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인명진을 보았다. 인명진은 아주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그에겐 더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온지유도 알고 있었다. 인명진이 지내던 곳은 원래부터 남에게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그가 말했던 것처럼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자랐다.그럼에도 온지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사람이면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자랐으니 말이다.“왜 저한테 피를 나눠준 거예요?”온지유는 속으로는 거부하고 있었다.“쓰러진 건 시간이 조금 지나면 깨어날 수 있었어요. 인명진 씨가 굳이 팔에 상처를 내가며 피를 저한테 먹일 필요가 없었다고요. 왜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거예요? 전 인명진 씨가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거 원치 않아요.”인명진은 가볍게 피식 웃었다. 아마도 그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괜찮아요. 피를 조금 나눠준 것뿐인데요, 뭘. 그 정도로 죽지 않아요.”“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리고 다음에 제가 쓰러져도 그러지 말아요!”온지유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저랑 같이 지내게 된 이상 인명진 씨는 존중받아야 마땅할 사람이라고요. 희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 누구의 희생도 원치 않아요. 인명진 씨에게도 자유가 있어요. 그러니 자신을 너무 속박하지 말아요.”온지유가 이런 말을 한 건 그저 그에게 앞으로 더는 그런 일 하지 말라고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길 바랐다.인명진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했다.“알았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제가 한 말 꼭 기억해요. 우리는 친구예요.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저한테 말해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와줄 테니까요.”온지유는 계속 말을 이었다.“참, 인명진 씨랑 같이 있던 여자 말이에요. 그날 이후로 홍혜주 씨를 보지 못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걱정돼요?”“불쌍하잖아요.”온지유는 비록 그때의 기억이 없지만 홍혜주가
백지희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여이현과 온지유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보았는데 왜 이렇듯 쉽게 이혼해 버린 것일까.“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여이현 그 쓰레기가 마음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거 아니야? 안 되겠어, 내가 찾아가서 따질 거야!”온지유는 이미 현실을 받아들였다.“그러지 마. 난 오히려 이혼 잘한 것 같아. 지금 돈도 있고 집도 있고 편하게 생활하고 있잖아. 난 앞으로 평생 일 안 하고 놀아도 문제없다고. 그러니까 그냥 축하해줘.”“그래도 그 여우한테 좋은 일만 했잖아!”백지희는 온지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좋은 일한 적 없어. 그러니까 이제 더는 신경 쓰지 마. 다 지나간 일이잖아.”“그래, 알았어. 난 그냥 네가 우울해하고 있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내가 곁에 있어 주려고 했더니 넌 전화도 안 받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백지희는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녀도 온지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적응 능력이 뛰어났던 온지유였기에 당연히 여이현의 곁에 오래 머물 수 있었던 것이다. 쓰러지지 않는 잡초처럼 무슨 일을 당해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만약 그녀였다면, 여이현 같은 남자와 한시도 버틸 수 없어 바로 이혼했을 것이다.“난 괜찮아. 조금 더 쉬고 출근할 생각이야.”온지유는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다.“너 임신했잖아. 태교에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니야?”“괜찮아. 난 아직 일할 수 있어. 어차피 힘쓰는 일도 아닌데 뭐.”백지희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온지유의 생활이었으니 말이다. 걱정되긴 했지만 온지유가 원한다면 어쩔 수가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온지유는 티브이를 켰다.백지희에게서 이미 소식을 들었던지라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노승아는 아주 거만했다. 대범하게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자신이 여이현의 여자친구라고 밝혔다.원래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보려고 애를 쓰던 사람이었으니 이번이
