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내뱉는 동시에 나 역시 자신에게 감탄했다. 이 와중에도 나는 정말 선량하기에 그지없구나. 만일 이미연이 내 곁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나에게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신호연은 이러한 나의 말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본 듯 벌떡 일어나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았다.벌겋게 충혈된 눈이 나를 향했고, 그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지아야, 지금 날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네가 인맥 좀 써서 인천 일만 해결해 주면 다 쉽게 풀릴 거야.”그는 절박하게 애써 나에게 아이디어를 주고 있었다. 마치 진작부터 어떻게 할지 생각해 놓은 것처럼.“너 증명서 낼 수 있지? 전에 울산 사람 찾아서 증명서 발급받았었잖아. 서울의 재료에 아무 이상 없었다는 것만 증명할 수 있으면 신예 건축 지킬 수 있어.”나는 순간 놀림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내가 울산에서 발급받았던 증명서.신연아가 전희와 손을 잡고 놓은 덫에 걸려들어 급히 사람을 찾아 받아냈던 증명서. 하마터면 소송까지 당할뻔했더랬지.신호연은 말하다 보니 기세가 올라 더욱 그럴듯한 말투로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아는 아직 어리잖아. 순간의 실수로 그랬던 거야. 게다가 어떤 일들은 연아가 했을 리 없어. 무조건 전희 걔가 한 거야. 내 회사를 빼앗으려고. 그래서 인천 공사를 빌미로 일을 벌인 거야. 설령 재료에 정말 문제가 있었더라도 절대 연아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거야. 연아는 그럴 담도 없으니까. 넌 그냥...”“지금 나더러 신연아를 도와주라고?”내가 담담하게 신호연을 응시하며 물었다.그가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말을 잘못 꺼냈음을 아는듯한 눈치. 내 앞에서 신연아가 아직 어리다고 말하는 것은 금기니까.“신예만 있다면 우리도 다시 재기할 수 있어. 네가 도혜선한테 말해주고, 서훈한테 융통성 있게 처리해달라고 부탁하고, 대출도 조금 미루면 내가 투자자들 설득할게. 다 방법이 있어!”그는 기상천외한 말들을 하며 나를 설득하려고 애썼다.“네 말대로 재료의 문제가 전씨 가문의 소행이라면, 증거를
“한지아... 너 정말 정 없다. 내 아빠에 이어 연아까지 감옥에 보내놓고 지금은 고상하게 여기 앉아서 우리 집 망하는 꼴 지켜보고 있는 거야?”신호연이 침착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두 눈은 전생의 원수를 대하듯 표범처럼 눈을 부릅떴고 으르렁거렸다.“네 집안이 망한 건 네가 자초한 거야. 네 잘못을 나한테 덮어씌우지 마. 신연아가 재료를 어떻게 할 담이 있든 없든 법원에서 결과가 나오겠지. 그걸 네가 여기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자격 없어.”나는 침착하고 냉담한 태도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신호연, 가시밭길을 선택한 건 너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좋은 변호사를 소개해 주어 네 책임을 덜어주는 것뿐이야! 이것조차도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부탁한 거라 들어주는 거고.”“웃기지 마! 한지아...”“난 원래부터 책임질 것 따위 없었어. 우리 엄마 며칠 돌봐준 거 가지고 헛소리하고 있네... 우리 집안이 이 지경이 된건 다 너 때문이야. 넌 정말 음흉한 데다가 속도 좁구나. 네가 그렇게 헛소리 한다고 내가 믿어줄 것 같아? 우리 엄마는 늙어서 네 여우 같은 말에 넘어갔어도 나는 아니야! 신씨 가문은 너 때문에 망한 게 분명해...”“신호연!”나는 분노로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이를 갈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전의 동정심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어머님이 너보다 훨씬 깨어있어. 정신 차려.”나는 서랍에서 어머님의 유언이 적힌 그 종이를 꺼내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어머님께서 너한테 남긴 마지막 선물이야. 이 타이밍에 꺼내고 싶진 않았지만. 어머님 마지막 소원은 이제 네가 들어줘. 그거 들고 내 사무실에서 당장 꺼져.”신호연은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했다. 아마 내가 이토록 화난 모습은 처음 봤을 것이다. 우리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서로 노려보며 대치했고, 그는 내 손에서 종이를 홱 빼앗아 갔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표독스럽게 잡아먹을 것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한참 후에야 그는 손에 든 종이를 바라보았다.종이 위의 글을 읽은
