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인명진을 보았다. 인명진은 아주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그에겐 더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온지유도 알고 있었다. 인명진이 지내던 곳은 원래부터 남에게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그가 말했던 것처럼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자랐다.그럼에도 온지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사람이면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자랐으니 말이다.“왜 저한테 피를 나눠준 거예요?”온지유는 속으로는 거부하고 있었다.“쓰러진 건 시간이 조금 지나면 깨어날 수 있었어요. 인명진 씨가 굳이 팔에 상처를 내가며 피를 저한테 먹일 필요가 없었다고요. 왜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거예요? 전 인명진 씨가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거 원치 않아요.”인명진은 가볍게 피식 웃었다. 아마도 그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괜찮아요. 피를 조금 나눠준 것뿐인데요, 뭘. 그 정도로 죽지 않아요.”“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리고 다음에 제가 쓰러져도 그러지 말아요!”온지유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저랑 같이 지내게 된 이상 인명진 씨는 존중받아야 마땅할 사람이라고요. 희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 누구의 희생도 원치 않아요. 인명진 씨에게도 자유가 있어요. 그러니 자신을 너무 속박하지 말아요.”온지유가 이런 말을 한 건 그저 그에게 앞으로 더는 그런 일 하지 말라고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길 바랐다.인명진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했다.“알았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제가 한 말 꼭 기억해요. 우리는 친구예요.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저한테 말해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와줄 테니까요.”온지유는 계속 말을 이었다.“참, 인명진 씨랑 같이 있던 여자 말이에요. 그날 이후로 홍혜주 씨를 보지 못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걱정돼요?”“불쌍하잖아요.”온지유는 비록 그때의 기억이 없지만 홍혜주가
백지희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여이현과 온지유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보았는데 왜 이렇듯 쉽게 이혼해 버린 것일까.“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여이현 그 쓰레기가 마음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거 아니야? 안 되겠어, 내가 찾아가서 따질 거야!”온지유는 이미 현실을 받아들였다.“그러지 마. 난 오히려 이혼 잘한 것 같아. 지금 돈도 있고 집도 있고 편하게 생활하고 있잖아. 난 앞으로 평생 일 안 하고 놀아도 문제없다고. 그러니까 그냥 축하해줘.”“그래도 그 여우한테 좋은 일만 했잖아!”백지희는 온지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좋은 일한 적 없어. 그러니까 이제 더는 신경 쓰지 마. 다 지나간 일이잖아.”“그래, 알았어. 난 그냥 네가 우울해하고 있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내가 곁에 있어 주려고 했더니 넌 전화도 안 받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백지희는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녀도 온지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적응 능력이 뛰어났던 온지유였기에 당연히 여이현의 곁에 오래 머물 수 있었던 것이다. 쓰러지지 않는 잡초처럼 무슨 일을 당해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만약 그녀였다면, 여이현 같은 남자와 한시도 버틸 수 없어 바로 이혼했을 것이다.“난 괜찮아. 조금 더 쉬고 출근할 생각이야.”온지유는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다.“너 임신했잖아. 태교에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니야?”“괜찮아. 난 아직 일할 수 있어. 어차피 힘쓰는 일도 아닌데 뭐.”백지희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온지유의 생활이었으니 말이다. 걱정되긴 했지만 온지유가 원한다면 어쩔 수가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온지유는 티브이를 켰다.백지희에게서 이미 소식을 들었던지라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노승아는 아주 거만했다. 대범하게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자신이 여이현의 여자친구라고 밝혔다.원래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보려고 애를 쓰던 사람이었으니 이번이
