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 안의 방은 손님의 휴식을 위해 잠시 제공한 것뿐이다. 방음 효과가 호텔 보다 현저히 떨어진다.그의 비명 소리에 아래층 손님까지 모두 깜짝 놀랐다. 꽉 걸어 잠근 문이 세게 열렸다. 이어서 흐트러진 옷차림에 목에는 키스마크가 잔뜩 남아있는 남자가 안에서 뛰어나왔다.셔츠의 단추는 마지막 하나를 남기고 모두 풀렸다. 그 바람에 가슴팍과 복부가 모두 보였다. 남자는 맨발로 복도에 나와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경호원, 별장 경호원 없어? 다 죽은 거야? 당장 나와!”이때, 기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구석에 튀어나왔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남자를 향해 연속으로 버튼을 눌렀다.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바람에 눈이 아팠다. 또 얼굴이 노출될까 봐 서둘러 손으로 가렸다. “그만 찍어, 초상권으로 고소하기 전에.”“듣자 하니 오늘 여자친구를 데려왔다고 하던데 결혼하실 생각이십니까?”“얼마 전에만 해도 젊은 여성과 함께 산부인과로 들어가는 장면이 포착되었습니다. 혹시 속도위반인가요?”남자는 무려 오 도련님이다. 기자는 계속 특종을 잡았다는 생각에 들떴다. 이때, 한 여자 기자가 기회를 틈타 방 안으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옷장 앞에 서있는 강민호를 발견했다.. 그는 문을 잡고 옷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그녀는 강민호와 눈을 몇 초 동안 마주치고 크게 소리쳤다.“강민호다, 강민호가 방 안에 있어!”밖에 있는 사람들도 서둘러 밖으로 나와 구경하기 바빴다. 문 앞에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오 도련님의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얼굴 마저도 키스 자국이 남아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제대로 놀았구나!”라며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오 도련님은 공인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바람기가 유명하기로 소문이 난 탓에 기자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오 도련님, 민호 씨와 커플 이신 겁니까?”오 도련님은 자신의 얼굴을 벅벅 닦아냈다. 짜증나는 얼굴로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커플 좋아하고 있네. 저 인간이 갑자기 덮친 거라고! 무슨 짐승처럼 스킨십
근데 지금 여기 온 저 사람이 둘째 큰아버지 소속이라니 말도 안 된다.둘째 큰아버지가 해외 업무 때문에 바쁘셔서 국내 업무는 자기 아빠한테 맡겼다고 들었다.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생각할 시간도 없었고 어드덧 육지한은 강이연 앞에 서 있었다. “이연 아씨.”육지한은 신은지한테 눈길을 돌렸고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신은지도 의아한 듯 말하려고 했지만 육지한은 더 이상 그녀한테 눈길을 주기 않았고 바로 뒤돌아 1208호 방으로 향해 걸어갔다.경비원들도 기자들을 밖으로 모셨고 다른 고객님들도 1층으로 모시게 되었다.현재 복도 내에는 육지한이 데리고 온 사람 외에 신은지와 강이연 그리고 헐벗은 거나 마찬가지인 오 도련님뿐이었다.육지한은 방으로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자 제대로 차려 입지 않는 강민호를 밖으로 데려 나왔다. 강민호는 기가 꺾인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나왔고 문 앞에 서 있는 오 도련님을 보게 되었다. 그의 몸에는 빨간 키스 자국이 선명했고 한눈에 보였다.강민호는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방금 까무잡잡한 방에 있었고 또 기자들이 몰려 들어와 정신이 없어서 자기가 남자한테 키스했다는 걸 잊고 있었는데 지금 정신 차리고 보니 미칠 지경이었다.남자한테 그렇게 진한 키스를 했다니 속이 너무 쓰려 정말 설에 먹었던 떡국도 토할 뻔했다. 이 때문에 나중에 무슨 후유증이라도 있을 가봐 걱정이었다.사실 오 도련님도 강민호랑 마찬가지였고 큰 충격을 입게 되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강민호 엉덩이를 향해 한 발 힘껏 찼다. “네가 뭔데 구역질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들어오자마자 사람 구분하지도 않고 키스하다니 불이라도 켰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거 아니야.”연예계 생활을 하다 보면 화면발 때문에 마른 체형을 선호했다. 강민호는 지난 드라마 때 환자 역할을 맡은 관계로 살을 많이 빼 전보다 더 말랐다. 그래서 오 도련님의 힘에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그는 다시 일어나 손발 다 합쳐서 오 도련님과 몸싸움을 하게 되