“알았어요.”인명진은 온지유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온지유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 중심으로 갔다.시내는 그녀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여이현이 위치까지 고려해 그녀에게 별장을 선물해 주었기 때문이다.사람이 많은 시간이었던지라 그녀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초록 불이 켜지지 그녀는 얼른 자전거를 밀며 가려고 했지만,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도와드릴게요.”온지유는 뒤돌아보았다. 젊은 남자가 그녀의 자전거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아마도 그녀가 임산부였던 탓에 자전거를 혼자 밀기엔 힘들어 보여서 도와주겠다고 한 것 같았다.그녀는 캐주얼한 옷차림에 머리는 곱게 땋은 뒤 짚 모자를 쓰고 있었다. 품이 좀 너른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배가 불룩 나왔다.옷차림만 임산부였을 뿐이지 다른 곳은 전혀 임산부로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직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정도로 힘들지 않았지만, 호의를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기에 입을 열었다.“고맙습니다.”그녀가 먼저 횡단보도를 건너자 남자는 그녀의 자전거를 밀며 따라왔다.그녀는 계속 자전거 도로로 걸어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난히 지나가는 자전거가 적었다.아니, 거의 없었다.고개를 돌려 건너편을 보았다. 그곳엔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쌩쌩 지나가고 있었다.그런데 그녀가 걷는 길엔 아무도 없었다.이상해도 너무 이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한 금은방으로 왔다.들어가자마자 앉아 있던 금은방 사장이 안경을 꼈다. 겉보기엔 50대 중반으로 보였고 키도 별로 크지 않았다. 온지유가 들어오자 사장이 물었다.“뭘 팔러 오셨어요?”“반지를 팔려고요.”온지유는 미리 빼둔 반지를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다.“이건 얼마에 팔 수 있을까요.”사장은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그동안 다이아몬드 반지를 꽤나 많이 받아봤지만 이렇게 큰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는 드물었다. 소장 가치가 엄청났기에 그는 바로 확대경으로 자세하게 관찰하며 말했다.“1
온지유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왔을 때 금은방 사장은 전전긍긍하며 문 앞에 서 있었다.그의 이마엔 식은땀이 가득했다. 꼭 두려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그녀가 나오자마자 사장이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아이고, 아가씨. 드디어 나왔네요. 이 반지는 그냥 팔지 말고 가지고 있어요. 나도 안 받을 테니까!”그는 얼른 반지를 온지유에게 돌려주었다.“네? 왜 갑자기 안 사시겠다는 거예요?”온지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1000만 원에 사시겠다면서요.”“안 사, 안 살 거예요!”사장은 그녀를 재촉했다.“이 반지를 살 돈이 없으니까 얼른 반지 들고 나가요. 차라리 다른 금은방에 가서 팔아요!”그렇게 온지유는 쫓겨났다.고개를 돌리자 사장이 급하게 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 셔터까지 내리는 것을 보아 오늘 장사는 그만둘 생각인 것 같았다.그런 사장의 모습에 온지유는 너무도 이상했다.그저 화장실에 갔을 뿐인데 왜 갑자기 저러는 것일까?온지유는 핸드폰을 꺼내 사장이 조금 전 그녀의 계좌로 입금한 1000만 원을 보았다.“아직 돈도 못 돌려 드렸는데...”가게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마치 1000만 원도 필요 없는 듯했다.너무도 수상했다.온지유는 남의 돈을 거저 가질 생각이 없었다. 사장이 사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녀는 돈을 돌려주었다.이내 다른 곳으로 갔다.근처의 금은방에 전부 다 들러보았지만, 그녀가 보여준 반지를 보자마자 기겁을 하며 사지 않겠다고 했다.원래였다면 응당 처음 들어간 금은방 사장처럼 좋아하는 표정을 지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다들 거부하고 있었다.그렇다는 건 분명 뭔가 있다는 소리였다.온지유는 그냥 가지고 있기로 했다. 어차피 팔지도 못하니 말이다.자전거를 타고 이내 대형 마트로 갔다.퇴근 시간이었던지라 마트엔 사람이 많았다. 자전거를 주차해둔 뒤 평소에 즐겨 마시던 요구르트를 샀다.그리고 과일과 채소, 심심하면 먹을 간식도 샀다.어느새 한가득 사 버린 그녀였다.힘이 조금 셌던 그녀는
온지유는 남자가 빼앗아 든 봉투를 확 빼앗았다.“말할 생각이 없으면 그냥 도와주지도 말아요. 전 남의 도움을 받는 게 더 어색하거든요.”“잠깐만요, 천천히 걸어요!”힘 있게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본 청년은 행여나 그녀가 넘어질까 봐 얼른 걱정이 담긴 목소리를 내었다.온지유는 큰 봉투를 자전거 바구니에 담은 뒤 떠나려고 했다.그녀는 자전거를 천천히 탔다. 청년은 계속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청년을 힐끗 보던 그녀는 결국 자전거에서 내려와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대체 왜 따라오는 거죠? 따라오지 마세요, 아니면 그쪽한테 이런 일을 시킨 사람을 내 앞으로 데려오시던가요! 자꾸 따라오면 신고할 거예요!”온지유는 다소 표정을 잔뜩 굳히며 말했기에 청년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그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지시를 듣고 있었던지라 결국 가버리고 말았다.