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화를 억눌렀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니 화를 내기 어려웠다.“지아야, 성질머리는 여전하네.”그는 손을 뻗어 날 잡으려고 했는데 내가 재빨리 피하는 바람에 헛손질했다. 신호연은 순간 당황하더니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멋쩍은 듯이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뭐든 의논할 수 있어. 우리가 이 두 프로젝트를 순조롭게 진행한다면 우리도 서울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야. 너 혼자 고생할 필요 없잖아. 내가 말했었지. 아무리 강한 여자도 결국엔 여자라고. 그렇게 고생할 필요 뭐 있어? 그냥 나랑 같이하면 되잖아.”“넌 네 인생이나 신경 써.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난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다시 한번 그를 뿌리쳤다.신호연은 포기하지 않고 내 앞을 가로막았다.“연아가 누리는 건 너도 다 누리게 해줄게. 그리고 이번에 연아는 아이를 낳아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거야. 이제 연아는 다시 회사 일에 끼어들지 않을 거야. 앞으로 난 밖에서 일하고 넌 내조만 잘하면 돼. 우리 가족이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신호연, 너 낯짝 참 두껍다.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한 거야? 제발 정신 좀 차려.”그 말에 내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도혜선이 날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고개를 돌린 신호연은 그 말을 한 사람이 도혜선인 걸 확인하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아직 도혜선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내며 도혜선을 향해 말했다.“도혜선, 넌 아직도 남의 집안 일에 간섭하는 걸 좋아하나 보다?”“어머, 집안 일?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지네. 내가 그동안 기억을 잃었나? 결혼기념일에 바람피운 거 들켜서 서울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람이 너 아니던가?”도혜선은 가차 없이 말했다.“그런데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 봐? 그 불륜녀가 아들을 낳은 지 곧 한 달 된다며, 그런데 왜 갑자기 전처한테 집적대는 거야? 너 바람 피우는 거에 맛 들렸니?”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다들 경멸에 찬 표정
이세림의 눈빛이 짧지만 잠깐 번뜩였다. 난 이 일이 그들과 관련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이때 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조민성이 날 향해 눈짓하는 걸 보았다. 난 그와 인사를 나누겠다는 핑계를 대며 미소 띤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 몇 마디 안부를 물었다. 조민성이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밖에 차가 있을 거예요. 난 여기서 40분밖에 끌지 못해요. 한지아 씨는 반드시 그사이 경원에서 떠나야 해요.”난 고개를 끄덕인 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세림을 관찰한 뒤 밖으로 걸음을 올렸다.그런데 바로 그때 이청원이 남자 한 명을 데리고 날 향해 오고 있었다. 목표가 아주 명확했다.난 속으로 탄식했다. 다른 때도 아니고 하필 이때 마주치다니.이청원은 멀리서 날 향해 인사했고 난 억지로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이청원 씨, 방금 오셨어요?”“한지아 씨, 지아 씨에게 이분을 소개해 줄게요. 이분은 화윤 그룹 여 대표, 여정훈 씨예요.”이청원은 내게 그를 소개한 뒤 여정훈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정훈 씨, 이분이 바로 제가 말했던 신흥건재 대표 한지아 씨예요!”여정훈은 날 향해 손을 뻗었고 난 예의 바르게 그와 악수했다. 그는 아주 소탈해 보였고 이청원과 나이가 비슷한 듯했는데 이청원보다는 무던한 모습이었다.이청원은 날카로워 보일만큼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눈은 언제나 깊고 어두웠으나 여정훈은 그런 그와 달리 온화하고 믿음직스러웠다.“한지아 씨, 최근 여정훈 씨에게 꽤 큰 규모의 프로젝트가 있는데 전 그냥 다리 역할을 해주러 온 거예요. 구체적인 건 두 분이 얘기 나누세요.”이청원은 직접적으로 날 찾아온 의도를 얘기했다. 난 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 확실히 장사꾼이라 그런지 일을 질질 끌지 않았다.“고마워요, 이청원 씨.”난 진심을 담아 웃었다.그러나 내 마음속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 40분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나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경원으로 가는 길에도 시간이 꽤 많이 들 것이라 초조했다.“여정훈
