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손을 뺀 후 그를 건너서 가버렸다.밖으로 나오니 거리는 시끌벅적했다. 대부분 식사가 끝나고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이었는데, 다들 편안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함께 걷고 있었다. 도로에 줄지어 달리는 차들과 거리를 온통 채운 네온사인이 이 도시의 번화함을 부각시켰다.그녀는 처음 정씨 저택에 왔을 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정철진과 주소월이 직접 그녀가 있는 작은 도시로 데리러 왔고, 여기 도착했을 때 딱 이 시간이었다. 처음 대도시에 온 그녀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정씨 저택의 문이 눈앞에서 천천히 열렸고, 안에서 소년 소녀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가장 유행되는 신상 옷으로 화려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색이 바래고 늘어난 데다 키가 크면서 소매와 바짓가랑이가 짧아진 옷을 입고 있었고,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는 뼈만 앙상해 초라하고 꾀죄죄했다. 그녀는 그 집, 그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선아야, 언니야. 우리가 새로 입양한 아이.”정민아는 나중에야 이 잠깐의 멈춤이 그녀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것을 알았다.정민아를 데려오기 전에 부모님은 이미 정선아에게 이를 이야기했다. 정선아가 이 일 때문에 친구들 앞에서 많이 울었기에 그녀가 들어섰을 때 애들은 하나같이 배척과 경멸의 시선을 보내왔다.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정민아는 사람들의 안 좋은 시선에 특히 민감했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그녀는 그들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그 후에 겪은 일들은 그녀의 직감이 맞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마당 뒤편에는 빈 벽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아무도 가지 않던 곳이었다. 정민아가 오고 나서 그 벽은 온갖 욕설로 도배됐다.[오늘 똥개를 보았니?]맨 위에 있는 큼지막한 제목이다.[똥개는 바람기가 있는 천한 여자다.][오늘 내가 똥개에게 구정물을 끼얹었더니 화를 냈어. 하하하! 그 옷은 우리 증조할머니가 봐도 촌스럽다고 싫어해. 시골 촌뜨기나 보물로 여기는 거지. 웩!][천한 년이 감히 내 남자친구를 유혹하다니,
쾅! 누군가가 밖에서 욕실 문을 걷어차서 열었다.고연우가 몇 걸음에 욕조 옆으로 다가와 물밑에 가라앉은 정민아를 끌어올렸다. 그의 얼굴은 서리가 맺힐 듯 차가웠다.“정민아, 미쳤어? 죽고 싶으면 다른 데 가서 죽어.”정민아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고 흐트러진 동공은 한참 후에야 초점을 찾았다. 남자의 분노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욕조를 보았지만 여자는 보이지 않았고 물도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았다.그녀는 고연우의 허리를 휘감은 손을 놓고 흠뻑 젖은 눈을 내리깔며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잠들었어.”말하고 나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목욕하는데 왜 들어왔어?”“허!”고연우는 그녀의 적반하장에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내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내일 네 묘지를 알아봐야 했을 거야.”그는 밖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계속 대답이 없어 문을 박차고 들어왔던 것이다.“죽을 생각이 없었어.”죽고 싶어도 그 무리를 하나씩 지옥에 끌어넣은 후 죽을 것이다.정민아는 그가 보는 앞에서 선반 위의 목욕 가운을 내리려 했다. 고연우가 그녀를 직접 욕조에서 끌어냈는데,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는 그가 보는 앞에서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이 태연하게 돌아서서 손을 뻗었다...오히려 그녀가 똑바로 섰을 때 고연우가 조용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을 피했다.둘이 잠자리를 가졌지만 매번 불을 끈 상태에서 상대방의 희미한 그림자만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열 번에 일곱 번은 한밤중에 곤히 자고 있을 때 정민아가 그의 몸 위로 올라와 수동적으로 깨어났다.그는 워낙 정민아에게 애정이 없는 데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녀의 방식이 싫었다. 남자라면 모두 좌절감을 느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지는 잠자리는 성의가 없었고 시작하기 전의 애무는 고사하고 절정에 달했을 때의 위로도 없었다.그래서 고연우는 정민아의 몸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고, 시선을 피한 것도 뼛속까지 신사적인 그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다