청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온지유는 다시 자전거를 탔다.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자꾸 쫓아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며칠 동안 집에만 있었던지라 누군가 따라오며 그녀를 지켜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생각에 잠겨있던 탓에 저도 모르게 방향감을 잃고 휘청거리게 되었다.“어어...”하마터면 자전거에서 떨어져 넘어질 뻔했다.하지만 누군가 그녀의 자전거를 꽉 붙잡아 주었기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차가운 표정의 남자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면서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은은한 노을빛이 남자의 몸에 내려앉으며 슬픔과 쓸쓸함을 가려주었다...짧은 몇 초 만에 온지유는 힘껏 손을 뿌리쳤다.“당신이었네요!”여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또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뭐가 나였는데?”온지유는 그의 눈을 빤히 보았다. 목소리고 표정도 어느새 차가워졌다.“나한테 사람을 붙인 게 당신이잖아요.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난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여이현은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길 가다가 우연히 자전거를 타며
여이현은 길을 힐끗 보았다.“그래, 그냥 지나가던 길이야.”그는 여전히 아닌 척했다.온지유도 더는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대치하고 있었다.온지유는 천천히 자전거를 타며 앞으로 가고 있었고 여이현의 차는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꼭 그녀의 껌딱지처럼 말이다. 온지유는 집으로 가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자전거를 틀었다.그러자 여이현의 안색이 더 심하게 구겨졌다. 그는 빵빵 소리를 내며 온지유에게 알렸다.“거긴 네 집이 있는 방향이 아니잖아.”“전 바로 집으로 가겠다고 한 적 없어요.”온지유가 말했다.“조금 더 돌다 가면 안 되는 거예요?”그리고 이내 비꼬며 말했다.“참, 이런 우연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설마, 여이현 씨가 가려는 길도 이쪽 길일 줄이야.”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기분이 너무도 불쾌했고 화가 치밀었다. 여이현이 대체 왜 자신을 따라오는 것인지 몰랐다.먼저 이혼하자고 한 사람도 그였고, 지금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사람도 그였다.그녀는 결국 멈추어 서곤 고개를 돌려 잔뜩 굳어진 얼굴로 그를 보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여이현은 고개를 들어 물었다.“뭐가?”온지유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그의 앞으로 다가와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따라오지 말아요. 당신이랑 저는 이미 끝난 사이라고요! 당신이 이러면 이럴수록 저한테 피해만 준다는 거 몰라서 이래요? 이혼할 때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사인했잖아요, 아니었어요? 앞으로 더는 만나지 말라면서 저한테 선을 긋던 사람도 당신이었잖아요. 여진 그룹 대표가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나 했더니 전혀 아니었네요. 대체 저한테서 뭘 바라고 있는 거예요?”여이현도 몰랐다. 대체 뭘 원하는지.그저 행여나 그녀가 위험해질까 봐 걱정되었다.동시에 그가 곁에 없으니 임산부인 그녀가 혼자 어떻게 생활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다.걱정되는 건 아주 많았다.길을 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만 봐도 다치게 될까 봐 걱정되
“더 쉬지 않고요?”인명진이 그녀를 뒤따르며 물었다.“네, 충분히 쉬었어요. 더 쉬고 있다간 온몸이 뻐근해질 테니 그냥 내일부터 출근하려고요.”설령 그녀에게 이 별장이 있고 죽을 때까지 돈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대도 지루한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알았어요.”온지유는 다음 날 출근했다.그녀가 출근하자 공아영이 그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그녀는 더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아영 씨 눈앞에 보이는 건 뭐예요? 일단 일부터 해요.”공아영은 백지희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화가 났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온지유가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아 하니 더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공아영이 입을 다물고 있어도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이 수군대고 있었다.“실시간 인기 검색어 봤어요? 전부 노승아의 이름으로 도배되었어요!”“아마 노승아와 여이현 대표가 결혼할 거라는 소식이 갑자기 나오면서 그런 것 같아요.”“전에는 그냥 뜬 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그게 정말일 줄이야. 