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화를 억눌렀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니 화를 내기 어려웠다.“지아야, 성질머리는 여전하네.”그는 손을 뻗어 날 잡으려고 했는데 내가 재빨리 피하는 바람에 헛손질했다. 신호연은 순간 당황하더니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멋쩍은 듯이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뭐든 의논할 수 있어. 우리가 이 두 프로젝트를 순조롭게 진행한다면 우리도 서울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야. 너 혼자 고생할 필요 없잖아. 내가 말했었지. 아무리 강한 여자도 결국엔 여자라고. 그렇게 고생할 필요 뭐 있어? 그냥 나랑 같이하면 되잖아.”“넌 네 인생이나 신경 써.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난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다시 한번 그를 뿌리쳤다.신호연은 포기하지 않고 내 앞을 가로막았다.“연아가 누리는 건 너도 다 누리게 해줄게. 그리고 이번에 연아는 아이를 낳아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거야. 이제 연아는 다시 회사 일에 끼어들지 않을 거야. 앞으로 난 밖에서 일하고 넌 내조만 잘하면 돼. 우리 가족이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신호연, 너 낯짝 참 두껍다.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한 거야? 제발 정신 좀 차려.”그 말에 내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도혜선이 날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고개를 돌린 신호연은 그 말을 한 사람이 도혜선인 걸 확인하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아직 도혜선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내며 도혜선을 향해 말했다.“도혜선, 넌 아직도 남의 집안 일에 간섭하는 걸 좋아하나 보다?”“어머, 집안 일?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지네. 내가 그동안 기억을 잃었나? 결혼기념일에 바람피운 거 들켜서 서울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람이 너 아니던가?”도혜선은 가차 없이 말했다.“그런데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 봐? 그 불륜녀가 아들을 낳은 지 곧 한 달 된다며, 그런데 왜 갑자기 전처한테 집적대는 거야? 너 바람 피우는 거에 맛 들렸니?”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다들 경멸에 찬 표정
이세림의 눈빛이 짧지만 잠깐 번뜩였다. 난 이 일이 그들과 관련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이때 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조민성이 날 향해 눈짓하는 걸 보았다. 난 그와 인사를 나누겠다는 핑계를 대며 미소 띤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 몇 마디 안부를 물었다. 조민성이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밖에 차가 있을 거예요. 난 여기서 40분밖에 끌지 못해요. 한지아 씨는 반드시 그사이 경원에서 떠나야 해요.”난 고개를 끄덕인 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세림을 관찰한 뒤 밖으로 걸음을 올렸다.그런데 바로 그때 이청원이 남자 한 명을 데리고 날 향해 오고 있었다. 목표가 아주 명확했다.난 속으로 탄식했다. 다른 때도 아니고 하필 이때 마주치다니.이청원은 멀리서 날 향해 인사했고 난 억지로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이청원 씨, 방금 오셨어요?”“한지아 씨, 지아 씨에게 이분을 소개해 줄게요. 이분은 화윤 그룹 여 대표, 여정훈 씨예요.”이청원은 내게 그를 소개한 뒤 여정훈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정훈 씨, 이분이 바로 제가 말했던 신흥건재 대표 한지아 씨예요!”여정훈은 날 향해 손을 뻗었고 난 예의 바르게 그와 악수했다. 그는 아주 소탈해 보였고 이청원과 나이가 비슷한 듯했는데 이청원보다는 무던한 모습이었다.이청원은 날카로워 보일만큼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눈은 언제나 깊고 어두웠으나 여정훈은 그런 그와 달리 온화하고 믿음직스러웠다.“한지아 씨, 최근 여정훈 씨에게 꽤 큰 규모의 프로젝트가 있는데 전 그냥 다리 역할을 해주러 온 거예요. 구체적인 건 두 분이 얘기 나누세요.”이청원은 직접적으로 날 찾아온 의도를 얘기했다. 난 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 확실히 장사꾼이라 그런지 일을 질질 끌지 않았다.“고마워요, 이청원 씨.”난 진심을 담아 웃었다.그러나 내 마음속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 40분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나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경원으로 가는 길에도 시간이 꽤 많이 들 것이라 초조했다.“여정훈
