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신은지가 육지한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육지한은 담담하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 사이, 신은지는 휴대폰에 찍힌 전화번호를 보게 되었지만 그 번호는 신은지의 것이 아니었다."죄송합니다, 잠시 전화 좀 받겠습니다."육지한이 두어 걸음 떨어진 곳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죠?"신은지는 여전히 연결음만 들려오는 휴대폰을 잡고 기다리다 결국 자동적으로 끊길 때까지 아무 대답도 얻지 못했다."어디 가요?"육지한이 통화를 끝내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집에 갈 거예요."나연그룹에는 매일 갈 필요가 없었다. 방안도 결정 났고 이제 남은 건 세부적인 것뿐이었다. 이런 것은 집에서도 할 수 있었기에 마지막 결정을 하기 전, 가면 그만이었다.……신은지의 발은 반달이 지나고 나서야 나았다. 하지만 여전히 오랫동안 걸을 수 없었다. 근육을 다친 탓에 천천히 요양해야 했다.주말이 되어 진유라는 신은지와 함께 쇼핑을 하자고 했다. 쇼핑이라고 했지만 그저 카페에 앉아있으려던 것이었다."이따 뭐 먹어?"그 말을 들은 진유라가 고개를 짤랑짤랑 흔들었다."나 요즘 밥 너무 많이 먹어서 토할 것 같아. 나 좀 놔줘. 우리 엄마 하루에 남자 6명을 안배해서 선 보게 해.. 하루에 6끼를 먹어야 한다고, 요즘 남자랑 밥만 보면 토 나와."신은지는 선을 본 경험이 없었다. 일찍 결혼한 탓에 그 누구도 이런 걱정을 한 적도, 안내해 준 적도 없었다.하지만 하루에 6명은…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너희 어머니 너 배탈 날까 봐 걱정도 안 된다니.""그건 상관없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데리고 가면 돼. 저번에는 두 사람 동시에 만난 적도 있잖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어서 좋았지."상황이 조금 난감하긴 했지만 구체적인 건 신은지에게 알려주지 않기로 했다.진유라는 여자 바람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끼리끼리 모여 논다더니, 밥을 먹으면서도 남의 걸 탐내고 있네요."그때, 한 여자의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목소리를 들은 신은
신은지에게 다가간 진선호는 걷어 올린 그녀의 소매를 다시 내렸다.“에어컨을 온도를 너무 낮춘거 같은데 춥지 않아요?”오늘은 화창한 날씨이였지만 4월 말이어서 그늘진 곳은 공기가 찼다. 쇼핑몰은 사람들로 붐볐고 에어컨을 빵빵 틀고 있었다.신은지: “어떻게 온 거예요?”진선호는 진유라를 힐끔 보고 말했다.“누군가가 저에게 문자를 보냈고 마침 제가 이 동네에 있어서 왔죠.”사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가족들은 최유리와 한 쌍으로 묶으려 했고, 그는 어머니의 회유로 이곳에 왔다. 근처에 막 도착했을 때 진유라의 문자를 받은 것이다.최유리는 아직 바닥에 앉아 신은지의 소매를 내려주는 진선호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그는 신은지에게 다가가면서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오빠!”진선호는 고개를 돌렸다.“바닥에 앉아 뭐 하는 거야? 안 차가워?”최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치가 없는 것이면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그는 상대의 소매를 내리는 사소한 일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사랑꾼 같은 모습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녀는 더욱 불만을 품었다.“조심하지 않아, 그만 넘어졌어.”다른 남자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다른 마음이 없더라도 손잡아 줄 테지만 항상 훈련받거나 다른 사람을 훈련시키고 있었던 진선호는 실수로 넘어졌어도, 심지어 허들에서 굴러떨어진다고 해도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한다는 태도였다.하여 그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넘어지면 일어나. 별일도 아니잖아.”최유리: “...”“다른 사람들 방해하지 말고 빨리 움직여.”최유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은 가슴을 아리게 했지만, 이 남자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정심도 없었다. 그저 귀찮아하는 모습이었다.신은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치스러움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얼굴을 가리고 카페를 뛰쳐나갔다.진유라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그러다 평생 혼자 살 수도 있어요.”진선호는 신은지의 옆자리에 앉으며 휴대