정말 소설 속 여주인공 같네요!”“다들 혹시 이 방송 보셨어요? 여이현 대표가 다른 여자한테 프러포즈했다던데, 그 여자가 설마 노승아는 아니겠어요?”그들이 말하는 방송엔 온지유의 뒷모습만 나왔다. 얼굴을 찍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여자가 온지유임을 몰랐다.“노승아의 뒷모습은 아닌 것 같아요. 전 뭔가 좀 알 것 같은데... 그래도 며칠 되었다고 결혼 소식이 나오니 조금 이상하네요.”“여이현 대표가 쓰레기일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노승아는 그런 쓰레기가 뭐가 좋다고 결혼하려는 건지, 참.”“어디 결혼뿐이겠어요? 지금 SNS에서 해명하느라 바쁘잖아요. 두 사람의 연애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약혼반지까지 SNS에 올려 자랑하던데요.”“노승아도 연애하면 상대에게 눈이 멀게 되는 사람이었네요.”“불쌍하네요. 여이현 대표가 유부남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쯧쯧, 여이현 대표는 안 좋은 소문이 더 많네요.”“그걸 누가 알겠어요? 우리도 얼른 사실이나 파헤쳐 보자고요. 여이현 대표
“지금 뜨거운 인기를 받고 있다고 해서 나중에 잘되리란 보장은 할 수 없죠.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커지는 법이니까요.”온지유가 느긋하게 말했다.“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지금 받는 인기로는 부족할 거예요. 이 사람들이 노승아를 섭외하고 있다니까 저희도 이젠 그만 찾아가서 비위를 맞춰주죠. 그런 건 고생을 사서 하는 일이랑 뭐가 다르겠어요.”온지유는 뒷장을 보았다.“여기에 있는 드라마들이 인기가 없다고 해서 망하게 되는 건 아녜요. 대부분 유명한 드라마도 처음에 반응이 미지근했었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확 뜨게 된 거잖아요, 아녜요?”그리고 이내 공아영을 힐끗 보았다.“사람들의 기대도 확 높이고 말이에요.”“지유 씨가 한 말도 일리가 있네요.”공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하지만 누가 이미 인기를 엄청나게 끌고 있는 드라마를 거부할 수 있겠어요? 인기 없는 드라마를 선택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커요. 장다희 씨도 지금 드라마 하나로 확 뜨길 바라고 있는 거잖아요.”연예계에서 드라마 섭외를 받았다는 건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을 의미했다.만약 이 기회를 놓치게 되면 앞으로 언제 또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많은 연예인들은 드라마 한편을 찍고 유명해진 다음 소식이 뜸해졌다.세대가 바뀌는 속도는 점차 빨라졌고 연예인 사이의 경쟁력도 높아졌다. 관객들은 스크린에서 자주 신인들을 보게 되었다.게다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속도도 빨라졌다.온지유가 말했다.“그러니까 저희가 신중하게 선택을 해야 하는 거예요. 어쩌면 다크호스가 될 수 있으니까요.”그녀는 장다희의 리즈 시절이 지속되려면 반드시 드라마 한 편 더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지금 시대에서 무엇이 인기를 끌면 그것을 찍어야 했다.하지만 아무리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해도 사람들의 신선감을 이기지 못했다.어쨌든 질리기 마련이었으니까.게다가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는 전부 지금 유행하고 있는 것을 소재로 찍고 있었다.그래서인지 대부분 내용이 크게 다
밖을 내다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북적이던 거리가 이제는 적막이 흘렀다.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노점상들이 한창 손님을 맞이하며 돈을 벌어야 할 때였다. 모두가 한꺼번에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건 말이 안 됐다.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 모든 게 남태건이 꾸민 짓이라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었다.“너, 정말 비열하고 추잡하구나.”권다솔은 그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심해졌다.하지만 남태건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칭찬 고맙다. 내가 노점상들한테 각각 200만 원을 줬거든. 이제 너한테 선택지는 한 가지야. 나랑 만나.”그는 그녀를 꼭 얻어야 했다.권다솔은 비웃음을 흘리며 손을 지퍼에 올렸다.“난 선택하지 않을 거야.”어찌 인간이 짐승과 어울리겠는가.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지퍼를 열어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려는 순간 남태건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너한테서 정말 좋은 향이 나는 거 알아? 다음 주에 네가 이혼하면 그날 바로 결혼하는 게 어때?”“꺼져!”그녀는 힘껏 뒤로 발길질하며 그를 걷어차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행동을 예상한 듯 순식간에 그녀의 다리를 잡은 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보아하니 너도 나랑 함께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모양이네. 난 지금 바로 널 갖고 싶은데, 여기서 할까? 얼마나 짜릿하겠어?”그는 원래는 그녀에게 멋진 밤을 선사하려고 했다. 7성급 호텔에 장미로 덮인 침대와 로맨틱하게 촛불까지.하지만 그녀가 너무 말을 안 듣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원래 말 안 듣는 고양이는 잘 길들여야 발톱을 감출 줄 알게 되는 법이다.“남태건!”그녀는 화가 치밀어 오른 채 소리를 질렀다.“너 지금 무슨 짓 하는지 알아? 너 그러다 감옥 갈 거야!”그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종아리를 따라 손을 위로 더듬었다.“우리가 부부가 된 후에도 날 감옥에 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이 지난 뒤 네 뱃속