“알았어요.”인명진은 온지유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온지유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 중심으로 갔다.시내는 그녀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여이현이 위치까지 고려해 그녀에게 별장을 선물해 주었기 때문이다.사람이 많은 시간이었던지라 그녀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초록 불이 켜지지 그녀는 얼른 자전거를 밀며 가려고 했지만,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도와드릴게요.”온지유는 뒤돌아보았다. 젊은 남자가 그녀의 자전거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아마도 그녀가 임산부였던 탓에 자전거를 혼자 밀기엔 힘들어 보여서 도와주겠다고 한 것 같았다.그녀는 캐주얼한 옷차림에 머리는 곱게 땋은 뒤 짚 모자를 쓰고 있었다. 품이 좀 너른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배가 불룩 나왔다.옷차림만 임산부였을 뿐이지 다른 곳은 전혀 임산부로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직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정도로 힘들지 않았지만, 호의를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기에 입을 열었다.“고맙습니다.”그녀가 먼저 횡단보도를 건너자 남자는 그녀의 자전거를 밀며 따라왔다.그녀는 계속 자전거 도로로 걸어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난히 지나가는 자전거가 적었다.아니, 거의 없었다.고개를 돌려 건너편을 보았다. 그곳엔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쌩쌩 지나가고 있었다.그런데 그녀가 걷는 길엔 아무도 없었다.이상해도 너무 이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한 금은방으로 왔다.들어가자마자 앉아 있던 금은방 사장이 안경을 꼈다. 겉보기엔 50대 중반으로 보였고 키도 별로 크지 않았다. 온지유가 들어오자 사장이 물었다.“뭘 팔러 오셨어요?”“반지를 팔려고요.”온지유는 미리 빼둔 반지를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다.“이건 얼마에 팔 수 있을까요.”사장은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그동안 다이아몬드 반지를 꽤나 많이 받아봤지만 이렇게 큰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는 드물었다. 소장 가치가 엄청났기에 그는 바로 확대경으로 자세하게 관찰하며 말했다.“1
온지유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왔을 때 금은방 사장은 전전긍긍하며 문 앞에 서 있었다.그의 이마엔 식은땀이 가득했다. 꼭 두려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그녀가 나오자마자 사장이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아이고, 아가씨. 드디어 나왔네요. 이 반지는 그냥 팔지 말고 가지고 있어요. 나도 안 받을 테니까!”그는 얼른 반지를 온지유에게 돌려주었다.“네? 왜 갑자기 안 사시겠다는 거예요?”온지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1000만 원에 사시겠다면서요.”“안 사, 안 살 거예요!”사장은 그녀를 재촉했다.“이 반지를 살 돈이 없으니까 얼른 반지 들고 나가요. 차라리 다른 금은방에 가서 팔아요!”그렇게 온지유는 쫓겨났다.고개를 돌리자 사장이 급하게 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 셔터까지 내리는 것을 보아 오늘 장사는 그만둘 생각인 것 같았다.그런 사장의 모습에 온지유는 너무도 이상했다.그저 화장실에 갔을 뿐인데 왜 갑자기 저러는 것일까?온지유는 핸드폰을 꺼내 사장이 조금 전 그녀의 계좌로 입금한 1000만 원을 보았다.“아직 돈도 못 돌려 드렸는데...”가게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마치 1000만 원도 필요 없는 듯했다.너무도 수상했다.온지유는 남의 돈을 거저 가질 생각이 없었다. 사장이 사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녀는 돈을 돌려주었다.이내 다른 곳으로 갔다.근처의 금은방에 전부 다 들러보았지만, 그녀가 보여준 반지를 보자마자 기겁을 하며 사지 않겠다고 했다.원래였다면 응당 처음 들어간 금은방 사장처럼 좋아하는 표정을 지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다들 거부하고 있었다.그렇다는 건 분명 뭔가 있다는 소리였다.온지유는 그냥 가지고 있기로 했다. 어차피 팔지도 못하니 말이다.자전거를 타고 이내 대형 마트로 갔다.퇴근 시간이었던지라 마트엔 사람이 많았다. 자전거를 주차해둔 뒤 평소에 즐겨 마시던 요구르트를 샀다.그리고 과일과 채소, 심심하면 먹을 간식도 샀다.어느새 한가득 사 버린 그녀였다.힘이 조금 셌던 그녀는
온지유는 남자가 빼앗아 든 봉투를 확 빼앗았다.“말할 생각이 없으면 그냥 도와주지도 말아요. 전 남의 도움을 받는 게 더 어색하거든요.”“잠깐만요, 천천히 걸어요!”힘 있게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본 청년은 행여나 그녀가 넘어질까 봐 얼른 걱정이 담긴 목소리를 내었다.온지유는 큰 봉투를 자전거 바구니에 담은 뒤 떠나려고 했다.그녀는 자전거를 천천히 탔다. 청년은 계속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청년을 힐끗 보던 그녀는 결국 자전거에서 내려와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대체 왜 따라오는 거죠? 따라오지 마세요, 아니면 그쪽한테 이런 일을 시킨 사람을 내 앞으로 데려오시던가요! 자꾸 따라오면 신고할 거예요!”