박태준: “내 번호를 차단한 거야?”회사에서 신은지에게 여러 번 연속 전화를 건 박태준은 그제야 자신이 차단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신은지는 지문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박태준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는 요즘 그녀를 돌봐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그녀의 공간에 입주했다.비록 소파에서만 잘 수 있었지만 적어도 집안으로는 들어갈 수 있었으니 꽤 성공적이었다.거실을 점령했으니 언젠가 침실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오늘, 그가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신은지가 말했다.“내 발은 이미 괜찮아져서 더 이상 돌봐 주지 않아도 돼.”“발을 다쳤을 때는 그림자도 안 보이던 자식이 다 나으니 나타나서 얼마 되지도 않는 식사로 그렇게 기뻤던 거야? 이렇게 오랜 시간 옆에서 돌 본 나한텐 왜 미소 한번 지어주지 않아?”방금 미소를 머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신은지가 그를 발견하고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마치 그녀가 그를 만나기 싫어하는 것을 남들이 모를까 두려운 사람처럼 말이다.“얼마 되지 않은 식사지만 기분이 좋아. 당신은 이렇게 하찮은 것도 해주지 않잖아?”과거의 일이 떠오른 탓인지, 신은지의 말투는 공격적이었다. 아주 강렬한 감정이 실려있었다.“옷장에 있는 옷과 장신구, 여기저기 쌓여있는 가방들까지 모두 내가 사준 거잖아. 돈으로 따지면 그딴 생선, 평생 먹을 수 있을 정도야.”참아왔던 화가 폭발했다.마주 서고 있어 그녀의 붉은 입술이 시야에 들어왔다.분명 생선을 싫어하는 그녀가 그 자식을 위해 억지로 행한 행동이 떠오르자, 분노가 일었다.“아줌마가 당신이 생선을 싫어한다고 했어. 그런데 그 자식이 발라주는 건 기꺼이 먹더군. 입맛이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 상대가 누구냐가 중요한 거였지?”“그런 말은 잘도 기억하면서 왜 내가 열이 39.5까지 올라 전화했을 때에는 오지 않은 건데?”“그땐 해외 출장 중이었어.”그는 언제 열이 났는지 묻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때 그는 진영웅에게 비
다음날.신은지는 한산 별장으로 갔고 육지한이 그녀와 동행했다.그들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몇마디 주고받는 사이에 불과했다. 얼굴 없는 그 남자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입을 다무는 육지한때문에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2층으로 갈 수 없는 육지한은 엘리베이터 문 앞까지만 동행했다.예전에는 곧장 올라갔지만, 오늘은 난간을 잡고 그녀가 물었다.“그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아요?”그림은 이미 복구되어서 오늘 그분과 만나기로 했다.육지한: “호기심은 종종 나쁜 결과를 불러오죠.”웃고 있던 신은지는 그를 흘겼다.“너무 재미없네요.”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그녀는 요즘 그림을 복구하고 있어서 서재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밝고 통풍이 잘되는 곳을 선호했기에 그녀를 싫어하는 이안나지만 그녀를 위해 커튼과 창문을 열어주었다.하지만 오늘밤은 달랐다.그분이 있었기 때문이다.노크하고 응답을 기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안은 어두웠다.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자 거튼 옆에 서 있는 사람을 겨우 볼 수 있었다.“오늘 밤에 조금만 더 복구하면 완성될 것 같아요. 나가실 건가요? 제가 불을 켜드릴까요?”어둠 속에 괴물이 숨어있을 거 같은 느낌에 견딜 수가 없었다.“나가도 돼요.”남자는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도 하고 있었다. 손에 장갑까지 낀 채 온몸을 단단히 가렸고 피부가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신은지는 그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고 확신했다.그녀는 작업 책상을 가리켰다. 그녀는 아직 물건을 챙기지 않아 모두 그대로 남아있었다.“이렇게 많아서 옮기는 시간이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과장된 말이었다.그녀의 손짓을 따라 그곳을 바라보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발걸음을 옮겨 문 쪽으로 향했다.“속도를 올려요. 그림을 너무 오래 끌었어요.”신은지: “알았어요. 제가 더 급해요.”그녀는 책상 쪽으로 달려가다 발을 삐끗해 그만 남자와 부딪히려 했다.상대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그녀를 부축했다.신은지는 그의
