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기 생각에 흠칫 놀랐다. 설마 배현우가 배유정의 시선을 돌리려고…? 왜 자기 뜻을 알아듣지 못하느냐던 그의 질문이 다시 떠오르자 손이 떨리고 심장이 벌렁대기 시작했다. 사방이 빙빙 도는 듯 어지럽고 울렁거렸다. 방안에 사람만 없었어도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에게 묻고 싶었다.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난 그야말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한 거였다. 그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난 애써 멘탈을 잡고 감정을 추슬렀다. 적응은 안 되지만 그는 매정한 걸 못 견뎌 하기에... 더는 핑계 대지 말고 내려놓기로 했으니 끝까지 가자.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함께하는 길은 좋을 수가 없으니...밥을 먹고 나는 장영식 그리고 이동철과 함께 내일 이 청원을 찾으러 가는 일에 대해 좀 더 상의했다. 나는 일을 벌이면서도 불 난 집에 도둑질하러 가는 느낌이 들어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러자 장영식은 이건 비즈니스고 우리가 우리의 이익을 지켜야 그도 마음이 편할 거니 이익 때문에 의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그가 다른 사람을 찾지 않은 건 찾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야. 이 정도 이익이 아까워서도 아니고. 아마 우리가 최적이라 생각해서겠지. 왜 우리가 최적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가 우리의 계약이 성사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는 건 확실해. 그게 아니면 우리의 조건을 다 맞춰줄 거라는 약속을 했을 리가 없지. 넌 그가 몇 년 동안 일하면서 믿고 맡길 사람 하나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그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엔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명료하게 분석해내진 못했었지.이튿날, 난 장영식과 함께 청원을 만나러 갔다. 예상대로 그는 담담하게 우리를 대했고 장영식도 에둘러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청원은 대담하게 비용은 반반으로 나누되 이익은 3:7이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모든 수속은 우리 측에서 그쪽과 계약하길 요구했다. 영식은 고민 끝에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청원 쪽의 권리양
나는 콩이의 변화를 느끼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나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달려나가는 콩이...“삼촌!”나는 콩이가 달려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배현우... 그를 본 순간 나는 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때 흥분에 겨워 뛰어가던 콩이는 그만 발을 헛디뎌 그대로 앞으로 몸이 기울었다. 나는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바로 손을 뻗어 콩이를 받아내는 배현우. 그의 몸은 관성에 의해 그대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나는 급하게 달려 나갔지만 둘은 이미 둘만의 세상에 빠져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콩이는 그 짤막한 두 팔로 배현우의 목을 꼬옥 둘러 안고 말했다.“삼촌 최고야!”콩이의 귀여운 한마디에 나도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배현우의 조각 같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고 두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만인의 동경을 받는 고고한 왕자님 같던 배현우가 어린애를 보며 이토록 달콤하게 웃다니. “얼른 일어나 봐요. 넘어진 데는 괜찮아요?”나는 머뭇거리며 말을 건넸다. 그는 그저 잠깐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눈 보고는 이윽고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콩이에게 건네며 말했다.“Happy birthday!”콩이는 상자를 보고는 토끼 눈을 하며 물었다.“고마워요 삼촌! 이거 혹시 최신 태블릿이에요?”“그럼!”배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콩이는 기쁨에 겨워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삼촌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요!”그의 품에 안겨 얼굴에 뽀뽀 세례를 하는 바람에 배현우는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나는 그제야 주변 사람들이 우리 쪽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걸 느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배현우는 어딜 가든 이목을 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둘만의 세상에 빠져있다. 그제야 그는 콩이를 안고 일어섰다. “이제 엄마랑 집으로 돌아가.”그의 말에 콩이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삼촌은 집에 같이 안 가요?”나와 배현우는 잠깐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나를