온지유는 다소 표정을 잔뜩 굳히며 말했기에 청년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그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지시를 듣고 있었던지라 결국 가버리고 말았다.청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온지유는 다시 자전거를 탔다.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자꾸 쫓아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며칠 동안 집에만 있었던지라 누군가 따라오며 그녀를 지켜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생각에 잠겨있던 탓에 저도 모르게 방향감을 잃고 휘청거리게 되었다.“어어...”하마터면 자전거에서 떨어져 넘어질 뻔했다.하지만 누군가 그녀의 자전거를 꽉 붙잡아 주었기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차가운 표정의 남자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면서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은은한 노을빛이 남자의 몸에 내려앉으며 슬픔과 쓸쓸함을 가려주었다...짧은 몇 초 만에 온지유는 힘껏 손을 뿌리쳤다.“당신이었네요!”여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또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뭐가 나였는데?”온지유는 그의 눈을 빤히 보았다. 목소리고 표정도 어느새 차가워졌다.“나한테 사람을 붙인 게 당신이잖아요.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난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여이현은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길 가다가 우연히 자전거를 타며
여이현은 길을 힐끗 보았다.“그래, 그냥 지나가던 길이야.”그는 여전히 아닌 척했다.온지유도 더는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대치하고 있었다.온지유는 천천히 자전거를 타며 앞으로 가고 있었고 여이현의 차는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꼭 그녀의 껌딱지처럼 말이다. 온지유는 집으로 가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자전거를 틀었다.그러자 여이현의 안색이 더 심하게 구겨졌다. 그는 빵빵 소리를 내며 온지유에게 알렸다.“거긴 네 집이 있는 방향이 아니잖아.”“전 바로 집으로 가겠다고 한 적 없어요.”온지유가 말했다.“조금 더 돌다 가면 안 되는 거예요?”그리고 이내 비꼬며 말했다.“참, 이런 우연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설마, 여이현 씨가 가려는 길도 이쪽 길일 줄이야.”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기분이 너무도 불쾌했고 화가 치밀었다. 여이현이 대체 왜 자신을 따라오는 것인지 몰랐다.먼저 이혼하자고 한 사람도 그였고, 지금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사람도 그였다.그녀는 결국 멈추어 서곤 고개를 돌려 잔뜩 굳어진 얼굴로 그를 보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여이현은 고개를 들어 물었다.“뭐가?”온지유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그의 앞으로 다가와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따라오지 말아요. 당신이랑 저는 이미 끝난 사이라고요! 당신이 이러면 이럴수록 저한테 피해만 준다는 거 몰라서 이래요? 이혼할 때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사인했잖아요, 아니었어요? 앞으로 더는 만나지 말라면서 저한테 선을 긋던 사람도 당신이었잖아요. 여진 그룹 대표가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나 했더니 전혀 아니었네요. 대체 저한테서 뭘 바라고 있는 거예요?”여이현도 몰랐다. 대체 뭘 원하는지.그저 행여나 그녀가 위험해질까 봐 걱정되었다.동시에 그가 곁에 없으니 임산부인 그녀가 혼자 어떻게 생활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다.걱정되는 건 아주 많았다.길을 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만 봐도 다치게 될까 봐 걱정되
“더 쉬지 않고요?”인명진이 그녀를 뒤따르며 물었다.“네, 충분히 쉬었어요. 더 쉬고 있다간 온몸이 뻐근해질 테니 그냥 내일부터 출근하려고요.”설령 그녀에게 이 별장이 있고 죽을 때까지 돈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대도 지루한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알았어요.”온지유는 다음 날 출근했다.그녀가 출근하자 공아영이 그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그녀는 더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아영 씨 눈앞에 보이는 건 뭐예요? 일단 일부터 해요.”공아영은 백지희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화가 났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온지유가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아 하니 더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공아영이 입을 다물고 있어도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이 수군대고 있었다.“실시간 인기 검색어 봤어요? 