신은지가 박태준 뒤에 다가와 보니 마침 안전통로에서 나온 강 씨네 둘째 어르신을 보게 되었다. 그는 키도 크고 캐주얼한 복장을 입었고 눈에는 권력자만 갖고 있는 예리함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또 어르신의 자상함도 섞여있었다.둘째 어르신은 아무도 데리고 오지 않고 혼자였다. “박 대표......”박태준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강태민은 이제야 신은지를 보게 되었다. 고개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신은지 씨, 이번 일은 우리 집 자식들이 철 없이 저지른 일이라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보상으로 뭐든지 말씀해 주세요.”강태민의 입장은 명확했다. 그건 바로 이번 일을 최대한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하는 거였다.신은지는 강태민의 손목을 보며 말했다. “둘째 어르신, 혹시 제가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강태민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네, 그러죠.”그래서 강태민 일행은 신은지의 방으로 들어왔다. 신은지는 가방에서 염주를 꺼냈다. 이 염주는 신은지 손에서 다시 관리를 하지 않은 관계로 전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전에 남포시에서 저를 구한 분이 어르신 맞죠?”신은지는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강태민은 신은지 손에 있는 염주를 빤히 쳐다보다가 웃음을 지었다. 뭔가 예의상 웃는 것 같았지만 또 달라 보였다.“맞아요.”그러자 신은지는 물었다. “그럼 어르신 께서는 혹시 저희 엄마 아시나요?”육지한은 강태민의 소속이고 그의 지령에 따라 일을 했다. 전에 엄마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한산 별장도 알고 보면 강태민 거였다.“오래전에 얼굴 몇 번 본 적 있어서 옛 친구라고 할 수 있죠.” 강태민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고 말했다.신은지는 뭐라고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때 육지한이 강이연과 강민호를 데리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마치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왔다.강민호는 보란 듯 벌을 받은 거 같았고 들어오자마자 바로 사과했다. “신은지 씨,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술을 많이 마셔서 술김에 그만 방을 잘못 들어가 실수를 한 것
두 사람은 몇 발짝 물러섰다. 박태준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신은지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신은지, 너 대체 우리 둘째 삼촌이랑 무슨 사이야?” 강이연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원한과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강이연 씨, 무슨 말이에요?”“삼촌이 아들을 얼마나 아끼시는데. 여태까지 한 번도 때린 적이 없었어. 오늘 너 때문에 손찌검까지 하고 연락처도 주시고.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강민호 같은 인간쓰레기가 맞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네가 어떻게 그런 놈을 설득해서 입을 다물게 했어?”그렇게 두들겨 팼는데 강이연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이 그렇게 오붓한 남매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강이연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아니면 내가 왜 오 도련님과 방을 바꾸겠어?”강이연이 일부터 박지훈을 밟은 틈을 타 옷 주머니의 카드키를 바꾼 걸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오늘일 뿐만 아니라 박물관 일도 네가 한 짓인 거 다 알아. 네가 백진희의 아들을 유학 보내는 대가로 백진희한테 죄를 뒤엎어 쓴 거지 .”신은지는 비웃듯이 말했다. “너 같이 악랄한 여자가 감히 박씨 가문에 들어가려고 해? 꿈 깨. 다음 생에 유기견으로 태어나면 모를까?”“신은지, 내가 일부러 너한테 접근한거 알고 있었지.” 강이연의 목소리는 문득 높아졌다. “그러면서 나를 조커처럼 지켜본 거 아니야?”“알고 있으면 어쩔 건데? 내 뒤에는 강씨 가문이야. 너 하나쯤은 쉽게 밟아줄 수 있어. 오늘 민호 오빠가 당한 게 네가 한 말 때문인 줄 알아? 삼촌이 박 사장님 체면을 봐준 거야. 박 사장님만 아니었으면 네가 오늘 억울해서 죽는 한이 있어도 아무 방법이 없을걸.”말을 들은 신은지는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응. 네 말이 맞아. 아 맞다, 너한테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는데.”“무슨 말이야?”신은지는 대꾸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 웃음에 강이연은 갑자기 온몸이 오싹했다.정
