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유성아… 날 가져.”“신연지, 날 똑바로 봐. 내가 누구야?”전등이 켜지고 신연지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박태준? 당신이 왜 여기 있어?”남자는 여자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 싸늘하게 말했다.“이건 당신이 자초한 거야. 겁도 없이 내 침대로 뛰어들다니.”“그런 거 아니야. 방을 잘못….”신연지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그녀는 이날 밤 순결을 잃었다.모든 게 끝난 뒤, 박태준은 싸늘하게 그녀에게 카드를 던졌고 분노한 신연지는 남자의 귀뺨을 후려쳤다.그는 손으로 입가를 쓱 문지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니었나?”그 말은 신연지를 미치게 만들었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어버렸다.“박태준, 돈은 필요 없어. 내 순결을 망쳤으니 결혼으로 갚아!”3년 후, 신당동의 한 호화저택.신연지는 따분한 얼굴로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유명 발레리나 전예은이 무대에서 추락하며 아수라장이 된 현장.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사람들을 비집고 달려가서 부상을 입은 여자를 안고 현장을 벗어나는 모습이 각종 채널에서 보도되고 있었다.잠깐 비친 옆모습이었지만 그와 3년을 동거한 신연지는 한눈에 박태준을 알아보았다.어젯밤 침대에 누워 오늘 일찍 돌아오겠으니 기다리라고 했던 남자였다.그녀는 식어버린 음식들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직접 만드느라 오후 시간을 다 썼건만, 같이 먹어줄 사람은 오지 않았다.신연지는 다가가서 반찬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물집이 잡힌 손으로 정성들여 만든 반찬을 쓰레기통에 붓는 모습은 처량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설거지를 끝낸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집을 싸기 시작했다.그녀와 박태준은 계약결혼한 사이였다. 그리고 계약한 3년이 드디어 끝났다. 전예은이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시간과 정확히 맞물렸다.비록 아직 정확한 계약기간까지는 3개월이 남았지만 전예은이 돌아왔으니 계약을
“신연지, 이혼 서류 보냈던데 대체 뭐하자는 거야?”박태준의 목소리를 확인한 신연지는 순식간에 잠이 확 깨 대답했다. “거기 적힌 대로야.”박태준은 냉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이따가 출근하면 내 사무실로 와서 이 쓰레기들 도로 가져가. 저녁 여덟 시까지는 시간 줄 테니까 짐 싸들고 집에 돌아오고.”그의 말에 신연지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박태준, 당신 미쳤어?”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말투를 바꿔 차분하게 말했다.“전예은 씨가 불륜녀로 낙인 찍힐까 봐 그러는 거야? 어차피 우리가 결혼한 거 부모님하고 가까운 지인들만 알고 세상 사람들은 모르잖아. 사람들은 당신을 여자친구의 꿈을 응원하고 기다리는 순애보로 기억한다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귀국했으니 잘된 거 아니야?”하지만 박태준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제 전예은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뉴스에 났는데 오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이 서류가 외부에 노출이라도 된다면 전예은은 불륜녀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그는 싸늘한 얼굴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한참 신나서 떠들던 신연지는 뒤늦게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개 같은 자식.’호텔과 본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그녀는 느긋하게 씻고 조식을 챙겨 먹은 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박태준과 결혼한 뒤, 그녀는 시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박태준의 비서로 재경에 입사했다.하는 일로 따지면 사실 비서라기보다는 하녀에 가까웠다.평소에는 박태준의 삼시세끼와 옷 세탁 등 자질구레한 일을 책임지고 최저시급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월급을 받았다.회사에서는 그녀가 박태준의 아내이자 재경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륜녀로 불려야 할 여자는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고 정실 부인인 그녀는 매일 신분이 들킬까 봐 차를 타고 와도 몇 정거장 앞에서 내려 걸어서 출근하고 있었다.회사에 도착한 신연지는 곧장 자리로 가서 사직서를 작성했다. 어차피 이혼하기로