전부 노승아의 이름으로 도배되었어요!”“아마 노승아와 여이현 대표가 결혼할 거라는 소식이 갑자기 나오면서 그런 것 같아요.”“전에는 그냥 뜬 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그게 정말일 줄이야. 정말 소설 속 여주인공 같네요!”“다들 혹시 이 방송 보셨어요? 여이현 대표가 다른 여자한테 프러포즈했다던데, 그 여자가 설마 노승아는 아니겠어요?”그들이 말하는 방송엔 온지유의 뒷모습만 나왔다. 얼굴을 찍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여자가 온지유임을 몰랐다.“노승아의 뒷모습은 아닌 것 같아요. 전 뭔가 좀 알 것 같은데... 그래도 며칠 되었다고 결혼 소식이 나오니 조금 이상하네요.”“여이현 대표가 쓰레기일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노승아는 그런 쓰레기가 뭐가 좋다고 결혼하려는 건지, 참.”“어디 결혼뿐이겠어요? 지금 SNS에서 해명하느라 바쁘잖아요. 두 사람의 연애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약혼반지까지 SNS에 올려 자랑하던데요.”“노승아도 연애하면 상대에게 눈이 멀게 되는 사람이었네요.”“불쌍하네요. 여이현 대표가 유부남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쯧쯧, 여이현 대표는 안 좋은 소문이 더 많네요.”“그걸 누가 알겠어요? 우리도 얼른 사실이나 파헤쳐 보자고요. 여이현 대표
“지금 뜨거운 인기를 받고 있다고 해서 나중에 잘되리란 보장은 할 수 없죠.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커지는 법이니까요.”온지유가 느긋하게 말했다.“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지금 받는 인기로는 부족할 거예요. 이 사람들이 노승아를 섭외하고 있다니까 저희도 이젠 그만 찾아가서 비위를 맞춰주죠. 그런 건 고생을 사서 하는 일이랑 뭐가 다르겠어요.”온지유는 뒷장을 보았다.“여기에 있는 드라마들이 인기가 없다고 해서 망하게 되는 건 아녜요. 대부분 유명한 드라마도 처음에 반응이 미지근했었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확 뜨게 된 거잖아요, 아녜요?”그리고 이내 공아영을 힐끗 보았다.“사람들의 기대도 확 높이고 말이에요.”“지유 씨가 한 말도 일리가 있네요.”공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하지만 누가 이미 인기를 엄청나게 끌고 있는 드라마를 거부할 수 있겠어요? 인기 없는 드라마를 선택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커요. 장다희 씨도 지금 드라마 하나로 확 뜨길 바라고 있는 거잖아요.”연예계에서 드라마 섭외를 받았다는 건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을 의미했다.만약 이 기회를 놓치게 되면 앞으로 언제 또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많은 연예인들은 드라마 한편을 찍고 유명해진 다음 소식이 뜸해졌다.세대가 바뀌는 속도는 점차 빨라졌고 연예인 사이의 경쟁력도 높아졌다. 관객들은 스크린에서 자주 신인들을 보게 되었다.게다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속도도 빨라졌다.온지유가 말했다.“그러니까 저희가 신중하게 선택을 해야 하는 거예요. 어쩌면 다크호스가 될 수 있으니까요.”그녀는 장다희의 리즈 시절이 지속되려면 반드시 드라마 한 편 더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지금 시대에서 무엇이 인기를 끌면 그것을 찍어야 했다.하지만 아무리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해도 사람들의 신선감을 이기지 못했다.어쨌든 질리기 마련이었으니까.게다가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는 전부 지금 유행하고 있는 것을 소재로 찍고 있었다.그래서인지 대부분 내용이 크게 다
대신 일을 해줄 사람이 넘쳐나는데 뭐하러 본인이 고생하냐는 식으로 말하는 박은희에 나도현은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어머니, 시은이 몸 상태도 고려해주셔야죠. 시은이가 최근 4년간 하민이를 위해서 밤낮없이 일만 해온 거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저랑 같이 살게 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여유를 즐길 틈도 없이 또 덜컥 아이를 가져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도 여자니까 임신과 출산의 고생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거 아니에요.”나도현의 그 한마디에 박은희도 할 말이 없었다.나도현은 박은희가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아 냉큼 말을 이어갔다.“만약 하민이가 혼자라서 외롭다고 하면 당연히 둘째든 셋째든 낳을 테니까 그 점은 시름 놓으세요. 하지만 시은이와 저의 계획을 물으신다면 그건 그냥 순리에 맡기고 싶어요.”“알겠어, 그럼 너희 뜻대로 해.”박은희는 나도현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 밀어붙였다간 양시은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일까 봐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그제야 박은희는 은근히 걱정됐다.“내가 이렇게 급해 했다고 시은이가 또 오해하진 않겠지?”“그럴리가요. 시은이는 어머니 마음을 이해할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나도현이 박은희의 어깨를 토닥이며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을 때 양시은이 박은희를 향해 걸어왔다.