그 목소리에 나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를 악물고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빌어먹을.난 천천히 몸을 돌렸고 날 향해 다가오는 이세림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왜요? 벌써 가려고요?”그녀는 내 행적을 꿰뚫어 본 듯이 느긋하게 내 곁으로 다가와 날 살폈다. 그녀는 내게 꼭 시비를 걸겠다는 태세로 재수 없게 말했다.“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급해요? 정신없어 보이네요.”“저한테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그런 것까지 알아채시고.”난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몰래 숨을 작게 들이마시며 평정심을 되찾으려 했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아주 급한 일이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할 얘기 있으시면 지금 하세요!”조급한 나와 다르게 이세림은 실눈을 뜨고 매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녀의 번뜩이는 눈빛에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에게 질 수는 없었다. 적어도 기세에서는 말이다.“얼른 말해요. 다른 일 없으면 이만 가볼게요!”난 나의 조급함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이건 도박이었다. 소중한 시간을 그녀에게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이청원을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이미 5분을 낭비하고 난 뒤였다.살면서 40분이 이렇게 짧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여기서 1분이라도 더 낭비한다면 배현우를 만나는 시간이 1분 줄어든다는 걸 의미했다. 흘러가는 시곗바늘이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이었다.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가 울렸고 나는 순간 안도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이세림을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겨둔 채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일부러 버튼을 누르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조급해 하지 마요. 저 지금 가고 있어요.”전화 건너편에서 이해월의 목소리가 들렸다.“대표님, 저예요. 아까 이세림 씨가 대표님을 따라 나가더라고요. 혹시라도 대표님에게 시비를 거는 건 아닐까 걱정됐어요.”“그래요, 알겠어요. 잘했어요.”난 통화하면서 엘리
나는 다른 차에 올라탔고 차 안에는 우아하고 점잖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는 날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 뒤 아무 말 없이 시동을 걸고 경원으로 향했다.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난 더욱더 긴장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두 손을 꼭 맞잡았다.“걱정하지 말고 편히 있어요.”그 의사는 내 기분을 알아챈 건지 긴장을 풀어주려고 했다.“그냥 날 따라오면 돼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게 협조하면 돼요.”경원에 도착하자 익숙한 문이 보였다. 사람이 없는 듯 굳게 닫혀 있는 모습으로 그저께 내가 왔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난 일부러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나 수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지키는 사람도 없었고 경비가 삼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그러나 겉보기와는 다르게 이곳 경비는 아주 삼엄할 것이다.입구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기 전 의사가 내게 말했다.“잠시 뒤에 내 뒤에 바짝 붙어있어요. 말만 하지 않으면 돼요. 긴장 풀고 무서워하지 말아요.”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손바닥이 축축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내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의사는 나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눈치를 준 뒤 손을 뻗어 뒷좌석에서 자신의 약상자를 챙긴 뒤 안으로 성큼성큼 돌아갔다. 나는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전에도 몇 번이나 이곳에 온 적이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내부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도우미가 많아진 것 같았지만 다들 소리 없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하이힐을 신은 내가 이상한 부류로 보였다. 가는 길 내내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들려 긴장감에 가슴이 움츠러들었다.아마도 긴장 때문일까?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이번에는 그가 지내고 있는 2층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홀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있는 넓은 복도로 걸어갔다. 복도의 가장 안쪽에 있는 방에 도착했을 때, 나는 방문 밖에 경호원 여럿이 경호를 서고 있는 걸 발견했다.나는 그들이 아마 배유정의 부하일 거라고 짐작했다.문 앞에 선 의사는 태연하게 눈짓했다. 자칫 오만해 보일 수 있