"아이고, 자네 정말 오랜만이네!" 아빠가 먼저 반응 빠르게 반겼다.싸늘한 분위기는 이 열정 넘치는 인사에 점점 녹았고 배현우도 따뜻하게 웃으며 안부 인사를 했다."아버님, 오랜만입니다. 요즘 계속 바빠서 인사도 못 드렸어요. 그 간 몸은 좀 괜찮아지셨나요?" "외할아버지, 삼촌이 저한테 엄청 좋은 선물을 주셨어요! 이제 콩이 생일도 함께 보내주신대요!“행복해하는 콩이와 달리, 나는 매우 난처했다. 얘는 정말, 자기 엄마 처지를 헤아려 주지도 않네."정말?“쾌활하게 웃으며 손녀와 말하는 아빠를 보니 살짝 놀라웠다. 연기 실력이 언제 저렇게 느셨지?"네!" 콩이는 활짝 웃으면서 답했다. 그 모습이 또 얼마나 사랑스럽던지."삼촌, 그렇죠?""응! 콩이랑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지!" 이 인간, 오늘따라 말은 왜 또 이렇게 많은 거야!나는 서둘러 콩이를 끌어당기며 말했다."그러면 빨리 내려와. 엄마랑 옷 갈아입으러 가자!“콩이는 현우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난 삼촌이랑 갈아입을래!“어이가 없었다. 둘이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거야!"콩이는 여자라서 엄마랑 갈아입어야 해. 삼촌 어디도 안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외할아버지랑 얘기 나누면서 기다릴게.“현우는 콩이랑 약속했다. "생일인데 예쁘게 입고 와!“콩이는 그제야 손을 떼고 내 품에 얌전히 안겼다. 그러나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현우에게 자기를 기다려 달라 신신당부했다."저 빨리 내려올 거니까 삼촌 절대 가면 안 돼요! 콩이를 꼭 기다려 주세요!" 배현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앉아서 엄마 아빠와 얘기를 나눴고, 나는 콩이를 방으로 데려갔다. 콩이는 빨리 현우를 보고 싶은 마음에 떼쓰지 않고 나를 잘 따라주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는 혼자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콩이를 보내고 나도 방으로 돌아갔다. 심장은 아직도 두근두근 뛰었고, 지금은 손마저 덜덜 떨렸다.치마로 갈아입은 나는 옅은 화장도 하면서 예쁘게 꾸몄다. 나도 내 행동이 이
이 말을 꺼내자마자 혀를 깨물 뻔했다. 후회된다기보단 바보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그럼 그렇지. 배현우는 상냥하게 웃고 있는 듯했지만 나는 분명히 그 속에 담긴 불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이 와중에 아빠도 한마디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냥 네가 배웅해 줘. 술도 마셔서 운전할 수 없잖니!”"네..."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하고는 일어섰다."가죠!“차에 오르자, 현우는 내게 목적지를 알려줬다. "스타라이트로 가요.“참 다행이었다. 스타라이트는 경원보다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근데 왜 경원으로 돌아가지 않는 걸까?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그는 마치 내 속을 꿰뚫어 본 듯 말했다."경원은 너무 멀잖아요. 지아 씨 혼자 돌아오는 게 영 걱정되어서요.“그의 배려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고마워야 할지 잘 모르겠다.날 걱정하는 거 맞지?차를 몰고 가는 내내 우리 사이에는 침묵만 맴돌고 있었다."함께 올라가죠.“"저...“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는 명령의 어투로 한마디 던지고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차에서 내려 밖으로 걸어갔다.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차를 세우고 그의 뒤를 따라 로비로 들어갔다.현우는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듯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닫길 때까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다시 버튼을 누르고는 나더러 올라가라 했고, 내 뒤를 따라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닫히는 순간, 어색한 분위기에 나는 긴장되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꼭대기 층에 도착하니 익숙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방인가 보네.현우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도 주춤거리다 그의 뒤를 따랐다.