양시은이 자신에게 미소를 짓는 것을 보자 박은희는 그제야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박은희는 나도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넌 시은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서 바람을 좀 쐬고 들어와. 회사 일은 절대 걱정하지 말고 둘만의 시간을 좀 보내. 네가 그랬잖니, 그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고.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현재를 즐겨.”“알겠어요.”나도현은 대답과 함께 양시은에게 다가갔고 둘은 알게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함께 올라갔다.양시은이 단미주와 합작한 프로젝트로 인해 업계의 많은 사람은 양시은을 다시 볼 것이다.양시은은 그 결과에 대해
하민은 박은희와 함께 지낸 지 3년이나 되었고 이 집에서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하지만 하민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다.그래서 양시은과 나도현은 퇴근하는 대로 집으로 돌아와 하민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가끔 학부모의 참여가 필요한 활동은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하지만 너희들도 보다시피 하민이도 나를 잘 따르고 나도 시연이 널 도와서 아이를 잘 돌봐주잖니. 지금 너랑 도현이도 시간이 있고 하민이도 학교에 다니니까 내가 돌봐줄 수 있을 때 딱 둘만 더 낳는 건 어떠니? 그럼 우리 집안도 더 복작거리고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양시은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나도현이 말을 가로챘다.“싫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저랑 시은이는 아직은 하민이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아이 일은 나중에 더 말하는 거로 해요.”나도현은 하민이 한 명에게도 제대로 된 사랑을 못 주고 있는데 둘째까지 낳아버리면 하민이가 원래도 부족했던 사랑을 나눠줘야 할 것처럼 느낄까 봐 걱정됐다.“왜? 너희 둘 중에 누가 아프기라도 한 거야?”박은희는 말은 그렇게 해도 눈길은 이미 나도현에게 향해있었다.양시은은 이미 하민이를 낳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박은희의 시선을 느낀 나도현은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맞아요, 제 몸에 문제가 생겼어요. 최근 4년간 병원에 다니고 있었고 일도 바빠서 제 정자 생존율이 엄청나게 낮아졌어요.”그 말을 들은 박은희가 침착할 리 없었다.박은희는 당장 나용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당신이 기를 쓰고 도현이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부담을 주니까 도현이 몸이 망가졌잖아요. 지금 당장 회사 업무를 이어받아서 책임지고 도현이 좀 푹 쉬게 해줘요. 국가 정책도 개방된 마당에 애가 하나밖에 없는 게 말이 돼요?”박은희에게는 나도현이 유일했다. 애당초 박은희는 나도현이 양시은과 사귈까 봐 온갖 방법을 다 대며 노력을 했지만 결국 나도현은 그런 박은희의 노력을 무시하듯 박은희의 뜻대로
그 순간 양시은은 단미주를 흘겨보았다. 차디찬 양시은의 눈빛이 이미 모든 걸 설명하고 있었다.양시은이 설령 지금 나진 그룹의 비서가 아니라고 해도 대학을 나온 사람인데 PPT 하나 만들 줄 모른다는 게 말이 될 리가 없었다.단미주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그냥 궁금해하는 것도 문제가 되나요?”양시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이윽고 양시은은 단미주를 회의실 안으로 안내했고 단미주가 그렇게나 기다리던 PPT를 그녀의 눈앞에 보란 듯이 전시해두었다.양시은은 미소를 띠며 단미주에게 물었다.“단미주 씨,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양시은은 단미주와의 합작이 절대 쉽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그녀가 제기할 모든 문제점을 예상해 아주 작은 방면들까지 철저히 준비했다.게다가 그날은 단미주도 나도현에 대한 은근한 마음을 드러냈었지만 나도현은 양시은 때문에 단미주에게 더는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단미주도 양시은이 자신을 통해 양시은이라는 사람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단미주는 양시은이 얼마나 문제를 전면적으로 바라보는지를 깨달았고 덩달아 양시은이 훌륭한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단미주는 양시은의 치밀함에 진심으로 탄복하였고 마침내 나도현이 왜 양시은을 선택했는지도 알게 되었다.“이 프로젝트에 서명할게요. 그리고 앞으로 더는 양시은 씨를 난감하게 하지도 않을게요.”“벗이 늘어나는 건 어떻게 보나 적이 늘어나는 것보단 이득이죠. 단미주 씨도 상당히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양시은도 그 순간에는 진심으로 단미주를 칭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미주는 자신이 결코 양시은의 칭찬을 받을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은 씨, 그동안 제가 양시은 씨에게 했던 무례한 행동들에 대해 사과할게요.”말을 마친 단미주는 정말로 90도 인사를 하며 사과를 했다.