이불을 젖히는 순간, 문 쪽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난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긴장한 듯 이불을 꼭 쥐었다. 어디를 다친 건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내 헤라가 도우미 여럿을 데리고 내 앞에 나타났다.그 순간 들통났음을 직감했다.나는 헤라와 잠깐 시선을 주고받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여기까지 왔고, 들통까지 났으니 반드시 확인은 하고 가야만 했다.난 덤덤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젖힌 이불 속 배현우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의 팔다리에는 석고붕대가 감겨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군데가 붕대로 감싸여 있었다. 아직 채 낫지 못한 상처가 있는 게 분명했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파왔다.잠시 뒤 나는 조심스럽게 배현우에게 이불을 덮어줬다. 왈칵 흘러나온 눈물이 입으로 들어가 입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여전히 잘생긴 배현우의 얼굴을 보고 나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현우 씨, 얼른 나아요. 너무 오래 자지 마요.”“... 지아 씨는 참 영악하고 간도 큰 분이시네요.”헤라는 여전히 들어왔을 때 서 있던 그 위치에 서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행동들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난 배현우에게서 시선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그들에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나는 헤라를 마주 보며 똑같이 평온하게 받아쳤다.“과찬이네요. 난 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꼭 하거든요. 이건 간이 큰지, 작은지와는 별개의 문제죠. 난 내 친구를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거고요.”“누가 멋대로 들어오라고 했죠? 간덩이가 부었나 보죠?”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비록 평온한 어조였지만 무자비함이 느껴졌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내가 말했죠. 난 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한다고.”난 도발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나도 알고 싶네요.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죠? 이렇게 사람까지 끌고 올 필요가 있나요? 난 그냥 내 친구를 보러온 것뿐인데요.”헤라는 나와 논쟁하고 싶지 않은지
나도 앞으로 한 발 나서서 이세림을 노려봤다. “당신들 만행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으면 더는 날 자극하지 말아요!”뒤이어 고개를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가 나를 데리고 온 의사를 향해 말했다. “선생님, 절 데리고 돌아가 주세요.”의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사실은 의사 선생님을 남겨두면 저들이 불리하게 수를 쓸까 두려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차에 올라타자 나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릴 만큼 긴장이 몰려왔다. 죄책감에 의사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선생님도 힘들게 했네요, 선생님께 불리하게 행동하진 않겠죠?”“아닙니다! 상상하신 만큼 심각하진 않아요.” 그는 긴말 없이 시동을 걸어 밖으로 차를 몰았다.“상처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걱정돼 의사에게 물었다.“보셨던 대로입니다.” 그는 나를 한번 보더니 말을 이었다. “팔다리 상처는 위중하지 않지만, 머리에 상처를 심각하게 입었어요.”“그럼 언제쯤 깨어날까요?” 나는 초조한 듯 물었다.“흡수되는 상황을 지켜봐야죠. 당장이 될 수도 있고요.”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차를 바꿔 탔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차량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의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나를 데려올 때 탔던 차로 돌아와 온 길을 되돌아갔다.차 안에서 나는 고민 끝에 조민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책감에 가득 찬 채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짧게 한 마디만 내뱉었다. “돌아가서 쉬세요.”“조 대표님…. 저는...” 어떻게 미안함을 전달해야 할지 몰랐다.조민성은 긴말 없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드디어 배현우를 보게 됐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우울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술자리에서 이세림을 떠본 결과 유보욱의 사망이 반드시 그들과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경원에서 이세림과의 정면충돌은 승패를 가른 것은 아니었으나 대놓고 그녀에게 칼날을 들이민 것이나 다름없었다.이세림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배현우