그 목소리에 나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를 악물고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빌어먹을.난 천천히 몸을 돌렸고 날 향해 다가오는 이세림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왜요? 벌써 가려고요?”그녀는 내 행적을 꿰뚫어 본 듯이 느긋하게 내 곁으로 다가와 날 살폈다. 그녀는 내게 꼭 시비를 걸겠다는 태세로 재수 없게 말했다.“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급해요? 정신없어 보이네요.”“저한테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그런 것까지 알아채시고.”난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몰래 숨을 작게 들이마시며 평정심을 되찾으려 했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아주 급한 일이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할 얘기 있으시면 지금 하세요!”조급한 나와 다르게 이세림은 실눈을 뜨고 매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녀의 번뜩이는 눈빛에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에게 질 수는 없었다. 적어도 기세에서는 말이다.“얼른 말해요. 다른 일 없으면 이만 가볼게요!”난 나의 조급함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이건 도박이었다. 소중한 시간을 그녀에게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이청원을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이미 5분을 낭비하고 난 뒤였다.살면서 40분이 이렇게 짧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여기서 1분이라도 더 낭비한다면 배현우를 만나는 시간이 1분 줄어든다는 걸 의미했다. 흘러가는 시곗바늘이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이었다.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가 울렸고 나는 순간 안도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이세림을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겨둔 채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일부러 버튼을 누르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조급해 하지 마요. 저 지금 가고 있어요.”전화 건너편에서 이해월의 목소리가 들렸다.“대표님, 저예요. 아까 이세림 씨가 대표님을 따라 나가더라고요. 혹시라도 대표님에게 시비를 거는 건 아닐까 걱정됐어요.”“그래요, 알겠어요. 잘했어요.”난 통화하면서 엘리
나는 다른 차에 올라탔고 차 안에는 우아하고 점잖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는 날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 뒤 아무 말 없이 시동을 걸고 경원으로 향했다.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난 더욱더 긴장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두 손을 꼭 맞잡았다.“걱정하지 말고 편히 있어요.”그 의사는 내 기분을 알아챈 건지 긴장을 풀어주려고 했다.“그냥 날 따라오면 돼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게 협조하면 돼요.”경원에 도착하자 익숙한 문이 보였다. 사람이 없는 듯 굳게 닫혀 있는 모습으로 그저께 내가 왔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난 일부러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나 수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지키는 사람도 없었고 경비가 삼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그러나 겉보기와는 다르게 이곳 경비는 아주 삼엄할 것이다.입구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기 전 의사가 내게 말했다.“잠시 뒤에 내 뒤에 바짝 붙어있어요. 말만 하지 않으면 돼요. 긴장 풀고 무서워하지 말아요.”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손바닥이 축축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내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의사는 나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눈치를 준 뒤 손을 뻗어 뒷좌석에서 자신의 약상자를 챙긴 뒤 안으로 성큼성큼 돌아갔다. 나는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전에도 몇 번이나 이곳에 온 적이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내부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도우미가 많아진 것 같았지만 다들 소리 없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하이힐을 신은 내가 이상한 부류로 보였다. 가는 길 내내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들려 긴장감에 가슴이 움츠러들었다.아마도 긴장 때문일까?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이번에는 그가 지내고 있는 2층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홀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있는 넓은 복도로 걸어갔다. 복도의 가장 안쪽에 있는 방에 도착했을 때, 나는 방문 밖에 경호원 여럿이 경호를 서고 있는 걸 발견했다.나는 그들이 아마 배유정의 부하일 거라고 짐작했다.문 앞에 선 의사는 태연하게 눈짓했다. 자칫 오만해 보일 수 있