모든 일을 마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는 내가 우유부단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콩이가 크면 최선을 다했음을 아이에게도 모두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내가 마침 이동철에게 연락하려 했을 때 그가 다급하게 사무실로 들어왔다.“지아 씨...”“마침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내가 이동철을 바라보며 반갑게 말했다.“몇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먼저 말씀하세요!”이구동성으로 한 마디를 내뱉은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이동철 씨 먼저.”나는 이동철에게 양보했다. 이렇게 다급하게 들어오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무언가 정보를 알아낸 것일 것이다.“지아 씨, 이미 그 사진을 확정 지었고 절대 문제없습니다. 전지훈 수행원을 잡아 두었습니다.”“그리고 이 며칠간 전희와 배유정이 관계가 밀접합니다. 전희를 도와 신예에 도움을 준 사람은 해외의 한 투자자입니다. 이름은 표창수이고, 조사에 따르면 전희의 첫사랑이랍니다. 지금은 M 국에 이민하였습니다.”“잠시만요...”나는 이동철의 말을 잠시 끊었다.“성이 표씨... 라고요. 맞습니까?”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머릿속에는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서 말하셨던 표씨 가문이 떠올랐다. 서울의 4대 가문 중 하나였다던.“네! 서울 출신이에요.”이동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그럼 더 자세히 조사해 줘요. 표씨 가문에서 어떤 신분인지.”이 일에 표씨 가문까지 연결됐을 줄 몰랐던 나는 얼른 이동철에게 분부했다.이 몰락한 가문이 어떻게 우리의 일과 연관이 생긴 거지? 세상도 참 좁구나.“표씨 가문의 둘째입니다.”이동철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미 조사해 본 듯했다.“표씨 가문은 원래 서울에서 알아주는 가문이었는데 후에 M 국으로 이민하였습니다. 첫째는 표창근, 둘째는 표창수. 첫째는 점잖은 사업가인데 둘째는 불법적으로 장사하는 사람이었답니다. 섭렵한 지역도 꽤 넓었고.”“그리고 나중에는 이 표창수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표씨 가문이 몰락하게 되어 어쩔
우물쭈물하는 이동철의 모습에 대략 짐작한 나는 얼른 부추겼다,“얼른 말해봐요. 저랑 관련됐죠?”“배씨 가문에 일이 생긴 후 이세림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이동철이 나를 바라보며 주저하며 말했다.나는 깜짝 놀라 이동철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표정이 이 단서가 확실히 쉽지 않을 거라는 추측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진짜 이세림의 행방 말하는 거예요?”내가 다급하게 추궁했다.“그럼 얼른 말해요. 저한테 중요한 문제니까.”이동철이 나를 응시하며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네.”“당시 제경선이 죽고 난 뒤 이세림은 배유정에 의해 보육원에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배현우가 아무리 말리고 이세림과 떨어지기 싫어했어도 아이였으니 눈 뜨고 이세림이 강제적으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보육원으로 데려갔다는 말만 있지 어느 보육원인지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나는 영문을 모르게 갑자기 가슴이 아파졌다.“배현우는 이세림이 끌려가는 바람에 강제로 갈라지게 되었고 그 여파로 몸살이 나고 열이 내리지 않아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죠. 이후에는 배씨 가문의 영감 배진기가 나서서 천우 그룹을 회수했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배유정에게 회사를 물려주었죠.”“이 배 영감이 제일 멍청한 사람이에요. 배씨 가문의 모든 재난이 이 영감 때문에 일어났으니까요.”내가 낮게 중얼거리자 이동철이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아 씨도 이 일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다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서 알려준 거예요. 저도 대략적으로만 알지 구체적인 일들은 몰라요. 그래서 더 알고 싶은 거예요. 어떤 일은 직접 배현우에게 물을 수 없으니까요. 배현우에게는 아물지 않는 상처일 테니 그 상처를 다시 열 수는 없으니까.”내가 이동철을 바라보며 설명했다.“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나와 함께한 시간이 오라니 이동철도 자연스레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느 하나라도 배현우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아픔이고 상처이니 그가 다시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나 다를까, 이동철이 말을 덧붙였다.“결국 배유정은 악랄한 수단을 썼습니다. 