고연우는 그녀를 힐끗 봤는데, 그 눈빛은 마치 멍청한 바보를 보는 것 같이 속눈썹마저 경멸을 나타내고 있었다.그는 그녀를 건너서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정민아는 아래층에 내려와서야 송씨 아주머니가 면을 두 그릇 끓였다는 것을 알았다. 고연우는 벌써 젓가락을 들고 먹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위에 노릇노릇한 계란후라이와 잘게 다져서 볶은 고기, 파릇파릇 싱싱한 야채를 얹고 그 위에 송송 썬 쪽파를 뿌린 면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한 젓가락 집으니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맛있는 냄새가 확 풍겼다.그녀는 면이 뜨거워 무심하게 집었다 놓았다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초점 없는 시선으로 주방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마지막에 고연우를 바라보았다.“밥 안 먹었어?”“응.”“정선아를 좋아해?”고연우네는 몇 년 전에 그 마을에서 이사 갔고 두 집은 같은 방향도 아니다. 고연우가 오늘 그렇게 때마침 나타난 것은 정선아의 작간이 틀림없다.면을 먹고 있던 고연우는 멈칫하더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내뱉은 말은 매우 듣기 거북했다.“집 나간 정신이 아직 안 돌아왔어?”정민아는 그를 바라보면서 말을 잇지 않았다.그녀는 사람을 바라볼 때 눈꼬리를 내리는 습관이 있는데, 이목구비가 또렷하지만 약간 염세적인 얼굴로 그렇게 보고 있으면 세상을 우습게 보는 듯한 압박감을 주었다.그녀의 시선에 밥맛이 떨어진 고연우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부모님이 뭔가 가져다드리라고 해서 갔어. 공교롭게 도착하자마자 네가 악랄하게 날뛰는 모습을 보게 된 거야.”말투는 덤덤했지만 눈가에 감도는 비꼬는 기색에서 경멸의 뜻이 남김없이 드러났다.정민아는 그제야 고개를 숙이고 면을 먹었다. 그녀는 먹는 속도가 빨랐지만 소리는 별로 나지 않았다. 면 한 그릇은 이내 바닥이 났고, 더 이상 건져지는 것이 없을 때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휴지로 입을 닦더니 절반 넘게 남은 고연우의 면에 시선을 돌렸다.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배 안 불렀어?”그는
이 말이 끝나자 거실은 정적에 휩싸였다.정민아는 눈을 내리깔고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정선아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겠으면 쿠팡에서 여자친구를 사 줄게.”“...”이 말을 들은 고연우는 쓴웃음을 짓더니 비꼬는 듯한 눈빛으로 정민아의 얼굴을 훑었다.“네 덕분에 나는 이제 여자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어.”“남자도 있어.”목소리가 맑고 시원해서 듣기 좋았지만 하는 말은 이가 갈릴 정도로 미웠다.“그래서 나한테 남자를 사주겠다는 거야?”고연우의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은 그냥 차가운 표정보다 더 섬뜩했다. 그는 더 이상 정민아와 말을 섞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정민아는 초점 잃은 눈빛으로 불어버린 면을 바라보았다.“고연우, 이혼하면 좋지 않아? 이혼하면 너랑 나 모두 자유를 얻게 되잖아.”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지극히 웃긴 얘기를 들은 것처럼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자유를 얻는다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그는 눈에 비꼬는 기색이 가득했다.“그렇게 많은 사람을 해치고 그렇게 많은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네가 무슨 자격으로 자유를 얻어?”“...”“사모님.”송씨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한 그릇 더 끓여드릴까요?”정신을 차린 정민아는 그제야 고연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아니요.”그녀의 외롭고 가냘픈 뒷모습을 보면서 송씨 아주머니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사모님, 대표님과 무슨 오해가 있는지 모르지만 사모님이 절대 사람을 해치지 않았을 거라고 믿습니다. 대표님이 오해하고 계신다면 분명하게 설명하세요.”“오해 아니에요.”고개를 돌린 정민아의 눈에 웃음기가 있었지만 기쁨에서 나오는 그런 웃음이 아니었다. 송씨 아주머니는 이게 어떤 종류의 웃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슬펐다.“제가 정말 많은 사람을 해쳤어요.”...월요일에 정민아는 얼굴의 상처가 다 낫지 않았지만 여전히 작업실로 나갔다. 백아영이 아침부터