이불을 젖히는 순간, 문 쪽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난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긴장한 듯 이불을 꼭 쥐었다. 어디를 다친 건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내 헤라가 도우미 여럿을 데리고 내 앞에 나타났다.그 순간 들통났음을 직감했다.나는 헤라와 잠깐 시선을 주고받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여기까지 왔고, 들통까지 났으니 반드시 확인은 하고 가야만 했다.난 덤덤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젖힌 이불 속 배현우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의 팔다리에는 석고붕대가 감겨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군데가 붕대로 감싸여 있었다. 아직 채 낫지 못한 상처가 있는 게 분명했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파왔다.잠시 뒤 나는 조심스럽게 배현우에게 이불을 덮어줬다. 왈칵 흘러나온 눈물이 입으로 들어가 입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여전히 잘생긴 배현우의 얼굴을 보고 나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현우 씨, 얼른 나아요. 너무 오래 자지 마요.”“... 지아 씨는 참 영악하고 간도 큰 분이시네요.”헤라는 여전히 들어왔을 때 서 있던 그 위치에 서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행동들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난 배현우에게서 시선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그들에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나는 헤라를 마주 보며 똑같이 평온하게 받아쳤다.“과찬이네요. 난 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꼭 하거든요. 이건 간이 큰지, 작은지와는 별개의 문제죠. 난 내 친구를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거고요.”“누가 멋대로 들어오라고 했죠? 간덩이가 부었나 보죠?”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비록 평온한 어조였지만 무자비함이 느껴졌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내가 말했죠. 난 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한다고.”난 도발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나도 알고 싶네요.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죠? 이렇게 사람까지 끌고 올 필요가 있나요? 난 그냥 내 친구를 보러온 것뿐인데요.”헤라는 나와 논쟁하고 싶지 않은지
나도 앞으로 한 발 나서서 이세림을 노려봤다. “당신들 만행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으면 더는 날 자극하지 말아요!”뒤이어 고개를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가 나를 데리고 온 의사를 향해 말했다. “선생님, 절 데리고 돌아가 주세요.”의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사실은 의사 선생님을 남겨두면 저들이 불리하게 수를 쓸까 두려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차에 올라타자 나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릴 만큼 긴장이 몰려왔다. 죄책감에 의사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선생님도 힘들게 했네요, 선생님께 불리하게 행동하진 않겠죠?”“아닙니다! 상상하신 만큼 심각하진 않아요.” 그는 긴말 없이 시동을 걸어 밖으로 차를 몰았다.“상처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걱정돼 의사에게 물었다.“보셨던 대로입니다.” 그는 나를 한번 보더니 말을 이었다. “팔다리 상처는 위중하지 않지만, 머리에 상처를 심각하게 입었어요.”“그럼 언제쯤 깨어날까요?” 나는 초조한 듯 물었다.“흡수되는 상황을 지켜봐야죠. 당장이 될 수도 있고요.”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차를 바꿔 탔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차량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의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나를 데려올 때 탔던 차로 돌아와 온 길을 되돌아갔다.차 안에서 나는 고민 끝에 조민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책감에 가득 찬 채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짧게 한 마디만 내뱉었다. “돌아가서 쉬세요.”“조 대표님…. 저는...” 어떻게 미안함을 전달해야 할지 몰랐다.조민성은 긴말 없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드디어 배현우를 보게 됐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우울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술자리에서 이세림을 떠본 결과 유보욱의 사망이 반드시 그들과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경원에서 이세림과의 정면충돌은 승패를 가른 것은 아니었으나 대놓고 그녀에게 칼날을 들이민 것이나 다름없었다.이세림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배현우
