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는 태어나도 달가워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온지유 혼자 애지중지 키우는 게 나았다.별장은 아주 조용하고 쓸쓸했다. 온지유는 몇 시간째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첫 직장부터 여이현과 함께 하다가 후에는 결혼하게 되었다. 비록 눈길조차 받지 못하던 혼인 생활이었지만, 그녀는 묵묵히 참아왔다.그러다가 포기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여이현이 첫사랑과 이뤄지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도 이 악연은 계속되었다.악연의 끝은 비극이었다. 당연한 것이다. 완벽한 결말은 주어지지 않았다.이제는 정말로 끝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희망을 포기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면 여이현이 말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혼하지 않도록 말이다.그녀는 계속 기다렸다. 마침내 늦은 밤, 여이현이 돌아왔다. 그는 얼굴만 비추려는 듯 급하게 돌아왔다. 소파 앞으로 가서 앉은 그의 곁에는 변호사가 있었다.온지유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냉담한 모습은 결혼 초기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여이현의 시선은 그녀에게 머무르지 않았다. 변호사는 서류 가방에서 서류 한 장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이혼 합의서입니다. 온지유 씨가 방송국에서 일할 때 지내던 아파트는 대표님 명의로 전환했습니다. 그 집은 이제 온지유 씨 앞으로 넘어갈 거고, 더불어 40억 원의 위자료도 지급될 겁니다. 합의서를 보시고, 추가 사항이 있으면 말씀하세요.”온지유는 이혼 합의서를 펼쳐서 확인했다. 여이현이 이미 서명한 것도 확인했다. 그가 직접 쓴 글씨였다.그녀는 자신이 참 우스워 보였다. 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이혼 합의서가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니 말이다.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온지유는 한참 후에야 평정심을 되찾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이럴 거면 프러포즈는 왜 했어요? 그냥 처음부터 이혼하지 그랬어요. 도대체 뭘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이혼도 결혼처럼 좋은 날짜를 받아야
“그 입 다물어요!”온지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네요.”여이현은 피하지 않고 있는 대로 맞아줬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냉소가 걸려 있었다.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냉기가 눈 속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난 원래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었어.”온지유는 너무나도 상처받았다. 그의 말에 온몸이 벌벌 떨렸다. 그녀는 평생 이 정도로 나쁜 사람을 본 적 없었다.“사인을 받아내기 위해 저를 자극하는 거라면, 성공했어요. 이제 저도 이혼을 원하게 됐으니까.”온지유는 주저하지 않고 펜을 들어 이혼 합의서에 사인했다. 그리고 서류를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꺼져요. 당장 제 집에서 꺼져요!”여이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분노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변호사는 서둘러 이혼 합의서를 챙겼다.“대표님, 이제 준비는 끝났습니다.”여이현은 가볍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온지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별장을 나섰다.그들이 떠난 후, 온지유는 방전된 듯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여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답답한 기운은 가슴속에 맺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반대로 여이현은 별장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이제야 고개를 돌려서 별장을 바라보았으나, 그가 그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대표님, 서류 준비는 끝났으니 이제 이혼 절차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꺼져요!”여이현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변호사는 그의 돌변한 감정에 깜짝 놀라며 움찔했다.여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변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꺼져요.”변호사는 더 이상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서둘러 노승아의 집으로 돌아갔다.여이현은 극심한 불안과 분노로 인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
노승아는 벌써 상상하기 시작했다. 여이현과의 결혼식이 얼마나 성대할지를 말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될 것이다.바로 이때 어딘가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당연히 도우미인 줄 알고 차갑게 말했다.“혼자 있고 싶으니까 내려가요.”그러나 발걸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마스크팩을 뗐다.“내려가라고 했잖...”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노승아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녀는 급하게 마스크팩을 치우고 정중하게 인사했다.“아버지...”“그래, 승아야.”남자는 노승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이구나. 이제 정말 처녀가 다 됐어.”노승아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끌어안았다.“드디어 나오셨네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남자는 50대 중반으로, 노승아보다 조금 더 큰 키에 여전히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애정 어린 손길로 노승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아니에요. 아버지가 겪으신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게다가 전 이제 연예인이잖아요. 