“10월 하순?”이가림의 시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절절매고 있는, 남 앞에 내놓기 부끄러운 며느리를 바라보았다.“후에 또 왔었어? 이 디자인은 네가 고른 거야?”“아니요, 어머니, 아니에요.”여인은 다급하게 설명하려 했지만 겨우 이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정민아를 바라보았고, 너무 급해서 눈시울까지 붉어졌다.“정민아 씨, 내일이 결혼식이라 지금 고쳐도 늦으니까 가게에 있는 기성품으로 바꿔 주세요.”그녀의 애원에 대한 정민아의 반응은 상당히 냉정했다.“가게 규정에 따라 우리 잘못이라면 맞춤 제작한 드레스를 환불해 주는 것은 물론 100배의 배상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은 저희 가게의 명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죄송하지만 그런 애매한 처리방식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그녀의 신랑과 시어머니는 100배 배상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여 뒷말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100배라고?”남자는 심지어 손가락을 꼽으며 중얼거렸다.“웨딩드레스를 주문하는 데 1,000만 원을 썼으니 100배면... 10억...”이건 그가 운영하는 작은 회사의 1년 순이익보다도 많다.그는 원래 4,000만 원만 배상받으려 했는데, 이렇게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는 만족스럽게 콧소리를 냈다.“눈치 있네. 그럼 빨리 배상해. 당신들이 잘못하긴 했지만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가 이렇게 성의 있는 걸 봐서 앞으로 주변에 결혼하는 친구가 있으면 추천해 줄게.”중년 여인도 말했다.“그러니까, 볼일이 있어서 가봐야 하니까 빨리 배상해.”따라온 친척들도 모두 눈에 퍼런 불을 켜고 정민아라는 바보 계집애한테서 돈을 뜯어낼 방법이 없을지 머리를 굴렸다.아무도 이가림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고 손도 걷잡을 수 없이 떨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녀는 시골 아가씨였는데, 외모도 능력도 평범해 그동안 경인시에서 줄곧 지하실에 살았다. 경인시에 자가를 보유하고 회사까지 가지고 있는 약혼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는 올해 어쩔
백아영은 정민아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은행을 털러 가는 사람처럼 얼굴을 꽁꽁 가리고 있어서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민아 언니, 도대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온 거예요?”“...”그녀는 궁금해 죽겠다는 백아영의 얼굴을 밀어냈다.“빨리 정리하고 업무를 시작해. 다음 달에도 월세를 마련하지 못하면 문을 닫아야 해.”“괜찮아요. 문을 닫아도 저는 두 언니를 따라갈 거예요. 까짓것 월급을 받지 않으면 되죠. 먹여주고 재워주면 돼요.”“내가 지하 통로에서 구걸해도 따라갈 거야?”“그럼, 저는 누워서 아픈 사람 연기할게요.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더 많이 던져줄지도 모르죠.”정민아가 웃음을 터뜨렸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일이나 해.”가게 바닥에 옅은 색의 무광 타일을 사용한 까닭에 쉽게 더러워졌다. 방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밟아서 신발 자국이 가득 생겼는데, 전시 구역의 흰색 웨딩드레스와 대조되어 더욱 더러워 보였다.백아영이 대걸레를 가지고 와서 바닥을 닦으면서 툴툴댔다.“민아 언니, 그 남자는 정말 징그럽네요. 마마보이에 가정폭력까지. 그런데도 이가림 씨는 결혼하려 하다니, 정말 우리 여자들의 얼굴에 먹칠하네요.”휴대폰에서 사연희가 보내온 문자에 답장하던 정민아는 그녀의 말을 듣고 타이핑하던 손을 잠시 멈추더니 종잡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어쩔 수 없겠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으면 그 사람의 선택을 평가할 자격도 없어.”이 말이 왜 절망적이고 슬프게 들릴까?백아영은 의아한 눈빛으로 정민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하고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편안한 상태인 것 같았고 절망과 슬픔은 보이지 않았다. 백아영은 머리를 흔들면서 ‘막장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환각이 생겼나’하고 생각했다.“그 남자가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요. 10억 소리를 들었을 때 눈을 번쩍 뜨더라고요.”아니나 다를까 오후에 그 남자가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영상이 인터넷에 나돌았다. 백아영이 그 영상을 봤을 때는
