줄게.”거짓말로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에 대해 전혀 부끄러움이 없어 보였다.채연은 다시 말했다.“...내가 이 사실을 정선아에게 말할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너희 어젯밤에 사이 틀어졌잖아.”“...”정말 그러했다. 어젯밤 정민아가 떠난 후 그녀와 정선아는 크게 싸웠다.“너 우리를 감시했어?”“내가 너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것 같아? 굳이 감시할 필요도 없어.”이기적이고 이익만을 좇는 이들에게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들의 사이를 틀어놓을 수 있다.영상을 손에 넣자마자 차를 몰고 떠났다. 옆 건물이 바로 정씨 가문이었지만 올라가 보지도 않았다.가는 길에 송씨 아주머니에게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말하고 아무거나 대충 먹었다.집에 도착하자 송씨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께서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아요. 돌아오시자마자 거실에서 계속 얼굴을 찌프리며 앉아 계세요. 아마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네, 고마워요 아주머니. 늦었으니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거실로 들어서자마자 고연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집으로 돌아올 줄은 아는구나.”이 비꼬는
고연우는 한 손을 정민아의 옆에 놓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감쌌다. 그의 짙은 눈 밑에 그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계속 시선을 떼지 못했다.“...”뒤이어 그가 어금니를 살짝 깨물자, 아래 턱선이 팽팽해지면서 목젖이 위아래로 진동했고 잠긴 목소리로 정민아를 불렀다.“정민아...”목이 타들어 갈듯한 무더위. 정민아의 코끝에 고연우의 강렬한 남성적인 기운이 감돌아 숨쉬기 힘들었지만 절대 떨림 때문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몸이 점점 굳어졌고 모공 하나하나가 밖으로 나와 저항하려는 것 같았다. 고연우의 검은 눈동자에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내 입꼬리를 치켜세우면서 정민아에게 물었다.“싫어?”사실 두 사람이 불이 환하게 켜진 상황에 가까이서 눈을 마주친 건 이번이 처음이었고, 정민아에 대한 증오로 차갑기만 했던 고연우의 눈빛이 지금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러나 정민아는 눈썹을 한껏 치켜올리더니 비아냥거렸다.“... 네가 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말해줄까?”그 순간, 고연우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고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면서 시원한 민트향을 풍겼다.“남자의 말도 믿어? 정민아, 너 바보야?”정민아가 말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더니 키스를 퍼부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민아가 아무런 반항을 못 하자, 고연우는 서슴없이 그녀의 입안 곳곳을 탐했고 야릇하면서도 거친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정민아는 간신히 정신을 다잡고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그의 키스를 피했고 하얀 목이 약간 들어 올려져 턱에서 쇄골까지의 라인이 두드러져서 눈을 뗄 수 없었다.방 안의 공기는 마치 수많은 불꽃이 숨어 있는 듯 살짝만 건드려도 활활 타오를 것만 같았지만, 정민아가 이내 분위기를 와장창 깨는 말을 내뱉었다.“얼마 전 최민영이 국내로 돌아오겠다고 자살 소동까지 일으키면서 난리 쳤대.”“...”그녀의 한마디가 그 어떤 행동상의 거부보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