회의실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단미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미주 역시 업계에서 꽤 유명한 사람인데 그런 단미주가 양시은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나도현은 결코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 양시은은 작게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비장하게 찾아보라고 말한 것 치고는 그리 깊은 곳에 숨긴 것도 아니었다.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양시은은 침대 밑에서 나도현의 마지막 서프라이즈를 찾아냈다.그건 다름 아닌 사진 한 장이었다.사진 속 양채은과 엄마 문해미가 해외의 유명한 철탑 아래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잠시 얼어붙었던 양시은은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목멘 소리로 나도현에게 물었다.“채은이랑 엄마는 어떻게 찾은 거야?”나도현은 양시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양시은을 반쯤 안은 상태로 사진을 들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내가 찾은 게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이 사람들이 날 찾은 거지.”이윽고 나도현이 설명해주었다.그 사진은 바로 어제 받은 산 건너 물 건너온 우편이었다.지금처럼 인터넷이 발전한 시대에 우편을 사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미 해외에서 이곳까지 넘어오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테니 지금 당장 그곳에 가서 사람을 찾는다고 해도 찾지 못할 게 뻔했다.나도현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내 생각엔 그 사람들이 시은이 네 생일을 기억하고 일부러 시간을 철저히 계산해서 너한테 이 사진을 보낸 것 같아.”나도현의 말을 끝으로 양시은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세워두었다.양시은은 하루 만에 초안 수정을 마쳤다.철저하게 시간 계산을 마친 단미주가 때마침 하이힐을 도각거리며 나진 그룹에 들이닥쳤다.“어떻게 됐어요, 양시은 씨. 제가 준 프로젝트에 대한 방안이 생기긴 했어요?”양시은이 막 대답하려고 할 때 단미주는 새로 바꾼 네일아트를 자랑이라도 하듯 손을 휘저으며 멋대로 말을 가로챘다.“방안이 생기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저도 일부러 사람 난감하게 하는 악취미는 없어서요.”양시은은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단미주 씨는 정말 본인이 요구한 조건들이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당연하죠.”단미주는 비웃음과 함
양시은은 커다란 장미꽃 다발을 보고는 물었다.“도현 씨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그래서 꽃다발도 준비했는데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나도현은 자상하게 웃으며 양시은에게 말했다. 업무 중일 때는 그토록 차가운 사람에게 이렇게나 다정한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얼마 후 양시은은 나도현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받아 들고 말했다.“할 수 없지 뭐...”양시은이 아직 뽀로통한 걸 본 나도현은 고개를 돌려 또 살짝 웃어 보였다.하민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손가락 틈새로 둘을 훔쳐보았다.온지유는 일부러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두 사람 사이가 여전히 좋은 건 잘 알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저희까지 찬밥신세로 만들어야 하겠어요? 지금 먹지 않으면 음식도 다 식을 것 같으니까 빨리 앉아요.”양시은은 하민을 챙겼고 그제야 함께 서 있던 사람들도 모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가정부가 보이지 않자 양시은은 이 많은 음식을 누가 준비했는지 궁금해져 몇 번 더 두리번거리다가 온지유에게 물었다.“지유 씨가 이 음식들을 모두 준비한 거예요?”온지유는 별이에게 음식을 집어다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일부는 제가 했어요. 그리고 나머지 일부분은 시은 씨 남편이 준비한 거예요.”그러고는 손으로 나도현을 가리켰다.양시은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물었다.“오늘 온종일 회사에 있지 않았어?”나도현은 많이 해본 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양시은에게 국을 퍼주고는 대답했다.“일부는 사전에 준비해야 하는 것들도 있어. 그래서 내가 특별히 세프님도 찾아가서 어떻게 하는지 배워왔단 말이야. 그리고 미리 해서 냉장고에 숨겨뒀지.”양시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마음속으로는 감동이 밀려왔지만 그와 동시에 웃음이 터질 것 같기도 했다.양시은은 자칫 자신도 잊어버릴 뻔한 생일을 그들이 자기 몰래 이렇게나 정성 들여 준비해준 게 고마웠다.아무래도 양시은이 꽤 오랫동안 생일을 챙기지 않은 탓에 그 감동이 더 큰 것 같았다.그건 그렇