아버지도 편안하게 모실 수 있을 정도로 벌어요.”그러나 남자의 눈빛은 묘하게 의미심장했다.“네가 효녀인 건 잘 알지만, 난 네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우리 사업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급하게 돌아온 것도 그 일 때문이다.”노승아의 얼굴은 빠르게 어두워졌다.“아버지, 정말 괜찮겠어요? 그 일로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경찰의 감시가 아직도 심할 텐데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넌 지금도 여이현을 좋아하니?” 노승아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그건...”남자는 계속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모를 줄 아니? 발칙하게도 법로의 독을 쓴 모양이더구나. 그 독은 법로가 개발한 거야. 네가 그 독을 손에 넣었다는 건 법로와 불가분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은혜를 갚아야 하는 법이란다, 승아야. 나는 평생 법로를 위해 일할 거
노승아에게는 이제 이 길밖에 남지 않았다....온지유는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길고 고통스러웠던 것만 기억났다.그녀는 소파에서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완전히 정신이 들었을 때 동쪽 하늘에는 이미 희미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피곤했다. 너무 피곤했다.온지유는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았다.눈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얼굴은 혈색 없이 초췌했다. 마치 병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온지유는 자기 얼굴을 만지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사랑의 상처를 입었다고 이렇게 무너져야 할까?여이현 없이는 살 수 없는 걸까?답은 ‘아니’였다.그녀는 애초에 이 악연을 끊고 이혼할 생각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가 먼저 제안했을 뿐이다.이혼하더라도 그녀는 잘 살 것이다. 예전보다 백 배 더 멋지게 살 것이다. 힘들어하는 건 하룻밤으로 충분하다. 남은 날들은 반드시 멋지게 살아가야 한다.그녀는 세수를 하며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면 그렇게까지 연애에 매달리지 않으니까.세수를 마친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가 빈혈 때문인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 자리에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온지유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반쯤 죽은 것처럼 온몸이 지쳐 있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피폐해졌다.그녀는 스스로도 놀랐다. 여이현 때문에 이렇게까지 에너지를 소진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주위를 둘러보니, 곁에는 인명진이 서 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온지유는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며... 명진 씨가... 어떻게 여기에...”그는 한 번도 그녀의 집에 온 적
온지유의 인생은 운이 좋다고 하면 참으로 운이 좋았다. 행복한 가정에서 많은 사람이 그녀를 아껴주었다.그녀의 불행은 대부분 감정적인 부분에서 온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이 너무 안정적이어서, 감정에서만큼은 파란을 겪어야 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온지유의 말을 들은 인명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곁에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 눈동자는 유난히 따뜻해 보였다.“그렇다기보다는... 지유 씨가 저한테 새 삶을 줬어요.”인명진은 더 이상 회피하지 않았다. 이제는 많은 일을 함께 마주해야 할 때였다.“기억이 돌아오면 알게 될 거예요.”그가 몇 번이나 구해준 걸로 봐서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 정도는 있었다. 그의 정체가 단순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의심은 여전했지만 말이다.이제 그녀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인명진뿐이었다. 온지유는 그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명진 씨 친구는 있어요?”“아뇨.”온지유가 다시 물었다.“왜요?”“저는 친구가 필요 없어요.”“부모님은요?”“누군지도 몰라요.”“많이 외롭겠어요. 친구도 가족도 없는 삶이라니... 상상이 안 가요.”온지유는 갑자기 그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신이 그를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신은 그에게 뛰어난 외모와 의술을 주었지만, 동시에 끝없는 고독도 안겨준 것이다. 기쁨을 나눌 사람조차 없다는 것은 분명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인명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만약 온지유가 묻지 않았다면 그는 외로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그런 감정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매일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찼기에, 그런 건 사치라고 생각했다.“그래도 이렇게 잘살고 있잖아요.”인명진은 무심하게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럽게 위로했다.“괜찮아요. 이제 제가 친구 되어줄게요. 슬프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 언제든 말해요. 제가 기꺼이 들어줄게요.”온지유는 그렇게 인명진에게 마음을 열었다.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그녀는 이별에 빠져서 소중한 인연을, 즉 새로운 만