그럼 처음부터 딱 잘라 거절하는 편이 나았다.김영은은 그녀의 편에서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 돈은 바로 계좌로 보낼게. 물건은 혼자 옮길 수 없을 테니 경호원을 불러서 도와줄게.”경호원이라는 말을 들은 남태건은 더욱 씁쓸해졌다.이 또한 은근히 그를 경고하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집에는 경호원이 있으니 즉시 제압할 수 있고 그는 결국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남태건은 마지막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솔아, 잘 지내. 몸조심하고.”‘가급적이면 외출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물론 남태건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그는 예전에도 권다솔을 스토킹한 적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기회를 보면서 그녀를 강제로 데려갈 계획이었다.그때 두 사람의 친밀한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게 되면 그녀의 부모님은 이를 악물고 승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사회는 여자에게 항상 더 가혹한 법이다.그녀의 부모님이 딸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결국 그를 사위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남태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우리 딸, 이제 모든 물건은 돌려주었어. 앞으로 네가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해도 돼. 엄마, 아빠는 언제나 네 뒤에서 지켜줄게.”김영은은 그녀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그녀는 김영은을 꼭 안아줬다. 아무래도 미리 대비하는 게 아무 준비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았다.다음 날, 출근길에 권다솔은 가방 안에 호신용 스프레이 한 병을 넣었다. 여러 종류의 고춧가루로 만들어졌기에 아주 소량만으로도 사람을 울릴 수 있었다.하루 종일 별다른 일은 없었고 퇴근 후에 동료들과 근처 먹자골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권다솔이 그중 한 골목 입구를 지나던 순간 옆에서 손을 뻗어와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갔다.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남태건이 서 있었다.그는 예전의 신사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엄마는 지금 병이 매우 심각해요. 아마 수술을 받는다 해도 남은 인생을 병상에 누워서 보내야 할 가능성이 커요.”배진호는 엄마에 대해 자업자득이라는 말밖에 할 게 없었다.처음에 권다솔은 그녀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매사에 세심하게 신경 써주고 자주 찾아뵈러 가서는 다양한 보신탕을 끓여주기도 했다.만약 그녀가 터무니없는 행동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었다.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다.“어쩌다 그렇게 됐어요?”분명 두 사람이 이혼하기 전만 해도 정미진은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에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줄은 몰랐다.“계속 아픈 척하다가 이제 진짜 병이 든 거죠. 악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이미 치료의 최적 시기를 놓쳤어요.”배진호는 간단히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권다솔은 하마터면 꼴좋다고 말할 뻔했다.하지만 정미진은 어디까지나 그의 친어머니라는 점을 고려해 그만 삼켜버렸다.전화를 끊고 난 뒤 그녀는 혼자 방에 앉아 많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정미진은 자신을 돌보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비록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에 간섭하고 싶어 할지라도 이제는 그럴 힘조차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과연 이혼해야 할까?그녀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남태건이 김영은 앞에 서 있었다.“지난번에 이미 할 말을 다 했고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할 필요도 없는데 이제 와서 또 뭘 하려는 거니?”김영은은 다소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증거가 모두 드러났는데도 남태건은 왜 이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걸까?그녀는 외간 남자의 몇 마디 달콤한 말에 딸을 내어줄 사람이 아니었다.“저와 다솔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감히 그런 기대를 할 수도 없고요. 오늘은 전에 드린 물건을 돌려받으려고 온 거에요.”남태건은 최대한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고 그
