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식도에서 시작된 열기가 점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윤정현의 얼굴에 어느덧 홍조가 일렁였다. 그가 마신 술의 도수는 무려 52도였다. 그 독한 것을 멋모르고 원샷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대표님. 술 잘 드시네요."진영웅이 옆에서 육정현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온갖 칭찬의 말들을 쏟아내며 어떻게든 그가 계속해서 술잔을 들게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흔한 수법에 당할 육정현이 아니었다. 워낙 잘난탓에, 웬만한 입바른 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진영웅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는 쉽사리 다시 잔을 들지 않았다. 끄떡없는 육정현의 모습에 진영웅은 필살기를 써보기로 했다."육 대표님, 원하시는 일 모두 이루시고 빠른 시일 내에 소원 성취하시길 바랍니다."진영웅은 이 말을 하는 동시에 신은지와 육정현을 번갈아 봤다. 그 눈짓을 알아차린 육정현은 괜히 울컥하고 화가 치솟아 올랐다.그렇게 창과 방패, 술을 먹이려는 자와 술을 거부하려는 자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육정현도 서서히 술에 취한 듯 눈빛이 풀리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덩달아 진영웅과 육정현의 비서도 함께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유일하게 신은지만 임산부로서 배려받아 술을 안 마신 탓에 멀쩡했다. 신은지는 기사를 불러 진영웅과 육정현의 비서를 호텔로 보낸 뒤, 잘 지켜보라고 당부했다. 그런 다음 다시 육정현을 챙기기 위해 룸으로 돌아왔다. "걸을 수 있겠어요?"육정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풀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취한 육정현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순하고 순종적이었다. "이제 가요. 가서 쉬셔야죠."신은지가 앞서 나가며 말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육정현이 바닥에 앉은 채 그녀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못 걷겠어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신은지가 살짝 짜증을 담아 말했다."다리만
신은지가 답했다."벗으면 뽀뽀해 줄게요."만약 그가 박태준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뽀뽀하고, 아니면 바로 그를 내쫓아버릴 생각이었다. 육정현이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싫어요. 거짓말이잖아요. 뽀뽀 안 해주면, 제 여자 친구 아니에요."윽박지르고 달래도 통하지 않자, 신은지는 방법을 바꿔 애교 어린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진짜 여자 친구 맞는데....""잠깐만요."그런데 이때, 육정현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핸드폰 녹음기를 켰다. "아까 한 말 다시 해봐요."신은지는 할말을 잃었다. 인내심이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었던 그녀는 곧바로 그의 바지춤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동작이 너무 컸던 탓일까, 바지가 아닌 상의가 위로 젖혀지고 말았다. 신은지의 눈이 충격으로 동그랗게 떠졌다. 그의 몸엔 온통 울퉁불퉁한 상처들로 가득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그 상처들을 매만지며 물었다. "이 상처들, 어떻게 된 거예요?"얼마나 아팠을지 도저히 상상조차 가지 않는 상처들이었다. 그의 상체는 온전한 피부가 거의 없을 정도로 흉측한 상처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 순간, 신은지는 차라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박태준이 아니길 바랐다. 박태준이 이런 고통을 당했을 걸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때, 육정현이 고분고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맞았어요. 밥도 안 주고, 물도 안 주고, 새카만 방에 가두고 절 때렸어요.""누가요?"상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아무리 길게 봐도 최근 몇 개월 사이에 난 상처들로 보였다. 해외에 있다가 최근에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온 걸로 알고 있는데, 도대체 이 상처들은 어떻게 난 것인지 그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설마 육씨 집안 사람들이 이런 거예요?"신은지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육정현이 그녀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답했다. "몰라요. 누군지 모르겠어요." "아프지 않아요?"그동안 육정현은 꾸준히 자신이 박태준이 아니라며 주장했기 때
새벽 5시, 습관적으로 깨어났다.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본 육정현은 완전히 낯선 환경에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생각나면서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렸다. 천장에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쳤고 주위가 고요했다. 육정현은 고개를 돌려 침실 쪽을 바라봤지만 방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가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지만 같은 공간에서 함께 자는 신은지를 생각하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육정현은 오래 누워 있지 않고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길가에 주차된 낯익은 차가 눈에 들어왔다. 운전기사는 차 옆에 서서 육정현이 아래층으로 내려온 것을 보며 재빨리 차 문을 열었다. "육 대표님.” 육정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여기 있어?” 육정현은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었다. 운전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차 안을 들여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운전기사가 무슨 말을 할지 육정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육정현은 차 앞으로 걸어가서 안에 앉아 있는 기민욱을 보았다. 