깜짝 놀란 박태준은 손이 미끄러져 하마터면 신은지를 놓칠 뻔했다가 다시 바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마침 여자의 얼굴이 복부 아래인 민감한 곳에 맞댔다.온몸의 신경이 곤두선 그는 목소리가 잠겨졌다. “신은지, 너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그는 신은지가 취해서 얼떨떨해진 줄만 알았다.결혼 뒤, 매번 신은지가 취했을 때마다 그가 돌봤으니, 그녀의 술 버릇이 얼마나 나쁜지 제일 잘 알고 있었다.따질 생각은 없었는데, 품에서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취한 여자가 갑자기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그뿐만 아니라 손으로 문지르다가 불편한지 그곳을 누르려고까지 했다.박태준은 그녀의 분주한 손을 잡고 솟아오르는 욕구를 억지로 참으며 물었다. “나랑 선을 긋는다더니, 왜 또 같이 있겠다는 거야?”곤드레만드레 취했어도 신은지는 그의 말을 교정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같이 있는 게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해 병을 고쳐주는 것뿐이야.”화가 난 박태준은 웃음만 나왔다. “남들이 은혜 갚는다고 하면 보통 잠자리를 같이 해주는 건데, 넌 그냥 옆에서 자기만 하는 거야? 은지야, 백화점에서 세일해도 너만큼은 안 해.”신은지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한참 만에야 정중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넌 좋은 남편감이 아니야.”그녀의 말은 마치 부드럽고 가느다란 가시처럼 가슴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심한 통증은 아니었지만 시큰하고 저렸다.박태준은 고개를 숙여 한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싼 채 이마를 맞대고 신은지와 시선을 마주쳤다.쉰 목소리는 조용한 거실에서 유난히 작게 들렸다. “은지야, 전엔 내가 나빴던 거 알아, 기회 한 번 줘, 내가 고칠게.”그가 말할 때 신은지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박태준은 손끝으로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은지야......”신은지는 길게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싫으면 됐어, 그만 잘래.”그녀가 박태준을 밀치고 의자에서 뛰어내리자,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다.박태준의 손이 허허하게 그녀의 허리에
박태준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은지의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소파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차림을 보았다. 상의는 거의 다 벗겨졌지만 바지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박태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짐승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30분 동안 뭐한 거야?”그에게 빚졌던 은혜를 갚으려 마음을 굳게 먹었었다. 게다가 박태준이 아프다고 해서 그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그가 좋은 남편감은 아니지만 속궁합도 맞고, 신체와 외모 모두 신은지의 이상형이기도 했다. 중간에 도망칠까 봐 일부러 술을 마시면서 자기 최면도 했지만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다.“입 맞춤.”신은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창피한 동시에 짜증이 났다.“입 다물어.”박태준이 자리에 일어났다. 그리고 술을 몇 병 들고 왔다. 그가 들고 온 술은 저번에 진영웅이 가져다준 술이다.“한잔할래?” 신은지는 술병을 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어떤 술인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의사가 여러 번 해도 된다고 그랬어.”“..”“한번만 더 하자.”박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어서 상대를 위로하기 바빴다.“믿어줘, 이번에는 절대로 다치게 안 할게.”그의 눈빛에 빛이 반짝 거렸다. 순간 신은지는 그가 결혼을 해달라는 건지 아니면 다른 걸 해달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별장 안.자리를 뜨려던 강태민이 이번 일로 다시 돌아왔다. 밖에서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는 강이연은 강 씨 가문 사람 앞에서는 도덕적인 사람처럼 행동했다.“둘째 큰 아버지, 그 사람 이상해요. 무조건 해외로 유학 시키려고 그랬어요. 그리고 경인 시 박물관에 들어갔을 때도 자기 아들한테 소개 좀 시켜 달라고 했다니까요. 분명히...”백진희는 구치소에 있지 않은가, 그녀가 어떻게 별장에 나타난 것일까. 또한 그의 아들이 유학 명단에서 빠졌다는 게 무슨 말일까.해외로 유학을 보내는 일은 그녀가 손 하나만 까딱해도