“전 치료 받지 않았어요.”정미진은 크게 후회했다.온갖 계산을 다 해가며 일을 꾸몄지만 결국 제대로 걸려든 사람은 본인이었다.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왜 했을까?“하지만 환자분 차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요.”“약은 먹지 않았고 링거도 다 버렸어요.”정미진은 말할수록 후회가 밀려왔다.이제는 의사조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치료받기 싫으시면 그냥 퇴원 수속 밟으세요. 집에서 지내는 게 나을 거예요. 약값도 아낄 수 있고 요즘 젊은이들 돈 벌기 얼마나 힘든데요. 게다가 소문나면 우리 병원 체면도 말이 아니거든요.”“안 돼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부터는 치료에 협조할게요.”정미진은 순순히 의사의 의견에 따랐다.입으로는 죽고 싶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했다.그녀는 진심으로 살고 싶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돈 걱정도 없고 배진호도 권다솔 문제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효자였다. 그녀가 죽게 되면 모든 게 끝나버리는 셈이다.그녀는 계속해서 지금의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일단 병실로 돌아가세요. 치료를 받으시려면 가족분께서 동의서를 작성하셔야 하고 저희 병원 측에서도 다시 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의사는 그녀를 설득해 병실로 돌려보낸 뒤 이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저녁, 배진호는 정관수술을 마쳤다.잃어버린 아이를 떠올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통을 느꼈다.아버지로서 아이를 지키지 못한 건 어쩌면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남은 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때 권다솔이 전화를 걸어왔다.권다솔?배진호는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번호였다.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다솔 씨, 이제야 저한테 연락하는 거예요?”“전 그냥 월요일에 이혼 절차를 마치러 가는 걸 잊지 말라고 전하려던 것뿐이에요.”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임신 사실을 숨기기
“걔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정미진은 비웃음을 흘렸다.“지난번에 의사한테 물어봤더니 걔 체질은 워낙 임신하기 힘들대. 특히 유산까지 한 번 겪고 나면 더더욱 그렇지. 아무리 우리 진호를 유혹한다 해도 아이는 못 얻을걸.”갑자기 병실 문이 열렸다.배진호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서 문밖에 서 있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그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그는 자신의 엄마가 이렇게 비열하고 이기적인 사람일 줄은 차마 상상도 못 했다.“진호야, 갑자기 어쩐 일이야?”정미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방금까지 병실 안에 누구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다만 배진호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제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 엄마가 뒤에서 이런 짓들을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엄마도 여자인데 어떻게 다솔 씨한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어요?”배진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권다솔을 유산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그녀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대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그제야 권다솔이 왜 확실하게 선을 긋고 떠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해치고 싶지 않았다.“방금 그냥 해본 말이야. 엄마가 무슨 짓을 하진 않았잖아...”“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저 오늘 바로 정관수술 예약할 거예요. 제 아이를 잃은 이상 앞으로도 다른 아이는 절대 갖지 않을 거예요.”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했다.그는 오늘 중으로 수술을 예약하고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이 말을 들은 정미진은 마치 청천벽력을 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애써가며 미래의 손자를 위해 준비했는데 결국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만약 배진호가 진짜 정관수술을 한다면 그녀는 평생 손자를 보지 못할 것이다.“불효 중 가장 큰 불효가 자손을 남기지 않는 것이야. 네가 정말 그렇게 한다