흰색 캐주얼 옷을 입은 기민욱은 잘생긴 얼굴로 천천히 걸어오는 육정현을 보며 고개를 돌려 육정현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 육정현이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형 집으로 찾아갔었는데, 형이 없어서 비서에게 전화했지. 형이 어젯밤에 신은지 씨와 약속이 있었다고 알려줬어." 기민욱은 말을 하며 뒤에 있는 아파트를 한 번 쳐다보았다. "형이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을 선택하고 운에 맡겼는데, 형이 정말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지.” 육정현은 허리를 숙이고 차에 올라타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회사로 가죠.” 기민욱은 환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형, 어젯밤에 잘 잤나 봐.” 휴대전화를 확인하며 메시지에 답장을 하던 육정현은 기민욱의 말에 고개도 들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형, 신은지 씨 좋아하지? 사실 형이 정말 신은지 씨를 좋아한다면 그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잖아. 내가 아버지한테
기민욱은 휴대전화를 노려보았다. 그는 육정현이 사진을 보고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흐렸던 기민욱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기민욱이 육정현에게 보낸 메시지는 마치 바다에 가라앉은 듯 고요했다. 기민욱은 사진 속 놀란 표정의 신은지를 차가운 얼굴로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싫어.” 얇은 입술과 치켜 올라간 턱, 오만하고 도발적인 모습은 아까 신은지 앞에서 보였던 순둥이 같은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육영 그룹으로 갔다. 육정현의 비서는 기민욱과 육정현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기민욱이 아무렇지 않게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말리지도 못했다. 기민욱은 육정현의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노크를 했다. 기민욱은 당황한 보좌관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당신이 새로 발령받은 비서예요?" "네." 그 비서는 사장실 비서팀 사람이 아닌 육정현이 직접 지명한 비서였다. 기민욱은 그를 쳐다보다가 한참 뒤에 말했다. "듬직해 보이네요. 우리 형 안목이 역시 좋네요. 잘 지내봐요. 이전의 방 비서처럼 눈치 없이 굴지 말고요. 멀쩡하게 걷다가도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수 있어요.” "……” 새 비서는 기민욱이 자신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들어와." 안에서 육정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민욱이 문을 밀고 들어갔지만 육정현은 서류를 들여다볼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무슨 일이야?” "형, 내가 방금 뭐 하러 갔는지 맞춰봐." 기민욱은 육정현의 뒤로 가서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서류들을 내려다보았다. 기민욱의 낮은 목소리에는 고혹적인 웃음이 가득했다. 육정현이 말했다. "신은지 씨를 찾아갔잖아.” "내가 보낸 사진 봤어?” "응." 기민욱은 육정현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메시지를 봤으면서 왜 답장을 안 해?” 기민욱은 휴대전화를 꺼내 음량을 무음으로 바꾼 뒤, 최신 통화
기민욱의 전화를 받은 후, 신은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오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저 여자의 타고난 직감이었다.진유라는 오후에 신은지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에 자신의 집에 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엄마가 얼마 전에 초원으로 여행 가서 소고기와 양고기를 한 트렁크 사 왔어. 최근에 어떤 전문가가 얼린 고기를 먹으면 좋지 않다고 해서 엄마가 매일 고기 요리를 하고 있어. 매일 고기만 먹었더니 몸에서 누린내가 나는 것 같아.” 신은지는 진유라가 지금 틀림없이 자신의 몸 냄새 맡기 위해 킁킁 걸이고 있을 거라는 것을 생각하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곧 겨울인데, 내가 털 있는 옷을 입고 나가면 양이 우리에서 튀어나온 줄 알 것 같아. 그러니까 빨리 와서 나 좀 도와서 고기 좀 먹어.” 신은지가 대답했다. “알았어.” 신은지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 진유라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진씨 가문의 집은 습지 공원에 인접한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섬에 위치해 있었다. 신은지는 차를 다리 위에 세우고 백화점에서 구입한 진유라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들고 걸었다. 최근 섬에 조성된 인공 관광지는 조명 쇼, 음식, 고성, 전통 공연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매일 저녁 7시가 되면 그 도시의 자동차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는 관광지 안으로 들어가질 못했다. 이제 겨우 6시가 넘었는데 이미 붉은 조명들과 함께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나마 진씨 가문 집은 상업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고급 단지의 별장 단지에 살고 있어 조용한 편이었다. 신은지가 문을 두드리자, 이내 진유라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왔다. 왔어. 잠깐만!” 문이 열리자 신은지가 미처 들어가기도 전에 진유라가 뛰어나와 문을 쾅 닫았다. 진유라 어머니의 꾸짖는 소리가 문안에서 들려왔다. "나이도 먹을 대로 먹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천방지축이면 어떻게 해! 빨리 은지를 들어와서 앉게 해. 은지나 되니까 너랑 말 섞어주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어 봐. 당장 너와 관계를 끊을 거야