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은 나에겐 익숙했다.두 사람 사이에서 맴도는 어색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는 외투를 벗어 소파에 던지고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해 나는 뒷걸음쳤다. 그는 빠르게 손을 뻗어 내 턱을 단단히 붙잡고는 얼굴을 들게 하였다. 나는 강제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한지아 씨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그는 눈을 내리깐 채 대답하지 않았다.“진짜 당신이었어요? 왜 들어오지 않고... 명절은 어떻게 보낸 거예요? 해외에 있었어요? 아니면 서울에 있었나요? 혼자 있었던 거에요?” 속사포로 질문을 쏟아냈다.“이제서야 생각나서 묻는 거예요? 늦었다고 생각 안 해요?” 화가 난듯한 말투였다.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먼저 여기저기 스캔들 내고 다닌 건 당신이에요. 오늘은 임윤아였다가 내일은 한소연이였다가, 뭐가 진실인지, 몇 다리를 걸치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당신 재산 따윈 관심 없는데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남자를 좋아할 수는 없잖아요?”나는 화풀이를 하듯 억울함을 쏟아냈다.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안중에도 없단 듯이 그를 비난하고 비판했다.“신호연한테 속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바람둥이를 만나다니. 재수가 없어도 더럽게 없네요. 내가 뭐가 모자라서 아무나 날 속이고 이용하지 못해 안달이냐고요!” 나는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내가 아무나예요?” 불만이 섞인 질문이었다.“당신은...” 눈을 꼿꼿이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난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했잖아요! 알면서도 날 흔든 건 당신이니까 끝까지 책임져야죠!”“재벌이든 뭐든 다 필요 없어요, 돈 같은 건 내가 벌 수 있으니까. 난 그냥 서로 사랑하고 책임을 다하는 관계가 되고 싶을 뿐인데, 그것도 과분한 욕심이었나요?” 현우를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욕심 아니에요...” 현우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나를 한 품에 와락 껴안았다. “울지 말아요.”“당신 눈엔... 내가 임윤아랑 닮았나요?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 왜 다른 사람을 흔들어 놓는 건데요? 똑똑히 말할게요. 배현우씨. 나는 신지아예요, 임윤아가 아니라!”“그 누구도 아니에요!” 뜻 모를 말이었다.“무슨 뜻이에요? 얘기해봐요! 역시 임윤아죠?”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려왔다. “저도 바보 아니에요. 죽은 그 사람을 이길 순 없다는 거 알고 있다고요. 나한테서 그 사람 모습을 찾아
차 안에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불길한 느낌은 떨칠 수가 없어 힘껏 페달을 밟아 빠르게 차를 몰았다.집에 도착하니 부모님은 아직도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길 기다린 모양이다.“집까지 데려다줬어?” 엄마가 물었다.“네. ” 대충 대답하고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왜 아직도 안 자고 계셨어요?”아빠가 그제야 일어서더니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너 돌아오는 거 봤으니 이제 편히 자야지.”“아이고 우리 현우씨가 콩이한테 정말 잘한다니까.” 엄마가 놓칠세라 한마디 했다. “우리 귀염둥이가 이렇게 잘 따를지 상상도 못 했네!”“그 사람도 외로운 사람이에요. 부모님도 안 계시고 친인척도 거의 없거든요. 아마 우리같이 정 있는 분위기를 그리워하는 거겠죠.” 일부러 그의 단점을 꼬집었다.그가 이번 설에도 혼자 쓸쓸하게 보내며 가족의 온정을 그리워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려왔다.“그 사람, 큰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며?” 내 말에 아빠도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회사가 클수록 더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는 거죠. 혼자 운영하고 애를 쓰니까, 회사가 클수록 조심스러워지기도 하고. ” 왠지 현우 씨의 꼬투리를 잡는 말 같이 느껴졌다.“부모님 두분 다 안 계신다고? 어려 보이는데 안타깝네.” 엄마가 안타까워했다.“네. 항공 사고로 같이 돌아가셨어요.”“세상에! 그런 비극이!” 엄마가 탄식했다. “그럴 줄은 몰랐어. 귀하게 자란 줄 알았는데 이런 슬픈 사연이 있을 줄이야.”엄마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근데... 그 집안이 대단한 집안이던데... 우리랑은 맞지 않는 것 같네.”“엄마! 자꾸 멀리 생각하지 마요. 우리 아직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라니까요. 이런 얘기하긴 아직 이르기도 하고 스스로 잘 생각해보고 결정할게요.” “얼른 주무세요. 늦었어요!” 항의하듯 대꾸하며 서둘러 부모님을 끌고 올라갔다....그날 밤 나는 쉽게 잠 들지 못했다. 종일 뒤척이며 그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그때의 항공 사고를