초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나도현은 뻐근한 눈을 비비고는 이내 눈을 뜨고 양시은을 향해 웃어 보였다.“작은 문제들이 있는 거 빼고는 전반적으로 참 괜찮은 초안이야.”양시은은 바로 고쳐야 할 점들을 물어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공부를 사랑하는 학생 같았다.그리고 양시은의 선생님이라고 봐도 무방한 나도현 역시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학생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주었다.둘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오후 내내 초안을 토론했다.양시은은 만족스러운 피드백을 얻어내고 나서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안을 들고 곧장 수정하러 달려갔다.양시은은 그렇게 꼬박 저녁까지 초안을 수정했다.일을 마친 나도현은 아직도 컴퓨터 앞에서 고개를 박고 초안 수정하기에 여념이 없는 양시은을 발견하고는 난감한 듯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양시은을 자리에서 일으켰다.양시은은 갑자기 붕 뜬 상반신에 놀라 얼떨떨해했다.“뭐 하는 거야, 도현 씨. 난 아직 일이 남았단 말이야.”나도현은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지금이 몇 신지 직접 봐.”양시은은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탓에 하마터면 나도현과 부딪칠뻔했다.“하민아!”순간 놀라서 이마를 탁 친 양시은은 뒤늦게 이미 가정부에게 대신 하민이를 데리러 가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생각났다.양시은의 기색을 확인한 나도현은 굳이 묻지 않아도 양시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결국 나도현은 난감하단 듯이 말했다.“하민이를 데리러 가지 않아도 퇴근은 해야지. 무작정 야근한다고 내가 야근 수당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잖아.”말을 끝낸 나도현은 무 뽑듯 양시은을 의자에서 일으켰다.양시은은 회사를 떠나면서 이처럼 미련이 뚝뚝 떨어지기는 처음이었다.(그 사람의 초안이 거의 다 완성됐는데...)하지만 양시은을 퇴근시키려는 나도현의 태도는 굳건했다.출퇴근 시간이라 돌아가는 길에 차가 막혔다.양시은은 그다지 일에 집착하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미처 끝내지 못하고 퇴근한 일에 대한 미련은 진작에 없어진
나도현은 그저 한쪽에 두었던 기획서를 빼갈 뿐이었다.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은 단미주는 머쓱함을 숨기려 애써 진정하며 나도현이 움직임을 슬쩍 살피고는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원래부터 도현 씨에게 맡기려고 했던 거니까 프로젝트를 받아들일지 아닐지만 말해줘요!”양시은은 나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다만 양시은은 아침부터 찾아와 시비를 걸고 대놓고 불만을 드러낸 단미주의 뜻대로 일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제멋대로인 사람에게 조금의 틈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나도현은 양시은을 한번 보고는 입꼬리가 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제 생각엔 가능할 것 같아요.”그 말은 양시은에게 하는 말이었다.하지만 단미주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아까의 울분은 금방 잊어버리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양시은 씨 들었죠? 도현 씨가 당신 직속 상사인 것도 맞죠? 직속 상사도 받아들인 마당에 당신이 더 할 말은 없겠죠?”단미주는 이미 자신이 양시은의 갑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비록 사실이기는 했으나 콧대 높은 모습이 퍽 얄미운 것만은 사실이었다.양시은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을 때 나도현은 단미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단미주 씨, 제가 이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다고 해서 단미주 씨가 나진 그룹에서 멋대로 행패를 부려도 된다는 뜻은 아닌데요. 그러니 제 비서에게도 예의를 갖춰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사람을 불러 단미주 씨를 이곳에서 끌어낼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주세요.”단미주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뻐끔거리더니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졌다.양시은은 나도현 덕분에 꽉 막힌 것 같던 가슴이 조금 전보다 매우 후련해졌고 이 프로젝트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까만큼 싫진 않았다.“알겠습니다, 승낙하겠습니다.”양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나도현의 손에서 기획안을 가져왔다.단미주는 양시은과 나도현을 번갈아 가며 보고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절 실망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거예요, 양 비서님.”단미주가 나가