어린 배현우는 한 고용인의 도움으로 밤에 도망칠 수 있었어요. 이후에는 도망 다니는 생활이 계속됐습니다.”이동철이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여기까지 들은 나는 이미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뼈가 썩는듯한 통증이 세포 하나하나에 퍼지는 것 같았다. 머리가 갑자기 돌에 맞은 멍한 기분. 이동철이 놀라서 얼른 내 이름을 불렀다.“... 한지아 씨!”나는 얼른 손을 저으며 말했다.“괜찮, 괜찮아요! 계속 말해요.”이동철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하지만...”“진짜 괜찮아요. 오래된 증상인데, 아무 일 없어요.”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동철에게 말했다.이동철이 잠시 머뭇거렸다가 집요한 나의 눈빛에 결국 입을 열었다.“가장 최근에 알아낸 정보로는, 배현우가 진짜 이세림을 찾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도망가는 도중에 이세림에게 교통사고가 났고 이세림은 머리를 다치고... 쇄골에 상처를 입었습니다.”그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이 떡 벌어졌다.“...쇄... 쇄골?”“네. 심각한 쇄골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실 제일 중요한 건 머리 부상입니다.”이동철이 말하며 나를 응시했다.내 생각이 순간 가위에 필름이 잘리듯 뚝 끊겨버렸다. 대뇌는 마치 작동을 멈춘 기계처럼 백지장이 되었다.나의 손이 저도 모르게 다쳤던 쇄골 쪽을 쓰다듬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이동철을 바라보았지만 차마 질문할 수 없었다.머리부상? 쇄골?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지?나는 머리가 다친 기억이 없다. 쇄골은 확실히 다친 적이 있지만 교통사고는 아니었다. 오토바이에서 떨어지며 다친 것이라고 엄마가 직접 말했었는데!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동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떤 교통사고였는데요?”이동철이 나를 응시했다.“추격당하던 차에 부딪히는 바람에 차 밖으로 날아가 머리 부분이 먼저 땅에 부딪혔답니다.”그의 말
“깨어났네요!”귓가에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뜨려고 애썼다. 그리고 내 눈앞의 신이 빚은 듯한 끔찍하리만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따뜻한 눈길로 나를 주시하며 이마를 어루만졌다.“지금 좀 어때요? 아직도 머리가 아파요?”나는 배현우를 멍하니 바라보며 전의 일을 되짚어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한 병실에 있었다.내가 병실에 누워있었다는 사실에 당황한 나는 배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아파요? 뇌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그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지아 씨 아픈 것 같아요?”“그럼 저 왜 여기 있어요? 저 얼마나 잔 건데요?”배현우가 웃으며 말을 피했다.“어쨌든 지금은 점심 먹을 시간이에요!”나는 믿을 수 없게 그를 바라보았다.“맙소사, 이렇게 오래 잔 거예요? 누가 절 데려다준 거예요? 동철 씨는요? 동철 씨랑 저랑 사무실이었는데. 아! 아직 처리해야 할 일도 많은데!”말을 마친 나는 허우적거리며 일어났다. 머리는 여전히 희미하게 아팠다.“네. 아직 기억하나 보네요.”배현우가 조심스럽게 내 뺨을 어루만졌다.“동철 씨가 데려온 거예요. 전 연락 받고 왔고요. 배 안 고파요? 의사한테 보이고 얼른 밥 먹으러 가요!”말을 마친 그가 호출 벨을 누르자 복도에 이곳으로 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그에게 물을 것이 많았지만 의사가 들어오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닫았다.오히려 의사가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정신이 맑다는 것을 확인한 의사가 배현우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큰 문제는 없습니다. 지아 씨의 기억이 조금씩 회복 중입니다. 현재 뇌세포가 활발하기 때문에 이후에도 외부의 자극이 있으면 이러한 일이 또 생길 수 있습니다.”외부의 자극? 이동철의 말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았는데?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나는 멍하니 의사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배현우에게 말했다.“기억이 조금씩