악역은 그가 맡기로 했다.“아니에요. 애초부터 태건 씨의 아이가 아니에요.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배진호의 아이예요.”그녀는 손을 뻗어 배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설마, 잃어버렸던 그 아이가 다시 그녀한테 돌아온 걸까?그녀는 권용민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어찌 됐든 간에 전 이 아이를 꼭 지킬 거예요. 저랑 진호 씨는 이미 이혼했지만 진호 씨는 저를 괴롭힐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잘 알아요.”“그렇다면 배진호 어머니는 어떡하려고? 그처럼 고약한 시어머니를 만나면 누구든 불행할 수밖에 없어.”권용민은 그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남태건과 비교하니 이제는 배진호가 조금 나아 보이기까지 했다.게다가 그가 찾아본 증거에 따르면 권다솔에게 달린 악플들은 배진호가 퍼뜨린 것이 아니었다. 석규리가 권씨 가문의 경쟁업체를 찾은 것이었다. 더 이상 배진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법이다.만약 배진호 혼자였다면 권용민은 아이를 위해 그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아빠가 말을 직설적으로 해서 미안하다만 배진호의 어머니가 있는 한 너희 둘이 다시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그건 저도 잘 알아요.”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녀 역시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이미 시어머니 때문에 아이를 한 번 잃었지만 하늘의 축복으로 다시 아이를 가졌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그녀가 명확히 결정을 내린 것을 보고 권용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배진호는 매일 병원에 들러 정미진을 보살폈다. 정미진은 그의 앞에서 약을 먹고 링거를 맞는 척하며 완벽히 연기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배진호는 병원 문을 나서다 병실에 물건을 두고 온 것이 떠올라 급히 되돌아갔다.문 앞에 도착하자 어머니와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며칠째 연기하느라 들어간 병원비만 해도 적지 않잖아요. 오빠도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제가 병원비를 봤는
그는 바닥에 쓰러진 딸을 보더니 깜짝 놀라 그녀를 안아 들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얼른 구급차 불러!”지나가던 직원이 급히 응급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권용민은 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그는 응급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왔다 갔다 오간 지도 셀 수 없었다. 권용민은 평생 딸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만약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그조차 견딜 수 없는데 만약 아내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하늘이 무너질지도 몰랐다.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떠다니던 찰나 의사가 걸어 나왔다.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권용민은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물었다.“의사 선생님, 지금 제 딸은 어떤 상태인가요?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겁니까?”권용민은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의사는 그의 손을 보며 한 발짝 물러서려 했지만 너무 세게 잡고 있는 바람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그는 속으로 어쩌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을지도 모른다며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히 설명했다.“따님은 괜찮습니다. 단순히 저혈당 증상이 나타난 겁니다. 그런데 지금 따님이 임신 중이라 반드시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권용민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완전히 멍해졌다.‘임신이라니?’그럼 이 아이는 남태건의 아이인가?원래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남태건은 지나치게 계산적인 데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 딸과 엮이는 것을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권다솔이 남태건의 아이를 임신했다니, 그녀는 얼마 전에도 아이를 잃었는데 또 낙태 수술을 한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뻔했다.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도 가능하지만 남태건의 성격상 아이를 두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권용민은 걱정을 가득 안고 딸을 만나러 갔다.“아빠, 지금 아빠 상태를 보면 마치 제가 정말 큰 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잖아요.”권다솔은 병상에 누운 채 창백한 얼굴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