진짜 신분으로 돌아간 육지한은 그녀의 경호원을 볼때보다 더 차가웠다.그녀를 하찮게 보면서 말했다.“우리는 그저 파트너일 뿐이에요. 남포시에서 당신을 구해준 것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죠. 당신에게 투자한 금액이 한두 푼이 아닌데 이대로 날려버릴 수는 없죠.”그는 모자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3층에는 신경 꺼요. 누군가가 있다고 했고 그건 내 사람이고 돈 받고 일하는 부하직원인 당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어요.”신은지는 눈살을 찌푸렸다.“전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어요. 내가 그 계약에 동의한 이유이기도 하죠.”만약 그들이 그 사진들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막을 알고 있는 듯한 표현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육지한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알아내기 전에 남포시에 목숨을 바칠 뻔했어요. 당신의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걸 원치 않을 거예요. 배후의 그 분은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신은지: “내가 꼭 확인 해야 한다면요?”“...”육지한은 조금 화가 난듯했다.“만약...”그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한참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한번은 구할 수 있어도 매번 구할 수는 없어요. 기어코 멈추지 않겠다면 저도 방법이 없네요. 그저 죽기 전에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미리 준비하세요.”신은지: “네.”육지한: “...”이 여자는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는건가?지금 설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건가?그림을 마친 신은지는 그것을 윤지한에게 건넸다.“보시고 문제가 없으면 당신에게 넘길게요.”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상급에서 지시한 일을 아직 완성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그였다.그러니 그림 따위가 들어올 리 없다.그림도 그저 신은지에게 접근하려는 핑계여서 이미 목적을 달성한 그는 그림이 쓸모가 없어졌다.그는 무심히 훑어보고 한켠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그림에 마음이 아팠지만, 복원
박태준 입을 닫았다.밥 한 끼가 이렇게 조용하고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났다.신은지가 계산하려는데 박태준이 잡았다.“이미 계산 했어.”손을 잡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손을 잡을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녀도 원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하지만 이렇게 잡은 순간 더는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날씨도 좋은데 걸을까?”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그녀는 어디가 좋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조금 기온이 떨어져 몸에 닿는 바람이 차가웠다.“아니, 난 집에 갈래.”생각이 많기도 했고 피곤한 하루였다.걸을 힘은 더더욱 없었고 돌아가서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영화를 보며 힐링하고 싶었다.그에게 잡힌 손을 빼려는데 그가 말했다.“남포에서 있은 일을 누가 지시했는지 알아?”깜짝 놀란 신은지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알아냈어?”“응.”박태준은 기회를 잡고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그녀의 옆으로 갔다.“나랑 걸으면 알려줄게.”상대가 육지한이라고 이미 알려주었다. 단지 그녀를 속이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머뭇거리던 신은지는 박태준의 말을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손 놔.”박태준은 아쉬움 가득 그녀의 손을 놔주었다.신은지: “어딜 걸을까?”남자는 사람이 붐비는 곳을 손으로 짚었다. 그의 목적은 걷기가 아니었기에 어디든 상관 없었다.사람이 많아지고 길은 붐볐다. 몇몇 아이들이 천방지축 뛰어다니고 있었다. 박태준은 신은지를 잡아끌어 품속에 안았다.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었다.사람이 많이 모인 곳일 수록 음악 소리가 컸다. 라이브를 켜고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박태준의 신경은 온통 신은지였다. 혹시라도 다치게 될까 봐 노심초사 중이었다.“진선호, 그 자식이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길거리 음식도 함께 먹을 수 있고 뼈도 발라줄 수 있으니 그 자식은 좋아하지 마. 진씨 가문은 생각보다 안 좋아. 부모들이 너무 까다로워서 네가 힘들어...”“전에 내가 나빴다는 걸 알고 있어. 남편으로서 책임
