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인간은 신경 쓰지 말고 저희끼리 놀아요. 오늘 쇼핑하러 가는 건 어때요? 제가 가방 사 줄게요! 평소에도 쓸 수 있는 그런 캐주얼한 거로!”강윤희와 친해질 대로 친해진 온지유는 인사치레 말을 하지 않았다.“오늘 왜 이렇게 통이 커요?”“남도 아닌 지유 씨잖아요. 지유 씨한테 잘해줘야 이현 오빠가 눈치 주지 않아요.”강윤희는 여이현의 차가운 얼굴이 너무 싫었다.“옷 갈아입고 올게요.”온지유도 마침 쇼핑 가고 싶었던 참이다. 배가 점점 불러오니 유아용품을 사고 싶었던 것이다.두 사람은 기사와 경호원을 대동하고 함께 나섰다. 방송국 쪽은 미리 못 간다고 사정을 얘기했다.그녀가 없더라도 공아영이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장다희도 퇴원했다고 한다. 진송이는 주연 자리를 잃었고, 다시 돌아온 제안을 장다희는 거절했다고 한다. 지금은 다른 배우를 찾는 중이다.백화점에 도착한 온지유와 강윤희는 명품관에 갔다. 옷, 가방, 신발... 어느 브랜드에나 사람이 많았다. 일반인이라면 줄 서서 기다려야겠지만, VIP 강윤희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강윤희는 최근 돈을 더 주면서도 사기 어렵기로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온지유에게 들려주면서 말했다.“이거 지유 씨한테 어울려요. 가벼워서 무리도 안 갈 것 같아요.”“괜찮네요. 근데 저는 맞은켠 브랜드가 더 좋아요.”“지유 씨도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었어요? 일찍 말하지! 빨리 가봐요!”온지유는 장난으로 물었다.“제가 윤희 씨 용돈을 전부 써버리면 어떡하려고요?”“지유 씨만 좋다면 뭐든 사줄게요. 가방 10개라도 사줄 수 있어요!”“저 그냥 윤희 씨한테 시집갈 걸 그랬어요.”강윤희는 진지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온지유의 웃는 얼굴을 본 다음에야 농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저는 진지하다고요! 놀리지 마요.”“아니에요. 윤희 씨도 마음에 드는 거 있나 봐봐요.”온지유의 말 한마디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강윤희는 그녀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좋아요!”두 사람은 한 브랜드에서 몇 개 사고 다른
“정말 이현 씨예요?”온지유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아무래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강윤희는 창백한 얼굴로 씩씩대며 말했다.“나쁜 놈! 이현 오빠는 다르다고 생각한 제가 멍청했어요! 결국 남자는 다 똑같아요!”강윤희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온지유는 들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노승아는 여이현과 팔짱을 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전처럼 다정한 모습이었다.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온지유의 발은 마치 뿌리라도 내린 듯,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고, 노승아가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 오빠. 이렇게 비싼 선물도 해주고.”좋아하는 사람이 선물한 물건은 어느 여자에게나 큰 기쁨이었다. 노승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별거 아니야. 네가 좋으면 됐어.”여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제가 좋다면 뭐든 들어줄 거죠?”“응.”“우리 오빠 너무 다정하다~. 역시 내 안목이 최고라니까요. 오빠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남자예요. 난 오빠가 이혼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들은 온지유와 마주쳤다. 모두 발걸음을 멈췄다.노승아는 온지유의 잔뜩 상심한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쇼핑하다가도 만나다니요.”노승아는 여이현과 팔짱을 더 꽉 꼈다. 자신의 남자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듯 말이다.온지유의 시선은 오직 여이현에게만 향해 있었다. 여이현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고, 표정도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의 눈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물론 해명할 생각도 전혀 없어 보였다.이때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강윤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빠, 가정 있는 사람이 다른 여자랑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강윤희 씨 맞죠? 강태규 씨의 손녀.”노승아는 강윤희의 비난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말했다.“벌써 이렇게 컸네요.”반대로 강윤희
온지유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사실이에요?”여이현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온지유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계속 침묵을 지켰다.기다리다 못해 온지유가 다시 물었다.“노승아 씨랑 만나기로 한 거예요? 말해줘요, 제가 생각하는 게 맞아요? 이현 씨 말만 믿을 수 있어요.”여이현은 여전히 침묵했다. 온지유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다. 아직도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었다.“이현 씨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걸로 알고 있을게요. 제 눈보다도 이현 씨 말을 더 믿어요. 사정이 있을 거로 생각해요. 제발 그렇다고 해줘요. 대체... 대체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건데요. 말 좀 해요, 뭐라도 다 되니까요.”온지유는 말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더 아팠다. 그의 프러포즈도 사랑도 전부 환상이었던 것 같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느꼈었다.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남자가 드디어 자신을 선택해 줬으니 말이다. 그동안 그녀가 했던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늘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말았다.온지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절망했고, 마음이 칼에 베인 듯이 아팠다.여이현은 자꾸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온지유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바늘이 되어 마음에 떨어졌기 때문이다.‘울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말로 다시는 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여이현은 시선을 돌리며 온지유에게 집중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전부 무시하고 차갑게 대답했다.“온지유, 우리 이혼하자.”이 말을 들은 노승아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이날이 왔네! 이젠 별 탈 없이 이혼할 수 있겠지?’온지유의 마음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마치 영혼이 몸을 떠나버린 듯,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하며 애써 침착한 미소를 지었다.“방금 뭐