별거 얘기가 나오자 신연지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상하다? 왜 마음이 아프지?결혼한 뒤로 박태준이 저택으로 돌아와 밤을 보낸 횟수는 손에 꼽을 수준이었다. 사실 상 별거와 다를 바 없었다.“어차피 3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굳이 그 집으로 들어가서 살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래.”박태준은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냉소를 지었다.“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지. 오늘 반차 내줄 테니 짐부터 집으로 옮겨.”“아니….”거절의 말은 때 아니게 들려온 노크소리에 묻혀버렸다. 안으로 들어온 진영웅이 공손히 말했다.“대표님, 회의 들어갈 시간입니다.”박태준은 옷매무시를 정돈하고 그녀에게 싸늘하게 말했다.“이제 나가봐.”신연지는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박태준, 난 돌아가지 않을 거야.”박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지난번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신연지가 그와 싸우고 집을 나간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번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는 스스로 집으로 돌아갔다.할 말이 없게 된 신연지는 말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여기서 그와 입씨름하는 건 시간낭비였다.사무실을 나온 그녀는 일단 화장실로 가서 화장을 수정했다. 그에게 잡혔던 턱에 퍼런 멍이 나 있었다.두꺼운 컨실러로 자국을 가린 뒤, 그녀가 사직서를 제출하러 인사과로 향하는데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연지 씨, 프린터에 잉크가 다 떨어졌어. 좀 갈아줘.”하루에도 몇번씩 듣는 잔심부름이었다. 박태준의 개인 비서로써 그의 일과만 관리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녀를 쌀쌀맞게 대하는 박태준의 태도에 점차 같은 비서실 직원들도 그녀를 막내처럼 부려먹기 시작했다.“연지 씨, 잉크 좀 갈아달라니까?”평소에도 신연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도 비서가 싸늘한 목소리로 재차 강조했다. “퇴사하더라도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어? 아직 사직서 제출하기 전이잖아?”“제 업무 내용은 박 대표님의 일과를 책임지는 겁니다. 도 비서님이 박 대표님 대신이라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신연지가 건넨 카드는 박태준이 준 카드였다. 그녀는 개인돈을 숙박료로 전부 탕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준 카드를 썼다. 그녀는 진유라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고 바로 택시를 잡았다.강태산의 차가 뒤를 따르고 있었지만 신연지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챙기다가 모서리에 손등을 부딪혀 버렸다.피부가 긁혀서 피가 났지만 그리 심각하지는 않아 보였다.진유라는 17층에 살고 있었다. 미리 연락을 했기에 문은 열려 있엇다.신연지가 캐리어를 끌고 나타나자 진유라는 살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전화 상으로는 집을 나왔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진유라가 다급히 다가와서 그녀의 손에서 캐리어를 받았다.“짐 있다고 얘기했으면 내가 내려갔지. 너 손은 왜 이래? 다쳤어?”신연지는 다급히 의약품 상자를 찾으러 가는 친구의 손목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내버려두면 알아서 나을 거야.”“손으로 벌어먹고 살 사람이 손을 이렇게 막 대하면 어떡해?”신연지는 과장된 친구의 표정을 보자 며칠간 쌓였던 피로가 다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이 정도 다쳤다고 영향이 있진 않아.”잠시 고민하던 진유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지난번에 내가 얘기했던 거 고민해 봤어?”신연지는 그 말에 시선을 회피했다.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허 원장님 나를 몇번이나 찾아오셨어. 그분이 운영하는 작업실은 국내 최고 골동품 복원사만 모였잖아. 그런 인물이 직접 너를 지명하셨다는 건 대단한 기회야! 네가 신분이 들통날까 봐 거절만 안 했어도 당장 네 연락처를 줬을 텐데!”신연지는 뛰어난 골동품 복원 전문가였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복원사인 엄마를 따라 기술을 배웠고 대학도 같은 과를 나왔다. 졸업하고 바로 박물관에 취직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사고가 나면서 박태준과 결혼하고 잠적했다.최근 몇 년 사이, 그녀는 친구인 진유라를 통해 일감을 받아 민간 복원사로 일하고 있었다.하지만 현재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유명 작업실에 취직하는 것