신은지는 그들과 친하지 않다. 그들 중 한 명과는 딱 한번 만나 본 적이 있다. 당시에 상대의 이목구비가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기품 있는 분위기가 아직도 생각난다. 굳이 뽑자면 그들 중 뒤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과 더 익숙하다. 다름 아닌 어제 자신과 잠시 해프닝이 있었던 최유리였기 때문이다. 신은지는 일행을 향해 허리를 꼿꼿이 폈다.“진 이모님.”진선호 모친은 침착한 태도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표정은 한치의 변함없이 기품을 유지했다. 하지만 웃음은 짓지 않았다.“이 근처에 일 처리할 게 있어서 잠시 들렸습니다. 마침 신은지 양과 커피라도 할까 했는데 아마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신은지 양과 박 대표는 여전히 사랑하시나 봅니다. 재혼하시게 되면 진 씨 집안이 큰 선물을 들고 찾아뵙겠습니다.”신은지에게 자신의 아들과 거리를 두라는 경고가 분명하다. 진선호 모친이 얕은 미소를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보시다시피 제 아들이 사지만 멀쩡하고 머리가 딱히 좋지 않습니다. 아마 신은지 양의 행동이 작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이 고된 모친의 마음을 헤아려 아들에게 제대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을 비하하는 듯한 말에는 오만함이 섞여 있다. 그녀가 자라 온 환경과 위치 덕에 가질 수 있는 베짱이다. 만약 박태준이 자리에 없었다면 더 직설적인 말이 날라 왔을 것이다. 신은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진 이모님, 저는 아드님께 설명할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제 어떠한 행동도 실례되는 혹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해를 한 사람은 진선호 씨입니다, 그렇다면..”그녀는 상대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진선호 모친의 뒤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최유리를 바라보았다.“혹시 이모님 뒤에 계신 불여우가 무슨 말이라도 한 걸까요?”최유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몸이 반응했다. 신은지를 노려 보면서 말했다.“누구 보고 불여우 라고 하시는 거예요?”곁에 박태준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진
신은지의 손은 여전히 박태준에게 잡혀 있었다. 위로 올려다보자 그의 동공에 그녀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박태준은 연한 색의 긴 셔츠와 진한 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다. 셔츠 반 쪽은 이미 비 때문에 완전히 젖었고, 머리도 비를 피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품 있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옷이 젖어도 전혀 초라하지 않았다. 박태준이 신은지의 엄지와 검지 사이를 만지작거렸다. 일종의 스킨십이지만 변태적인 행동은 아니다. “은지야, 네가 나랑 결혼 했을 때 부터 넌 이미 박 씨 가문 사람이야. 의지해도 돼.” 자신을 도와 준 행동에 감동을 받고 있었는데 그의 한 마디에 감정이 팍하고 식었다. 신은지가 가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래, 기대기 참 좋겠네. 그리고 아무도 내가 박 씨 가문 사람인지 모르겠지.”친한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두 사람이 부부 사이인지 모른다. 박태준은 노기가 서려있는 신은지의 얼굴을 보고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너도 남한테 내 와이프라는 사실 말 한적 없잖아.”그렇지 않고서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신은지는 화가 나서 코웃음을 쳤다. 이성과 교양으로는 몸속에서 날뛰는 분노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발로 차서 멀리 날려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앞에 있는 이 남자는 책임을 떠넘기는 데에 선수가 확실하다. “그래서 매일 나한테 차갑게 대하고, 결혼 사실 숨기고 다닌 거야? 네 말대로 라면 내가 목에 간판이라도 걸어서 돌아다녀야 했어야 했겠네?”박태준과의 결혼은 오해로부터 시작된 줄 알았다. 신문사가 일을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결혼이 그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신문사에게 사진도 넘겨주었다.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그는 남편 또는 부부의 의무도 하려 하지 않았다. 이혼하고 서로 모르는 척 지냈으면 했지만 오히려 ‘사랑’ 을 내밀면서 신은지의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진정 자신을 사랑했다면 3년의 결혼 생활이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