신은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모르겠어.” "어젯밤에 그를 취하게 만들지 않았어?" 진유라는 어젯밤 그녀에게 곽동건처럼 이상한 핑계를 대며 혼인신고를 하자고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하소연했다.신은지는 그때 육정현과 늦게 밥을 늦게 먹고 있어서, 진유라에게 자주 답장하지 않았다. "술에 취했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는데 새로운 상처도 많았어.” 진유라는 입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육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학대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거야?” 그냥 신은지가 알아보는 걸 막기 위해 흉터만 제거하면 되지 않을까? 굳이 자신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지금 그의 대외적인 신분은 육씨 가문의 막내아들이다. 육씨 집안이 지난 2년 동안 좀 힘들기는 했지만, 그의 몸에 흉터를 제거할 돈도 마련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곽동건이 말했다. "제가 아는 한 육씨 가문사람들 중, 사람 몸을 상처투성로 만들만큼 학대를 즐기는 변태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어요.” 오히려 그들은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곽동건은 바둑을 다 두었는지 그녀들 곁으로 왔다. 신은지가 물었다. "곽 변호사님, 육정현이 정말 육씨 가문의 막내아들이에요?” 곽동건은 육정현이 박태준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물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곽동건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육씨 가문에 막내아들이 있기는 했지만 태어날 때 폐가 덜 발달한 미숙아로 태어났어요. 그래서 자라는 환경이 많이 중요하다고 들었어요. 안개, 먼지, 공장에서 배출되는 매연 같은 것들이 병을 일으킬 수 있어 어릴 적부터 시골로 보내 요양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 몇 년 동안은 들리는 소식이 없었어요.” 곽동건은 자연스럽게 진유라 옆 자리에 비집고 앉아 멜론 조각을 입에 넣었다. "육정현이 박태준이라고 의심하는 건가요?” 진유라는 남자의 체격에 밀려 자신도 모르게 등을 곧게 폈다. 곽동건의 숨결이 진유라에게 닿자 그녀는 자리를 옆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하
식사를 마친 곽동건은 먼저 자리를 떴다. 진유라는 자신의 생각을 읽히지 않기 위해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신은지를 끌고 갔다. ”너 아니었으면 나 오늘 엄마한테 맞아 죽었을 수도 있어.” 신은지는 말했다. "아줌마가 곽 변호사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던데.” "우리 엄마는 내가 시집 못 갈까 봐 아무 남자나 다 마음에 들어 해.” "정말 곽 변호사한테 아무 관심도 없어?” 곽동건은 잘생겼고, 키도 크고 직업도 좋고 돈도 많은 데다가, 스캔들도 없다. 독설을 내뱉는 것 이외에 진유라를 포용할 수 있는 완벽한 신랑감이다. 진유라는 차에 시동을 걸며 웃음기 뺀 얼굴로 말했다.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라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 정신을 쏟아붓고 싶은 생각이 없어.” “곽동건이 오늘 우리 부모님을 만나러 온 것도 자기 이모 때문이야.” 진유라는 신은지가 알아듣지 못할까 봐 덧붙여 말했다. "우리 엄마의 아는 동생이 곽동건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해서 온 거야. 그리고 어제 나한테 혼인신고 하러 가자고 한 것도 내가 좋아서 결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해야 하는데 마침 자기가 아는 여자 중에 본인을 귀찮게 하지 않을 사람을 찾아서 이렇게 된 거야.” "어쨌든 로스쿨까지 졸업한 사람이 왜 이렇게 고지식한 거야? 부모님 세대 때처럼 나이가 차면 그냥 결혼하고 평균수명을 넘으면 죽어야 하는 거야?” "……”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진유라의 말은 그래도 일리가 있었다. 진유라의 입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패소해 본 적 없는 곽동건 같이 숙련된 변호사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그날 밤, 신은지는 진유라 집에서 묵었다.두 사람은 한밤중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었다. 다음날 일어나니 커다란 다크서클과 함께 눈이 탱탱 부어있었다.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 신은지는 화장을 했다. 박용선이 사람들에게 신은지가 임신했다고 말한 이후로, 그녀는 손이 다 나았지만 화장을 하지 않았다.
육정현과 오시은이 룸에서 나오자마자 강태민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 육정현은 '아버지'라고 불쑥 말할 뻔했지만 이성이 행동보다 앞섰다. 그는 이를 악물고 평소처럼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강태민 어르신.” 강태민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나를 알아요?” "그건 당연하지요. 순천의 강씨 가문의 가주를 상업계에서 누가 모르겠습니까?” "생김새도, 아부하는 솜씨도 닮았어.” "……” 육정현은 말이 없었다. 그런 말은 조용히 속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오시은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먼저 가버렸다. 강태민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육 대표님, 이렇게 식사를 방해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부탁이 있는데,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육정현은 옆으로 한발 물러서며 손을 들어 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들어가서 말씀하시죠. 강 어르신께서 너무 예의를 갖추고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어떤 일이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일이 끝나고 신은지가 박태준의 고충을 알게 되더라도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지금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태어나지 않은 아이이다. 진유라에게는 바랄 것이 없다.진유라는 자신에게 나쁜 점수를 주지는 않을 것이지만, 절대 나서서 화해를 시키지 않을 것이고, 그를 도와 신은지 앞에서 좋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박태준은 이 새로운 장인어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사위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 한다는 말이 있다. 박태준은 조용히 자기 자신을 검사했다. 지금 옷차림도 행동도 단정했으며, 열성적이면서도 비굴한 태도는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도 훌륭한 사위였다. 강태민도 예의를 갖추며 룸으로 들어갔다. 신은지는 이미 강태민에게 사건들을 한차례 말했고, 자신이 의심하고 있는 것들도 말했다. 육정현은 웨이터를 불러 테이블 위의 접시를 모두 치우고, 차를 내오라고 했다. 강태민이 말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