그가 돌아오자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저 정말 기억 잃은 거예요?”그가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는 듯했다.나는 다급하게 배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얼버무리지 말고 사실대로 알려줘요. 이미 두통이 생긴 지 오래되었어요. 특히 이세림 얘기를 할 때마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고요. 도대체 제가 그 여자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확실히 알려줘요.”나의 조급한 모습에 그가 침대 곁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나를 품에 안고는 감동한 듯 울먹이며 말했다.“알려줄 테니까, 조급해 하지 마.”“항상 이렇게 얼버무려 대답하잖아요. 당신이 이럴수록 난 고통스러워진다고요. 확실히 알려주세요. 저랑 이세림이랑 무슨 관계인지!”나는 어린애처럼 떼를 쓰며 고집을 부렸다.그는 가볍게 웃더니 가슴 아파하며 나를 더 세게 안았다. 큰 손으로 뒤통수를 어루만지고는 나를 감쌌다.“당신...”그러나 한참 동안 기다려도 말이 없었다.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 배현우의 조각 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말해요...”내가 애타게 말했다.그가 사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꿀 바른 듯 달콤했다.“지아 씨가 바로 제가 찾던 이세림이에요.”분위기가 갑자기 얼음처럼 굳었다.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잠시 후에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물었다.“방금... 뭐라고 한 거예요?”그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했다. 그는 확실하게 대답했다.“지아 씨가 바로 저랑 어릴 적부터 붙어 다니던 이세림이에요. 진짜 이세림!”마음속으로 희미하게 무언가 알 듯했지만, 그의 말에 나는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벼락에 맞은 것 같았다.나는 눈앞의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꿈 같았다. 이번은 두통이 아니라 뇌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아프지도,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배현우가 나의 모습에 걱정이 되었는지 품에 완전히 안았다.“세림아,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 알아. 우리에게 너무 가혹한
배현우가 핸드폰을 꺼내 갤러리에 들어갔다. 핸드폰을 손에 올려놓고는 잔인했던 옛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봐요. 이 사람이 진짜 임윤아에요.”나는 사진 속의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아름다웠고 흑색의 두 눈동자는 생기 넘쳤고 웃는 모습은 찬란했다.“어머니가 떠난 그날 밤, 저와 지아 씨는 그 텅 빈 방에 기대어 있었어요. 저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요. 그때의 외로움, 무력감, 그리고 두려움을.”그가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고통스러운 눈빛이었다.“나도 무서웠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어요. 어머니는 나에게 내가 사내니까 당신을 꼭 돌봐줘야 한다고 당부했었거든요. 그곳은 시끌벅적하고 화목했었는데 어느 순간 우리 둘만 적막 속에 남겨지게 되었어요. 그 정적이 너무 조용해서 특히 소름 끼쳤었어요.”배현우의 입꼬리가 떨려왔다. 표정에 처연함과 쓸쓸함이 가득했다.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다시 생각해도 무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그때의 당신은 그저 제 품에서 울기만 했죠. 저도 그러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어요. 잠을 잘 수는 더더욱 없었죠. 어머니가 임종할 때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서 맴돌았어요. 그때 저는 날이 밝으면 당신을 데리고 외할머니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그런데 날이 밝으면 우리가 갈라지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죠. 배유정이 왔을 때, 그녀는 집을 보러 온 것이었어요. 배유정은 집에 들어온 이후 우리를 보고는 하인들에게 호통을 쳤어요. ‘우리가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냐고.’ 그는 하인에게 보내버리라고 지시했어요.”“저는 그 말이 당신을 보내라는 말인 줄은 몰랐어요. 저는 한사코 당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죠. 데리고 외할머니집에 갈 것이라고 애원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어요. 저는 두 눈 뜨고 당신이 그 차에 태워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어요. 당신은 손을 뻗으며 나를 간절하게 불렀죠. ‘가고 싶지 않아. 현우 오빠... 살려줘! 갈라지고 싶지 않아!’”이야기를 하던 배현우가 나를 꼭 껴안았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창백했고 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