단미주는 담담히 말했다.“아무도 안 배워줬다면 지금 배우면 되겠네요. 전에 서비스업 할 때 어땠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나도현 씨랑 결혼했다고 태도를 바꾸겠다는 거예요? 사람은요, 초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나도현은 클럽 안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양시은이 거절하고 그를 밖에 세워뒀다. 그걸 모르는 단미주는 그녀 혼자 있는 게 만만해 보였는지 처음부터 줄곧 막말을 쏟아냈다.“단미주 씨, 제가 오늘 왜 여기 왔을 것 같아요?”양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리한 시선으로 단미주를 바라봤다.단미주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제가 그것도 알아야 해요? 여기 온 이상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갑이고, 양시은 씨는 을이에요.”갑과 을이라는 표현에 양시은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협력이 성사됐나요? 제가 협력 얘기는 없던 거로 하자면 어떡할 건데요. 저도 단미주 씨랑 꼭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양시은은 단미주의 거만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단미주가 조금은 자중하다가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야 빈정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전혀 자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양시은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협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어요. 단미주 씨, 앞으로 저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퇴로는 마련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그 한마디를 남기고, 양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찰나 나도현이 문간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다. 양시은은 그가 분명 단미주에게 따지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얼마 전 연회장에서, 나도현은 단미주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단미주는 전혀 자중하지 않고 또다시 양시은을 건드렸다.나도현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협력이라는 것도 결국 내 아내를 곤란하게 하려는 속셈 아니었나요? 근데 왜 이어가지 않아요?”단미주는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생각했지, 직접
그날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나도현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양시은을 무시했다. 하물며 그가 없는 틈을 노려 양시은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우리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됐는데 내가 널 지키고 싶은 마음도 알아줘. 무슨 일을 겪든 나한테 꼭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르고 지나갈 테고, 그럼 너 혼자서 괜한 고생할 거잖아.”차분하고도 따뜻한 나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네 마음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협력은 정말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해.”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의 곁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그 여자랑 협력한다고 해서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시은아, 내가 있으면 굳이...”나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양시은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도현의 생각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단미주 씨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 기회에 단미주 씨의 기를 꺾으면 아무도 날 얕볼 수 없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양시은의 의도는 너무나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감정을 품은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꿀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딴지를 걸 거야. 넌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돼. 굳이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그의 부모만 해도 양시은에게 엄청난 편견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편견을 내려놓고 하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말이다.어찌 됐든 유언비어는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라, 양시은이 모든 공격을 다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아니, 난 이미 마음먹었어. 말리지 말아 줘.”양시은은 결심이 확고했다. 나도현도 억지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그래. 그렇다면 내가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