나는 전화를 끊고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씻고 1층으로 내려갔다. 콩이는 이미 집에 없었다.밥 먹으려던 찰나, 이해월한테서 전화가 와서 민여진이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곧 도착할 테니 기다려달라고 했다.가방을 쥐고 집을 나서려고 했을 때 엄마가 콩이를 데려다주고 막 시장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집을 나서려는 나를 보더니 물었다.“밥은 먹었어?” “아니요, 회사에 가서 먹으려고요. 마침 고객님이 오셔서 같이 먹으려고요.”나는 말을 끝내고 급히 집을 나섰다.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민여진은 사무실에서 나를 기다리면서 이해월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불렀다.“대표님!”나는 걸어 들어가면서 웃으면서 물었다.“오래 기다렸지. 어제 우리 딸 생일이라 늦게까지 노는 바람에 늦게 깨났지 뭐야.”나는 멋쩍게 말하면서 시간을 확인해 보았지만, 아직 밥 먹기는 이른 시간이었다.“대표님, 방금 한 바퀴 쭉 둘러보았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하네요!”그녀는 공손하게 말하면서 어색함을 무마하려고 했다.“에이, 무슨. 얼른 앉아.”나는 열정적으로 그녀는 소파에 앉혔다.“원래는 오늘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가야 할 것 같아서요. 이번의 일은 정말 실수였습니다. 직접 사과를 드려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민여진은 미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괜찮아. 일이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나는 넓은 아량으로 말했다.“하...”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대표님처럼 늘 한결같은 친구를 만나기도 어려운데 너무 멀어서 문제예요. 같은 도시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나는 잠시 생각하다 가방을 들고 그녀를 끌고 나가려고 했다.“가자, 좋은 구경 시켜 줄게.”나는 일부러 비밀스럽게 말했다.어리둥절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를 사무실에서 데리고 나오면서 이해월한테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당부했
그녀의 말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민여진은 나와 시선을 마주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누군데 저래요?”나는 민여진을 보고 피식 웃었다. 딱 봐도 민여진은 전희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로써 그녀가 그날 우리의 계약서를 망친 얼굴 없는 배후자였던 것이 분명해졌다. 아니면 민여진이 그녀가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민여진에게 말했다.“아직 몰라? 우리 계약을 망친 사람이잖아.”민여진은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나는 바로 말했다.“너희 사장님과 아는 사이야. 사장님을 도와 우리의 일을 망치게 한 배후자라고.”민여진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전희를 짚으면서 말했다.“저 분이요? 근데 무슨 분이시길래 저렇게 건방지대요?”“서울의 한 부동산 회사 사장. 근데 그 회사가 아주 이름있어.”나는 차분하게 말했다.“어느 회사예요?”민여진이 물었다.“형원.”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민여진은 더욱 놀랐다.“어... 어떻게 이런 사람이!”나는 눈썹만 움찔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는 생각에 별로 따지도 싶지도 않았다. 언제든 다시 볼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녹차만 마시고 있을 때, 저쪽에서 한 직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사모님, 한 번만 봐주세요. 저도 저분들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신 적이 없어서 잘 알아보지 못했나 봅니다. 그러니 그만 넘어가 주세요.”“내가 안 따지면 누가 따져? 나 여기 골드 회원이야! 일 년에 몇천만 원씩 쓴다고. 알아? 근데, 이러고 있을 권력도 없다고?”자신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여기 회원권이 2, 3천만원이나 하네, 이런, 내가 너무 시대에 뒤떨어져 있나? 혜선 씨가 준 이 카드가 이렇게도 비쌌다니. 참 통도 크셔.”“안 보이면 그만인데 왜 하필 나랑 마주치게 해? 여기가 아무나 오는 곳이야? 전염병이라도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