인명진의 표정은 아주 복잡했다. 속으로는 만약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온지유의 손조차 감히 만지지 못하는 겁쟁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그래도 인명진은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온지유의 손목에 있던 염주의 붉은빛이 점점 짙어졌다. 그걸 발견한 온지유는 인명진에게 물었다.“이 염주 색이 변한 것 같지 않아요?”인명진은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했다.“그래요?”햇빛 아래로 자리를 옮기자 붉은빛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진작 색이 바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짙어졌어요. 이거 명진 씨 염주 맞죠? 명진 씨는 아무것도 못 느꼈어요?”인명진은 무심코 주먹을 꽉 쥐다가 웃으며 말했다.“그거 아마 가짜일 거예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딱히 확인해 본 적 없어서요.”“가짜라면 왜 지니고 다녔어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근데 피가 있는 염주라니, 살짝 이상하기는 해요.”그녀는 염주를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약초 향에, 약간의 피 냄새도 나요. 정말 이상해요. 명진 씨는 몰랐어요?”그녀는 또다시 물었다.인명진은 온지유의 통찰력이 이렇게 강할 줄 몰랐다. 그녀는 모르는 것이 많더라도 이상한 점은 빠르게 알아챘다. 어떻게 설명해도 납득시키기 어려워 보였다.“됐어요, 인제 그만 생각할래요. 명진 씨가 이 염주를 준 이후로, 저는 정말 보호받는 느낌이었어요. 몸도 한결 가벼워졌고요.”온지유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그렇게 지쳤던 몸이 벌써 기운을 차렸다. 어쩌면 이 염주의 효과일지도 몰랐다.온지유가 질문을 멈추자 인명진은 몰래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자고 일어나니 배고프지 않아요? 제가 밥 해줄게요.”“명진 씨 요리도 할 줄 알아요?”온지유는 인명진의 집에 가본 적 있었다. 심지어 그가 일하는 곳도 가본 적 있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생활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요리라는 것을
“처음이에요.”온지유는 눈썹을 꿈틀댔다.“처음인데 이 정도면 잘한 거예요. 본인 솜씨 좀 맛보세요. 인명진 씨는 요리에 재능이 있으니까.”반 시간 뒤, 인명진은 주방에서 나왔다.탄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을 보아 인명진이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의미였다.하지만 인명진이 음식을 테이블로 들고 왔을 때 온지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두 눈 휘둥그레 뜨며 인명진을 보았다.인명진은 행여나 어떤 음식인지 알아보지 못할까 봐 담담하게 설명도 해주었다.“이건 닭 염통, 이거는 닭 간... 전부 닭의 내장 부위에 속하죠. 이건 닭 몸통이에요. 다리 살이라 퍽퍽하지 않을 거예요...”인명진의 설명에 그녀는 꼭 해부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그녀는 심지어 인명진이 요리를 할 때 어떤 모습으로 닭을 해부했는지 상상이 가기도 했다. 보기만 해도 식욕이 뚝 떨어지는 그의 요리였다.오히려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온지유가 젓가락을 들지 않자 인명진이 물었다.“왜 그래요? 맛없어 보여요? 전 최선을 다해 만들었어요.”“그런 게 아니라...”온지유가 말을 이었다.“굳이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요. 혹시 다른 요리도 있어요?”“네, 감자 칩을 만들어 봤어요.”인명진은 주방에 남아 있는 감자를 보곤 낭비하지 말자는 생각에 감자를 으깬 후 오븐에 넣었다.온지유는 그제야 마음이 놓여 말했다.“그럼 감자 칩을 먹을게요. 한동안 안 먹었더니 감자 칩이 먹고 싶네요.”“알았어요.”인명진은 얼른 오븐으로 달려가 감자 칩을 꺼내왔다.그 순간 인명진은 우울해졌다. 온지유는 새까만 감자 칩을 보았다. 탄 것이 분명했기에 젓가락을 들 수 없었다.“미안해요. 레시피에 있는 시간대로 타이머를 설정해 두었는데 탈 줄은 몰랐네요.”인명진은 레시피를 엄격하게 지키며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새까맣게 타버렸다.그 말인즉 그가 본 레시피는 잘못된 레시피라는 말이었다.온지유는 아주 놀랐다. 이렇게나 요리를 못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이건 괜찮아요.”
인명진은 휙 피해버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길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온지유는 당연히 의심했다.“왜 피가 아직도 멈추지 않은 거예요?”상처가 생긴 지 오래되었다. 아무리 완전한 건강을 되찾지 못했다고 해도 지금도 계속 피를 흘릴 정도는 아니었다.그의 몸에 새로운 상처가 생긴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인명진은 얼른 소매를 내리며 가렸다. 하지만 떨어지는 핏방울은 가릴 수 없었다.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핑계를 댔다.“아까 요리하면서 실수로 베었나 봐요. 괜찮아요.”온지유는 당연히 속지 않았다.“메스를 항상 손에 들고 있던 사람이 그런 실수를 했다고요? 날 속일 생각하지 말아요!”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변명을 믿지 않았다.“전혀 요리할 때 생긴 상처가 아닌 것 같네요. 대체 어쩌다가 다친 거예요?”인명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가 말하지 않으니 온지유는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인명진의 손을 잡으며 당긴 후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의 팔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임시로 치료한 것인지 제대로 감겨 있지 않았다.어쩌면 혼자 치료한 것이라 한 손으로 제대로 감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실수로 다친 거예요.”인명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전에도 봤다시피 어차피 제 몸엔 상처가 많잖아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닌 거죠.”말을 마친 그는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다.온지유도 더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하지만 온지유는 전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인명진 씨가 그런 거예요?”인명진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빼냈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온지유가 말했다.“실수로 베인 거라면 어떻게 마침 손목을 벨 수가 있겠어요? 게다가 붕대 감은 것도 깔끔하게 감았잖아요. 그러니 스스로 상처를 냈을 가능성이 아주 크죠. 게다가 원래는 이쪽에 상처가 있었잖아요. 의사가 이렇게 허술하게 상처를 치료해줄 리가 없잖아요. 그 말인즉슨 인명진 씨가 혼자 상처를 치료했다는 의미겠죠. 그것도 아주 급하게. 그래서 피가 뚝뚝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