노승아는 잠시 넋이 나갔다.‘설마 이현 오빠는 모르고 있었나? 말이 안 되는데?’이 말을 듣고도 여이현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오로지 냉기만 가득했다. 온지유와 관련된 모든 일이 더 이상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듯했다.온지유는 아이를 이용해서라도 그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선 여이현에게 아이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지도 몰랐다.마지막 희망의 끈까지 사라지자, 온지유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이현 오빠, 우리 이제 가요.”노승아는 여이현에게 기대면서 다툼을 끊었다.“지유 씨도 애쓰지 마요. 그러게 애를 일찍 지웠으면 좋았잖아요. 그러면 이런 망신도 겪을 필요 없었을 텐데.”여이현은 시선을 돌렸다. 숨결이 약간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차갑고 무정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가자. 이혼 안 하려고 못할 말이 없는 여자야.”두 사람은 그대로 온지유를 스쳐 지나갔다. 뒤돌아보지도 않고서 말이다.노승아는 지나가면서 일부러 온지유의 어깨를 툭 쳤다. 온지유는 살짝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강윤희가 그녀를 부축하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요? 저 여우 년이 분명히 이현 오빠를 꼬드겼을 거예요. 지유 씨, 저희...”“그만해요.”온지유는 강윤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녀는 너무 빨리 변해 버린 여이현의 태도에 의심을 품은 것이다. 그런데도 온지유는 쓴웃음만 지었다.“제가 무슨 말을 해도 이현 씨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이현 씨는 저한테 믿음이 없어요.”강윤희는 초조하게 말했다.“정말 이대로 끝낼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않는 건데... 그러면 운 나쁘게 마주치지도 않았을 거고...”온지유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울음보다 더 처절해 보이는 미소였다.“아니에요. 언젠가 마주해야 할 일이었어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빨리 끝내면 좋죠.”온지유는 동정을 사고 싶지 않았다
이 아이는 태어나도 달가워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온지유 혼자 애지중지 키우는 게 나았다.별장은 아주 조용하고 쓸쓸했다. 온지유는 몇 시간째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첫 직장부터 여이현과 함께 하다가 후에는 결혼하게 되었다. 비록 눈길조차 받지 못하던 혼인 생활이었지만, 그녀는 묵묵히 참아왔다.그러다가 포기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여이현이 첫사랑과 이뤄지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도 이 악연은 계속되었다.악연의 끝은 비극이었다. 당연한 것이다. 완벽한 결말은 주어지지 않았다.이제는 정말로 끝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희망을 포기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면 여이현이 말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혼하지 않도록 말이다.그녀는 계속 기다렸다. 마침내 늦은 밤, 여이현이 돌아왔다. 그는 얼굴만 비추려는 듯 급하게 돌아왔다. 소파 앞으로 가서 앉은 그의 곁에는 변호사가 있었다.온지유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냉담한 모습은 결혼 초기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여이현의 시선은 그녀에게 머무르지 않았다. 변호사는 서류 가방에서 서류 한 장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이혼 합의서입니다. 온지유 씨가 방송국에서 일할 때 지내던 아파트는 대표님 명의로 전환했습니다. 그 집은 이제 온지유 씨 앞으로 넘어갈 거고, 더불어 40억 원의 위자료도 지급될 겁니다. 합의서를 보시고, 추가 사항이 있으면 말씀하세요.”온지유는 이혼 합의서를 펼쳐서 확인했다. 여이현이 이미 서명한 것도 확인했다. 그가 직접 쓴 글씨였다.그녀는 자신이 참 우스워 보였다. 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이혼 합의서가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니 말이다.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온지유는 한참 후에야 평정심을 되찾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이럴 거면 프러포즈는 왜 했어요? 그냥 처음부터 이혼하지 그랬어요. 도대체 뭘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이혼도 결혼처럼 좋은 날짜를 받아야