본가로 향하는 차 안에는 어색한 공기로 매워쌌다. 차가 번화가를 벗어나 한 호화 주택가로 들어선 다음에야 그는 긴 한숨을 내리며 차에서 내렸다.그는 뒤에 내린 신연지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가슴 크고 백치미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했어?”신연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그냥 그의 이미지에 생채기라도 낼 생각에 홧김에 한 말이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을 줄이야!고개를 돌리자 박태준의 시선이 고의인지 아닌지 그녀의 가슴께로 향해 있는 것이 보였다.그의 눈빛에서 잔잔한 비웃음이 느껴졌다.“남자들 좋아하는 여자 이상형은 거의 다 비슷하지 않아?”박태준이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난 아니거든?”신연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길거리에 나서면 모두의 시선을 받을 만큼 화려한 이목구비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박태준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담담하고 아무런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당신 취향은 내 알 바 아니지만 난 활기차고 밤일 잘하는 남자를 좋아해. 그게 이혼하려는 이유이기도 하고.”박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하게 굳었다.옆에서 대기하던 강태산의 이마에서도 식은땀이 흘렀다.“도련님, 작은 사모님, 이제 들어가시죠. 바람이 찹니다.”신연지는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강혜정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내가 아줌마 시켜서 삼계탕 끓였어. 안에 피부 미용에 좋은 약재도 넣었으니까 이따가 먹어봐.”그녀는 뒤따라오는 아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거실로 들어온 강혜정이 작은 소리로 며느리에게 물었다.“태준이 녀석 요즘은 얌전하지?”어제 뉴스를 보고 혹시나 신연지가 상처받았을까 봐 본가로 부른 게 분명했다! “어머님, 저희는….”그녀가 이혼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려는데 강혜정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태준이 녀석 너 속상하게 하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혼내줄 테니까! 녀석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지만 말고 이따가 리스트 따로 적어줄 테니까 그것만 끼니 때 챙겨줘
신연지는 말투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어머님의 성의를 무시하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싸늘하게 대꾸했다.“당연히 마셔야지.”박태준은 말없이 그릇을 들고 욱여넣다시피 해서 한 그릇을 비우더니 탕 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전등을 끄고 침대로 올라왔다.신연지는 그를 등지고 누워 눈을 감았다.가끔은 이렇게 둘이 같은 침대에 누워 잠든 적이 있었지만 항상 멀리 떨어져서 잠만 잤다.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잘 자고 있는데 갑자기 박태준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 그의 딱딱한 근육이 등에서 느껴졌다.남자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거친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신연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허리 아래에서 딱딱한 느낌이 느껴졌다.“박태준!”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신혼 때는 이런 상황을 기대했던 적도 있지만 3년 동안 그의 냉대와 침묵에 지쳐 언젠가부터 포기하고 있었다. 이제 곧 이혼할 사이인데 그와 이런 식으로 엮이는 건 달갑지 않았다.실수는 한번이면 족했다.“뭐가 잘못됐어?”남자의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당당했다.박태준은 순식간에 그녀의 위로 올라타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신연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쳐냈다.“싫어.”“내가 남자 구실을 안 해서 질렸다며? 아까 그 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때 이런 거 바라고 한 거 아니었어? 이제 와서 싫다는 건 너무 속보이지 않아? 나랑 밀당이라도 하고 싶어?”그의 말투에서 진한 비웃음이 느껴졌다.신연지는 그제야 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난 몰랐어.”“나한테 그걸 믿으라는 거야? 이런 적이 처음 있은 것도 아니고.”“그건….”매번 그 이야기만 나오면 신연지는 깊음 무력감을 느꼈다. 이제 그만 잊으려고 할 때마다 그는 그날 밤 실수를 상기시켜 주었다.“마지막으로 말하지만 그때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태준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쳐왔다.당황한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