백아영은 오후 내내 사이버 여론을 주시했는데, 역시 뻔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영상의 열기가 뜨거워지자 잠시도 쉬지 않고 라이브 방송을 시작해 눈물 콧물 짜내며 정민아의 태도가 얼마나 얄밉고 고약했는지 하소연했다.“그 여자는 줄곧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끼고 우리를 쌀쌀맞게 대했어요. 내일이 결혼식인데, 웨딩드레스가 이렇게 돼서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을 연기해야 하는데 호텔, 웨딩 서비스, 하객의 숙박과 비행기표 등 손실을 합하면 2,000만 원에 육박합니다.”“우리가 많이 요구한 것도 아니고 그저 가게 규칙에 따라 배상하라고 했더니 그 여자는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직접 쫓아냈습니다. 착한 우리 며느리가 가게를 운영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기성품으로 바꿔 달라고 하는데도 정씨 디자이너는 동의하지 않았어요.”말을 마친 중년 여인이 옆에 있는 이가림을 쿡쿡 찌르자, 그녀는 즉시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결혼식처럼 중요한 날에는 문을 나서는 시간까지 정확히 계산하는데, 이렇게 큰 문제가 생겨서 길시를 놓쳤으니 앞으로 결혼생활이 순조롭지 않을지도...”그녀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그저 다른 사람들은 이 가게와 이 디자이너를 피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사실을 공개하는 바입니다.”그녀는 작업실의 주소와 정민아의 사진을 공개했다. 누리꾼들은 마음이 고약하고 무책임하고 고객에게 큰 피해를 줬다며 정민아를 욕했다.인터넷에서 네티즌과 입씨름을 벌이던 백아영은 덤덤한 표정으로 쇼를 관람하는 정민아를 보고 놀랐다.“언니는 화도 나지 않아요?”입장을 바꿔서 그녀가 이렇게 욕을 먹었다면 케이블을 타고 기어가서라도 개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의 대갈통을 부숴버렸을 것이다.정민아가 중얼거렸다.“이보다 더 듣기 거북한 말도 들어봤어.”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백아영은 듣지 못했다.“뭐라고요?”“퇴근해.”정민아는 노트북을 덮으며 말했다.“좀 더 늦으면 가지 못할 거야.”옆 거리의 길가에 세워둔 차로 향하던 그녀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고연우는 공민찬에게 사무실에 들어오라고 연락하고는 자기를 뜨거운 시선으로 노려보는 정민아에게 말했다.“가게 일은 공 비서가 곧 해결할 거야, 곽 변호사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돼.”“내가 가게 일을 도와달라고 너한테 온 줄 알아?”고연우가 답을 안 해도 그의 표정에서 모든 것이 드러났다.“퇴근하는 널 데리러 온 거야.”정민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는 아무리 독한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모두 용서할 수 있을 정도였다.“가게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공 비서를 귀찮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그녀는 이미 반박할 증거를 다 수집한 상황이었고, 반응이 더 뜨거워지면 폭로할 계획으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고 투자는 고사하고 가겟세도 겨우 내는 마당에 그녀는 이 일로 엄청난 마케팅 효과를 볼 거로 확신했다.고연우는 입술을 오므리면서 정민아를 쳐다보고는 공민찬에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알겠어, 네 마음대로 해.”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지 않았고 정민아는 사무실에서 들리는 에어컨 소리와 펜으로 글을 쓰는 백색소음에 졸음이 쏟아졌다.그녀는 결국 소파 손잡이에 기대어 잠이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이상한 꿈을 꾸었다.꿈속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학교 앞에서 정선아가 친구와 약속이 있다면서 정민아더러 먼저 집에 가라고 했다.그러나 그녀가 집에 도착했을 때, 정선아는 온몸이 비에 젖은 채 주소월의 허리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주소월은 비에 홀딱 젖은 정선아와 달리 우산을 써서 멀쩡한 정민아를 보고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었다.“민아야, 선아는 네 동생이야. 우산이 없는 동생을 왜 기다리지 않고 혼자 왔어? 어휴, 네가 온 뒤로 하루가 멀다고 집안싸움이 벌어지고 있어. 밖에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하고 들어오는 나랑 네 아빠가 신경을 덜 쓰도록 네가 앞으로 조금 더 조심히 해줄 수 있겠니?”그녀의 온화한 말투 속에는 정민아에 대한 실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