도혜선이 이 일을 알고는 같이 가주겠다고 먼저 말해왔으나 나는 거절했다. 이런 장소에서 도혜선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데는 좋은 의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도혜선에게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고, 굳이 올 필요가 없다고 구구절절 말했고 도혜선은 그제야 마음을 접었다.나는 해월이와 함께 참석했다. 해월이도 신흥의 사람인지라 데리고 온 목적이 있었는데 해월이에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것이라 믿었다.만월 잔치는 브라운호텔에서 진행되었다.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연회장 앞에서 신호연이 웃음꽃이 만발한 채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서강훈의 픽업 차량이 문 앞에 도착한 것을 발견하고는 얼굴에 불쾌함을 살짝 드러내며 말했다. “내 딸은?”나는 그를 한 눈 쳐다보고 온화한 태도로 답했다. “됐어, 더는 욕심 부리지 말고. 콩이가오지 않아도 너에게 아들딸이 다 있단 건 모두가 알고 있어.”그는 감정을 추스르더니 웃으며 답했다. “그럼 얼른 들어가!”해월은 얼른 내 옆으로 와 두 개의 축의금 봉투를 신호연의 손에 전달했다.안으로 들어갈 때 조심스럽게 해월에게 물었다. “이런 건 언제 준비한 거예요?”“빈손으로 올 수는 없잖아요!” 해월이 웃픈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달싹였다.“꽤 통이 크네요. 돈만 아깝게 됐어요, 그 돈을 회사 사람들한테 복지로 나눠주면 얼마나 좋아요.”내 투덜거림에 해월이 씨익 웃더니 더 답하지 않았다.우리 두 사람이 홀로 들어서자 많은 이들이 신기한 듯 쳐다봤다. 아마 나의 등장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의문으로 가득 찬 눈빛들에 괜히 민망해졌다.다행히 심은정이 멀리서 우리를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켜 이쪽을 향해 손짓해준 덕분에 민망함이 조금 가실 수 있었다. 심은정은 아예 다가와 내 손을 잡더니 조용히 얘기했다. “대표님이 진짜로 오실 줄은 몰랐네요. 마음도 넓으셔라!”나는 담담하게 웃었다. “축의만 표하는 건데요 뭐.”자리에 앉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서 산후조리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신연아가 보였다. 오
그녀는 격을 차리며 걸어오는 척했지만 차마 표정까진 관리하지 못했는지 뱀 같은 눈동자를 내 얼굴에 고정한 채 이를 꽉 깨물며 다가왔다.나는 애써 침착한 미소를 유지한 채 그들의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눈앞의 광경에 옆에 앉은 심은정도 긴장한 듯 숨을 죽인 채 나를 툭 쳤고 해월이는 이미 주먹을 꽉 쥐고 반격할 준비를 했다.나는 그녀를 꽉 잡고 진정시켰다.“아이고! 누군가 했더니 새언니네요!” 신연아의 말에 저도 몰래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만 올린 채 말했다. “연아야, 임신하면 지능도 떨어진다던데 너도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 아니야? 새언니라고 생전 부르지도 않던 애가 오늘은 웬일이래? 무슨 새언니야? 지금 날 부른 거니?”해월이도 기다렸다는 듯이 거들었다. “그러게요. 신 대표님까지 양보해드렸는데 무슨 새언니에요? 아들도 있는데 양심 좀 챙기세요. 새언니란 호칭은 본인이 빼앗아놓고는.”신연아는 갑자기 불쌍한 얼굴을 하고 눈가를 붉히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새언니, 그러게요, 아이까지 낳았는데 이젠 절 그만 놔주세요! 전에 일은 제가 잘못했어요. 사실 오늘 오빠에게 언니를 초대하라고 한 것도 예전의 오해들을 풀고 싶어서였어요. 오빠도 저한테 얘기하더라고요, 우린 한 가족이라고. 그러니 대인배답게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요?”신연아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억울한 모습을 한 채 말했다.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리며 누가 봐도 약하고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리를 박차고 구경하러 오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해 까치발까지 들며 내 쪽을 바라봤다. 아마 자리에 있는 모두가 신연아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하! 드디어 연극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렸다!거기다 신연아는 미리 누군가와 짜고 친 듯 평소와는 다르게 연기하고 있음을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이게 신연아라고? 평소의 암사자 같은 모습과는 달리 오늘은 비련의 여주인공 연기를 하고 있었다. 신연아가 전략을 바꿔 이렇게 나온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