“잠만 자고 갈 거야?” 박태준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제 얘기 끝났잖아…” 박태준은 이불을 걷어 목과 가슴의 상처를 신은지에게 보여줬다. 박태준의 가슴과 어깨에는 상처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아직도 피가 나는 곳도 있었다. “얘기는 끝났지. 그런데 네가 내 몸에 상처를 냈으니까 가격을 올려도 할 말 없지 않아?”“……” 신은지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등에도 상처 있는데 볼래?” 박태준은 등을 보여주려고 뒤돌아섰다. “됐어. 가격만 올려, 다른 건 절대 안 돼.” 신은지는 재빨리 박태준을 제지했다. “내가 돈이 없을 것 같아?”“다른 건 절대 꿈도 꾸지 마…” 신은지는 박태준과 침대에 마주 보고 누워서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해 일어나 앉았다. 잠시 후, 신은지는 온몸이 경직됐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신은지는 고개를 돌려 박태준을 째려보며 말했다. “박태준, 어젯밤에…”콘돔? “우리 집에 콘돔이 있나?” 박태준은 침대에 누워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네 집이잖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신은지가 박태준을 좋아했을 당시, 신은지는 박태준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서 콘돔을 샀다. 하지만 그 후로 콘돔의 유통기한이 지날 때까지 하나도 쓰지 않았다. 신은지는 박태준이 본인을 건드리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콘돔을 사지 않았다. “나 혼자 사는데 콘돔이 무슨 필요야? 사놓으면 유통기한 지나서 버릴 텐데?” 박태준은 일부러 신은지의 정곡을 찔렀다. “유통기한 지나면 버리면 되잖아?” 박태준의 말에 뜨끔한 신은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신은지는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는 것이 생각나 재빨리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박태준에게 말했다.“뒤돌아.” 박태준은 씁쓸했다. 신은지를 이렇게 놓아준다면 어렵게 발전한 사이가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예전과 같은 사이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따 가서 사 올게.” 박태준은 말했다. “미안, 어
과거의 박태준은 때려죽여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박태준은 입만 열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신은지는 박태준이 바뀌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눈여겨봤다. 때문에 박태준에게 빚지고 싶지 않은 신은지는 어젯밤 잠시 정신을 놓았던 것이다. 박태준은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매우 풍족하다. 하지만 유일하게 부족한 것인 바로 남자로서 구실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순간 박태준의 단점이 생각난 신은지는 곧바로 말했다. 신은지는 뒷걱정을 생각하며 후회하지 않았다. 박태준이었다면 신은지처럼 할 수 있었을까?절대 못했을 것이다. 박태준과 신은지의 성격은 정반대이다. 하지만 신은지는 정반대인 성격이라도 박태준이 좋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전 남편이라 그런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첫 남자라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분간할 수 없으니 시도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계약 남자친구 기간에는 절대 다른 사람들한테 내가 네 여자친구라는 걸 말하면 안 돼.” 신은지는 말했다.신은지는 지난번 두 사람의 재혼설이 떠돌아다녀서 고생했던 것이 떠올랐다. 신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박태준이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었다. “말 안 했는데 알아채면? 그럼 내 탓하면 안 돼.” 잠시 후, 박태준은 일부러 과장하며 말했다. “내 옆에서 떨어져 있어. 붙어있으면 다른 사람이 오해할 수도 있어.” “고연우는 눈치가 백단이야.” 매너 있고 품위 있는 고연우는 신은지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겼었다.잠시 후, 신은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고연우한테 들키면 끝나는 거야.” “그럼 오늘 아르바이트생 시켜서 네 짐 옮기라고…” 목적을 이룬 박태준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때, 신은지는 박태준의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우리 각방 쓰자. 내 짐 옮길 필요 없어.” “……” 박태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박태준은 잔뜩 실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신은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어렵게 얻은 계약 남자친구를 하루 만에 끝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