도혜선이 이 일을 알고는 같이 가주겠다고 먼저 말해왔으나 나는 거절했다. 이런 장소에서 도혜선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데는 좋은 의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도혜선에게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고, 굳이 올 필요가 없다고 구구절절 말했고 도혜선은 그제야 마음을 접었다.나는 해월이와 함께 참석했다. 해월이도 신흥의 사람인지라 데리고 온 목적이 있었는데 해월이에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것이라 믿었다.만월 잔치는 브라운호텔에서 진행되었다.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연회장 앞에서 신호연이 웃음꽃이 만발한 채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서강훈의 픽업 차량이 문 앞에 도착한 것을 발견하고는 얼굴에 불쾌함을 살짝 드러내며 말했다. “내 딸은?”나는 그를 한 눈 쳐다보고 온화한 태도로 답했다. “됐어, 더는 욕심 부리지 말고. 콩이가오지 않아도 너에게 아들딸이 다 있단 건 모두가 알고 있어.”그는 감정을 추스르더니 웃으며 답했다. “그럼 얼른 들어가!”해월은 얼른 내 옆으로 와 두 개의 축의금 봉투를 신호연의 손에 전달했다.안으로 들어갈 때 조심스럽게 해월에게 물었다. “이런 건 언제 준비한 거예요?”“빈손으로 올 수는 없잖아요!” 해월이 웃픈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달싹였다.“꽤 통이 크네요. 돈만 아깝게 됐어요, 그 돈을 회사 사람들한테 복지로 나눠주면 얼마나 좋아요.”내 투덜거림에 해월이 씨익 웃더니 더 답하지 않았다.우리 두 사람이 홀로 들어서자 많은 이들이 신기한 듯 쳐다봤다. 아마 나의 등장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의문으로 가득 찬 눈빛들에 괜히 민망해졌다.다행히 심은정이 멀리서 우리를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켜 이쪽을 향해 손짓해준 덕분에 민망함이 조금 가실 수 있었다. 심은정은 아예 다가와 내 손을 잡더니 조용히 얘기했다. “대표님이 진짜로 오실 줄은 몰랐네요. 마음도 넓으셔라!”나는 담담하게 웃었다. “축의만 표하는 건데요 뭐.”자리에 앉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서 산후조리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신연아가 보였다. 오
그녀는 격을 차리며 걸어오는 척했지만 차마 표정까진 관리하지 못했는지 뱀 같은 눈동자를 내 얼굴에 고정한 채 이를 꽉 깨물며 다가왔다.나는 애써 침착한 미소를 유지한 채 그들의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눈앞의 광경에 옆에 앉은 심은정도 긴장한 듯 숨을 죽인 채 나를 툭 쳤고 해월이는 이미 주먹을 꽉 쥐고 반격할 준비를 했다.나는 그녀를 꽉 잡고 진정시켰다.“아이고! 누군가 했더니 새언니네요!” 신연아의 말에 저도 몰래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만 올린 채 말했다. “연아야, 임신하면 지능도 떨어진다던데 너도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 아니야? 새언니라고 생전 부르지도 않던 애가 오늘은 웬일이래? 무슨 새언니야? 지금 날 부른 거니?”해월이도 기다렸다는 듯이 거들었다. “그러게요. 신 대표님까지 양보해드렸는데 무슨 새언니에요? 아들도 있는데 양심 좀 챙기세요. 새언니란 호칭은 본인이 빼앗아놓고는.”신연아는 갑자기 불쌍한 얼굴을 하고 눈가를 붉히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새언니, 그러게요, 아이까지 낳았는데 이젠 절 그만 놔주세요! 전에 일은 제가 잘못했어요. 사실 오늘 오빠에게 언니를 초대하라고 한 것도 예전의 오해들을 풀고 싶어서였어요. 오빠도 저한테 얘기하더라고요, 우린 한 가족이라고. 그러니 대인배답게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요?”신연아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억울한 모습을 한 채 말했다.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리며 누가 봐도 약하고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리를 박차고 구경하러 오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해 까치발까지 들며 내 쪽을 바라봤다. 아마 자리에 있는 모두가 신연아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하! 드디어 연극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렸다!거기다 신연아는 미리 누군가와 짜고 친 듯 평소와는 다르게 연기하고 있음을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이게 신연아라고? 평소의 암사자 같은 모습과는 달리 오늘은 비련의 여주인공 연기를 하고 있었다. 신연아가 전략을 바꿔 이렇게 나온다면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