“그 입 다물어요!”온지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네요.”여이현은 피하지 않고 있는 대로 맞아줬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냉소가 걸려 있었다.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냉기가 눈 속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난 원래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었어.”온지유는 너무나도 상처받았다. 그의 말에 온몸이 벌벌 떨렸다. 그녀는 평생 이 정도로 나쁜 사람을 본 적 없었다.“사인을 받아내기 위해 저를 자극하는 거라면, 성공했어요. 이제 저도 이혼을 원하게 됐으니까.”온지유는 주저하지 않고 펜을 들어 이혼 합의서에 사인했다. 그리고 서류를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꺼져요. 당장 제 집에서 꺼져요!”여이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분노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변호사는 서둘러 이혼 합의서를 챙겼다.“대표님, 이제 준비는 끝났습니다.”여이현은 가볍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온지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별장을 나섰다.그들이 떠난 후, 온지유는 방전된 듯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여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답답한 기운은 가슴속에 맺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반대로 여이현은 별장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이제야 고개를 돌려서 별장을 바라보았으나, 그가 그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대표님, 서류 준비는 끝났으니 이제 이혼 절차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꺼져요!”여이현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변호사는 그의 돌변한 감정에 깜짝 놀라며 움찔했다.여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변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꺼져요.”변호사는 더 이상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서둘러 노승아의 집으로 돌아갔다.여이현은 극심한 불안과 분노로 인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
노승아는 벌써 상상하기 시작했다. 여이현과의 결혼식이 얼마나 성대할지를 말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될 것이다.바로 이때 어딘가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당연히 도우미인 줄 알고 차갑게 말했다.“혼자 있고 싶으니까 내려가요.”그러나 발걸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마스크팩을 뗐다.“내려가라고 했잖...”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노승아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녀는 급하게 마스크팩을 치우고 정중하게 인사했다.“아버지...”“그래, 승아야.”남자는 노승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이구나. 이제 정말 처녀가 다 됐어.”노승아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끌어안았다.“드디어 나오셨네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남자는 50대 중반으로, 노승아보다 조금 더 큰 키에 여전히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애정 어린 손길로 노승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아니에요. 아버지가 겪으신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게다가 전 이제 연예인이잖아요. 아버지도 편안하게 모실 수 있을 정도로 벌어요.”그러나 남자의 눈빛은 묘하게 의미심장했다.“네가 효녀인 건 잘 알지만, 난 네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우리 사업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급하게 돌아온 것도 그 일 때문이다.”노승아의 얼굴은 빠르게 어두워졌다.“아버지, 정말 괜찮겠어요? 그 일로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경찰의 감시가 아직도 심할 텐데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넌 지금도 여이현을 좋아하니?” 노승아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그건...”남자는 계속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모를 줄 아니? 발칙하게도 법로의 독을 쓴 모양이더구나. 그 독은 법로가 개발한 거야. 네가 그 독을 손에 넣었다는 건 법로와 불가분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은혜를 갚아야 하는 법이란다, 승아야. 나는 평생 법로를 위해 일할 거
노승아에게는 이제 이 길밖에 남지 않았다....온지유는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길고 고통스러웠던 것만 기억났다.그녀는 소파에서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완전히 정신이 들었을 때 동쪽 하늘에는 이미 희미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피곤했다. 너무 피곤했다.온지유는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았다.눈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얼굴은 혈색 없이 초췌했다. 마치 병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온지유는 자기 얼굴을 만지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사랑의 상처를 입었다고 이렇게 무너져야 할까?여이현 없이는 살 수 없는 걸까?답은 ‘아니’였다.그녀는 애초에 이 악연을 끊고 이혼할 생각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가 먼저 제안했을 뿐이다.이혼하더라도 그녀는 잘 살 것이다. 예전보다 백 배 더 멋지게 살 것이다. 힘들어하는 건 하룻밤으로 충분하다. 남은 날들은 반드시 멋지게 살아가야 한다.그녀는 세수를 하며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면 그렇게까지 연애에 매달리지 않으니까.세수를 마친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가 빈혈 때문인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 자리에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온지유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반쯤 죽은 것처럼 온몸이 지쳐 있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피폐해졌다.그녀는 스스로도 놀랐다. 여이현 때문에 이렇게까지 에너지를 소진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주위를 둘러보니, 곁에는 인명진이 서 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온지유는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며... 명진 씨가... 어떻게 여기에...”그는 한 번도 그녀의 집에 온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